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보코프의 문체에 끝내 적응하지 못한 내 부족함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내용 자체가 거북하게 느껴지는 내 알량한 도덕심 때문이었을까? 아님 번역의 미숙함 때문인가? 뭐라고 딱히 꼬집어 대답할 수 없었다. 결론적으로 내 머릿 속엔 과연 이 작품을 <고전>으로 치부할 수 있을까에 대한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확실히 이 작품을 세계문학의 하나로 꼽아 출판한 <민음사>의 시리즈물들은 기존의 고전문학작품 리스트와는 꽤 상이한 것들이다. 듣도보도못한 제목들의 작품들이 계속해서 번역되어 출판되고 있고 그래서 내 이목을 끄는 측면이 있었다. 중년남자의 어린여자아이에 대한 변태성욕적 양상을 상징하는, 이제는 너무나도 일반화된 채로 쓰이고 있는 용어, '롤리타 콤플렉스'를 상기하며 이 작품 역시 내 시선을 끌었다. 우선 책제목만 보아 그같은 이상성욕에 대한 이야기가 많은 이들의 공감을 이끌어내며 문학적인 아름다움으로 이상화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심히 놀랐다. 단순히 물리적으로 나이차이가 심하게 나는 커플이라서 해서 용납될 수 없다는 생각이 혹시 편견에 불과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내 기존의 사고방식에 딴지를 걸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만약 그 생각이 맞다는 전제 하에 하루빨리 내 성(性)적 편견을 버리고 자유로워지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많은 평범한 남자들이 어린여자아이에 대해 가지고 있는 성적 판타지의 수위가 어느정도까지 도달할 수 있을지에 대한 궁금증도 이 작품을 빨리 접하고 싶다는 생각에 한몫했다. 그러나 처음 말했던 것처럼 나는 작품을 읽는 내내 순수하게 텍스트 자체에 빠져들 수 없었고 글자 주변을 맴돌기만 했다. 우선 험버트의 로리타에 대한 성적 판타지는 '사실성'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몽상적이고 정신이상에 더 가까운, 은유적이고 피해망상적 환자의 넋두리에 더 가까운 것이었고 그의 생각에 근접하고 싶어지면 싶어질수록 그의 집착과 광기를 더 이해하기가 힘들어짐을 느꼈다. 앞뒤가 맞지않는 독백, 사실과 환상을 구별해내지 못하는 혼미한 정신상태, 광적인 소유욕과 온몸을 전율케하는 듯한 집착, 중년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어린 시절의 특정한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유아적인 망상 등 온통 그를 이해할 수 없을 것 투성이였다. 어떻게 3년을 롤리타와 함께 여행까지 했으면서도 그의 세계는 그토록 정신분열적이고 '롤리타'라는 글자로 도배가 되어있었는지 내 부족한 상상력으로는 납득하기 힘들었다. 아니 더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이 작품을 고전의 반열에 올려놓은 민음사에 대해 반감까지 든 것이 사실이다. 나보코프. 어떻게 이 작품을 쓰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확실히 소설적 자아인 '험버트'를 동정하고 이해하며 그를 옹호한 채로 작품을 써나간 것이 분명한 것 같다. 하지만 내가 딴지를 걸고 싶은 것은 작가는 왜 중년남자와 어린여자의 관계에서 어린여자는 항상 도발적이고 악마적 속성을 가진 채 중년남자를 그녀가 먼저 유혹한 것으로밖에 그릴 수 없었는지 하는 것이다. 험버트의 내면은 폭발할 듯한 성욕으로 가득차있으나 그것을 항상 억누르면서 그녀의 도발이 있기까지 어른스럽고 교양있게 기다리는 사람으로 설정한 사실, 채 성장하지 못한 채 솜털이 보송한 여린 여자애를 굳이 욕잘하고 못되먹은 아이로밖에 묘사할 수 없는지에 대한 작가의 생각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비판하지 않는 것 같다. 결국 그런 내용과 서술로써 험버트는 속죄받는다. 왜? 롤리타를 결코 먼저 유혹하지 않았고, 그녀와의 섹스를 즐겼으나 그녀에게 최선을 다하는 사랑(?)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또 그녀에게 기꺼이 이용당하는 선한(과연?) 존재였으며 그녀를 위협하는 또다른 존재를 - 감옥행을 각오하고 - 제거해주었기 때문에. 나보코프 즉 작가는 그렇다면 그녀에게 최선의 사랑은 험버트라는 것을 끝까지 강변하고 싶어했던 것인지, 그 특이하고도 이상스런 사랑의 행각을 세상에 둘도없는 아름답고 유일한 사랑으로 남기고 싶었던 것인지 나는 의문스러워진다. 어린애에게 모든 것을 바칠 만큼의 사랑을 하는 중년남자? 성숙하지 못한 유아적 소년기라는 화석속에 갇힌 이에 불과하다고 본다. 현실에서는 인정받지 못하는 사랑이 소설에서는 천상의 아름다움으로 미화될 수 없다고 본다. 결국 롤리타의 불행한 삶의 테이프는 험버트가 끊기 시작했으며 이런저런 시행착오를 통해 충실히 인생을 배워가야할 시점의 어린생명을 변태성욕으로 더럽힌 채, 그녀의 인생 전부를 얼룩지게 한 장본인 역시 험버트라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가 아무리 자기인생을 담보로 위험에 빠진 롤리타를 구해주었다한들 그의 인생 최대의 실수는 면책될 수 없는 거대한 것이다. 자기사랑이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고 오묘하다 해도 그것을 실제로 어떻게 표현되느냐에 따라 사랑으로 인정받을 수 있고 반대로 족쇄로 보일 수 있는 거다. 진부한 말이겠지만 모든 사랑이 면죄부는 아니며 만병통치약은 더더욱 될 수 없다. 나는 고로 험버트의 사랑의 방식에 반대하며 이 소설에 대한 온갖 칭찬과 찬양에 대해 단호히 거부하고 싶다.민음사>고전> |
| 책을 잡고 있는 동안 주인공 험버트에 전염된 양 정서불안에 시달렸다. 촉수까지 황홀하게하는 연인과 함께 할 때도 끊임없이 눈을 희번덕인채 사방을 살펴야 하는 남자, 그의 품안에서도 결코 그의 것이 돼주지 않는 방약무인한 소녀,,,,, 물리적 연령으로야 험버트가 롤리타의 아버지뻘 되는 차이긴 하지만 그들 사랑의 헤게모니는 물론 정신적 지배력까지 소녀는 그의 연장자나 마찬가지다. 중년남자의 소녀를 향한 성적 환타지를 탐구하고자 이 소설을 선택한다면 큰 오판이라고 본다, 이 이야기는 덜 자란 늙은 남자애의 파멸적인 사랑의 보고서로 읽힐 뿐이다. 시도 때도 없이 나오는 언어의 유희, 뜬금없이 갖다 붙이는 은유의 홍수 속에 그의 비탄만이 가득하다. |
| 그리고 거기, 허물어진 모습으로, 힘줄이 튀어나온 어른 같은 손과 거위처럼 흰 팔, 얇은 귀, 지저분한 겨드랑이의 롤리타가 가망 없이 지친 17세로, 임신을 한 채 있었다. 한때는 대스타가 되어 2020년쯤에나 은퇴하는 꿈을 꾸었던 나의 여자. 나는 그녀를 보고 또 보았다. 그리고 분명히, 내가 언젠가는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아는만큼 그렇게 분명히 나는 그녀를 내가 본 어느 것보다 사랑했고, 지구상에서 상상할 수 있는 어느 것보다 더 사랑했으며, 다른 어느 곳에서 얻을 수 있는 어떤 희망보다 더 그녀를 사랑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단 하나의 희미한 바이올렛 향기였고, 그렇게 울면서 찾아헤맨 과거, 그 님펫의 메마른 껍질을 반향했고, 하얀 하늘 아래 먼 숲과 자줏빛 계곡의 둑 위 메아리였고, 시냇물을 먹는 갈잎이었고, 바삭바삭한 잡초 속의 한 마리 마지막 귀뚜라미였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내가 숭배한 것은 메아리만은 아니었다. 내 가슴의 엉킨 핏줄 속에 내가 실컷 불어넣었던 것, 나의 엄청난 얼얼한 죄는 정수만 남았다. 척박하고 이기적인 악덕을 나는 모두 취소하고 저주했다. 여러분은 나를 조롱하고 법정을 모독하지 말라고 야단을 하실 테지만 재갈을 물리고 반쯤 죽는다 해도, 나는 내 가난한 진실을 외쳐댈 것이다. 내가 얼마나 롤리타를 사랑했는지 세상 사람들은 알아야만 한다. 롤리타, 창백하고 더럽혀지고 다른 사내의 아이로 배가 부른 여자, 하지만 여전히 잿빛 눈에 검은 속눈썹, 여전히 붉은 갈색에 아몬드빛, 아직도 칼멘시타, 여전히 나의 것, 삶은 덧없는 것, 나의 카르멘이여, 어느 곳이든지 결코 우리가 헤어질 수 없는 곳에 가서 살자꾸나. 오하이오? 메사추세츠의 황야? 그녀의 두 눈이 근시안의 물고기로 퇴색해도, 그녀의 젖꼭지가 부풀어오르고 갈라져도, 사랑스럽고 부드러운 젊은 삼각주가 찢기고 더럽혀진다 해도, 이 모든 것에도 나는 너의 사랑스런 하얀 얼굴이, 목쉰 젊은 음성이 그저 스치기만 해도, 사랑으로 가득 차올라 정신이 혼미해진다. 나의 롤리타. 이 밤에 이게 무슨 짓일까요..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장편소설인 롤리타의 한 부분입니다. 마지막에 가까운 절정 부분에서의 주인공 험버트의 독백이에요. 이 소설은 거의 70% 이상이 험버트의 머릿속에서의 여러 상념이 주를 이루고 있지요. 수많은 독백중에서.. 롤리타와 연락이 끊겼다가 다른 사람의 아이를 임신한 17세의 망가져버린 그녀를 보면서 그가 하는 독백입니다. 이 엄청난 부분이 한 단락의 일부입니다. 이 험버트란 양반의 의식세계가 참 복잡하고 혼자 생각하는것이 구만리를 뻗어가곤 하죠. ㅡ.ㅡ "롤리타 콤플렉스" - 심리학적 용어로는 중년의 늙수그레한 양반이 10대의 성숙하지 못한 여린 소녀를 보고 성적 충동을 느끼는, 이상 심리의 일종이죠. 요즈음은 원조교제란 단어가 퍼뜩 생각나기도 하구요. 그래서인지.. 롤리타란 이 책을 뒤늦게야 읽게 되었습니다. 영화화되고 사회적으로 자주 등장하는 단어였지만 어쩐지 중년 남자의 변태적인 모습이 오버랩되어서 이 소설에 대한 편견이 있었어요. 읽지도 않았던 주제에..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와서 읽는데, 오랫만에 정말 가슴 절절히 울어본것 같습니다. 역시 기존의 이미지에 따른 선입견을 가지면 안된다는 것을 또한번 깨달았습니다. 정상적인(물론 이것도 상대적이고 개인차가 큽니다만..) 사랑의 경우, 그 사랑이 깊어갈수록 충만해가는 에너지를 서로에게 쏟을 수 있어서 더욱더 발전적이고 긍정적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회적인 시선에서 볼 때 비뚤어지고 왜곡된 사랑의 경우는 그 사랑이 깊어갈수록 서로에게 고통과, 사회의 손가락질을 감수해낼 만한 용기를 요구하지요. 그렇다고 해서 외면하거나 발을 빼기엔 너무 늦어버렸고, 괴롭고 고통스럽지만 거부할 수 없는 끌림으로 끌려들어가는 이런 사랑이야말고 제게 더 큰 매력과 공감을 가져다주곤 합니다. 머.. 제가 소심해서인지라 이런 정상적인 궤도를 넘어선 사랑을 해본 적도 없고, 해보기도 원치 않지만요. 어쩌면 그래서 이런 사랑에 더욱더 동경을 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얼마전에 뒤라스의 "연인"이란 소설(제인마치의 주연으로 영화화되어 히트친 바 있습니다..)을 읽고 눈물 흘렸을 때와는 비교도 안되게 울어본거 같네요. 영화보면서도 잘 안 우는 것이 거 참.. ㅡ,.ㅡ 이 소설에는 선인도, 악인도 없습니다. 험버트가 악인일까요.. 그는 롤리타에 대한 충동을 자제하지만, 영악한 어린마녀같은 롤리타가 먼저 의붓아버지를 유혹해서 그 선을 무너뜨립니다. 허허.. 소설 줄거리만 가지고는 예측할 수 없었던 부분이죠. 그녀는 또래와는 다른 영악함과 사나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롤리타는 그가 자신에게 꼼짝 못한다는 것을 이용해서 전제군주처럼 행동합니다. 험버트를 이용하지만 결국 그의 마음을 받아들이는 것두 아니구요. 그렇다고 해서 롤리타가 악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10대의 풋풋해야 할 시기를, 의붓아버지와의 도피행각으로 어둡고, 비밀에 가득찬 채로, 밝고 즐겁게만 보내는 또래와는 다르게 보낸 그녀가 악랄한 가해자라고 할 수가 있을까요.. 어쨌건 간에.. 그 사랑이 왜곡된 모습으로 나타났고, 받아들여지지 못했지만.. 험버트의 롤리타에 대한 사랑은 정말 진실되었다는 것을 이 마지막 독백에서 확연히 깨달았답니다. 어느 누가, 이런 조건없는 숭배하는 이런 사랑을 할 수 있을까요.. 그녀가 어떤 망가진 모습으로 험버트 앞에 섰더라도 험버트에게 있어서 롤리타는 여전한 "나의 님펫" 이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너무나도 변하고 지친, 그전까지 내가 알던 것과는 다른 실망스럽고 망가진 모습으로 나타났을때.. 사실 저는 험버트처럼 그것이 절대 불변할 것이라는 확신이 없습니다. 아직 그런 사랑을 해 본 적이 없어서일까요.. 그래서 이 대목에서 많이 울었던 것인지 모르지요. 제가 가지지 못한 한 부분이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의 기준에서 벗어나고, 알려지면 지탄을 받을 사랑에 모든 것을 바친 사람의 독백이었으니까요. 예전에 잉글리쉬 페이션트란 영화를 보면서 알마시 백작이 캐서린의 시체를 안고 동굴에서 나오면서 회한에 가득찬 듯한 몸짓, 절망감에 빠진 그 몸짓을 보면서 울었던 것과 같은 맥락이었습니다. 불륜의 사랑의 종말은 연인을 사랑한 남편에 의해 연인의 죽음으로 결말지어졌으니까요. 백작 역시도 그 사랑에 모든 것을 바쳤으니까요. 이 영화에 대해서도 말하자면 머.. 술 마시면서 얘기하면 몇시간이고 얘기할만큼 많은 감동을 받았으니까요. 여기서 줄일랍니다. 삼천포로 벌써 빠졌군요. 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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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초에 읽었던 가장 멋진 책이 바로 롤.리.타.이었다. 너무도 많은 얘기를 듣고 배워왔기에 그저 언젠가는 읽어야지라는, 맘다지는 순간의 나 자신조차 믿지 못할 약속을 하며 기약없이 미뤄왔던 책이었다. 도서관 근로하는 친구따라 학교 나왔다가, 우연히 펼친 롤리타의 첫장.
"롤리타, 내 삶의 빛이요, 내 생명의 불꽃. 나의 죄, 나의 영혼. 롤-리-타. 세 번 입천장에서 이빨을 톡톡 치며 세 단계의 여행을 하는 혀끝. 롤.리.타."(15쪽)
이보다 더 강렬하게 사람을 사로잡는 도입부가 또 있을까? 두권짜리 다소 촌스러운 표지에(그런면에서 비록 번역은 그대로이지만, 편집과 표지가 말쑥해진 세계문학전집으로의 재탄생은 반가워해마지 않는다) 인물간의 대화나 전지적 작가의 친절한 개입없이, 대부분의 분량이 험버트라는 주인공 인물 혼자의 머릿속에 할애되므로(게다가 이 험버트란 양반의 의식은 엄청 난류의 흐름을 탄다) 헐랭이로 읽기에는 영 뻑뻑한 그 책을, 그 날 밤을 새우며 한글자 한글자 핥다시피 읽었다.
정말이지... 지독한 책이다. 해피투게더. 롤리타 역시 이와 마찬가지로 삐뚤어진 사랑이다. 하지만 중늙은이가 미소녀를 탐하는 이 사랑과, 멀쩡하게 달린 꼬추 구실 못하며 끌어안는 사내들의 사랑은 "정상"이라 불리우는 다른 사랑에서 느끼지 못했던 찌인한 감정이 읽는이에게 소통의 회로 없이 그대로 배어져 나온다. 남들 다 하는 똑같은 것을 거부하는 이 시대의 개나소나 소위 말하는 "엽기"문화의 동경이라는 치기어린 맘이 이유가 아니다. 그들도 멀쩡한 사람으로 미역국 먹고 태어난 사람이다. 그런 그들이라고 왜 자신들의 사랑이 남들과 다르고, 나아가 틀리기까지 하다는 것을 모르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어린 나이지만, 나름대로 적잖은 연애를 하면서 어슴프레하게나마 깨우칠 것도 같은 사랑의 알짜 중 하나가 바로 이 말일 듯 싶다. 롤리타가 성격이 드러움에도 불구하고, 장국영이 바람기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짜잘한 문제는 접어두고, 멀쩡한 사람으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사랑을 하는 이들의 감정은 보통이들에게는 필요없는 이 "불구하고"의 장애을 넘겨야 했기에 자연히 더 농익을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물론 순리대로 거스름없이 이뤄지는 사랑은 허접데기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 사랑 역시 충분히 아름답다. 이들처럼 극복해야할 벽이 없기에 거기에 소모될 에너지를 사랑하는 상대방에게 부을 수 있다는 잇점까지 있다) 험버트가 아니라면 그 어느 누가 학급출석부조차 그녀-사랑하는 롤리타의 이름이 적혀있다는 이유 하나로 그것을 완벽한 시로 숭배할 수 있을까.
나는 한국땅에 발붙이고 살고 싶다. 부득이하게 이민을 가게 된다해도 LA 한인촌의 범위를 넘기지 않을 작정이다. 물론 나 역시 이그조틱한 세상에대한 동경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평생을 살 부대끼며 살아갈 사람들과 말이 안통한다는 것은 무섭기만하다. 도끼들고 쫓아왔다란 말이 생각 안 나 큰 칼들고 쫓아왔다라고 말하고 허탈했다는 김영희씨의 일화가 아니어도 평소 느끼는대로 생각하는대로 나불나불거리는 재미를 누구보다 좋아하는 내가 도끼란 말도 못하고는 살 수 없는 일이다. 독어 잘하는 아내와, 한국어 잘하는 서방사이도 이럴진데, 나같은 외국어 천치가 낯선 이국땅에서 발붙이고 산다는 것은 참으로 끔찍한 일이다.
보통 사람인 나도 내나라 말 하지 말라면 이리도 깜깜하건만, 작가라는 말로 벌어먹는 출신들에게 제나라 말을 뺏는다는 것은 얼마나 거한 일이겠는가. 러시아말로 생각하고 러시아말로 말하고 쓰던 작가가 영어로 쓸 수밖에 없었던 롤리타. 내 나라 말이 아니기 때문에 더더욱 한 단어, 한 글자도 몇 번을 고쳐봐야 했었으리라. 그런 고단한 여정을 겪었기에 "내 나라 말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머리에 착착 감기는 걸작을 남겼을터... 작가 자체가 "불구하고" 씨리즈를 실천하니 이 작품은 더욱 내가 생각하는 사랑의 이데아에 근접하는 것인가.
구성과 짜임은 물론이거니와, 누차 강조하는 그 표현의 완벽함은 눈물로 책장을 뻣뻣하게 만들었고, 도서 반납을 6개월여동안 미루어 숙제 도서도 친구네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야만 했던 긴급상황에까지 이르게했다. 결국은 한결 이쁜 표지의 롤리타 책을 사버렸다. 몇 날을 머리맡에 끼고서 되뇌이고 되뇌이던 서두와, 내가 보았던 그 어떤 사랑의 고백보다 더 진한 한 단락의 고백. 그토록 닳고닳게 쓰이던 사랑이란 단어의 불신과 식상함을 너무도 새롭고 뜨거운 의미로 바꾸었다. 나아가 사랑이라는 단어는 어이해서 "빠진다", "홀린다"란 서술어와 호응을 하게되었는지의 의문까지도 해결해주었다. 위에서도 옮겨본 소설의 서두와, 378쪽부터 등장하는 험버트의 사랑고백은 어디서도 쉽게 맛볼 수 없는 최고의 지독한 강렬함을 선사한다.
사족으로 비하인드 스토리 하나 부기한다. 롤리타는 최근에 제레미 아이언스 주연의 영화로 다시 개봉되기도 하였는데, 이때 남자주인공 선정에 꽤나 애를 먹었다는 후문이다. 처음 물망에 오른 워렌 비티는 특유의 편력으로 인하여 영화가 아니라 진짜로! 염문을 뿌릴까봐 탈락했고, 차순위 숀 코넬리는 아무리 나이차 있는 사랑을 다루는 영화라 해도 그 정도 나이는 패륜으로까지 보일까봐 밀려서 제레미 아이언스에게 낙점되었다고 한다. [인상깊은구절] 그리고 거기, 허물어진 모습으로, 정맥이 밧줄 모양 불거진 어른 같은 손과 소름 돋은 흰 팔, 얇은 귀, 지저분한 겨드랑이의 롤리타가 가망 없이 지친 17세로, 임신을 한 채 있었다. 한때는 대스타가 되어 2020년쯤에나 은퇴하는 꿈을 꾸었던 나의 여자. 나는 그녀를 보고 또 보았다. 그리고 분명히, 내가 언젠가는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아는 만큼 그렇게 분명히 나는 그녀를 내가 본 어느 것보다 사랑했고, 지구상에서 상상할 수 있는 어떤 희망보다 더 그녀를 사랑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단 하나의 희미한 바이올렛 향기였고, 과거에 내가 그렇게 울며 찾아 헤매던 님펫의 죽은 메아리였다 그녀는 하얀 하늘 아래 먼 숲, 황갈색 계곡 가장자리에 사는 메아리고 시냇물을 막는 갈잎이며 바삭거리는 잡초 속의 한 마리 마지막 귀뚜라미였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내가 숭배한 것은 메아리만은 아니었다. 내 가슴의 엉킨 핏줄 속에 내가 실컷 불어넣었던 것, 나의 엄청나고 찬란한 죄는 정수만 남았다. 척박하고 이기적인 악덕을 나는 모두 취소하고 저주했다. 여러분은 나를 조롱하고 법정을 모독하지 말라고 야단을 하실 테지만 재갈을 물리고 반쯤 죽는다 해도, 나는 내 가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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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된 책이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0번째 였으나, 판권문제인지. 30번째가 [야성의 부름]으로 바뀌었다. 작가가 이 책을 쓰게 된 계기가 동물원에 갇힌 원숭이가 숯으로 그린 그림이, 창살이었다라는 기사였는데, 그 기사를 읽은 뒤에, 단편을 썼고 또 그 단편이 원형이 되어 [롤리타] 된 것이라고 한다. 어린 여자아이를 좋아하는 험버트에 대한 이야기이며, 이 책때문에 롤리타 증후군이라는 단어까지 생겨날 정도였으니, 대단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쉽지 않기에 중간에도 덮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겪게 된다. 오죽하면 여러출판사에서 출판을 거절했겠는가. 이 소설은 험버트의 관점에서 이 이야기를 써내려가고 있다. 험버트는 님펫이라는 어린 여자아이들에 대한 애착에 갖혀 있는 느낌이다. 마치 원숭이가 창살에 갇혀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원숭이 처럼 자신을 가둔 님펫, 롤리타를 표현한 것 뿐일 것이다. 외설적이게도 느껴지고, 롤리타와 함께 장기간의 여행을 하면서 험버트의 삶은 롤리타에게 집중되어 있다. 한가지에 매달려 주위를 못 보는 롤리타, 그리고 그런 의붓아버지에게서 벗어나려고 하는 롤리타. 롤리타도 처음에는 지극히 평범한 여자아이처럼 보였지만, 점점 남자들의 눈빛을 받아들이고 또 그 눈빛을 더 받기 위해 행동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런 롤리타를 보면서 저러면 안되는데, 왜 험버트에게 좋은 곳에 정착해서 살자라고 친구들과 같이 평범하게 살고 싶다고 더 일찍 얘기 하지 않았을까. 롤리타도 점점 연극, 유명해지는 것에 갇혀지는 것 같다. 작가는 아니라고 하지만, 자유분방한 미국의 문화에 대한 비판도 독자가 느낄 수 있는 정도이다. 험버트, 롤리타, 그리고 롤리타를 납치한 퀼티 모두 동물원에 갇힌 원숭이처럼 무언가에 갇혀 있는 것 같다. 혹시 나도?? |
| 롤리타 롤.리.타. 완전한 사랑에 빠진 사람 그 사랑때문에 숨쉬는 사람 그 사랑때문에 죽는 사람 그 사랑이 전부이며 전부가 곧 사랑인 사람 사랑이란 밝은 감옥 사랑이라는 절절한 아픔, 갈망이 있는 시간도 공간도 없다시피한 감옥 롤리타와 함께 있는 것이 험버트에게는 천국이었고 그 천국의 하늘이 지옥의 불. 즉 롤리타로부터 오는 고통으로 휠훨 타오르지만 그것은 여전이 천국이었다.(227p) 사랑의 버거움. 힘듬, 벗어나지 못함. 환희, 욕구들이 너무도 적날하게 표현된 최고의 책이라 생각된다 어린 소녀를 사랑하여 그 사랑이란 감옥에 그녀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가든 험버트 난 도덕을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다 험버트에 연민을 느끼고 그를 동정한다 롤리타를 사랑하는 그 마음이 얼마나 괴로운지 내 마음까지 너무나 잘 전혀져온 묘사와 설정이 너무도 뛰어난 책이란 생각이다 마치 실재의 인물들 처럼 그들을 내 눈에 보고 싶고 만나고 싶어진다. 비극적인 결말이어서 더 인상깊은 작품 |
| 롤리타.. 솔직히 음흉한 마음에 샀죠...^^;;; 근데.. 정말 세계문학전집에 들어갈 만한작품이더군요... 전에,사드후작에 대한 영화를 봤는데... 그 영화 처음에는 "저런 미친X가 다있나.."하다가 점점 사드가 멋있게 느껴졌거든요. 이 롤리타도 첨엔 "뭐 이런사람이 다 있어..."하다가 결국은... 매력적인.. 너무 매력적인 님펫이라서 빠져들었지만 롤리타가 "님펫"이 아니라 "여자"가 되었는데도 롤리타에 대한 그의 사랑은... 그의... 롤리타에 대한 사랑은 불순했지만 결국 마지막에서는 숭고하다고 느낄정도입니다.. 롤리타 컴플렉스라는 단어에 선입견을 가지고 있으신 분들 한번 읽어보세요.. 충격받으실 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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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들에게 도덕적 감각이란 우리가 덧없는 미적 감각에 지불해야 하는 임무다. -p.386
책을 읽다보면 씁쓸한 작품이 몇몇 눈에 띈다.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도 씁쓸한 축에 속한 책이었지만, <롤리타>만큼은 아닌 느낌이다. 롤리타, 롤리타. 그 이름만 불러도 머릿속은 바빠진다. “롤리타”라는 소리(또는 문자)를 들으면 “롤리타 콤플렉스”가 아득한 뇌수 골짜기에서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뒤이어 “변태, 아동성애욕구, 원조교제”등등 숨쉬기 바쁘게 이미지와 단어들이 솟구친다. 그러나 이런 연상 이미지들은 광고의 선전 문구 같은 거였다. “미성년자 구입 불가”에 두고 싶지만, “세계문학전집”에 손색없는 작품이다. #1. 변태 회고록 또는 뮤즈 신 내림 기가 막힌다. 변태들이 좋아할 만한 단어는 “단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 단아하고 절절한 느낌의 문장만이 가득하다. 그런데도 그런 문장에서 페로몬이 폴폴 풍긴다. 인터넷 저질 소설과 같이 묶어서 도매 급으로 취급하면 나보코프 옹이 굉장히 섭섭할 거다. 한 사람에 대한 기억을 읊조릴 때, 외모를 묘사하는 것보다 훨씬 변태처럼 보이는 묘사 방법이 있었다. 사람에 관련된 숫자를 기억하고 있다는 게 그토록 섬뜩한 일인 줄은 미처 알지 못했다. 님펫은 분명히 지난 7개월 동안 성장했을 터이므로 나는 이 일 월의 치수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엉덩이둘레 29인치(둔부 쏙 들어간 곳 바로 아래). 넓적다리 둘레 17인치, 장딴지 둘레와 목둘레 11인치, 가슴둘레 27, 윗팔둘레 8, 허리 23, 신장 57인치, 몸무게 78파운드, 자세 곧음, 지능지수 121, 맹장은 있음. 하느님 감사합니다. -p.148
‘넓적다리 둘레’를 읽을 즘에는 내가 이 부분을 왜 이토록 집중해서 읽고 있는 걸까―하고 스스로 의심하기도 했다. 1부와 2부로 나뉘어 있다. 1부는 “빨리” 읽히지만, 2부는 “굉장히 더디게” 읽힌다. 1부가 변태 회고록이라면, 2부는 뮤즈 신 내림을 받은 뒤 적어가는 사랑 고백이다. 많은 사람들이 <롤리타>라는 단어에 붙인 느낌은 아마, “변태 회고록”쪽에 무게를 좀 더 둔 듯하다. “기분 나쁜 변태 자식!”이라며 책을 냅다 던지는 쪽에 가까울까. 나처럼 “1부는 후다닥 넘어가는데 2부는 더디네!?”라며 읽어내는 좀 “면역”된 사람도 있을 테고. 목젖을 치고 올라오는 위산을 꿀꺽 삼키면, 좀 더 깊은 곳에 담긴 이야기가 보이기 시작한다. 사랑에 불타오르는 감정을 묘사한 환상적인 문장들도 눈에 들어오면서. #2. 사랑, 돈으로 살 수 없다 고백하는 중년 남자는 험버트. 꽤나 지루한 이름처럼, 안타까운 사랑의 상처를 지니고 평생을 산다. 12~14살 때 사랑을 나누었던 첫사랑―애너벨―의 죽음 뒤에, 그녀의 환영을 가슴 속 깊이 새겨두었다. 그리고는 그 환영과 비슷한 여자 아이들에게 애칭을 붙인다. (님펫. 아마도 님프(nymph)와 펫(pet)의 합성어겠지.) 험버트는 롤리타의 사랑을 돈으로 산다. 하룻밤을 자면 돈을 주고 롤리타에게 무언가를 요구하거나 친절을 베풀 때면 돈을 쥐어줬다. 그런 사랑은 끝내 파멸로 돌아가고 만다. 광고들은 그녀를 위해 태어난 것 같았다. 온갖 더러운 포스터의 주체요, 객체요, 이상적인 소비자였다. 그리고 예쁜 냅킨이나 시골 치즈 샐러드에까지 헝컨 다인의 신성한 정신이 깃들인 그런 레스토랑에서만 식사를 하려고 했다―물론 다 뜻대로 된 것은 아니지만.
그때는 그녀도 나도 뇌물이라는 돈의 위력이 나중에 나의 신경과 그녀의 도덕을 얼마나 황폐화시킬지 미처 생각지 못했다. -p.202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말해 주면 동전 한 닢 주지” 이렇게 말하자 그녀는 즉시 손바닥을 내밀었다. -p.283
‘원조교제’가 떠오른다. 나보코프 옹은 알고 있었나 보다. 어린 여자에게 돈을 주고 사랑을 구걸하는 짓은 스스로 노예가 된다는 것을, 서로가 서로의 도덕을 황폐하게 만드는 일이란 것을. 그리도 또 하나, 애들은 돈으로 키우면 안되는 게 확실하다. 원조교제에 푹 빠져있는 중년 남성에게 독서치료 목적으로 읽히면 좋을 것 같다. 돈으로 애들을 키우려는 부모에게 읽혀도 꽤 좋을 것 같고. 고급 포르노를 갈망하는 사람에게도 적절하고, 지하철에서 상당히 불쾌한 눈빛을 느끼고 싶은 사람에게는 최적의 선택이다. 덧말 옮긴이의 띄어쓰기와 단어에 문제가 있다. 개정판에서는 고쳐 놓으려나. “그녀는 원숭이처럼 재빠르게 내가 무심코 펴들고 있는 잡지를 나꿔챘다.” -p.82 “나꿔채다”는 북쪽에서 쓰는 “낚아채다”의 표기법. <책에서> “선생님의 학구적인 명상을 방해하거든 아프게 때려주세요. 얼마나 이 정원을 사랑하는지(그녀의 어조에는 감탄이 없다). 햇빛 아래서 보니 정말 신성하지요(물음표도 없다)” 아주 만족스럽다는 듯이 그 밉살스런 숙녀는 풀밭으로 내려서더니 팔을 뒤로 기대고 않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바로 그때 낡은 테니스공이 그녀 위로 튀어올랐고 안에서 로의 오만한 음성이 들린다. “미안해요, 엄마.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물론 아니지, 내 뜨거운 솜털 같은 연인아. -p.78 내가 미친 듯이 소유했던 것은 그녀가 아니라 나 자신이 창조해 낸 것이었다. 또 다른 환상적인 롤리타, 아마도 실제보다 더 리얼한 롤리타. 실제의 그녀와 겹치고 둘러싸며 나와 그녀 사이에서 둥둥 떠다니며 의지도 의식도 없는 소녀, 정말 그건 그녀 자신만의 삶이 아니었다. -p.88 “날 미치게 만드는 건 당신이 그럴 때 무얼 생각하는지 내가 모른다는 거예요” -p.125 나는 죄없는 냅킨을 나도 모르게 접었다가 찢었다가 움켜쥐었다가 다시 찢고 있었다. 하지만 내 미소 띤 얼굴은 그녀를 편안하게 주시한다. -p.126 >> 이런 감정 묘사는 정말 소름이 돋는다.
소위 <섹스>라는 것은 전혀 내 관심사가 아니다. 누구라도 그런 동물적 행위들을 상상할 수는 있다. 그보다 더 의미 있는 노력이 나를 움직인다. 바로 님펫의 위험스런 마술을 영원히 포착하는 것, 그것이다. -p.183 크고 작은 마을의 도서관에서 내가 내밀히 조사한 결혼, 강간, 양녀 등에 관한 책들은 국가는 어린이들의 최고 보호자라는 알쏭달쏭한 말 외에는 별로 알려주는 게 없었다. -p.235 슬프게도 2년간의 괴물 같던 탐닉은 내게 어떤 습관적인 정욕을 남겻다. 공허한 삶 때문에, 나는 학교가 파하고 저녁 시간까지 골목에서 부딪히게 되는 아이에게 유혹을 느껴 갑자기 미쳐버리지나 않을까 두려웠다. 고독은 나를 타락시켰다. 나는 친구와 사랑이 필요했다. 내 가슴은 히스테릭하고 믿을 수 없는 기관이 되고 말았다. -p.351 미성숙이 나를 왜 매혹하는가, 그것은 순수하고 젊고 금지된 요정의 아름다움이 주는 명쾌함 때문이라기보다 많은 것이 약속되지만 거의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음으로 인해 생기는 틈새를 무한한 완전성들이 메꾸어준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안심할 수 있기 때문이다―결코 가질 수 없는 분홍 잿빛의 위대함이여. -p.360 “죽는다는 것이 아주 두려운 것은 왠지 알아? 완전히 혼자가 된다는 거야” 무릎은 기계적으로 아래위로 움직이고 있었지만 나는 내가 그녀의 마음속을 조금도 모르고 있다는 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끔찍스런 청소년의 은어 뒤, 그녀의 깊은 마음속에는 정원이 있고, 환혼이 있고, 궁전의 문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곳은 내 비참한 몸부림과 누더기같이 더럽혀진 몸은 결코 들어갈 수 없이 금지된 곳, 희미하고 사랑스런 공간이었다. -p.388 이상하게도 흔히 시각보다 훨씬 덜 중요한 걸로 알려져 있는 촉각이 위기의 순간에는 현실을 다루는 유일한 수단은 아니라도 상당히 주요 수단이 된다. -p.4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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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은 1부와 2부로 나뉘어져 있는데요, 1부는 주인공인 험버트 선생이 롤리타를 만나기까지의 야야기들이 기록되어있고, 2부는 영화로 치자면 로드 무비, 그러니까 험버트와 롤리타가 사방 천지를 나부대고 돌아댕기면서 이야기가 전개되는 방식입니다. 물론 끝까지 그렇지는 않지만 어쨌거나 싸돌아다니면서 이야기를 끌어가는 게 2부의 전체적인 분위기예요.
1부에서 2부 초반부까지는 말이죠, 그러니까 험버트 선생이 롤리타와 돌아다니기 시작해서 어느 정도까지는 과연 명불허전, 아주 재미있었습니다. 뭐랄까 묘사가 아주 멋진 작품이었으니까요. 그런데 2부의 그 어느 지점이 지나면서부터는 완전히 하향곡선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지치지도 않고, 계속, 결국 바닥을 치고, 막판에 잠시 꼴딱 한 번 고개를 쳐들지만 다시금 별 다섯으로 끌어올려줄 파워까지는 어림도 없었습니다. 제 생각엔 그랬어요.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좋은 것도 하루 이틀이지 무기가 하나여서는 끝장을 보기 어렵다는 단순한 원리입니다. 그러니까 뭔소리냐 하면, 이 소설은 이야기로 먹고 사는 소설이 아니었습니다. 묘사죠. 표현과 묘사. 화려한 묘사와 문체를 자랑해주십니다. 그러니까 그게 어느 정도까지는 힘차게 뻗어나갑니다. 그러나 제아무리 잘났어도 어쨌거나 유효 사거리라는 게 있는 거니까요. 이 작품에서는 그게 2부 초반까지였어요. 거기서부터 백 세 노인의 소변 줄기 마냥 땅바닥으로 비실비실 꼬꾸라지더니 질질 흐르면서 끝나요. 그쯤에서 그것을 대체할 만한 무언가가 뒷받침되었다면, 아마 초반의 힘을 후반까지 이어갈 수 있었겠지만 대체 용병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거기서부터 질리기 시작하는 거예요. 몸이 점점 주리를 틀기 시작한달까. 몰입도 역시 소변 줄기처럼 비실비실 흐트러지고 말이죠. 그게 이 작품의 결정적인 흠이었습니다.
한가지 더 추측되는 흠은, 번역이었는데요, 이 작품의 번역이 문제가 있다는 말씀이 아니라 어느 누가 번역해도 원전의 맛을 살릴 수는 없는 종류의 텍스트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좀 들더군요. 말하자면 시적 표현이나, 영어로 맞춘 운율 같은 것들이죠. 그건 똘똘이 스머프가 번역해도 불가능한 얘기일테니까, 딱 번역 문학의 한계에 부딪힌 작품이 아니었나 하는 느낌도 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원래는 두 가지맛 츄파춥스였다면 뒷면에 붙은 딸기맛은 어쩔 수 없이 포기해야만 하는 그런 상황이었다구요.
내용은 글쎄요, 여자 분들은 어떨까요. 40대 중년 남자가 12살짜리 꼬마 여자애를 성적으로 느끼는 소아성애적인 내용이거든요. 스토리는 과연 찌질합니다. 저도 이런 내용 별로 안 좋아해요. 거지 같달까. 언젠가 박범신 선생님의 <은교>를 읽고 다른 이들을 리뷰를 구경하다가 역겨운 내용이라고 쓴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은교 역시 살짝 롤리타적인 내용이었는데 아마도 그 분은 그걸 어떤 다양한 측면에서의 이해보다는 그냥 노인네가 어린애를 사랑하는게 더럽다고 느낀 모양이에요. 하지만 그걸 두고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는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분이 그렇게 느꼈다는 게 중요한 거니까요. 물론 세상 일이란 게 비단 책뿐만이 아니라 모든 면에서 아는 만큼 보이는 게 사실입니다만, 해석의 여지가 다양한 문화적 상품의 경우에는 접하는 사람의 지식이 좀 짧거나, 혹은 시야의 폭이 좁아 남들이 즐길 수 있는 것의 반 밖에 즐길 수 없다해도 그건 자신의 복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걸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는 거죠. 남의 인생이 아니라 자기 인생이니까 자기가 아는 만큼 느끼고 감동하면 그만이라고 저는 생각해요.
그러나 바뜨, 몰라서 그런 게 아니라 패쇄적이기 때문에 그런 것은 문제가 좀 다릅니다. 편견. 이건 진짜 나쁜거죠. 패쇄적인 사고의 소유자는 뭐랄까, 좀 사람 지치게 하는 아집이 너무 강하죠. 그건 타인에게 뿐만이 아니라 자신에게도 불행한 일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삶을 볼 수 있는 반경이 100이라면 그런 사람은 스스로 각도를 좁혀 10만 보고 사는 형편이니까요. 어쨌거나 제가 살아가면서 느끼는 건, 유연한 사고를 지닌 사람이 아무래도 더 많은 이해의 폭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의 장점을 가령 음식과 비유하자면, 세상에 존재하는 더 많은 음식을 맛 볼 수 있고, 그 과정에서 더 많은 실제적인 경험을 쌓게 되겠죠. 그러면 세월이 흐르면서 더 다양한 경험을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는 겁니다. 그게 중요하거든요. 사람들과 함께 다양하고 실제적인 정보를 나누는 것. 이를테면 어떤 음식은 어떻게 먹으면 더 맛있고 어떤 건 그렇게 먹으면 맛이 없다 하는 식의. 그런 미각적인 포인트를 배우고, 알아 즐기는 쪽을 선택해서 삶을 살면 세상사는 재미가 두 배로 느는 건 엄청나게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게 책만 읽어서는 배울 수 없는 거거든요. 이 책이라는 게 참 묘하더만요. 읽으면 읽을수록 똑똑해지는게 아니라 사람을 점점 편협하게 만드는 것 같더라구요. 책만 읽어서는 그래요. 지식은 늘지만 지혜는 생기지 않는 거지요. 그래서 책만 읽어 늘은 지식은 누구와 언쟁을 벌일 때나 유리하지 실상 사람 사이에서 유쾌한 즐거움을 찾는 쪽에서는 영 아이올시다, 인 경우를 많이 봤습니다. 상황 이해는 빠른데 근본적인 심리는 이해하지 못한달까? 타인에 대한 배려를 잘 모른달까. 그래서 제가 종종 책만 읽어 배운 지식은 아집만 키울 뿐이라고 말씀드리는 거거든요. 사람 사이에서 경험했던 것들을 책으로 다시 접하면 뭐랄까, 그 현상의 여러가지 면을 조금 여유롭게 돌려볼 수가 있는데 그런 실제적인 경험없이 오로지 책만을 통해서 뭔가를 익힌 사람들은 꽤나 꽉들 막혀있다는 것을 저는 많이 느꼈습니다. 제가 살면서 만나는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 중에서 가장 말이 안 통하는 부류가 바로 책만 읽은 사람들이었거든요. 그래서 저는 사회 경험이 아직 적은 나이 때의 사람이 책 너무 많이 읽는 거 별로 권하지 않는 편입니다. 언제나 말씀 드리듯이 경험이 뒷받침되지 않는 독서는 위험하거든요. 특히 인문서는 더욱 그렇고요. 실제적인 삶이 바탕되지 않는 무조건적인 지식의 수용은 호환마마보다도 더 위험한 겁니다. 사람을 골방 지식인으로 만들뿐만 아니라 반대 의견이라도 낼라치면 아주 죽일라고 드니까요.
얘기가 잠시 삼천포로 빠졌는데 어쨌거나 이 작픔도 그러므로 소아성애를 다룬 역겨운 작품이므로 던져버리는 것보다는, 그 부분은 난 싫으니까 제껴놓더라도 그러한 주제를 다루는 과정에서의 장점이나 미적인 요소는 눈여져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한 작품에서도 이건 진짜 싫지만 저건 마음에 들더라, 하고 판단할 수 있는 시각이 살아가면서의 시각으로도 저는 좀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물론 제 생각 따위일 뿐입니다만, 경험상 그쪽을 선택해서 손해본 일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오히려 패쇄적인 냥반들의 인생이 패쇄 반, 소비적인 논쟁 반으로 갈아드시는 걸 더 많이 봤습니다. 너무 갈아서 건더기도 없더라. 인생을 즐기는 쪽보다는 고통스럽게 만드는 쪽에 더 관심이 많은 사람들처럼 보인달까.
어쨌거나 이 작품에 관해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작품성만 놓고 본다면 제 생각엔 <은교>가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작품이 바로 롤리타 신드롬의 장본인이라는 전설적인 측면에서의 명예도 존중해주어야겠죠. 제 생각엔 이 작품의 아우라가 일정 부분은 거기서부터 비롯된다고 생각되어요. 실상 실체는, 그렇게 강하지 않아도 말이죠. 여튼 아직까지도 모든 로맨틱 코메디의 장르가 제인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의 품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영화 <레옹>이라든가, 말씀드린 <은교>도 그렇고, 소녀를 사랑하는 모든 예술 작품은 이 롤리타의 품을 벗어날 수 없는 시조라는 점에서의 가치. 사실 그것만으로도 겁나 위엄 쩔어주시기는 하는 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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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작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를 세계작가 반열에 올려놓은 롤리타는 영미권 작가들에게 있어 최고문학작품 4위에 오른 꽤나 인정받은 작품이지만 한국에 사는 일개 독자인 나의 입장에서 볼 때 '글쎄'였던 작품이다. 다들 알겠지만 롤리타는 롤리타 콤플렉스의 약자 롤리콘의 기원이 되는, 성인 남자가 사춘기 전후의 어린 소녀에게만 흥분을 하는 변태적 성욕을 지칭하는 대명사의 근원이 된 소설이다. 그리고 꽤나 보수적인 나로서는 이 작품의 문학적 가치에 대하여 상당히 회의적인 시각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작가인 나보코프 본인도 변태 성욕을 지칭하는 단어가 자신의 작품에서 나왔다는 것에 대해 상당히 회의적이었다고 한다.
롤리타의 의미 파생도 그렇고 작품의 전체적 분위기를 봐도 그렇고 이 작품은 전혀 교훈적이지 않다.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도 없다. 어찌하여 소설에 주제가 없는고 하면 그게 바로 작가가 의도한 바이기 때문이다. 나보코프는 억지로 가르치려고 드는 많은 소설들에 대해 못마땅해했다. 그림만 봐도 결코 설명을 요구하지 않는 예술이다. 그런데 그게 문자를 사용하는 예술이라 하여 반드시 메시지나 교훈이 담겨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수천년에 걸쳐 형성된 지독한 편견이다. 그래서 작가는 그저 한 남자, 지식인이고 유창한 몇개국어 실력을 가졌지만 떠돌이에다가 어릴적의 트라우마로 인해 어린 소녀에게만 사랑을 느끼는 험버트 험버트를 주인공으로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험버트 험버트는 일반인들의 기준으로 봤을때 머릿속에 든 것은 많아도 전혀 배울만한 점이 없는 남자이기 때문이다.
그럼 어째서 전혀 메시지가 없는 이 소설이 영미작가들이 선택한 최고 문학작품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을까? 그 이유는 의외로 단순하다. 그건 이 소설이 담고 있는 내용에 비하여 너무나 아름다운 단어들만을 선별하여 씌여졌고 암시성이 매우 짙기 때문이다. 보통 변태 성욕적 내용을 담고 있다고 생각하면 굉장히 외설스러운 단어와 표현들이 사용되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롤리타를 쓰는데 선별된 단어들은 고급스럽고 아름답다. 게다가 광대한 미국 여기저기가 소설의 배경이다. 아름다운 미국 전원적 풍경을 배경으로 묘사한 롤리타는 영미권 작가들에게 (적어도 심리적 측면이 아닌 부분에서는) 공감을 살 수 있었을거고 그 부분이 문학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되었을 것이다. 뭐, 나중에 이 소설이 정신분석학의 의학적 용어를 나타내는 기원이 되었다는 점에서도 충분히 가치는 생겼을거다.
주인공 험버트 험버트는 프랑스에서 교과서를 만들만큼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유럽의 지식인이지만 어릴때 이루지 못한 사랑 때문에 어린 소녀에게만 사랑을 느낀다고 주장하는 이 소설의 화자다. 천진난만하지만 천한 단어를 쓰면서 자신을 유혹하는 사춘기 전후의 어린 소녀들을 자신만의 용어 님펫으로 정의하면서 님펫을 보는 것과 돈을 주고 사는 것에 행복을 느끼는 비뚤어진 성욕의 중년 남자다. 그러던 그가 미국으로 건너가 렘즈데일의 한 하숙집에 머물게 되는데 그 이유는 하숙집 주인의 딸 롤리타에게 한눈에 반하기 때문이다. 롤리타야말로 험버트가 꿈꾸던 님펫의 전형이며 어릴적 이루지 못한 사랑의 여성을 그대로 연상시키는, 오직 하나뿐인 사랑스러운 연인이다.
그러나 하숙집 주인이자 롤리타의 엄마인 샬로트는 험버트에게 애정을 느끼고 자신을 선택하지 않을거면 하숙집을 나가달라고 요구한다. 험버트는 별로 고민하지 않는다. 자신의 진정한 사랑 롤리타에게 합법적으로 접근하면서 그 얼굴을 만지고 키스하고 보듬어줄 수 있는 아버지로서의 위치가 확실하게 얻어지는데 샬로트와의 결혼이 대수로울리는 없다. 게다가 샬로트는 롤리타의 원조인 셈이니 불만스럽지도 않다. 비록 샬로트에게 애정을 느끼지 않더라도 험버트는 그녀와 결혼하고 롤리타의 아버지로서 렘즈데일에 머물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샬로트는 험버트의 비밀 서랍을 열고 그의 일기를 보게된다. 험버트의 일기에는 그가 롤리타를 처음 본 순간부터 느낀 애정의 진행상태가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다. 전형적인 미국의 여성으로서 자신의 남편에 대한 살아있는 소유욕을 가지고 질투를 할 줄 아는 샬로트는 이를 보고 분개한다. 자신의 딸에 대한 질투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딸을 지켜야한다는 미묘한 감정, 그리고 어떻게든 험버트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심리는 결국 샬로트를 정신적 공황상태에 빠뜨리고 우체국으로 정신없이 달려가던 중 자동차에 치여 즉사하고 만다. 그로부터 롤리타의 법적인 아버지이자 보호자이자 연인으로서 험버트는 그녀와 둘이서 미국을 돌면서 여행을 하게 된다.
만약 롤리타에 대한 험버트의 사랑이, 단지 롤리타가 님펫으로 통할 때인 어릴 적 몇 년 간만 지속되는 사랑이라면 험버트의 사랑은 변태적 성욕으로 끝날 것이다. 하지만 험버트는 롤리타를 통해 님펫만을 사랑하던 자신의 이상한 성욕에서 승화되는 듯하다. 어른이 되고, 자신을 버리고,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한 롤리타에게 끝까지 사랑을 느끼며 돌아와달라고 한 험버트에게서 독자들은 마지막에 각기 다른 느낌을 갖게 될 것이다. 롤리콘의 원조라고 생각했던 험버트에게서 궁극적으로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는 사랑의 모습을 보면서 아이러니를 느낀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롤리타를 사랑했다고 해서 험버트의 사랑이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있느냐의 문제는 별개가 된다. 청교도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미국인들에게 험버트의 사랑은 변태적으로 받아들여지겠지만 80세의 할아버지가 10살도 안된 어린 소녀를 아내로 받아들이는 아랍 문화권에서는 전혀 문제로 여겨지지 않을테니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