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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로 가는 길-치마만다 응고지 아다치에의 '숨통'을 읽고
"아프리카로 가는 길-치마만다 응고지 아다치에의 '숨통'을 읽고" 내용보기
아프리카로 가는 길 -치마만다 응고지 아다치에의 '숨통'을 읽고-   인 오브 아프리카   아프리카라고 하면 우리는 으레 코끼리와 치타, 숨막힐 정도로 뜨거운 햇빛을 생각한다. 그 곳에 사는 원주민들은 검은 피부에 흰 이를 드러내며 웃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우성들이 한데 모여 미스테리한 의식을 거행하고, 몇몇은 거기에서 신성함을 느낀다고 호들갑을 떨기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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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로 가는 길

-치마만다 응고지 아다치에의 '숨통'을 읽고-

 




인 오브 아프리카

 

아프리카라고 하면 우리는 으레 코끼리와 치타, 숨막힐 정도로 뜨거운 햇빛을 생각한다. 그 곳에 사는 원주민들은 검은 피부에 흰 이를 드러내며 웃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우성들이 한데 모여 미스테리한 의식을 거행하고, 몇몇은 거기에서 신성함을 느낀다고 호들갑을 떨기 마련이다. 혹은 유일신을 섬기는 모 종교의 교리와 어긋난다고 불손하게 볼 수도 있다. 허나 이는 과거의 이미지, 과거 중에서도 편견에 찬 시선이 포착해 낸 이미지일 뿐이다. 아프리카가 유럽 대륙에 알려지기 시작했을 무렵, 영국에서 가장 유행했던 사진은 아프리카 원주민 여자가 벌거벗은 채 서 있는 사진이었다. 원래 원주민들은 벗고 살기 때문에 수치심을 모르며 금수에 가깝다는 게 그들의 이론이었고 주장이었다. 이는 어디서 많이 본 도식이다. 예전 일제 강점기 때 외국에서 돌아다니는 사진들, 조선에 관한 사진들을 보면 정말 초라하고 위축된 모습들만 담겨 있다. 물론 몇몇 사진은 진심으로 조선이라는 동양의 나라에 관심을 가지고 찍은, 호기심의 렌즈지만 사람들의 이목을 끈 사진은 각도며 앵글을 핍박받는 조선인에 맞추었다. 우리는 알지 않는가. 우리는 불쌍하지 않다. 그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멍청하지 않다. 무엇보다 그런 의도로 찍은 사진일수록 피사체와 눈을 맞추지 않는다. 피사체가 렌즈를 쳐다보는 순간, 보는 사람은 '보이는 사람'으로 바뀌게 되기 때문이다. '보는 사람''보이는 사람'을 자기 식대로 이해하게 된다. 그로 인해 '충돌'이 생긴다.

가령 예를 들자면, 아프리카에서는 어떤 사람이 갑작스레 화를 내거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할 때 '악마가 들렸다'고 말한다. 단순한, 미개한 부족의 미신으로 볼 수도 있다. 허나 '악마가 들렸다'라고 말하는 건 아프리카 사람들의 태도 중 한 면을 보여준다. 영국인들이 서로 만났을 때 애꿎은 날씨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아프리카인들은 '악마가 들렸다'라고 말하면서 '책임을 돌린다'. 화를 내는 사람의 성격 탓을 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은 원래는 그런 성격이 아닌데 '악마'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로 인해 쓸데없는 분쟁이나 맞붙어 화내는 걸 면할 수 있다. 흥미로운 말버릇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들의 '말버릇'을 미개한 것으로만 치부한다. '중매인'에서 나오는 남편이 미국에 융화되기 위해 '코코넛 밥'을 앞으로 짓지 말아달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들은 아프리카인들이 유럽과 미국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미개함'을 포기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는 올바른 '접근법'이 아니다. '점핑 몽키힐'의 에드워드가 아프리카에 관심을 가졌더라면, 제대로 '이해'하고자 했다면 이 면을 간파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끝끝내 자신의 '시선'을 포기하지 못하고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역으로 '아프리카다움'에 대해 강의하고 있는 셈이다.

에드워드와 그의 아내는 '이해'한다는 태도를 취하며 자신들이 얼마나 관용적인 사람인지 보여주고자 한다. 그는 우간다인을 워크숍 리더로 선정하지만 진짜 리더는 에드워드다. 그는 그들의 '소설'에 대해 대놓고 '아니다' '틀리다'고 논한다. '아프리카다움'에서 벗어난다고 지적을 받은 세네갈인은 화를 내며 커밍아웃을 한다. 몇몇 사람은 충격을 받는다. 사실 어떤 사회에서든 아직까지 커밍아웃은 충격적인 것이다. 그들이 아프리카인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그녀에게 '고급 보르도 와인을 너무 많이 마셨다'라고 비꼰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세네갈인이 아니다. 에드워드는 아프리카를 이해하는 척 하면서, 진짜 '아프리카인'들을 깔보고 있다. 존중이 아니라 성급한 '일반화'의 결과인 셈이다. 이런 사태는 '숨통'에서 이웃들이 다람쥐가 사라진 것이 새로 이사온 아프리카인들 때문이 아니냐는 데에서도 볼 수 있다. '이해'라는 것을 무슨 '하사'해 주는 특권으로 보는 이상, 완전한 이해란 불가능하다. 게다가 그 그릇된 '이해'로 인해 어떤 일이 생겨나는가. 그릇된 이미지가 생긴다.

 

 

에드워드는 생각에 잠긴 듯 한참 파이프를 씹더니, 이런 유의 동성애 이야기는 아프리카의 진짜 모습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어느 아프리카요?" 우준와가 불쑥 말했다.

남아공 흑인은 자세를 고쳐 앉았다. 에드워드는 더욱더 파이프를 씹어 댔다. 그리고는 마치 교회에서 얌전히 앉아 있으라는 말을 듣지 않는 어린애를 보듯 우준와를 쳐다보더니, 자신은 옥스퍼드에서 수학한 아프리카 학자로서 말하고 잇는 것이 아니라 아프리카의 참모습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고 아프리카라는 공간에 서양식 사고를 투영하지 않는 사람으로서 말하고 있는 거라고 했다. 짐바브웨인과 탄자니아인과 남아공 백인은 에드워드가 말하고 있는 동안 고개를 가로젓기 시작했다.

"지금이 2000년일지는 모르지만 가족들에게 자기가 동성애자라고 고백하는 여자 이야기가 대체 얼마나 아프리카적이라는 거요?"

에드워드가 물었다.

그러자 세네갈인이 알아들을 수 없는 프랑스어를 속사포처럼 쏟아 내기 시작하더니 약 1분 동안의 일장 연설을 마친 뒤에 이렇게 말했다. "내가 세네갈인이에요! 내가 세네갈인이라고요!" 이 말에 에드워드는 똑같이 유창한 프랑스어로 대답하고 나서 다시 영어로, 부드러운 미소를 띠면서 "저 사람은 고급 보르도 와인을 너무 많이 마셨나 보군요." 라고 말했고 몇몇 참가자들이 킥킥 웃었다.

-점핑 멍키힐. 145p-

 

 

그의 안에 있는 아프리카의 이미지가 어떤 것인지, 우준와는 그의 태도로 짐작하게 된다. 적어도 그의 안에 있는 '아프리카'라는 환상은 아프리카와는 멀리 떨어져 있다. '점핑 몽키 힐'이라는 이름과 달리-원숭이가 드글드글할 것만 같은데-원숭이가 한 마리도 없는 것처럼. 에드워드의 '아프리카'에는 아프리카가 없다. 진짜 아프리카에 사는 그들은 아프리카 밖에 사는 사람들처럼 생활고를 겪고, 머리카락 손질법을 궁금해 하며 맥주를 잘 마신다. 에드워드는 그런 '생활', 그가 살고 있는 유럽과 비슷한 생활을 못 견뎌 한다. 그리고 우준와에게 거리낌없이 성적 농담을 한다. 우준와는 처음에는 의아해하다가 나중에는 진담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경악한다. 만약 그가 우준와나 세네갈 여자처럼 아프리카 여자들이 아니었다면, 영국 여자였다면 그런 성적 농담을 할 수 있었을까? 아마 아니었을 것이다! '점핑 멍키 힐'에서 에드워드는 희화화된 이미지로 그려진다. '에드워드'는 작가로 하여금 분노하게 한, 과거에 만난 한 인물일 수도 있다. 하지만 작가가 진짜 주목하고자 하는 대상은 따로 있다. 바로 그런 '아프리카다움'을 강요받으면서도 입을 열지 않는 아프리카인들이다. 그들은 우준와가 그런 성희롱을 당하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에드워드의 태도가 얼마나 부당한지 알면서도 입을 다문다. 에드워드의 추천을 받기 위해서다. 동의하지 않고 침묵한다고 해서 '거부'가 될 순 없다. 침묵은 동의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결국 '아프리카다움'을 강요하는 에드워드도 문제지만, 진짜 문제는 '아프리카다움'을 강요받으면서도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 아프리카인, '미국다움'을 강요하는 '중매인'의 남편, 아프리카인들이다.

 

 

케냐인은 에드워드가 그 납작한 막대기처럼 생긴 아내의 몸 위로 올라갈 때 속으로는 우준와를 생각했으리란 건 첫날부터 빤히 보였다고 말했다. 짐바브웨인은 에드워드가 우준와를 쳐다볼 때는 늘 추파를 던지더라고 말했다. 남아공 백인은 에드워드가 백인 여자는 절대 그렇게 쳐다보지 않을 거라고, 왜냐하면 그가 우준와에게 느끼는 감정은 존중이 결여된 욕망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다들 알고 있었어요?" 우준와가 물었다. "다들 알고 있었어요?"

-점핑 멍키힐, 146-147p-

 

 

치마만다 응고지 아다치에는 단편들마다 이 점을 거듭해서 지적하고 있다. 그게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아프리카를 코끼리와 정글북의 세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꽤 '충격적'인 사실일 것이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아프리카와 아프리카인들의 아프리카는 얼마나 다른가? 그리고 침묵하는 아프리카인들, 그들은 어떤가? 단순히 타인에게 ''만 내는 것이 아니라, 아다치에는 아프리카인들에게도 반성적 성찰을 요구하고 있다.

물론 그 '반성적 성찰''타인의 강요'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라는 것도 있겠지마는, 더 나아가서는 아프리카인들의 정체성 문제를 다룬다. 아프리카인들과 유럽인들은 다른가? 서로 '다르다는 것'으로 인해 어떤 사태가 벌어지는가. 이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순간, 편견은 더 강화된다. 상대주의적으로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만큼 쉬운 게 없다. 하지만 동시에 어느 한쪽이 없어지고 나면, 다른 한쪽의 '정체성'은 사라지고 만다. 상대주의적으로 서로의 '정체성'을 이해하는 건 결국 어느 한쪽이 사라져 버리면 끝인 것이다. 한 명이 밥 먹으러 가버리면 다른 한 명은 멍하니 그 자리에 앉아 있게 되는 시소처럼. 그렇다면 이 불안한 시소의 감정은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로미오와 줄리엣

 

하지만 아프리카인과 유럽인들은 사는 환경도 다르거니와 가지고 있는 전통도 다르다. 세계화로 인해 서로의 문화를 더 잘 알게 되었지만 '다른' 것은 어쩔 수 없다. 사실 이렇게 따지자면 개개인이 다 다른 주체다. 어떤 주체는 카프탄(아프리카 전통 의상)만 입고 다닐 수 있고 어떤 주체는 동성 애인을 사귈 수 있다. 허나 그 '다르다'에 대해 어떤 이유를 따지게 된다면 어떨까. 우리는 '이해'를 하기 위해서 그런 주체들에게 ''냐고 묻는다. 어떤 거창한 역사적 이유가 있을 수도 있고, 이유라고 할 것까지는 없는 단순한 기호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몇몇은 그 이유들을 '이유답지 않다'고 말하며, '다른 것''틀린 것'으로 간주해 버린다.

'숨통'의 아쿤나와 ''는 분명 서로 다르다. 허나 ''는 아쿤나의 이름 뜻에 대해서도, 그리고 아프리카에 대한 어떤 성급한 판단도 내리지 않는다. 그저 아프리카에 대해 '어느 정도만' 알고 있다고 말할 뿐이다. 다는 아니다. 그는 아쿤나와 그가 '다르다'라는 것만을 인지하고 있을 뿐이다. 아쿤나는 그런 그에게 호감을 느낀다. 그 또한 아쿤나가 아름답다고 말한다. 그의 부모님도 아쿤나에게 반감을 드러내지 않고, 그냥 '여자친구'로서 대한다. 하지만 분명 둘을 갈라놓는 장벽이 있고, 아쿤나는 답답함을 느낀다. 가령 아쿤나가 그녀의 아버지가 '은시()'처럼 보였다고 말했을 때, 그는 아쿤나를 위로하면서 말한다. '그런 사람들은 극소수일 뿐이라고'. 어떤 수단으로든 상대방을 깔아 뭉개고 그 상황을 즐거운 오락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세상의 소수일 뿐이라고. 하지만 아쿤나에게는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만은 않다. 그녀가 만난 사람들 중 ''와 같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녀는 그런 세상을 겪으면서 살아왔다. 그의 위로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녀의 '고백'은 그저 '어린아이의 떼쓰기'에 지나지 않는다.

 

 

당신이 이 이야기를 마치자, 그는 입술을 오므리면서 당신의 손을 잡고는 당신의 심정을 이해한다고 말했다. 당신은 그의 손을 뿌리쳤다. 세상이 자기 같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고, 혹은 차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에게 갑자기 화가 났기 때문이다. 당신은 그에게, 이해해야 할 것은 하나도 없다고, 그냥 사는 게 원래 그런 거라고 말했다.

-숨통. 163

 

 

그녀는 애써 그의 말을 부인하면서 그녀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고자 한다. 어느 한 쪽의 이해에 편입되는 순간, 그와 그녀 사이의 평등한 관계는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게 된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필사적인 행동'을 알아채지 못한다. 그녀가 그의 부모님에 대해 '찬사'를 할 때, 그는 그녀에게 '부모님에 대해서 진짜 사실을 모른다'고 반박한다. 그녀가 그에게 '실용적이지 않은 선물은 필요없다'고 말했지만 그는 배꼽빠지게 웃을 뿐이다. 그는 정말 그 물건들이 그녀의 '기호'에 맞는지 생각하지 않고, 그저 그녀가 '가난했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녀는 그를 사랑하지만, 그를 나이지리아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기를 꺼린다.

그녀는 그를 사랑하지만, 그와 사사건건 '충돌'하면서, 그와 다른 그녀의 정체성을 확인하게 된다. 그 정체성은 그녀의 숨통을 조여온다. 결국 그녀는 그를 떠나기로 결심한다. 그는 그녀에게 다시 돌아올 것이냐고 묻지만, 그녀는 대답하지 않는다. 둘은 현대의 로미오와 줄리엣 같다. 과거의 로미오와 줄리엣은 서로 '다른 것'은 없었다. 오직 그들의 장애물은 서로에게 적대적인 가문들 뿐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함께 동반자살이라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쿤나와 그의 집안은 서로에게 적대적이지도 않고, 둘은 자유롭게 사랑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어찌 보면 과거의 로미오와 줄리엣보다 훨씬 더 유리한 상황이다. 하지만 둘은 '다르다'. 다르기 때문에 서로 이해할 수 없는 간극이 있다. 다르다는 것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시소처럼 불안한 상황이 된다. 이 불안함은 아쿤나를, 더 나아가 그와의 관계의 숨통을 '조인다'. 그리고 아버지의 죽음은 다시 한번 그와 그녀가 '다르다'라는 것을, 그 다름은 결국 극복될 수 없으리라는 것을 표명한다. 결국 그녀는 스스로 그를 떠날 수밖에 없게 된다. 과거의 로미오와 줄리엣은 그들 자신을 죽음으로 던져 스스로의 정체성을 세상에 밝혔지만, 아쿤나와 그는 죽을 수도 없다. 어쩌면 그녀가 영주권이 유효한 1년 안에 다시 돌아와서 그와의 '다름'을 다시 한번 극복하려고 시도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는 일종의 '유예 기간'을 두면서, 동시에 그에게도 그 자신의 감정을 수습할 것을 간접적으로 '권한다'. 가장 가능해 보이는 사랑의 끝에서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 사랑은 최고의 비극이 된다.

 

 

당신은 당신이 영주권자임을, 1년 안에 돌아오지 않으면 영주권을 잃게 된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그러자 그는 자기 말이 무슨 뜻인지 알지 않냐고 말했다. 당신, 돌아올 거야? 돌아올 거냐고.

당신은 고개를 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가 공항까지 당신을 태워다 줬을 때 아주아주 오랫동안 그를 꽉 끌어안았다가 놓아 주었다.

-숨통. 168-169p

 

 

우리는 강을 거슬러 올라가네

 

그렇다면 이 '다르다'는 어떻게 극복될 수 있을까. 극복할 수 없고, 극복하려고 뛰어넘기를 시도하다가 되려 그 속에 빠져버릴 만큼 절망적인 '간극'일까? 작가가 만약 여기서 그치고 만다면 이 소설집은 그저 기나긴 '하소연'에 지나지 않는다. 치마만다 응고지 아다치에는 하소연만 하는 작가가 아니다. 그녀의 단편소설집은 사실 하나의 장편 소설 구성과 같다. 결국에는 어떤 '결론'이 나오고야 말기 때문이다. '고집 센 역사가'의 느왐그바는 아프리카 전통 사회 속에서 살다가 남편을 잃는다. 그녀는 자신의 아들을 지키기 위해서, 살아남기 위해서 유럽 문물을 받아들인다. 단순히 그 유럽 문물이 더 위에 있으니 그걸 배워야 한다는 식은 아니다. 그녀는 그의 아들이 '유럽식'을 좇으면서 '유럽'을 상위에 두는 데에 불안감을 느끼고, 그를 혼내기까지 한다. 이마 음무오 의식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아니퀜와에게 그녀는 그가 '그녀의 아들인지 백인의 아들인지'를 물으면서 혼을 낸다. 아니퀜와는 결국 이마 음무오 의식을 치르러 가지만, 그는 계속 '유럽식 사고'만을 주장한다. 그녀의 아내 음그베케에게 강요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아니퀜와에게는 '유럽식 사고'가 그가 태어난 아프리카를 부정할 수 있을 정도로 더 강하고 위압적인 것, '옳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느왐그바는 그런 그를 비웃고 안타까워한다. 아니퀜와는 그와 '유럽'은 다르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다. 그는 '마이클'로서 살고자 하지만, 진짜 '마이클'로서 살 수 있을 리 만무하다. 아니퀜와는 아니퀜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니퀜와의 '설득'은 마을 사람들에게 '강요'로 읽힐 뿐이고 아내는 마을 여자들에게 폭행을 당한다. 오도널 신부만이 그들을 '설득'시킬 수 있는데, 그는 마을 사람들에게는 '다른 주체'이고 그 또한 다르다는 것을 알기에 강요하지 않는다. 느왐그바는 이 모든 사태가 짜증난다. 오도널 신부같은 유럽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자랑스런 아들, 아니퀜와 때문에.

아니퀜와는 자기 아내가 또다시 그런 일을 당하면 모든 원로를 감옥에 집어넣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찌만, 오도널 신부는 다음번 신방을 왔을 때 원로들을 방문하여 음그베케의 행동을 사과하고 혹시 기독교도 여자들은 옷을 입은 채로 물을 길으면 안 되겠느냐고 물었다. 원로들은 거부했지만-오이의 물을 원하는 자는오이의 규칙을 따라야 한다.-오도널 신부에게 정중했다. 그는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고 그들의 자식인 아니퀜와처럼 행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집센 역사가. 277p

 

 

하지만 음그베케는 희망을 가진다. 그녀의 손자, 혹은 손녀가 남편 오비에리카의 환생일지도 모른다는 기대로. 손자 은남디는 아니었지만 그녀의 손녀 아파메푸나는 오비에리카의 환생으로 태어난다. 아버지인 아니퀜와는 딸이 음그베케의 아프리카에 물들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러나 아파메푸나는 '그레이스'로서 살다가 그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의문을 던지게 되며, 그녀 스스로 '나이지리아'에 대해 알게 되면서 그녀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한다. 마치 연어처럼 그녀는 그녀가 오래전에 흘러왔을, 기억하지도 못할 '근원'을 향해 뛰어 올라가는 것이다. 음그베케의 희망은 그렇게 이루어진다.

 

 

그레이스는 교수상을 받을 때, 학회에서 심각한 얼굴을 한 사람들에게 나이지리아 남부의 이조족, 이비비오족 이보족, 에피크 족에 대해 얘기할 때, 후한 보수를 받으면서 국제 기구를 위해 상식적인 내용의 보고서를 쓸 때, 할머니가 자신을 내려다보면서 즐겁게 키득키득 웃는 모습을 상상할 것이다. 그레이스는 상패들과 친구들과 어디 내놔도 빠지지 않는 장미 정원에 둘러싸여 살던 말년에 이상하게 뿌리를 잃은 듯한 기분을 느끼고는 라고스 법원으로 가서 법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그레이스에서 아파메푸나로 개명할 것이다.

고집 센 역사가. 282-283p

 

 

이는 치마만다 응고지 아다치에의, 소설가로서의 '각오'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녀는 '유럽'을 향해 완고히 등을 돌리지 않는다. 그녀는 세계화 앞에 서 있는,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유럽을 받아들여야 함을 아는 현대의 인간이기 때문이다. 허나 그녀는 그녀 자신이 '나이지리아'의 핏줄임을 잊지 않는다. '잊지 않고'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가. 역사가들은 '중립적'인 입장에 서서 역사를 기술해 왔다. 그들에게 그들의 관점을 바꾸게 하기란 사실 하늘에 별따기만큼이나 어렵다. 그들의 관점은 그들 나름대로의 '정체성'이자 '철학'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어느 기점에 서서, 어느 사상과 관념을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 역사는 달라진다. 그 사람들에게 비난을 퍼부어 봤자 소용 없다. 키케로와 시오노 나나미의 관점이 다른 건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만약 아니퀜와처럼 그 상하관계에 스스로를 속박하는 순간, '역사가'로서의 자유는 사라진다. 영국인보다 더 영국인다운 아프리카인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프리카의 '역사', 공적으로 혹은 객관적으로 서술해야만 하는가? 그건 아니다. 사람은 살면서 '변화한다'.

 

새로운 삶, 그녀에게 새로운 삶을 줬던 것은 우곤나였다. 그녀는 자신이 새로운 신분, 새로운 정체성에 적응해 가는 속도에 깜짝 놀랐었다. "제가 우곤나 엄마예요." 그녀는 유치원에서, 교사들에게, 다른 학부모들에게 그렇게 말하곤 했다. 우문나치에서 있었던 장례식에서 그녀의 친구들과 가족들이 모두 똑같은 무늬의 앙카라 드레스를 입고 있었기 때문에 누군가가 "어느 분이 어머니시죠?"라고 물었을 때 그녀는 고개를 들고 잠시 경계하다가 "제가 우곤나 엄마예요." 라고 말했었다.

-미국 대사관. 185-186

연어도 뛰어오르면서 온 몸에 상처가 난다. 그래도 연어는 뛰어오르거나, 죽는다. 연어는 상처입어도 연어지만 뛰어오르기 전과 후의 연어는 서로 다른 연어다. '우곤나 엄마'로서의 정체성은 그녀가 스스로 부과한 그녀의 정체성이며, 그녀는 그것을 자랑스러워 한다. 그래서 우곤나를 잃었을 때 그녀는 순간 자신을 '상실'한 것으로 여긴다. 어떻게든 다른 곳에서 새롭게 그녀의 정체성을 '고정'하기 위해서 미국으로 망명을 가고자 하지만 그러면 그녀가 자랑스러워했던 '우곤나 엄마'로서의 정체성은 사라지고 만다. 이는 개인의 역사다. 개인의 역사에 대해 '면접관'에게 아무리 설명해 봤자 면접관은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도 그녀는 '우곤나 엄마'로서의 정체성을 고집한다. 아다치에, '아파메푸나'는 차라리 '고집 센 역사가'가 되기를, '우곤나 엄마'로 남기를 바란다. 뒤떨어진 것처럼 보여도 굳건하게 뒤를 향해 돌진하면서 온 몸으로 '깨닫고' '변화'에 고개를 돌리지 않는 이가 되기로 마음 먹는다. '숨통'은 결국, 아다치에의 '선언들'이자 그녀의 몸에 새겨진 '현대의 나이지리아 역사'인 셈이다.

s********4 2011.09.14. 신고 공감 1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숨통 서평] 아프리카 문학(의 본질)은 없다. 현시의 문학만이 있을 뿐.
"[숨통 서평] 아프리카 문학(의 본질)은 없다. 현시의 문학만이 있을 뿐." 내용보기
단편 모음집을 읽는 것은 상당히 오랜만이다. 대부분의 경우, 그냥 나만 그런 것인지는 모르나, 책을 덮고 나면 별다른 기억이 없거나, 혹은 어떤 특정한 몇몇 단편들만을 기억하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단편 각각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수가 벌써 이름들을 기억하기에는 너무나 여럿이다. 얼마 전 어딘가 인터넷 언론 기사에서, 소설을 일관적으로 구성하고, 그 소설의 줄거리를 어느 정
"[숨통 서평] 아프리카 문학(의 본질)은 없다. 현시의 문학만이 있을 뿐." 내용보기

단편 모음집을 읽는 것은 상당히 오랜만이다. 대부분의 경우, 그냥 나만 그런 것인지는 모르나, 책을 덮고 나면 별다른 기억이 없거나, 혹은 어떤 특정한 몇몇 단편들만을 기억하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단편 각각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수가 벌써 이름들을 기억하기에는 너무나 여럿이다. 얼마 전 어딘가 인터넷 언론 기사에서, 소설을 일관적으로 구성하고, 그 소설의 줄거리를 어느 정도 기억할 수 있을 만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요구되는 인물의 수가 약 일곱 명 남짓이라는 이야기를 보았던 것 같다. 어떤 일관적인 기억을 위해 이 소설집 전체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너무 많다.(단지 이국적인 아프리카식 이름들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그로 인해 이 소설집을 읽는 과정은 결코 일관적인 것일 수 없다.


물론 다행히도 이 책의 작품들에는 어떤 공통적인 정서 혹은 주제가 있다. 단순히 아프리카인들 특히, 나이지리아인들의 소외 혹은 인정 욕구라는 측면에 대해서만 그런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내가 주목하고 싶은 부분은 바로 어떤 익명성이라는 측면이다. 익명적인 사람들의 비일관적인 이야기. 바로 다수를 있는 그대로 현시하는, 어떠 하나의 이름 하에 재현하지 않는 작품이라는 측면에 대해서 말이다.


철학 혹은, 보다 정확하게 말해서, 존재론에는 해묵은 문제가 있다. 그 시초로부터 철학자들을 괴롭혀왔던 문제 - 일자(One)와 다수(multiple)의 문제, 혹은 일대 다의 문제라는 골치아픈 문제(그리고 언듯 보기에 쓸데 없는 것 같은 문제). 과연 존재는 일자인가 혹은 다수인가? 이 문제에 대한 답은 어떤 근거를 가질 수 없는 것이기에 - 물론 답을 위한 논증은 필수라는 의미에서 완전히 허당이라고 말하는 것은 무리이겠지만, 한 층위를 더 내려가서 보자면, 그 논증을 보증하는 어떠한 객관적인 보증물도 없다는 의미에서 - 이 문제에 대한 답은 전적으로 개인의 선택으로 돌려지게 된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다수를 우선으로 하는 입장(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가 제시하는 다수적 플라톤주의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기로 하자. 우리의 주위에 존재하는 존재자들, 혹은 사물들은 다수적이다. 개별 사물들의 존재를 볼 때 그것들은 어떤 의미에서건 여럿이며 하나가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사물들을 파악하는 우리, 혹은 인간 존재자의 인식 방법이다. 인간은 여럿을 하나로 구조화하여 파악한다. 그런 의미에서 어떤 하나의 이름 하에 파악되는 일자는 어떤 작용의 결과인 것이다.(바디우를 따라서, 이 작용을 하나로-셈하기[count-as-one, compte-pour-un]이라고 하기로 하자.)


예를 들어 말하자면, 지금 내가 앞에 두고 있는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의 <숨통>이라는 책은 하나의 일자화의 구조에 따라 파악된다. 우선 물리적으로 볼 때, 이 책에는 많은 낱장의 종이들이 있고, 그 위에 인쇄된 글자들이  들어 있다. 그리고 이 책을 소설집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에도 역시, 이 책을 구성하는 작품들의 이름들이, 그리고 그 개별 작품 가운데 들어있는 사물들과 사람들을 지시하는 이름들이, 동사, 조사, 연계사, 지시사 등등이 있을 것이다. 이런 하나로-셈하기의 작용은 비단 이 책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인식하는 인간의 주변을 둘러싼 모든 것들이, 내가 있는 방안, 집, 동네, 더 나아가 사회나 국가의 차원에서 볼 때에도 이런 셈의 작용은 이어져, 모든 것들이 하나로 뭉뚱그려져 인간이 처한 상황(situation) 속에서 파악된다.(상황이란 집합의 다른 이름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일차적인 하나로-셈하기 혹은 현시(presentation)의 작용은 언제나 완전히 파악하지 못하는 어떤 부분을 남기게 된다. 바로 공백(공집합)이라는 이름의 원소 혹은 비어있는 부분집합을 말이다. 이 공백은 상황 내에서 셈해지지 않은 것이기에 어떤 형태로든 불안을 초래하는데, 이런 공백이 초래하는 불안을 제거하기 위해 - 혹은 억압하기 위해 - 한 번 하나로 셈해진 구조는 다시 한번 하나로 셈해진다(re-present). 이 두 번째 셈하기를 재현[representation]이라 하기로 하자.


이러한 재현의 구조의 기제가 되는 것을 바디우는 상황의 상태(the state of situation, l'etat de la situation)이라고 명명한다. 문제는 여기에서 발생한다. 이러한 일자화의, 또는 이중적인 일자화의 구조 내에서 상황 내에 포함되어 있는 공백이라 불리는 부분집합의 문제가 완전하게 해소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억압되거나 잊혀질 뿐이라는 것. 말하자면, 국가(state)라는 재현 체계* 내에서 있는 그대로의 현시의 구조 또는 상황 내에 포함되어 있는 억압된 원소 또는 부분집합의 문제. 우리 사회에서도 얼마든지 공백의 문제의 이름들이 있지 않은가. 이미 잊혀져 가고 있는 용산 세입자들, 지금 진행되고 있는 명동의 재개발의 피해자들, 포이동, 이주노동자들...

[* 상태와 국가는 한 단어 state 또는 etat에 의해 동시적으로 지칭되는 것이다. 바디우는 바로 이 state라는 하나의 말을 통해 현시의 체제에서 공백을 억압하는 상태 또는 국가를 동시적으로 겨누고 있다.] 


이런 긴 서론 아닌 서론을, 이 그냥 생각만 해보기에도 복잡하고 재미없는 현대 철학의 이야기를 들먹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숨통>이라는 이름으로 묶여진 책 혹은 소설집에 등장하는 하나하나의 있는 그대로의 현시의 이야기들을 재현이라는 작용의 개입 없이 드러내고 있다는 것. 그 안에서 제시되고 있는(현시되는 있는, presented) 각양각색의 이름 없는 인물들의 공백의 문제, 말하자면 감방에 갖힌 오빠에게마 가족의 관심이 쏠려 있는 한 소녀('1번 감방'), 성공한 사업가인 남편이 바람을 피우는 것은 아닌가 고민하는 한 여자('모조품'), 종교 갈등 문제로 발생한 시장 통의 혼란에서 만난 두 여자('사적인 행위'), 정치적 혼란기에 죽은 줄로만 알았던 동료를 만남 퇴직 수학 교수('유령'), 미국으로 이주하여 정체성 갈등을 겪고 있고 중산층 가정에서 한 혼혈 아동을 돌봐주고 있는 여자('지난주 월요일에'), 아프리카 문학 그리고 동성애적인 성정체성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는 한 여성작가('점핑 멍키 힐'), 미국의 삶이 모든 것을 보장할 줄만 알았으나 삶이 녹록치 않음으로 고미하는 젊은 여자('숨통'), 나이지리아의 정치적 혼란으로 인해 남편과 자식을 잃고 미국 망명을 신청하려고 대사관을 찾은 한 여자('미국 대사관'),  한 부유한 나이지리아 여자와 비행기 추락 사고 소식으로 만나게 된 동성애자 남자('전율'), 자신의 나이지리아적 정체성을 부정하는 의사 남편과 결혼하게 된 나이지리아 여자('중매인'), 어린 시절 할머니의 관심을 독차지하는 오빠를 나무에서 떨어져 죽게 한 한 여자('내일은 너무 멀다'), 자식과 손녀를 서양적 정체성에 잃게 된 교육에 관심이 많았던 여자('고집 센 역사가')의 이야기들을 이 소설은 그 자체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단지 현시와 재현에 관련한 그것 만이 아니다. 문학이라는 것과 관련한 약간은 다른 층위의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일자적인 아프리카 문학이란 과연 있는 것인가에 대한 문제. 그리고 특히 이 작품집에 속한 '점핑 멍키 힐'이라는 단편에서도 드러나는 바이겠지만, 현시와 재현의 문제에 관련하여 문학에는, 특히 근/현대 문학에는 매우 중요한 문제가 있다.


먼저 '점핑 멍키 힐'에서 내가 읽었던 것에 대해 이야기 해 보자. 과연 아프리카 문학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이런 질문을 대할 때 마치 어떤 아프리카 문학이라는 실체가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점핑 멍키 힐'이라는 그 모순적인 이름의 리조트에서(그것은 원숭이들이 뛰어 다니는 언덕인가, 아니면 뛰어 오르는 원숭이 언덕인가) 논의되던 아프리카 문학은 실제로는 참가자 자신들이 속한 국가 혹은 민족의 이야기들을 엮어낸 문학일 뿐이다. 


특히 문학 교수라는 에드워드라는 인물의 가부장적이며 반-동성애적인 성향이 기억이 나는데, 마치 그는 자신이 (올바른) 아프리카 문학의 현신이라도 되는 양 모임을 주도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비어있는 제스쳐였을 뿐이다. 과연 누가 그의 주장을 인정한다는 말인가. 그렇다고 해서 그 모임의 참가자들 중 그 누구라도 아프리카 문학의 주도적 위치를 주장할 수는 없다. 실제로 아프리카 문학이란 그저 비어있는 것, 혹은 아무런 정체성이나 질적 규정에 의해서도 주장될 수 없는, 단순히 귀속 되어 있음으로 인해 정의되는 집합과 같은 것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프리카 문학이라는 '실체'는 없다. 그저 셈의 효과, 즉 다수들에 후행하는 하나 혹은 일자가 있을 뿐이다. 


두 번째로, 지금까지의 근/현대 문학에 속한 위대한 작품들은 어떤 비일관성을 다루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상황 혹은 세계 속에 속해 있는,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그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는 공백과 같은 부분들에 대한 서술이 근/현대 문학의 성격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상황 속에 속한 비일관성들이 문학 작품으로 제시될 경우, 그 비 일관성들은 단순히 현시되는 차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문학 작품의 일관성을 위해 재현의 구조를 편입하여야 하는 일이 발생한다. 다시 말해, 비일관성을 드러내는 것(현시)을 그 특성으로 하는 근/현대 문학이 작품의 서술을 위해서는 비일관성을 최소한 일정 부분 이상 감추거나 억압하는 기제(재현의 기제)를 따라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모순을 발생시키는 문제이며, 근/현대 문학의 난관, 불가능성이다. 


이 작품집 <숨통>은 그런 불가능성을 일정 이상 우회하는 방법을 제시하는 듯 하다. 각자에게 속한 기억할 수 없는 고유한 이름들, 그들의 현시의 이야기들, 그리고 이 현시의 이야기들을 일관적인 재현의 구조 속에 편입시키지 않는 갖가지 실험적 기법들 - 특히 2인칭 시점 - 과 단순히 그 안에 모아낸 집합의 이름일 뿐인 이름 짓기. 이 모든 것이 이 문학의 근본적인 문제, 난관으로서의 불가능성에 대한 가능적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그것이 의도적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어떤 정체성, 특정성, 또는 유한성을 벗어나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일종의 보편으로서의 공백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것, 그것이 바로 이 아프리카 문학 작품이 아닌, 아프리카 출신의 작가가 써낸 근/현대 문학이 지닌 미덕이 아닐까?



j******n 2011.10.01.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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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마만다 응고지 아다치에 '숨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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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는 동정의 대상이 아니다. 우리는 떳떳한 자립을 통해 존중받기를 원한다.”   최근 열렸던 12회 세계지식포럼의 아프리카 세션에서 아샤 로즈 미기로 유엔사무총장이 했던 말이 기사화 되었다. 미국 백악관의 아프리카 위원회 위원장 역시 아프리카의 휴대전화 사용인구가 미국의 2배가 넘는다는 말로, 세계인들의 아프리카에 대한 동정 혹은 원조해 주어야 할 국가로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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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는 동정의 대상이 아니다. 우리는 떳떳한 자립을 통해 존중받기를 원한다.”

 

최근 열렸던 12회 세계지식포럼의 아프리카 세션에서 아샤 로즈 미기로 유엔사무총장이 했던 말이 기사화 되었다. 미국 백악관의 아프리카 위원회 위원장 역시 아프리카의 휴대전화 사용인구가 미국의 2배가 넘는다는 말로, 세계인들의 아프리카에 대한 동정 혹은 원조해 주어야 할 국가로 바라보는 시선에 일침을 가했다. 기사를 읽으며 나는 내가 읽었던 <숨통>을 떠올렸다. 그동안 나는 아프리카에 대해 얼마나 많은 편견을 가지고 있었던가. 그리고 아프리카의 문학이, 아프리카의 작가가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것부터가 어떤 의미에서 또 하나의 편견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에게도 그들만의 문화가 있다는 사실을 너무도 당연하게 잊고 지낸 것은 아닐까.

<숨통>은 나이지리아의 여성 작가 치마만다 응고지 아다치에의 12편의 단편을 모아놓은 단편집이다. 미국에 대한 동경으로 미국으로 향하는 사람, 그리고 그 속에서 느끼는 이질감과 흔들리는 문화적 정체성. 작품 하나하나에 깃들어 있는 그들의 혼란과 불안을 느낄 수 있었으며 그들이 받고 있는 미국의 영향력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단편은, 정치적 혼란으로 자식을 잃고 망명 신청을 하러 미국 대사관을 찾는 한 여인의 이야기를 담은 「미국 대사관」이었다. 결국 망명 신청을 뒤로 한 채 대사관을 등지고 걸어 나오던 그녀의 모습이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진다. 나이지리아 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미국 문화에 젖어 있는 남편을 둔 여자의 이야기,「중매인」 역시 그녀에게 미국인으로의 삶을 강요하는 남편의 모습에서 나 역시 숨통이 죄여오는 느낌이었고, 재산을 되찾기 위해 아들에게 서양식 교육을 시켰지만 결국 정체성을 잃어가는 아들의 모습을 바라보게 되는「고집 센 역사가」의 느왐그바의 모습이야말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지리아에도, 그렇다고 미국에도 속하지 못하는 그들. 그리고 거기에서 오는 숨통이 죄여 오는듯한 고통은 우리의 이야기가 아니면서도 또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글로벌 시대, 다양화, 다문화 가정을 외치면서도 그들의 문화에 대해 생각해보려 하지 않았던 나를 반성하며 소통과 이해, 그리고 스스로가 정체성을 가진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었던 책이었다.




 

l*********8 2011.10.16.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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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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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습게도, 이 책이 단편인 줄 몰랐다. 마치 [그레이트 하우스]처럼, 연관성이 없어 보이지만,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모든 것이 맞물리는 접점이 있는.. 그런 형식의 작품인 줄 알았다. 거의 반 가까이 읽고 나서야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 단편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렇다. 나는 둔하다. 하지만, 그렇게 느꼈다는 것은 한편으로 이 작품이 이야기들 간의 구체화된 연결 고리가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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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습게도, 이 책이 단편인 줄 몰랐다. 마치 [그레이트 하우스]처럼, 연관성이 없어 보이지만,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모든 것이 맞물리는 접점이 있는.. 그런 형식의 작품인 줄 알았다. 거의 반 가까이 읽고 나서야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 단편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렇다. 나는 둔하다. 하지만, 그렇게 느꼈다는 것은 한편으로 이 작품이 이야기들 간의 구체화된 연결 고리가 없이도 각각의 분위기나 그것을 관통하는 주제들이 통일적이라는 사실의 반증으로 보고 싶다.

 

거센 미국화의 물결을 온 몸으로 맞으며, 그들이 때로는 무지와 오만의 결합이라고 칭하는 그 세계에서 살아나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하지만 오직 아프리카를 배경으로 삼았다는 희소성만으로 독자들을 사로잡으려 했다면 이 작품은 이렇게 흥미롭지 못했을 것이다. 아다치에의 글은 섬세하며, 깊은 통찰력을 보여준다. 특히 그녀의 세밀한 심리묘사와 단편이라는 짧은 길이의 특성을 백분 활용한 것이 지난 월요일에라는 작품인 것 같다. 미국에 온 뒤 달라진 남편에게 느끼는 권태와 그 권태 속에 찾아 온 자극제와도 같은 트레이시와의 대면. 그 과정에서의 카마라의 심리 변화 묘사는 그녀의 표정마저 눈에 선하게 보일 정도이다.

 

이와 함께 전율이라는 작품도 매우 흥미로웠다. ‘지난 월요일에와 더불어 동성애적인 요소를 다루었다. 작가가 아프리카의 전통적인것이 아닌, 동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감정들과 상황들에 대해 쓴 것이기 때문에 더욱 현실적이고 흥미롭게 다가왔다. 그리고 도리스 되리 감독의 파니 핑크가 연상되었다. 한 아파트에서 어느 날 문득 맞닥뜨린 이웃인 게이 점성술사에게 고민 상담을 하다가 결국엔 서로에게 가장 필요한 존재가 되어주는 스토리 전개가 비슷한 느낌을 주었다.

 

그녀는 치네두가 말이 없는 것이 좋았고, 그저 듣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하는 말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게 좋았다. 한번은, 전형적인 실연 극복 수단으로 그와 사귀어 볼까 하는 생각도 해 봤지만 신기하게도 그에게는 성별 없는 사람 같은 느낌이 있었다. 시커먼 눈 밑을 감추기 위해 파우더를 두드리지 않아도 될 것처럼 느끼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p.204

 

이 내용은 보고 피식 웃음이 나서 그 밑에 ㅋㅋㅋ라고 내가 메모를 해 놓은 부분이다. 국적을 막론하고 많은 여성들이 느껴보았을, 그리고 아직은 느끼지 못했더라도 고개를 심히 끄덕일 수 있는 감정에 대한 묘사이다. 그것도 아주 핀셋으로 콕 집어내듯이 미묘한 감정을 재치 있게 표현하였다.

 

앞으로 그녀의 행보가 기대된다.

 

b******m 2011.09.27.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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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을 조이듯 몰려오는 환멸과 동경의 아메리카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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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을 조이듯 몰려오는 환멸과 동경의 아메리카 드림.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의 열두 편의 단편은 팔색조 같다. 갓 말을 배우는 외국인이 다른 나라의 언어를 쓰는 것처럼 어눌한 발음으로 의사전달을 하기위해 애를 쓰는 것이 느껴지는 「1번 감방」에서 부터 구전동화같은 한 집안의 저주와 관련된 「고집 센 역사가」까지 다층적으로 보여지는 그들의 여정은 흥미로웠다. 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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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을 조이듯 몰려오는 환멸과 동경의 아메리카 드림.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의 열두 편의 단편은 팔색조 같다. 갓 말을 배우는 외국인이 다른 나라의 언어를 쓰는 것처럼 어눌한 발음으로 의사전달을 하기위해 애를 쓰는 것이 느껴지는 「1번 감방」에서 부터 구전동화같은 한 집안의 저주와 관련된 「고집 센 역사가」까지 다층적으로 보여지는 그들의 여정은 흥미로웠다. 그동안 우리는 안일하게도 '서구식 백인주의'에 물들었던 탓있지, 혹은 무지했던, 어쩌면 무관심 때문인지 아프리카(나이지리아)에 대한 편견이 나도 모르게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프리카 하면 동물의 왕국이나 내셔널 지오그라피에 나오는 영상을 떠올렸다. 하나의 단편을 읽고 나서 나도 모르게 얼굴이 붉게 달아 올랐다.

 

언젠가 늦은밤 특선영화로 보았던 '언더더쎄임문'과 같이 멕시코 사람들이 국경을 넘어 미국사회에 편입되려는 것처럼 그들은 급격히 몰려드는 미국 문화의 물줄기를 따라 그들만의 아메리카 드림을 꿈꾼다.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까를리토스의 엄마가 몰래 밀입국을 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부유한 가정의 도우미로 가서 일을 하는 것처럼 나이지리아에서 석사학위를 그녀도 그 사회에서 밑바닥인 일을 시작한다. 그들의 일원으로서 정식으로 인정받기 위해 돈과 노동을 쏟아부으면서도 그도, 그녀도 그들의 사회의 진입은 여전히 멀고도 험난하다. 일을 통해 그들이 배운 것은 자만심을 버리는 것. 낯선 곳에서 이질적으로 어울릴 수 없는 이방인의 단면을 느낄 수 있는 단편이었다.

 

작품 속 주인공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그들은 자신의 나라와 미국의 사이에서 저울질하면서도 양가의 감정의 끝은 미국사회의 갈망과 동경에 있다. 개발도상국으로서의 국가, 치안이 불안정하고, 기반시설이 정비되지 않는 미개한 국가라는 인식은 주변인의 시선과 언어의 장벽을 통해 느껴진다. 책을 읽다보면 까끌거리는 느낌과 마음이 서걱거리는 것처럼 서늘하면서도 이질적인 느낌을 받곤 했다. 파이낸션 타임즈의 평처럼 외국에서의 삶을 꿈꾸거나, 이민자로서의 삶에 적응해야 하는 사람들의 보편적인 시선인지도 모르겠다.

 

그는 이보어에 영어를 간간히 섞어 썼는데 영어 발음을 할 때 귀에 거슬리는 미국식 악센트로 말했다. - p.114

 

식당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당신에게 언제 자메이카에서 미국으로 왔냐고 물었다. 외국식 악센트로 말하는 흑인은 모두 자메이카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신을 아프리카인으로 추측한 몇몇은 자신이 코끼지를 좋아한다고 말하거나 수렵 여행을 가 보고 싶다고 하기도 했다. - p.158

 

나중에 당신은 왜 자신의 기분이 나쁜지를 그에게 얘기했다. 당신들이 창스에 그렇게 자주 가는데도, 메뉴판이 나오기 전에 키스를 했는데도, 중국인 웨이터는 당신이 절대 그의 여자 친구일 리 없다고 생각했고, 그는 미소만 짓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그는 결국 사과했지만 그 전에 한참 동안 당신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고, 당신은 그가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 p.164

 

"게다가 그렇게 엉망진창인 나라에서 당신이 뭘 할 수 있었겠어요? " 그가 물었다. "석사 학위를 가진 사람들이 직장도 없이 길거리를 떠올아다니지 않나요?" 그의 목소리는 무덤덤했다. - p.241

 

그녀가 대영제국일에 얼마나 활기차게 "신이여, 우리의 국왕을 보호하소서, 그에게 승리와 영관을 보내 주시고, 오랫동안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를 노래했던가를. 교과서에서 "벽지"나 "민들레" 같은 단어들이 나오면 머릿속으로 그릴 수가 없어서 얼마나 혼란스러워했던가를. 혼합물과 관련된 산수 문제가 나오면 커피는 무엇이고, 치커리는 무엇이고, 왜 그 둘을 섞어야 하는지를 이해할 수 없어서 얼마나 고생했던가를. - p.281

 

이 책의 장점은 다층적으로 볼 수 있는 세계화를 대처하는 그들의 자세다. 누군가는 밑바닥 일을 하면서 그들의 꿈을 키운다면 다른 이는 그 세계에서 이미 인정받는 사람과 결합을 통해 걷는 여정을 다루기도 한다. 인종을 넘어선 사람들의 환희와 욕망, 동경, 환멸이 묻어난다. 그보다 나라를 떠나서 '여자의 일생'을 따로 떼어본다면 각기 다른 나라의 풍경과 인식, 전통을 넘어선 감정들이 느껴지곤 했다. 만국공통어처럼 느껴지는 그녀들의 삶의 여정이.

 

각 단편마다 주는 고유한 맛이 틀려서 색다른 반면에 어눌하고 엉성한 느낌이 드는 부분에는 그녀가 쓴 원서가 원래 그런 것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아프리카(나이지리아>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아메리카 드림을 꿈꾸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똑같은 방정식이 적용되며, 편입되어 살아간다는 것을 느끼게 준 작품이었다. 솔직함을 갖춘 매력적인 열 두편의 작품 중에서도 「유령」이라는 작품이 가장 인상 깊었다. 작가의 자전적인 요소와 정치적인 상황이 맞물리면서도 문학적인 요소를 가미한 단편 중에서 가장 적절하게 맛을 낸 단편이었다.

l****9 2011.09.16.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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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통], 커뮤니케이션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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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통>을 처음 받았을 때, 표지 속 나비에 대해 의문을 품었다. 저 나비는 날아가려고 하는 것인지, 혹은 손에 앉으려고 하는 것인지 그것을 판단하는 것은 전적으로 읽는 이의 몫이다.  그리고 같은 맥락에서 '누구의 입장에서 바라보느냐'는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가 던지는 중요한 질문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숨통>을 읽는 동안, 내 주변에서는 여럿 관심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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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통>을 처음 받았을 때, 표지 속 나비에 대해 의문을 품었다.

저 나비는 날아가려고 하는 것인지, 혹은 손에 앉으려고 하는 것인지

그것을 판단하는 것은 전적으로 읽는 이의 몫이다. 

그리고 같은 맥락에서 '누구의 입장에서 바라보느냐'는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가 던지는 중요한 질문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숨통>을 읽는 동안, 내 주변에서는 여럿 관심을 보였다. 

그 중은 인상강한 제목에서 또는 작가의 특이한 이름에 관심을 보였다.

어느 나라 작가냐고 물었을 때 '나이지리아'라고 답하면, 조금은 쌩뚱맞는다는 한 표정을 짓곤했다.

그러면 어느정도 제목과 나이지리아의 상관성을 짐작한다는 듯이

나를 국제구호에 관심이 있는 사람으로 여기거나 제3세계에 관심이 있어보이는

사람쯤으로 비추는 듯 해보였다. 그들의 짐작은 어쩌면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숨통>이 담고 있는 이야기는 나이지리아인의 고단한 생활이 아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의 방향은 바로 우리가 갖고 있는 고정된 통념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구주의가 보편화되면서 세계의 보편성은 더 두꺼워지고 특수성은 점점 옅어지고 있다.
자본주의는 무섭게 세계를 동질화시키고 뉴스와 문화물에 있어서 중심과 주변의 불균형은
너무나 삐걱거린다. 불완전한 이야기가 유일한 이야기가 되기 쉬운 구조속에서
<숨통>은
그 위험성이 어떤 것인지 솔직하고 세련되게 보여준다.

<숨통>에 담겨있는 여러 단편들은 그녀의 미국 생활을 드러내준다.

그 생활은 미국'식'인 동시에 누구나 경험했을 듯한 감정의 연속이다.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끊임없이 고민하는 열두편의 작품, 그 일상의 주인공들이

자신의 목을 감아 오는 어떤 것들로 부터 멀리 날아갔음하는 바람이다.

7*******e 2011.10.16.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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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견이라는 고집을 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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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 클래식’을 접하며 가장 고마운 점은 다양한 문화권의 소설을 접하게 해준 일이다. 얼마 전 읽었던 이란 작가의 작품에 이어 나이지리아 출신 작가의 책이라니.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의 전작 『태양은 노랗게 타오른다』를 아직 보진 못했지만, 이번에 만난 『숨통』을 통해 전작까지 읽어보고 싶은 맘이 생긴 것 자체로도 충분히 더 많은 경험의 문을 열어 줬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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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 클래식’을 접하며 가장 고마운 점은 다양한 문화권의 소설을 접하게 해준 일이다. 얼마 전 읽었던 이란 작가의 작품에 이어 나이지리아 출신 작가의 책이라니.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의 전작 『태양은 노랗게 타오른다』를 아직 보진 못했지만, 이번에 만난 『숨통』을 통해 전작까지 읽어보고 싶은 맘이 생긴 것 자체로도 충분히 더 많은 경험의 문을 열어 줬다고 생각한다.

 

『숨통』은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의 단편 소설집이다. 열 두 편의 글을 모아 놓은 책인데, 이 중 한 작품의 제목이 ‘숨통’이다. 소설집의 제목으로 사용된 작품인 만큼 이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해야겠다. 「숨통」의 주인공은 ‘나’이고, ‘우리’이다. 너무도 버젓이 ‘당신’이라 지칭하며 ‘우리’의 국가와 삶의 모습, 인종을 설정해 버렸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이제 소설 속 주인공이 된다. 우리는, 나는 나이지리아에 태어나 미국으로 건너 왔고, 지금은 식당에서 일하고 있는 웨이트리스다. 작가의 이런 방식은 나이지리아라처럼 아직도 소수 민족들이 생활하고 있는 국가들에 대한 독자의 낯섦과 편견을 축소하는데 엄청나게 큰 효과를 준다. 아니, 오히려 작가가 그것을 경고하는 듯 보인다. “이것은 당신이 구경하고, 단순히 보고 즐기라고 쓴 이야기가 아니야. 당신의 이야기이고, 바로 우리의 이야기야.”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렇기 때문에 읽는 내내 다른 작품을 읽을 때보다 더욱 ‘나’의 이야기라 생각하며 몰입하게 됐다.

 

다른 작품 중에 「지난주 월요일에」를 인상 깊게 읽었다. 주인공 카마라의 설렘과 흥분, 그리고 좌절하는 과정의 묘사가 무척 재밌었다. 특히 마지막 장면이 좋았다. “그녀가 사과를 입술로 가져가서 천천히 깨무는 동안 그녀의 시선은 메런의 얼굴에서 한 번도 떠나지 않았다. 닐은 너그러운 미소를 띤 채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카마라는 눈길을 돌렸다. 그녀는 조시 옆에 앉았고, 그 애의 접시에서 쿠키 하나를 집어 들었다.”로 이야기가 끝나는 순간 나도 모르게 웃어버림과 동시에 적잖이 민망함을 느꼈다.

 

『숨통』에는 다양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미국이라는 자유의 땅에 살고 있지만 여전히 나이지리아 출신이라는 데서 오는 스스로가 만들어낸 편견과 시선을 의식하며 살아야만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여전히 남자보다 ‘못한’ 취급을 받아야만 하는 여성의 이야기, 작은 부족 안에 서구의 문명을 받아들이면서 오는 혼란을 담은 이야기, 폐쇄적인 정치·사회적 배경에 관한 이야기 등. 그렇지만 이 한 권의 책으로 우리가 나이지리아라는 국가와 그곳 사람들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한국 사회만 해도 그렇다. ‘다문화’와 ‘다양성’을 말하고 있지만 여전히 흑인이나 동남아, 중동 지역 출신의 사람들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경우가 많은 게 사실이다. 같은 외국인이라 할지라도 그들은 백인들에 비해 우리에게 더욱 ‘이방인’ 취급을 받으며 살아야 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간단하다. 그들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 자체는 불가능하지만, 그들을 우리의 외부 사람으로 ‘구경’하는 듯한 시선을 보내지 않는 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바라보는 일 말이다. 아마도 아디치에가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도 이것이 아니었을까. 신기한 듯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그들로 하여금 이방인으로 인식하게 만들고, 동시에 그들의 숨통을 옥죄어 오는 일이라고 말이다.

 

n*****2 2011.09.17.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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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숨통을 죄어오는 것들....[숨통][모던클래식 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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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찌르는듯한 마천루의 숲(불과 한두세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소위 말하는 성전이라는 건축물 이외에 지금처럼 높다란 건물을 축조한다는 발상자체가 신성모독이었다는 점을 기억해야한다)그리고 손을 뻗으면 언제든지 닿는 풍부한 먹거리(이 또한 불과 몇세기전에는 왕족이나 귀족들 속칭 선택받은 자들이외엔 상상할 수 없는 광경이기도 하다는 점을 기억해야한다)로 상징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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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을 찌르는듯한 마천루의 숲(불과 한두세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소위 말하는 성전이라는 건축물 이외에 지금처럼 높다란 건물을 축조한다는 발상자체가 신성모독이었다는 점을 기억해야한다)그리고 손을 뻗으면 언제든지 닿는 풍부한 먹거리(이 또한 불과 몇세기전에는 왕족이나 귀족들 속칭 선택받은 자들이외엔 상상할 수 없는 광경이기도 하다는 점을 기억해야한다)로 상징되는 현대라는 산물은 인류에 축복임에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마치 인류역사에서 보상받지 못한 부분을 확실히 보상받기 위해서 더욱더 이런 혜택에 천착하고 손에서 놓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점 역시 기억해 두어야 한다. 이제 이러한 혜택 소위 말하는 첨단문명은 새로운 종교가 되었고 모든 이들에게 모토로 그리고 롤모델로 의심의 여지 없는 하나는 진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삶을 살아가는 우리는 예전 인류가 가졌던 가치관이나 삶의 이정표를 속도가 느려터진 구세대 PC보다 못한 취급을 하게 되고 애써 기억에서 하나둘 씩 지워나가는 작업을 당연시 하고 있다. 마치 새로운 정보와 삶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뇌를 깨끗하게 포멧하는 것 처럼...

 

   치마만다 은고지 아디치에의 <숨통>은 작금의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작지만 정말 소중한 삶과 기억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한번쯤 되돌아볼 여유를 제공하고 있는 작품이라 해야겠다. 특히 팍스아메리카로 명명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모든 가치관과 삶의 척도를 미국식에 정조준하고 그를 향해서 앞만 보고 달려가고 있는 현상에 대해, 치킨런 게임에 참가하여 종착점을 향해 앞만 바라보고 뛰어가는 주자들에게 바로 뒤에 뛰어오는 주자와 한참 뒤에 뒤쳐저 있는 주자들을 아주 잠시나마 한번쯤 돌아보게 하는 그늘막같은 쉼터를 제공하고 있는 작품이다. 총 12편의 단편들을 묶어 자칫 지루함을 가져올 리스크을 헤치하면서도 각 단편들 하나만으로도 정제된 내러티브를 가지고 있어 독자들로 하여금 책 읽는 즐거움을 배가시키준다. 무엇보다 각각의 작품들의 등장인물이나 시대적 지역적인 배경들이 서로 상이하면서 단편들 전반을 흐리고 있는 플롯은 아프리카 정확하게 나이지리아인들의 삶과 애정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쉽게 아프리카 문학을 접할 수 없는 국내독자들에게 반가운 작품일 수 밖에 없다. 기꺼해야 아웃오브 아프리카라는 영화나 각종 다큐를 통해 접하게 되는 아프리카의 이미지는 어찌보면 제3자의 시각으로 바라본 아프리카일 수 밖에 없음을 이번 작품을 접하면서 새삼 느끼게 한다. 나이지라아 출신 작가의 숨결이 그대로 담겨있다는 점에서 이번 작품은 남다를수 밖에 없다. 그리고 문화적 이격감으로 인한 아프리카의 몰이해를 걱정할 필요성을 제거해서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탄생한 아프리카를 만날 수 있다는 점(물론 수박 겉핧기 식이지만 그래도 기존 서구의 시각으로 바라보던 아프리카에서 장족의 발전을 기대할만하기도 하다)에서 상당한 반향을 가져 오기도 한다.

 

   12편의 단편을 통해서 우리는 저발전 상태에서 고도로 발전된 사회로 진입하게 되는 이들의 삶 그리고 축북받은 사회에서 다시금 바라보게되는 자신이 거쳐왔언 족적들을 통해서 과연 어떠한 삶이 진정한 삶일까라는 무거운 주제를 접하게 된다. 단지 아프리리카(여기서는 나이지리아로  한정되었지만)가 대변하는 피폐한 물질문명의 사회가 자본주의 최상층에 자리한 미국을 위시한 서구자본주의 사회보다 떨어지는게 무엇일까라는 극히 간단명료한 질문에 쉽게 답을 할 수 없게 한다. 이는 비단 작가의 고향인 나이지리아 뿐 아니라 우리 대한민국의 사례를 보더라도 뭐라 확정적인 언급을 회피하게끔 하는 동변상련의 느낌을 지울 수 없게 한다. 글로벌시대을 맞이하여 전향적인 사고를 가지고 미래지향적인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바이블같은 문구가 각인된 우리에게 <숨통>은 왠지 모르게 어쩌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삶이 정답이 아닐 수 도 있다는 속사임으로 다가온다. 물론 그러한 속사임은 아주 작고 시간의 흐름속에 묻혀지겠지만 여전히 귀가에서 맴도는 작가의 속사임에 귀기울려지는 이유는 무엇이라 형용할 수 없는 본성에 가까운 것임을 간파하게 되면서 독자들로 하여금 즐거운 선택의 기로에 서게 한다.

 

   작중 유령편에 나오는 가짜 장티푸스약을 파는 사람의 "제 약은 사람들을 죽이지 않습니다. 단지 병을 고치지 않을 뿐이지요"의 말을 건강을 해치는 파렴치한 범죄행위로 진단하고 단호하게 대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제도화된 틀 속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병을 고치지 못할뿐 사람을 죽이지 않는 약과 병을 고치기 위해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반대급부로 원하는 약은 분명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앞으로 살아가야 하는 세상이 과연 어떤 선택을 요구하는 세상일지는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이심전심으로 알고 있는 지금 <숨통>은 우리들 스스로에게 그나마 숨쉴 수 있는 여유를 주고 있다.

 

 



l******e 2011.09.15.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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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통, 치마만다 응고지 아다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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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Thing around Your Neck. 당신의 숨통을 조여오는 그 무엇에 대하여. 치마만다 응고지 아다치에라는 나이지리아 작가가 있어요. 전작을 통해 나이지리아적인 것에 대한, 나이지리아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써내려갔던 그녀는 이번 작품; 숨통을 통해 문화 간의 갈등을 표현해내요. 당신의 목을 감아오는 무언가에 대하여. 그녀는 서구 문화를 들숨과 날숨의 턱에 다다른 어떤 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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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Thing around Your Neck. 당신의 숨통을 조여오는 그 무엇에 대하여. 치마만다 응고지 아다치에라는 나이지리아 작가가 있어요. 전작을 통해 나이지리아적인 것에 대한, 나이지리아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써내려갔던 그녀는 이번 작품; 숨통을 통해 문화 간의 갈등을 표현해내요. 당신의 목을 감아오는 무언가에 대하여. 그녀는 서구 문화를 들숨과 날숨의 턱에 다다른 어떤 압박으로 그려내요. 범람하는 문화의 물결 속에서 발버둥치는 나이지리아의 슬픈 자화상은 우리 자신의 이야기와 너무 닮아 있어요.

 미국은 문화라는 이름의 콘텐츠를 전 세계로 수출하고 있어요. 엠티비와 맥도날드, 스타벅스와 아이폰. 월드 와이드 웹 기반의 세상은 미국이 만들어낸 거대한 가상 현실이지요. 모든 일상엔 미국이 토해낸 숨결이 한가득 존재해요. 우리 말을 잃어버린 수많은 간판들과, 국적 불명의 언어가 되어 버린 우리의 일상어. 삶은 문화에 종속되고 우리의 주관 또한 더욱 편협해지겠지요. 메이드인 유에스에이. 그들이 만들어내는 왕국 속에서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들을 잃어버리고 있지는 않나요?

 아다치에가 그려내는 열두 편의 단편에는 각각의 삶이 등장해요. 미국에 이민을 가 베이비시터를 하는 석사 학위의 나이지리아 여성, 문화의 물결에 휩쓸려 간 가족을 바라보는 어느 노교수, 아프리카적인 것에 대하여 제멋대로 정의내리는 에드워드와 그 모든 편견 속에서 커밍아웃하는 세네갈 여인, 세월의 질곡에서 변화한 나이지리아를 바라보는 작가 그 자신. 미국과 나이지리아를 넘나드는 삶의 여정 속에서 그녀는 아프리카적인 것과 미국적인 것을 구분해내요. 구별이 아닌 구분, 틀림이 아닌 다름 말이지요.

 치타와 코끼리가 뛰어노는 아프리카는, 민중과 혁명이 있는 아프리카로, 유럽 문화와 미국 문화의 주요 수출지로서 변모해가요. 검은 민족의 삶의 터전에 발을 내딛는 문명과 그것이 일으키는 갈등 속에서, 그들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노력은 어떤 의미에선 숭고하게까지 느껴지기도 해요. 마치 우리의 과거를 보고 있는듯해요. 아다치에는 그 순간을 서술하고 싶었을 거에요. 나이지리아가 처한 상황에 대하여, 자신이 느끼는 그 압박에 대하여. 그녀는 단지 숨을 쉬고 싶었던 게 아닐까요. 숨 막히는 문화의 억압 속에서.


m******u 2011.10.03.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