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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적 학교에 전혀 다니지 않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본 기억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학교를 다니는 것은 또래 아이들이라면 당연한 일이었다. 찢어지게 가난하건 가난하지 않건 그래도 그 당시에도 초등학교는 모든 아이들이 다 다녔으니까 말이다. 그래도 그 당시에는 가정형편때문에 학교에 가지 않는 아이들이 있긴 있었을 것 같지만.
이 책을 보며 집 근처에 고물상이 있었던 어린 시절 기억이 떠올라, 열두살 소년 '요리'가 살고 있을 집이 왠지 낯설지 않게 느껴졌다. 허름하지만 무수히 많은 물건들 사이로 만화더미를 발견하기도 하고, 엿바꿔 먹을 수 있었던 고철들이 가득해서 뭔가 꾸질하고 가난해보이는 느낌보다 내 어린 시절 고물상의 느낌은 지금의 만물상을 보는 듯한 느낌도 들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지금 어른이 되어 그곳을 떠올리면 그건 어릴적만의 느낌이었던 것이었던 것 같긴 하지만 말이다.
공터에 빈병과 폐휴지, 오래된 가전제품으로 들어찬 이름도 '철거 전문 고물상'이라고 하는 늘푸른 자원에 사는 열두살 소년 '요리'. 요리라는 이름이 참 독특하다고 생각되었는데 요리에게는 가족관계도 특별해서 생모도 생부도 없었다. 고물상 장판 더미 위에 갓 태어나 김이 모락모락 나는 모습으로 고물상의 주인 할아버지를 만났으니까 말이다. '요리'라는 이름은 그렇게 김이 모락모락 나는, 오븐에서 갓 꺼낸 듯한 모습을 보고 할아버지가 요리 같다고 붙여준 이름이라고 한다. 그래도 할아버지가 거더준 덕분에 요리는 할아버지와 삼촌과 함께 늘푸른 자원에서 잘 자라고 있었다. 라디오를 틀어 대중가요에 귀 기울이고 노래 가사의 뜻을 음미하는 열두 살 요리는 늘푸른 자원에서 만난 하나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다. 애타게 기다려도 오지 않게 된 하나를 찾아 용기를 내어 찾아갔던 하나의 학교에서 뜻밖에 하나의 담임 선생님을 만나고 학교에 다니라고 권유를 받는데......
요리는 학교에 다니지 않아도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로 세상을 배우며 한글과 덧셈 뺄셈 등을 할 수 있었다. 그러다 선생님을 통해 학교에 나오라는 말에 동요를 하게 된다. 학교에 가서 학력 수준 테스트도 해보고 학교 급식도 경험해보며 학교가 재미있게 느껴진다. 그러나 이미 학교에 다니고 있는 아이들의 따가운 시선과 학부모들의 반대, 그리고 자신이 학교를 다니기 위해서는 절차를 밟아야 했는데 출생신고도 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에 요리는 불편한 진실에 맞딱뜨리게 된다. 그런 가운데, 요리는 자기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후반부의 이야기가 그래, 세상에는 꼭 학교가 정답은 아니다 라고 생각하게 해준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고정관념이란 어쩔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읽는 내 자신이 불편해졌다. 아마 내 아이가 초등학교 5학년 그 교실에 있었다고 생각한다면, 나도 그 학부모들 사이에 껴서 요리를 반대하지나 않았을지. 세상의 잣대로 그 아이를 판단하지 않았을지 자신이 없어졌다. 읽는 내내 학교에 다니지 않는다는 사실 하나가 마음에 걸렸는데, 후반부에서 이 책 속 요리는 그런 고정관념과 편견을 여지없이 깨뜨린다. 오히려 불편했었을 요리에겐 학교 보다 자기 자신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자기만의 삶의 방식을 찾아가는 모습이 또 다른 가치를 발견하게 해 주는 시선을 제공해 준 것 같다. 좋아하는 라디오에서 흘러 나온 옛 가요에서 '영일만'을 찾아나서는 모습이 그려지는 마지막 부분이 여운을 남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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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참 독특했다. 라디오에서 토끼가 뛰어나오다니 환상소설인걸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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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가 있는 이곳에서 나가 마을버스를 타고 조금만 내려가면 "늘푸른자원"이 있을 것 같다. 그 늘푸른자원으로 향하는 이들의 얼굴은 익숙하다. 대개는 나이든 할머니, 어디선가 많이 본듯한 얼굴들이 아닐까. 약간의 연민과 미안함 등등이 고루 섞여 평소 눈길 깊숙이 마주쳐본 적도 없는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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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아침 일곱시 삼십분까지 우릴 조그만 교실로 몰아넣고 전국 구백만의 아이들의 머리속에 모두 똑같은 것만 집어넣고 있어 막힌 꽉 막힌 사방이 막힌 널 그리곤 덥석 모두를 먹어 삼킨 이 시키먼 교실에서만 내 젊음을 보내기는 너무 아까워 (중략) 왜 바꾸진 않고 마음을 조이며 젊은 날을 헤맬까 바꾸지 않고 남이 바꾸길 바라고만 있을까
서태지와 아이들의 <교실이데아> 가사 중의 일부다. 이 곡을 처음 들었을 때 그 가사에 흠뻑 빠져있었던 기억이 난다. 이미 중고등학생의 현실에서는 벗어나 있었지만, 학창시절 느꼈던 그 답답함을 표현한 듯하여 노래를 듣는 순간 후련한 기분이 들었었다. 이제 중학생인 내딸이 그 현실에 놓여져 있다. 그 답답함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착실히 학교 생활을 잘하여 좋은 성적을 거두어내길 바라고 있다. 물론 현 교육체계에 대한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다. <교실이데아>에 열광했었던 기억은 이미 외면한 채, 학교를 잘 다니는 것만이 살길이라 생각하는, 학교가 우리 아이들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편협한 생각을 갖게 된 어른이 되었기 때문인가보다. 그런데 정말 학교에 다녀야만 우리 아이들이 무엇이 될 수 있는걸까? <<라디오에서 토끼가 뛰어나오다>>는 열두 살 '유령 소년' 요리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찾아가는 성장소설이다. 학교 교육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찾아가는 요리의 좌충우돌 성장 이야기가 노래의 가삿말처럼 구슬프게 혹은 흥겹게 전해진다.
'늘푸른자원'이라는 이름의 고물상에서 할아버지, 삼촌 그리고 고양이 두리와 함께 살아가는 열두 살 소년 요리는 학교를 다니지 않는다. 고물상 가장 안쪽 후미지고 높은 자리에 돌돌 말린 헌 장판 더미 위에 버려져 있던 갓난 아기는 할아버지에게 '요리'라고 불리며 이곳에서 함께 살게 되었던 것이다. 학교에 가자고 했을 때 도리질을 쳤던 요리는 아홉 살이 되었을 때 심심하지 않았기에 학교에 가지 않았다. 열 살이 되자 학교에 갔어야 하나 싶을 때가 있기는 했지만, 그건 어딘가 근질근질하고 불장난 같은 게 하고 싶을 때였다. 학교에 다니지는 않았지만, 요리는 노래를 통해서 말과 글을 배웠고, 사람과 인생 그리고 가사에 나오는 땅을 지도에서 찾아보기도 했고, 그 땅을 직접 찾아가 보고 싶은 꿈도 가졌다.
그런데 학교가 본격적으로 궁금해지기 시작한 것은 열두 살이 되어 하나를 만났을 때였다. 고물상에 놀러오던 하나가 며칠 째보이지 않자 요리는 하나를 만나기 위해 학교에 갔다가 오정민 선생님으로부터 학교에 다니라는 권유와 함께 '임시 학생 증명서'를 받게 된다. 고민 끝에 학교를 가지 않자, 선생님은 요리를 찾아오고 학교를 보내야한다는 선생님과 학교에 꼭 다녀야 하느냐는 삼촌과의 언쟁에서 자신이 출생신고도 되어 있지 않은 '유령 아이'임을 알고 자신의 존재에 대한 불안감을 느끼게 된다. 후에 삼촌의 권유로 학교에 가게 된 요리는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하나를 보게되고 함께 학교를 다니지 말자고 하지만, 하나는 자신만의 계산방식으로 학교에 다녀야 한다고 주장했다.
"옆방에 사는 대학생 언니가 일주일에 한 번씩 수학 가르쳐 준단 말이야. 그 언니가 그러는데 난 머리가 좋대. 힘들어도 꿋꿋하게 공부하래. 날 괴롭히는 애들, 알고 보면 그냥 시시한 애들인 거야. 내가 걔네들 때문에 마음 상하고 괴로워서 주눅 들고 뭔가를 포기한다면 그게 더 부끄러운 거래." (본문 135p)
그러나 뜻하지 않게 요리가 학교 다니는 것을 반대하는 학부형 때문에 요리는 심한 좌절을 느끼게 되지만, 두려움을 이기고 자신의 얼굴과 마주하면서 학교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찾으려한다.
지금까지 학교를 너무 좁게만 생각한 건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 세상 전부가 다 학교일 수 있었다. (중략) 그렇다고 방법이 전혀 없는 건 아니란다. 공부가 정말 하고 싶다면 검정고시를 쳐서 아무도 반대하지 못하게 정문으로 당당히 중학교에 들어가면 된다. '사람이 꼭 뭐가 되어야 합니까?' 삼촌이 오정민 선생님에게 한 말이었다. 어쩌면 그 말은 틀렸을 수도 있다. 요리는 반드시 무언가 될 것이다. 누구보다 요리 자신이 그걸 믿었다. 다만 누구이고 무엇일지가 학교에서 제시하는 목록에 들어 있지 않을 수는 있었다. (본문 154,155p)
학교에서 배워야 꼭 무언가를 될 수 있다는 사회의 통설 속에서 자유로운 소년 요리는 학교 밖에도 세상이 있다는 것을 일깨운다. 세상이 만들어 놓은 테두리를 벗어나 학교가 아닌 학교 밖으로 나와 <교실 이데아> 노래를 부른 서태지나 학교가 아닌 노래를 통해서 세상을 배우고 이제 막 삶의 방식을 찾기 시작한 요리처럼 자신의 꿈을 찾아가는 길은 여러 갈래길이 있다. 하지만 요리도 학교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언제가는 기회가 오기를 기다려보는 요리의 마지막 모습을 통해서 학교 밖에서 배우지 못하는 것을 배울 수 있는 또 다른 무언가가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이 정답이라고는 할 수는 없다. 좀더 자유로운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있다면, 삶의 방식을 찾는 길을 깨달을 수 있지 않을까? 어떤 방식을 선택하던 간에, 주위의 시선과 사회의 편견으로부터 자유롭고 자신의 내면을 마주할 수 있는 용기를 잃지 않기를 바란다. 요리는 바로 그 용기를 선물하고자 했을 것이다.
거울을 똑바로 쳐다보기까지 한참이 걸렸다. 용기를 내기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그것은 아무래도 어둠 속에서 배를 끌며 움직이던 유령 아이의 생김새를 확인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어서 꽤나 무섭고 꺼림책했다. 하지만 눈을 똑바로 뜨고 마주 보아야 할 것 같았다. 거울을 자세힌 들여다본 적은 없지만 요리가 생각하는 요리는 아름답고 멋진 소년이었다. 상대원초등학교 남자아이들이 모두 자기 밑이라는 생각에는 아직도 변함이 없었다. 그 멋진 모습을 오정민 선생님이 알아봐 준 게 아니던가. (본문 147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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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학교는 꼭 가야하는 곳이다. 적어도 초등학교와 중학교는 꼭 나와야하며 가능하면 대학교까지 나와야 제대로 된 직업을 얻을 수 있다. 초등학교도 안 나왔다고 하면 사람들은 멸시하거나 하찮게 보기 이전에 우선 놀란 눈으로 그 사람을 볼 것이다.
이 책의 주인공 요리도 그렇다. 부모도 모르고 고물상에 갓 태어난 상태로 버려진 아이. 막 태어나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게 무슨 요리인 줄 알았다고 너무나도 성의 없이 붙어진 이름이 '요리'다. 성조차도 제대로 없고 출생 신고서조차 내질 않았다. 그런 그 아이를 키워주는 건 고물상 할아버지와 삼촌으로 이 둘도 요리에 대해서 그렇게 챙겨준다든가 하진 않는다. 보통 이러면 굉장히 불우한 삶으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요리는 다르다. 아마 고물상 밖의 세상 자체를 잘 모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요리는 굉장히 용감하고 자신감에 넘친다.
이 이야기를 읽었을 때 가장 기억에 남는 글귀라면 마지막 부분에 삼촌이 한 말이었을 것이다. '사람이 꼭 뭐가 되어야 합니까?' 흔히 아이들은 꿈을 크게 가져야 한다든지 장래희망을 분명히 가지고 있어야 한다든지 하는 식의 말을 많이 한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꼭 뭐가 되어야 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자신이 되고 있은 게 있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에게 대해 왜 꿈이 없냐고 윽박지를 필요도 가지라고 강요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뭐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자기 밥벌이할 정도로 살 수 있다면 그것만드로 충분할 텐데. 어릴 때부터의 교육에 열을 올리는 것도 뭐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오는 것일거고. 사실 그렇게 되지 않고선 먹고 살기 힘든 것도 사실이긴 하지만 뭐가 될 필요 없이 그냥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들도 인정해 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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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을 탄다. 아직 채 잠이 깨지 않은 멀뚱한 눈으로 초점 없는 제 그림자를 들여다 보는 사람들. 한편에서 저마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자신이 선택한 음악 속에 빠져든 이들이 더 많다. 그 사람들을 볼 때마다 음악에 빠져 있다기 보다 세상에 눈 감으며 나만을 바라본다는 생각이 든다. 이어폰으로 세상과의 단절을 선포하는 것 같다.
MP3나 아이폰, 스마트폰이 대중화 되면서 라디오가 무척이나 낡은 퇴물이 되었다. 작은 콤포넌트 오디오가 집 안 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듯 유치원생 아이들은 라디오가 무엇인지 조차 모른다. 그런 라디오에서 토끼가 튀어나오다니..... 제목부터 뭔가 있을 것 같은 호기심이 발동한다. 퇴물 라디오에 걸맞게 ‘늘푸른 자원’ 고물상이 등장하고 무관심한듯한 할아버지와 사회에서 한 발짝 떨어진 삼촌과 함께 사는 요리가 등장한다. 요리는 그저 장판위에 던져진 아이다. 출생 신고조차 되어 있지 않아 학교도 다닐 수 없다. 분명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아이가 바로 요리다. 모든 것이 버려진 고물상의 한 부분인듯. 고물상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옛 가요를 흥얼거리며 말과 글을 터득하고 세상을 알아간다. 그런 요리가 사회와 줄을 닿은 것은 하나 때문이다. 하나 또한 학교라는 사회에서 겉도는 왕따지만 전혀 다른 세상인 학교가 궁금하다. 할아버지도 삼촌도 그리 탐탁해 하진 않지만 호기심으로 간 학교는 역시 요리와 교집합을 가질 순 없었다.
세상을 배우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모든 세상을 향해 공평하게 외치는 라디오 속의 세상은 라디오라는 틀을 통해 세상에 외치고 있다. 하지만 누구는 ‘눈물 젖은 두만강’에서 저릿한 울림을 갖지만 누구는 소녀시대의 환한 웃음 속에서 행복감을 찾기도 한다.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어가면서 깨우치는 것은 세상은 다르다는 것이다. 그 다르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다면 이미 반은 도인이 아닐까한다. 요리는 학교라는 테두리 속이 아닌 가요의 가사와 삼촌과의 여행을 통해 유령소년에서 두 발 땅에 닿은 당당한 소년으로 성장해 가고 있다. 요리가 세상을 배우는 가요의 가사는 오래 전 노래들이다. 그 대상이 누구라고 지정되어 있지 않아 누구든 자신이 그 주인공인양 듣는다. 요즘의 노래들을 보면 직설적으로 ‘너’라고 지칭하고 있다. 솔직함이 무기인양 자신만의 감정을 토해내고 있다. 노래 속에 ‘너’가 ‘나’가 아니고 싶기도 하다.
학교라는 틀에서 내쳐진 요리는 ‘실패’한 것이 아니다. 자신의 생각으로 자신의 길을 걷기로 ‘선택’한 것이다. 비록 등재되어 지지 않은 유령 소년이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존재감마저 유령은 아니라는 사실은 요리가 세상에 나갈 큰 힘이 된다. 표현하지 않는 할아버지와 삼촌의 사랑도 사랑임을 깨달은 요리에게 이미 세상은 열려져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