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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2] 필립 로스, 네메시스, 폴리오 그리고 나
"[5.22] 필립 로스, 네메시스, 폴리오 그리고 나" 내용보기
Sometimes you're lucky and sometimes you're not. Any biography is chance, and, beginning at conception, chance―the tyranny of contingency―is everything. Chance is what I believed Mr. Cantor meant when he was decrying what he called God. (242-243)   그의 죽음이 아직 실감나지 않는다. 2012년 그는 <네메시스>(2010)를 끝으로 절필을 선언했다. 번역서로 읽을 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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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metimes you're lucky and sometimes you're not. Any biography is chance, and, beginning at conception, chancethe tyranny of contingencyis everything. Chance is what I believed Mr. Cantor meant when he was decrying what he called God. (242-243)

 

  그의 죽음이 아직 실감나지 않는다. 2012년 그는 네메시스>(2010)를 끝으로 절필을 선언했다. 번역서로 읽을 당시 메르스 사태와 세월호의 불투명한 진상 규명에 공분하며 이 책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부고 소식을 접한 뒤 펴든 책은 같으나 다르게 다가왔다. 지난달 다른 책으로 작가의 죽음을 기릴 계획이었으나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우울해져 덮어야 했다.

 

  무더운 7월 한중간에 만난 소설은 남달랐다. 소설 속 폴리오 전염병이 19447월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3부 구성과 미국의 영웅주의에 반하는 자연주의 함의를 드러내서인지 드라이저의 미국인의 비극이 떠올랐다. 번역서로 읽을 당시 이 소설은 전염병과 양심이 주된 화두였다면 (이번에는) 어느 소설에선가 당신의 한국전쟁은?”이라는 질문이 다시 메아리쳐왔다. 지금 이 곳은 과연 안전한가? 여기가 폴리오 전염 지역은 아닐까? 묻지 않을 수 없다.

 

  문득 작가를 처음 접했을 때가 생각난다. ‘이 주인공은 왜 이리 화가 나 있지? 이렇게 화내도 되나?’ 필립 로스의 작품은 근원에 대한 질문을 끈질기게 잡고 늘어져 한편 미성숙하고 발악적인 인물 군상으로 비칠 위험이 있다. 뭐 이렇게까지 출신과 환경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거까지야 없지 않나, 한숨이 새어나오려는 순간 그만 소름이 돋고 말았다.

 

  유년의 아찔한 기억, 묻어두었던 그림자 하나가 스멀스멀 내 앞에 정체를 드러낸다. 비교적 자기 주도적으로 결정하고 책임지며 살아왔다고 믿었는데 지금 내 삶에 드리운 그림자의 영향력이 적지 않다. 나의 불안과 불행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다는 회의적인 연기가 스멀스멀 피어나오는 근원지를 독대한다. 내가 선택하지 않은 부모와 성장환경. 그리고 이어진 내가 선택했으나 원했던 것은 아닌 삶의 유형들이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다.

 

  나는 독립된 나이자 성인으로서 자유로운 듯 보이나 그것도 착각이었다. 나는 과거의 내가 덧대져 이루어진 얼룩덜룩한 복합물인 것이다. 당시 나는 내가 선택하지 않은 것으로 인해 심하게 널뛰는 삶에 억울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땅히 성인이라면 살아야 할 자기 삶을 영위하지 못한 채 현재를 저당 잡힌 사람이었다. 그게 나라는 사실을 필립 로스의 소설을 통해 마주할 수 있었다. 나만 나랑 평화롭지 못한 게 아니었다. 모든 사람에게 착하고 좋은 사람일 필요가 없다는 배움을 얻었다. 하지만 부모나 환경에 영향 받지 않은 채 자기 삶을 사는 실천이 어려웠다. 게다가 어차피 삶은 어느 정도 선이 그어진 달리기 코스라는 사실을 인정하던 중이었다.

 

  그런 내게 날아드는 불화살은 고스란히 속에 분노를 일으켰다. 밖으로 향하지 못한 원망은 때론 심하게 파고들어 스스로를 멍들게 한다. 어리석은 행위인 줄 알지만 어떤 문제와 봉착했을 때야 비로소 내가 가진 균형감(balance)과 유연함(flexibility), 행동력(movability)의 실상을 파악할 수 있다. 문제가 있기 전까지 그 사람의 아킬레스건이나 붕괴지점이 어디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이번에 주인공 버키를 향해 불쌍하다, 를 연발했다. 나라밖은 2차 대전이 한창 진행 중이고 사는 지역은 폴리오가 창궐해간다. 더욱이 그는 체육 선생으로 운동장 감독관이다. 44년 폴리오는 16년에 이어 무고한 아이들의 몸을 꼼짝달싹 못하게 강타한다. 왜 작가는 폴리오에 천착했을까? 유대인과 이탈리아계 이주민들이 주로 사는 가난한 동네가 뉴어크이다. 그 곳에 산다는 이유로 십대 아이들이 생명을 저당 잡힌다. 그가 책임자로 있는 학교운동장은 여자 친구가 머무는 캠프장(인디언 힐)과는 확연히 다르다. 출신과 사회적 위치의 구분이 존재한다.

 

  언뜻 보면 호레이스라는 동네 바보 형이 떠도는 동네 운동장과 잘 사는 아이들이 여름을 나는 여름학교(camp)의 대치로만 보일 수 있다. 나쁜 시력 탓에 참전하지 못한 주인공에게 동네 운동장(playground)은 남루하게나마 전쟁터(battlefield)에 빗대진다. 어떤 위협이 있더라도 남자답게 목숨 걸고 끝까지 싸워야 할 공간인 것이다. 젊은 남자다움의 승인이나 다름없는 군인이 되지 못함으로써 그는 위기감을 느낀다. 버키의 남자다움은 안타깝게도 외형적이고 신체적인 것에 종속되어있다. 그의 중압감과 그로인한 역설적인 존재감(창을 던지는 고대 그리스인)은 미국이라는 국가 이미지, 즉 강인한 남성성을 바탕으로 한다. 그뿐 아니라 홀연 단신의 몸으로 타지에 뿌리를 내린 외할아버지에게서 전수된 것이기도 하다. 버키를 둘러싼 환경은 그가 스물 셋 건강한 남성이라는 외형에만 과도하게 몰두하게 만든다.

 

  <네메시스를 읽으며 몇 차례 눈물을 훔쳤다. 이미 노년으로 인생의 끝을 감지한 작가에게 죽음은 두려움 자체였을 것이다. 충분히 살았고 성실히 집필해왔음에도 그의 마지막을 다스릴 더 강렬한 무언가가 필요했을 것이다. 죽음 앞에서 느끼는 당혹감과 분통을 그는 폴리오와 전쟁 속에 죽고 망가지는 인물들을 통해 잠재운 게 아닌가 싶다(비명소리가 잦아든다). 끊임없이 삶을 글쓰기로 탐사해온 그에게도 삶의 끝은 여의치 않는 주제였던 것이리라. 주인공은 마지막까지 자기식으로 주어진 운명에 맞선다. 미국이 내세우는 신드롬, 즉 영웅 탄생이라는 허세와 허영이 버키의 삶에 이끼처럼 끼어있다.

 

  버키의 삶을 놓고 애석해지는 이유 중 가장 큰 것이 그가 과연 한순간이라도 그의 삶을 산 적이 있냐는 질문이 생기는 탓이다. 그렇다고 마지막 3부 옛 제자의 출현과 증언도 그를 심판하기에는 허술하고 부족하다. 어떤 역경에도 불구하고 삶의 정해진 관문을 통과해내는 제자의 생명력과 의지는 미국인의 불구의 정신과 맞닿아 있다. 버키는 자신의 온 존재를 걸고 믿었던 몸의 무너짐과 배신, 한계, 부조리함을 끝내 수용하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약혼녀가 될 뻔한 여자와 그의 가족을 불행으로 더럽히지 않았다는 섬뜩한 승리감에 도취해있다.

 

  자신의 시계가 그녀를 내친 그 시점에 여전히 멈춰 있음을 자각하지 못하고 그녀를 대신해 자신이 관계를 정리해줌을 대단한 일로 회고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자기만족적인 결정이고 일방적인 해석이다. 이 부분이 가장 마음이 쓰이는데 나 역시 그런 좁은 시야로 삶을 대할 때가 많다. 사랑은 상대가 원하는 방식으로 줄 때 비로소 완성되는 것을 스물 세 살의 그는 아마 몰랐을 것이다. 상대가 내주는 팔에 머리를 기대고, 때로는 상대에게 품을 내주고 함께 하는 것이 건강한 사랑임을 그는 알지 못했다.

 

  그를 타박할 수 없는 게 외조부모님의 강철 같은 헌신적인 사랑이 그가 본 전부였다. 태어남과 동시에 어머니를 잃은 그에게 생사는 떨쳐낼 수 없는 물음이며 죄책감의 근원이었을 것이다. 어머니를 죽이고 아버지를 도둑으로 만듦으로서 세상에 나온 존재라는 원죄의식은 보통 사람은 상상하기 힘든 차원의 문제였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신이 과연 존재하는가, 라는 회의적인 물음의 순간 그가 삶과 화해할 길이 막혀 버린다. 암암리에 그는 예비 장인이 건네는 복숭아와 미래 아내의 자장가를 일상적으로 누릴 자격이 없다고 의심하고 불안해하며 단정해왔음이 틀림없다.

 

  그런 사랑을 받을 충분한 사람이기에 주어지는 기회인데도, 그는 제 발로 걷어 차버리며 끝까지 자신의 철칙을 고수한다. 결과적으로 그는 겉과 달리 불안한(insecure) 성격의 사람으로 자기 앎이 부족했다. 상대를 해하고 오염시킬 거라는 두려움은 기실 그의 결벽증에서 비롯된다. 도덕적인 결벽증은 한 개인과 그와 연결된 가족에게 본의 아니게 파탄의 충격을 준다. 사회는 개인의 완벽한 책임과 도덕성을 요구하고 심판하지만 한 가정의 일이 되었을 때는 가져다댈 잣대가 달라지고 모호해진다.

 

  저자는 어떤 인간도 주어진 우연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완전하게 바로 설 수 없음을 휠체어를 탄 인물로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 누구도 초인으로 자신의 두 발로만 세상을 상대할 수 없음을, 작가의 고유한 방식으로 그 거대한 환상과 이상을 비틀어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보급판 현대물 오이디푸스인 것이다.

 

  버키 캔터는 여러 면에서 비극적인 인물이다. 그 비극성은 한 개인의 성격과 기질에서도 비롯되지만 그가 속한 미국이라는 사회 근간이나 유대인 가정의 교육 등에서 양상된 것이다. 필립 로스의 붓터치를 따르다보면 버키라는 인물은 한 단면에서만 보고 말하면 안 된다. 여러 창문을 통해 봐야 옳다. 같은 일을 겪어도 해석이 다르고 취하는 행동이 다르듯이 그 개연성과 우연의 개입 등을 총체적으로 따져보게 한다. 버키로 향하던 애석한 시선은 어느 순간 나를 포함한 인간 개인에게로 이동한다.        

s********d 2018.07.18. 신고 공감 1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