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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책을 빌려왔다. 다른 사람의 책을 빌리는 일은 참으로 바람직한 행위이다. 우선, 보유하는 책을 공짜로 늘릴 수 있다. (돌려줘야만 한다는 강제가 붙지 않는다면) 그리고 나의 취향에만 오염된 편협한 사고를 벗어나 다른세상을 맛본다는게 부수적인 효과다.
어제 오늘 쇼펜하우어의 인생론을 읽고있다. 친구는 염세주의시절인 고등학교 때 줄창 읽었다고 한다. 과연 간간이 밑줄도 그어져 있다. 그 친구 답게 성실히 읽었을 듯 하군.
총 13장 중 앞의 3장까지 읽었는데 한번도 염세주의나 말세주의에 찬동하지 않았던 나의 이력 탓인지 간간이 웃음만 나올 뿐이다.
쇼펜하우어가 가끔 흘리는 자신의 신상에 따르면 왜 그가 회의주의에 빠져 염세론을 주창하였는지 이해가 간다.
책 뒷면의 소개글 그대로 '한편으론 인생의 낙오자가 내뱉는 무의미한 넋두리 같기도 하다.'
"나 살기 힘들어, 난 이렇게 똑똑한데 왜 세상은 나의 천재성을 몰라주는거야? 세상 정말 엿같다. 우리 모두 그만 살자. 에잉 빌어먹을."
그러면서 왜 세상은 살맛 안 나는지 왜 그만 사는게 도덕적으로 정당한지를 중얼중얼 비 맞은 중처럼 늘어놓는다.
간간이 보이는 독설은 얼핏 진보적인 개혁주의 사상가의 색채를 띄나 그 결론은 어디까지나 회의적, 범물적(?) 해탈의 경지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99.99명의 사람들이 명언인지 헛소리인지 못 알아들을만큼 난해하게 써있지도 않다. 공격적이고 적나라하기도 하나 명징함에까지는 이르지 못한 산만한 문체이다. 이런 글을 써서 원고료를 받아 생계에 보탬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 (실제로 그의 생이 어떠했는지는 뒤편의 자전 수기에 나온다하니 그 때에나 다시 알게 될테지만)
설득적이지도 못하고 다만 꾸준히 재발하는 신경통처럼 쿡쿡 쑤시지 못해 안달한다. 그게 간지럽게 느껴질 뿐인 것은 좀 더 나아간 독설의 악다구니에서 나뒹굴은 성과인가? 오히려 쇼펜하우어는 순진한 수준이라는 생각마저 들 정도이다. 단순히 악담의 고저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사물의 본질을, 현상의 제 모습을 벗겨내 보이자하나 이미 기력이 고갈되어 더 이상의 발전을 기대못하여 젊음을 흘끗거리며 시기하는 알몸뚱이의 노년-힘에 부쳐하며 수박 겉 껍데기에서 악악대는-이 고스란히 드러나기 때문인건가.
채 읽지도 않은 글을 가지고 섣불리 평가할 일은 아니지만 그냥 맹숭맹숭 밍숭밍숭 한 김에 고추가루를 칠 필요를 느끼고 입가심을 하고파서 자판을 두드린다.
살롱에서 한담의 가쉽거리-쇼펜하우어란 기인(게다가 또 하나 그가 이슈가 될 수 있었던 원인을 굳이 찾는다면 당시대엔 거의 괴이한 취미일수 있을 이교사상에 당대 기준으로는 상당한 진전을 보았다는 것일테니)이 있다네-를 제공해 준 정도면 나름대로 성과가 있었노라 만족해했을 듯 싶다.
단순히 흔들리는 여린 청소년기에 읽지 못한 까닭일수도 있겠다. 향수와 당시에만 공감할 수 있는 충동의 분위기에 휩쓸리지 못하는 게 문제일것 같기도 하다.
그게 다 시대의 덕인지도. 나야 어찌됐든 쇼펜하우어보다 많은 시간의 혜택을 업고 있다. 그러니까 작가는 영원히 패배하는 수비자이고 독자는 언제나 성공적인 공격수인지. 막간 코믹극을 감상하는 기분으로 페이지를 마저 들춰야지. 재미있군. 고전 사상가라는 것도.
그의 논리적이려고 하나 자기고백(?)적으로 털어놓고 마는 글을 잠시 엿보자.
사물을 깊이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아래와 같은 달관을 쉽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인간의 탐욕이 죄악이 되는 것은, 그것이 각 개인을 상호 훼방을 하여 해악을 끼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이 탐욕은 본래부터 그리고 본질적으로 죄악이며, 보다 빨리 배제되어야 할 것이라고 보아야 하며, 따라서 살려는 의지 자체를 송두리째 근본적으로 증오해야 할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정당하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의 인생론」3.살려는 의지에 대하여-
[대명제] 삶은 고난의 연속, 고달픔의 집대성
[] 죽음은 해탈, 모든 죄의 속죄, 절대 평온에 도달할 수 없는 인간 영혼의 구원
[결론] 가장 바람직한 일은 우리 자신을 죽음에 이르도록 그대로 두는것. 죽음에 거스르는 행위는 절대 금물.
[명제1] 삶을 부여해 주는 것-출산-은 후손에 대한 죄악
[명제2] 살려는 의지는 그 자체가 어리석음에서 말미암은 태만한 죄악
[명제3] 살려는 의지의 발현인 '탐욕'역시 죄악
(해석-혹은 해부-은 성가셔서 그대로 방치한다.)
시대를 거슬러 자기모순의 틈바구니에서 괴로워하는 쇼펜하우어의 괴팍한 펜과의 씨름을 관전하다보니 문명(文名)이란 얼마나 허무한가를 새삼 깨닫는다. 소칼 지적사기의 사기지적이 살아있는 자들의 문명(文名)의 아성을 송두리째 뒤흔든것처럼 역시 직접 격어보는 것 이상 옥(玉)인지 석(石)인지 분류하는 마땅한 방법은 없다는게 절절히 와닿는다. 재미있는 기인일 수는 있겠다. (노인에 대한 동정심과 아울러)
광대노릇을 스스로 기꺼워한다면-비아냥거리고 싶은 의도는 추호도 없다. 대체로-세상에 펼쳐 보여도 무방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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