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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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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불빛만으로도 가슴이 설레고 눈이 부시던 시절이 있었던 것 같다. 그때는 AA건전지 두 개가 들어가는 소형 후레쉬 갖기가 소원이었고 성냥 쪼가리만 생기면 도랑가로 나가 마냥 좋아라 불을 놓던 때였다. 부득 어두운 곳으로 들어가 득의양양하게 촛불을 켜고 마냥 골똘해 하던 기억도 그 시절엔 남아 있다. 어쩌면 그 환한 불빛은 앞으로 내게 올 시간과 세상의 모습이라고 생각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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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불빛만으로도 가슴이 설레고 눈이 부시던 시절이 있었던 것 같다. 그때는 AA건전지 두 개가 들어가는 소형 후레쉬 갖기가 소원이었고 성냥 쪼가리만 생기면 도랑가로 나가 마냥 좋아라 불을 놓던 때였다. 부득 어두운 곳으로 들어가 득의양양하게 촛불을 켜고 마냥 골똘해 하던 기억도 그 시절엔 남아 있다. 어쩌면 그 환한 불빛은 앞으로 내게 올 시간과 세상의 모습이라고 생각되었던 것은 아닐까. 그 시절 아직 닿지 못한 세상에는 신밧드의 모험이 있었고 데미안과 뽀루뚜까 아저씨가 있었다(혹은 그러리라 믿어졌다.). 신밧드와 데미안과 뽀루뚜가 아저씨는 마냥 눈빛만 반짝이고 있는 내게 어디선가 불쑥 나타나 내가 눈 부셔 하는 별빛만큼의 세상을 보여주고, 또 그리로 나를 인도해주리라 생각되었다. 그들은 스승이었다. 스승은 내게 잠재되어 있는 엄청난 재능을 일깨워 '끝장'을 보여줄 것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나는 그런 목마른 기다림에 강한 회의를 품게 되었다. 이 고달프고 쓰라린 순간, 소설의 원리대로 반드시 스승이 있어 손가락으로 무엇인가를 가리켜 줘야 할 그 순간에, 결국 온몸으로 내던져진 것은 나 혼자였던 것이다.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더 이상 어둠은 불빛을 위한 들러리일 수 없고 자신의 본질대로 불빛을 가리는 암흑에 불과한 것이었다. 때론 명징한 몽둥이가 나를 걷어차기도 했다. 순간 별빛은 힘차게 빛났고 나는 각성되었다. 그러나 너무나 얻어맞은 정신 역시 어느 순간부터 얼얼해지기 시작했다. 빛은 잠시간의 환각이 아니었을까. 정신은 어느새 용수철처럼 제자리로 돌아와 정좌하고 있는 것이었다. 벗어나려고 해도 용수철의 탄성계수를 이길 힘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오래 전부터 갈구해 오던 부재의 역사가 지금 현재 나를 그 용수철에 묶어두는 것이었다. 나는 이 소설 『안으로의 여행』이 몹시 불편하다. 구도소설의 형식이면서도 『만다라』처럼 선연하지 않다. 구도자의 동기도 고통도 모두 모호하고 낯설다. 도에 관한 한, 정신은 늘 우위에 서고, 무위(無爲)와 공(空)이 운위된다. 또한 구도자의 표상은 속세의 고통을 뚫고 경배할 만한 가치에 도달하기 마련이다. 주인공 박연호도 고통으로 잠입하고 또한 일정한 변화를 얻는 데 성공하고 있다. 안으로의 여행을 통해서. 그런데 무엇이 나는 불편한 것일까. 박연호는 고아라는 원형적 실존 속에서 용케 견디던 퓨즈가 나가버렸다. 그리고 신과 영의 나라 인도에서 그 어떤 알 수 없는 가능성을 찾아 구도의 행각을 버린다. 그 어떤 알 수 없는 가능성이 '도'라는 이름으로 수렴될 수 있다면 말이다. 공학적으로 시비를 걸자면 박연호는 현실감이 없다. 모든 '고아'가 그럴 리 없고, 설혹 그렇다고 해도 반드시 '인도'일 필요도 없는 것이다. 좀더 무뚝뚝한 반문화주의의 말투로 표현하자면 그것은 '사치'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그런 반문화주의적 입장에서 박연호의 여정을 읽고 있는 것일까?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소설의 독법은 현실과 가상을 오가는 것이다. 그럴듯함의 상상력이 독자의 현실을 뛰어넘어 공감과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이런 예가 없었던 게 아니질 않은가. 그럼 무얼까. '인도'를 지우고 '고아'를 지워버리기로 한다. '고아'도 '인도'도 중요하지 않다. 강가와 타포반과 꽃들의 골짜기는 인도이기 이전에 박연호의 '안'인 것이다.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여정은 다시 밖과 연계되어 있다. 그래서 이번엔 안과 밖을 지워버리기로 한다. 안과 밖이 지워지면 박연호는 인도로, 혹은 자신의 안으로 여행을 떠난 호사가가 될 수 없게 된다. 바로 경계가 무화되는 지점에서 나는 불편해 하고 있었던 것 아닐까. 늘 무언가 잠언과 같은 뚜렷한 명령조, 혹은 명확한 경계를 기대해 왔던 게 나의 습관이 아니었던가. 이제 나는 궁금해진다. 도대체 박연호에게 그 여자는 무엇인가. 그 여자를 갈망했고 그 여자를 죽였으며 다시 그 여자를 떠나 보냈다. 그에게 여자란 무엇일까. 나에게 여자란 무엇일까. 나는 여자의 일부였고 또한 여자로부터 나왔다. 여자, 여성성은 또 하나의 나이다. 박연호는 또 하나의 나를 만났고 그 가능성을 타진했으며 그 병든 나를 확인했고 그 나를 갈망했고 공포와 두려움으로 그 나를 죽였다. 죽임으로 인해 두려움이 사라지고 나서야 비로소 그녀를 떠나 보낼 수 있었다. 불구의 자아인 그녀를. 자아는 또한 타인이다. 안과 밖이 동일한 것과 같은 이치다. 나의 안에 그토록 깊고 병든 여성성이 있다면 타인은 자신의 거울이 된다. 여자를 만나 연애를 하고 사람과 부딪치며 다투기도 하고 술을 마시며 속을 털어놓기도 한다. 그런 과정의 총체가 '삶'이라면 타인에게 뻗는 탐구의 손길은 곧 나에게 뻗는 탐침이기도 할 것이다. 나는 나의 벽을 쌓는다. 그것은 내가 드러나기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며 이 두려움은 곧 나를 알기를 두려워하는 것과 동치다. 그래서 나는 이 소설을 향해 조그마한 목소리로 속삭인다. 나는 지금 '살아가고' 있다고. 벽이 탐침마저 가두지는 못했다고. 하여 내 용수철은 무수히 흔들리고 있다고. 물리를 배우고서야 나는 알았다. 희망은 언제나 비현실적인 감각으로 길을 인도하는 것이라는 것을. 우리의 눈에 당도한 밤하늘의 별빛은 이미 수 만, 아니 수 백만 년 전의 현현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소설의 빛도 동궤에 올려 두고자 한다. 이렇게 꽈서 읽어도 될까. 나는 이 소설이 우리의 갈증을 '무죄'화시키고 있다고 믿는다. 갈증은 부도덕한 처벌의 대상이 아니다. 갈증이 그토록 깊어져 나를 죽이고 또 하나의 나를 얻을 수 있는 길인 것이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용수철에 매달려 힘껏 뛰어 올라 본다. 별빛에 손이 닿을 리 있겠는가마는.
m*******d 2000.07.19.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자신의 삶에 쉼표가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자신의 삶에 쉼표가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내용보기
사막을 볼 수 있을 거란 생각으로, 답답하고 허전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채울 수 있을 거란 생각으로 책장을 펼쳤다. 단순히 나는 '사막'만을 기대했었다. 글의 스토리나 등장인물은 상관없었다. 질려 버릴 때까지 그냥 사막만이,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으면서 모든 것이 존재하는 사막만이 끝없이 펼쳐지길 바랐었다. 하지만 나는 책을 읽으면서 사막보다 중요한, 내 자신에 대해 조용히 돌
"자신의 삶에 쉼표가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내용보기
사막을 볼 수 있을 거란 생각으로, 답답하고 허전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채울 수 있을 거란 생각으로 책장을 펼쳤다. 단순히 나는 '사막'만을 기대했었다. 글의 스토리나 등장인물은 상관없었다. 질려 버릴 때까지 그냥 사막만이,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으면서 모든 것이 존재하는 사막만이 끝없이 펼쳐지길 바랐었다. 하지만 나는 책을 읽으면서 사막보다 중요한, 내 자신에 대해 조용히 돌이켜보게 되었다. 삶에 찌든 주인공 박연호를 평화로 이끄는 한태인의 말처럼 "네 마음에 있는 깊은 세계의 바닥"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던 것이다. 자신을 방생(放生)하기 위해 인도를 찾은 박연호를 따라 나는 강고트리며, 요가니케탄이며, 타포반이며 인도 곳곳을 함께 여행했다. 정말 인도를 여행하는 것 처럼 글에 내 마음을 실어 읽었다. 아마도 삶에, 사람들에게 지친 나를 히말라야 어딘가에 놓아버리고 싶어서 였을지도 몰랐다. 책을 읽는 동안 나 자신을 무한히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바쁘게 앞만 향해 달려 왔을 뿐 한번이라도 진지하게 자신을 돌아볼 기회가 있었던가. 세상 많고많은 사람들 중에 오직 한 사람 뿐인 나. 인도와 모래와 사막도 중요하지만 언제나 세상의 중심인 '나'를 사랑해야겠다. 마음이 한없이 차분해지는 책이다. 조바심내서 살지 않게 지친 발걸음을 잡아주는 책이다. 자신의 삶에 쉼표가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자신이 아직 누구인지 찾지 못했다면, '깊은 세계의 바닥'을 엿볼 수 있는 안으로의 여행을 하길 바란다.

[인상깊은구절]
나를 그토록 한기에 떨게 만드는 것은 다름아닌 손, 손들이었다. 나의 눈앞에는 손들이, 얼핏 헤아려 열도 스물도 넘을 많은 손들이, 바로 나를 겨냥하여 금방이라도 바짓가랑이며 티셔츠자락을 휘어잡을 듯한 기세로 불쑥불쑥 솟구쳐 오른 것이었다. 그렇게 솟구친 손들에는 손가락 마디들이 떨어져 나갔거나 아니면, 아예 손가락이며 손바닥 따위도 없이 손목만이 울툭 솟아오른 문둥이손도 적지 않았다. 거기다가 미처 제대로 펴지지도 않은 갓난아이의 고사로손 또한 몇 군데 섞여 있었다. 내가 예의 문둥이손이며 고사리손 들의 정체를 알아차리기에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나의 눈길이 나를 향해 내밀어진 손들에서 바로 넓혀지자, 공항 바실 바닥을 메우다시피하며 질펀하게 누워 있는 일단의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j*****n 2001.04.28.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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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의 사람들은 양희경씨의 모노 드라마 '늙은 창녀의 노래'나, 영화화 되었던 '너에게 가마, 나에게 오라'를 통해 중견 작가 송기원씨에 대해 더욱 쉽게 접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는 우연히 '인도로 간 예수'를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아, '여자에 관한 명상'을 읽었고, 송기원씨의 새로운 장편소설이 출판되었다는 신문지상의 반가운 소식을 듣고는 이렇게 일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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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의 사람들은 양희경씨의 모노 드라마 '늙은 창녀의 노래'나, 영화화 되었던 '너에게 가마, 나에게 오라'를 통해 중견 작가 송기원씨에 대해 더욱 쉽게 접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는 우연히 '인도로 간 예수'를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아, '여자에 관한 명상'을 읽었고, 송기원씨의 새로운 장편소설이 출판되었다는 신문지상의 반가운 소식을 듣고는 이렇게 일독을 하게 되었다. 그는 이 소설에서, 한 중년 남자의 구도여행을 통해 삶의 의미를 조용하고 차분히 되집어 보고있다. 인도와 히말라야라는 신비한 배경 속에서, 힌두교의 성스런 구도의 과정을 보고, 또한 그 속에 일그러져 있는 우리의 편견과 환상을 느끼며, 자신의 레종데아트르를 찾아 가고 있었다. 우리는 문득 왜 살아가는지를 반문할 경우가 있다. 어떤 원인에 의해 그런 일이 생기는지는 그 누구도 모르겠지만, 이런 근원적 의문을 진지하게 해결해보려는 노력을 해보기도 전에, 바쁜 일상속에 다시금 묻히고 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 아닌가. 인생은 한낯 물의 흐름과 같다고 하기도 하지만,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떠내려가는 우리의 인생을 돌이켜 보면 가끔 안타까울 때가 있는 것이다. 자신의 깊은 마음속 한 곳에 내재되어 있는 아픔과 상처를 숨기며 혼자 치유해가는 외로운 삶속에서는 삶에 대한 의지나 즐거움이 점점 사그라 들고 있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 아픔을 드러내고 나누고 남의 상처까지도 보듬어 안는 넓은 마음과 이해를 가지고 나서야 비로서 삶은 살만한 고시 되고, 로베르토 베니니의 영화 제목과 같이 '인생은 아름다워'라고 소리내어 웃을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이 책을 통해 우리도 주인공의 구도의 괘적을 쫓아 내 마음의 저 밑바닥까지 내려가 나를 바라보고 그 속의 찌꺼기를 제거하고 긍정할 수있는 기회를 가져볼 수 있으면 한다. '삶은 살아갈만하다고......'
YES마니아 : 골드 c*****g 1999.08.13.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