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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가 요동치고 있다. 상위 1%를 위해 희생해온 99%에 속한 자신의 위치를 인식한 사람들은 세계 질서를 향하여 마음껏 분노하기 시작했다. 과거 같았으면 특정 정치 세력에 기댄 불순 세력 따위로 이들을 매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여전히 그와 같은 시도가 행해지고 있긴 하나 사실 어린 아이의 응석과도 같아 보일 뿐 이전처럼 크게 설득력이 느껴지진 않는다. 거리로 나선 사람들의 면모를 본다면 더욱 이는 분명해진다. 하나의 집단으로 묶기엔 그들의 정체성이 너무도 복잡하다. 집 없고 직장 없는 노숙자들과 언제 해고될지 몰라 전전긍긍 중인 비정규직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이제 막 대학에 들어가 화이트칼라의 안온한 삶이 보장된 듯한 대학생들도 시위에 가담한 상황이다. 심지어 아이 유모차를 끌고 거리로 나선 아기 엄마와 이름만 들어도 ‘아, 그 회사’라며 감탄사가 터져 나오는 곳에서 버젓이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이들까지. 이 다채로움을 어찌 단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저자의 이력 중 가장 독특한 것은 그의 죽음에 관한 부분이었다. 불치병에 걸린 아내를 간호하다 제 의지를 발휘해 죽음마저도 선택한 저자에게 자살했노라는 비난은 차마 던질 수 없었다. 어쩌면 그의 삶이 내내 숭고함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런 저자의 작품이라는 인식을 하고 읽어서일까? 맑시즘을 다루고 있는 많은 책들과 ‘프롤레타리아여 안녕’는 다소 그 방향이 달랐다. 크게 두 계급이 존재하고 하나의 계급은 다른 계급에 적대적일 수밖에 없는, 이러한 이론의 형태에 의하면 우리 사회는 참으로 단순하게 구성되어 있고 ‘단결’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잘만 활용한다면 이전과는 전혀 다른 질서의 사회를 창조하는 것도 가능할 것으로 많은 이들은 추측해왔다. 그런데 사실 노동자가 자신의 계급적 위치를 자각하는 것만도 실제 사회에선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의 노동은 생산과 전혀 유대감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의 완제품을 놓고 보았을 때 노동자의 노동은 그 완제품의 극히 일부를 차지하는 부품에만 국한되어 있다. 사회가 계급적인 이해관계를 모호하게 만들고 있는 상황에서 과연 제 밥줄을 포기하면서까지 개혁에 동조하는 게 쉬울 수 있겠는가? 저자의 이번 책은 그 이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부제가 ‘사회주의를 넘어서’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저자가 바라던 세계는 무엇이었을까? 그는 자본가에 대한 반대뿐만 아니라 프롤레타리아라 불리어온 이들을 향해서도 반대한다. 아니, 좀더 명확히 표현하자면 프롤레타리아가 하나의 권력으로 세력화하는 것에 대해서 반대한다. 현대 사회는 개인이 중심에 놓인 사회이다. 사측에서 회사의 부흥을 위해 개개인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 폭력일 수 있듯 계급투쟁과 노동해방이라는 대의적 차원에서 요구되는 희생도 개인에게는 폭력일 수 있다. 따라서 기존의 방법과는 많이 다를지라도 개개인의 자율성이 확대되는 방향으로 우리 사회는 나아가야 한다. 수치로 표현되는 많이 지수들이 긍정적인 방향을 보일지라도 서민들의 삶이 나아지지 않듯 노동집단 전체 차원에서 보았을 땐 무언가 획득을 했더라도 내 자신의 삶에서 느낄 수 없다면 그것은 죽은 해방에 불과한 것이다. 오늘날 거리로 나선 사람들의 존재는 분명 희망적이다. 우린 비로소 우리 자신의 목소리를 스스로 내기 시작한 셈이니 말이다. 그렇지만 저자는 정치를 잊지 말 것을 우리 자신에게 요구한다. 여지껏 정치는 소수의 권력층이 제 지배를 견고히 하기 위한 도구로써 활용되어 온 측면이 강하다. 시민들이 행사한 표에 의존해 그들의 지위가 결정되지만, 그들이 시민들의 이해관계를 제대로 대변하고 있다고 믿는 이가 얼마나 되겠는가? 하지만 정치의 사명은 권력의 행사가 아니다. 저자에 따르면 ‘타율성의 영역은 축소되고 자율성이 영역은 커지도록 의무와 경영방식들을 국가에 위임하는 것’이 바로 정치의 사명이다. 거리로 쏟아진 사람들도 알고 보면 스스로 정치를 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자본으로부터, 국가 지배기구들로부터 권력을 빼앗아오는 역할을 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제 자신의 자율성의 증대를 도모하고 있는 중이다. 그들의 움직임을 현 정당들이 혹은 새로운 정당이 창출되어 흡수하지 못한다면, 즉 정치 영역에서 현재의 흐름을 짓밟는 데에만 몰두한다면 시민들은 정당을 불신하게 될 것이요, 정치의 죽음은 결과적으로 우리가 그토록 증오해온 절대국가의 탄생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이런 결론은 ‘사회주의’라는 체제와는 동떨어져 있는 듯하다. 중요한 것은 어떠한 체제를 택하느냐 보다는 구성원들의 자율성을 증대할 수 있는 무언가인 것이다. 특정 명칭을 사용해 미래를 그릴 수 있길, 사람들은 불확실성을 두려워한 나머지 사회주의 안에 미래를 가두어왔다. 그리고 프롤레타리아라는 이름으로 스스로를 불러 왔다. 하지만 저자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인류는 꼭 제시된 방향으로만 나아가야 하는 법은 아니다. 지금 우리의 움직임이 무엇을 낳게 될지 우리로선 알지 못하지만, 희망처럼 부상해온 프롤레타리아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어쩌면 더 짜릿한 미래를 우리에게 가져다줄지도 모른다. 당신이 당신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는 세상의 도래를 꿈꾼다면 외쳐보아도 좋은 그 말을 외쳐본다. “프롤레타리아여, 안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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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이성비판의 저자 앙드레 고르를 오늘 만났다. 정확히는 그의 이론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 기본소득제라는 것에 대해 설명을 들은 오늘은 내게 월급이라는 정기 소득이 없어졌을 때를 대비하여 꼭 필요한 제도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도 지금 당장 필요하지 않다는 생각에 반대의견 쪽에 한 표를 던졌었던 것이 기억이 났다.
필요와 당시의 상황에 따라 움직이는 마음 또는 의사결정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본 시간이었다.
내가 가진 생각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다. 사는 동안 배워야할 것이 이리도 많다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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