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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하는자 - 토마스 베른하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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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역사서와 평전, 철학서만 줄곧 읽어서 뇌에 과부하가 걸려왔었다. 특히나 플라톤의 <테아이테토스>를 1 독한 뒤로 멘탈의 붕괴가 가속되면서, 독서에 흥미가 떨어지기 시작했었다. 그러는 찰나, 새로운 기운도 불어넣을 겸, 문학으로의 도피를 생각했고, 추천받은 도서가 <몰락하는 자>와 <인간실격> 이였다. 오늘의 리뷰는 <몰락하는 자>에 대해서 써내려가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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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역사서와 평전, 철학서만 줄곧 읽어서 뇌에 과부하가 걸려왔었다. 특히나 플라톤의 <테아이테토스>를 1 독한 뒤로 멘탈의 붕괴가 가속되면서, 독서에 흥미가 떨어지기 시작했었다. 그러는 찰나, 새로운 기운도 불어넣을 겸, 문학으로의 도피를 생각했고, 추천받은 도서가 <몰락하는 자>와 <인간실격> 이였다. 오늘의 리뷰는 <몰락하는 자>에 대해서 써내려가볼까 한다.

 

 일단 이 책은 2가지 면에서 독특하다. 첫 번째로 배경적인 상황은 디스토피아 사상(부정적인 세계관)에 입각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으며, 서술상 가장 큰 특징은 의식의 흐름의 기법(서사적 흐름이 아닌 한 인물의 의식의 흐름으로 전개되는 소설)을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내겐 이 책은 쉽게 읽혔었지만 쉽게 읽히지 않는 모순적인 책이었다.

 

 의식의 흐름의 기법의 가장 큰 장점은 의식의 흐름이 진행되는 저자의 생각에 자신을 투영시켜서 읽기 시작하면 굉장히 몰입해서 읽을 수 있다. 마치 내가 경험하는 것처럼 말이다. 더불어 배경과 여러 음울한 분위기 역시도 책을 몰입시키는데, 공헌했었다. 쉽게 읽히지 않는 법 역시도 이 소설 내에 의식의 흐름의 기법에 있었다. 일단 나의 경험으로는, 주말에 즐겁게 책을 일독했었는데, 개인 사정상, 토, 일요일을 친구와 약속으로 인해서, 책을 보지 못했었다. 그래서 월요일 책을 다시 보는데, 책에 몰두하기까지 굉장히 힘들었었고, 특히 이 책의 서술상 특징이, 과거의 의식과 현재의 의식이 왔다 갔다 하는 전개 방식으로 인해서, 한 번 집중력이 끊어지면, 다시 몰두하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었다는 점도 있었다.

 

 스토리는 간단하다. 시점은 1인칭 주인공 시점에 '나'와 인간의 절대적인 모습을 상징하고 있는 '글렌 굴드' , 그리고 이 작품의 제목이자 가장 메인인 인물 몰락하는 자를 상징하는 '베르트하이머' 이 셋의 이야기다. 다른 외국 소설들과 다르게 등장인물은 많지 않으며, 대부분 이 3명의 인물들의 역학 관계 속에서 스토리는 진행된다. 나와, 글렌, 그리고 베르트하이머는 모두 당시의 부유층 출신이며 재산이 많은 상류층 계급으로 설정되어 나온다. 세 사람 모두 처음에는 음악에 미쳐서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닌, 집안으로부터 도피적인 선택과 반항적인 선택으로 음악인의 길에 들어선다는 공통점이 있다. 세 사람은 잘츠부르크에서 '운명'적인 만남을 가졌으며, 당시 최고의 음악 수업을 하는 모차르테움에서 거장 호로비츠의 수업을 같이 듣게 된다.

 

 셋 모두, 공통적으로 음악에 있어서는, 굉장한 재능을 보여줬었으나, 글렌 굴드의 능력이 워낙 뛰어났으며, 천재적인 모습에, 나와 베르트하이머는 경외감과 상실감이란 애증의 관계를 가지기 시작한다. 글렌 굴드와의 만남으로 인한 자괴감으로, 두 주인공은 최고가 될 수 없다는 완벽할 수 없다는 상실감에, 결국 음악을 포기하고 나는 철학의 길로 도피를 결심했으며, 베르트하이머 역시 정신과학으로 도피한다.

 

 그 뒤, 베르트하이머는 점점 몰락의 모습을 보이다가, 결국 마지막까지 의존하던 여동생에게 버림받고, 글렌 굴드의 죽음을 접하고, 자결을 하게 된다. 나는 그런 베르트하이머의 소식을 듣고, 그의 죽음을 추적하기 시작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서사적인 소설의 구성은 이렇게 정리될 수 있지만, 책의 서술은 내가 베르트하이머의 죽음을 조사하기 시작하는 현재 시점으로부터 시작하여, 회상하는 방식으로 과거의 부분들을 나타내고 있다.  

 

 글렌 굴드는 이 작품에서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실존 인물이었던 글렌 굴드를 작가는 적절한 허구를 뒤섞어서 완벽한 인간상으로 묘사한다. 그는 극한의 노력과 완벽주의로 인해, 높은 예술적 경지를 이룩한다. 전지적인 인간으로 그리는 그였으나, 작가는 나를 통해서 글렌을 '피 나는 노력을 통해 이룩된' 재능이라며(물론 천재성 역시 타고났음에도 불구하고),타고난 인간의 절대적 완벽성을 부정해버린다. 극 중에서 그는 강인한 정신력을 지닌 인간으로 묘사되고 있으며, 죽을 때까지 연주를 하다 뇌졸중으로 죽는데, 포기하지 않는, 극단적인 완벽을 끝까지 고수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에 대비되는 베르트하이머 역시 천재적이고, 음악에 재능이 있지만, 글렌을 만난 뒤로 서서히 '몰락하는 자'가 되는 인물로 묘사한다. 처음에는 별로 주목받지 못하다가(글렌의 포스가 상당함) 점점 책장을 넘길수록 존재감을 발휘하는데, 특히 극한의 의존적인 성격과 줏대 없는 모습을 보여주며, 갈팡질팡 고뇌하며, 합리화를 찾는 어쩌면, 강한 멘탈을 가지지 못하는 보통 사람들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도 싶었다. 그 역시도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으며 (물론 글렌보단 떨어진다), 충분히 부유한데도 전혀 만족을 못하고 모든 것에 불평을 한다. 베르트하이머는 글렌의 연주에 충격을 먹고 진로를 바꾸는 '나'를 보고서야 자기도 따라서 정신과학으로 도피를 감행한다. 그 뒤 여동생에 광적으로 의존하게 되면서도, 끝까지 글렌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결국 자신의 내면을 지탱하는 글렌과 여동생의 상실 후에, 의존적인 그는 그의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주체적인 결심을 하는데, 극단적인 자살의 길을 선택하고 걷는다.

 

 작품의 나 역시도, 베르트하이머와 비슷한 부류인데, 베르트하이머가 극한의 공황과 방황, 의존으로 상실감을 채워나간다면, 나는 체념적인 긍정을 통한 합리화로 상실감을 채워나간다. 자신은 베르트하이머와는 다르다고 이야기하며, 글렌의 천재성을 빨리 알아차리고 단념했다는 자위를 하며, 베르트하이머를 비판하지만, 사실은 그 역시도 글렌에 대한 글을 쓰고 있었으며, 그 글 역시도 완성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나도 체념적 긍정을 통해서 글렌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베르트하이머는 자기 스스로 글을 많이 남겼지만 죽기 전 모두 불태워버렸고, 나 역시 글렌에 대한 글을 예전부터 준비했지만 완성하지 못 했다. 대상만 달랐을 뿐 도피한 진로에서 그 둘은 뭐 하나 이룬 것 없다는 공통점을 보여주고 있었다.

 

 재미있었던 부분은 이 책의 구성은 대립과 대립의 축으로 이뤄지는 것 같았다. 가장 큰 축은 글렌 굴드와 베르트하이머이며, 여기서 나아가 나와 베르트하이머의 대립적인 모습, 그리고 더 나아가서 베르트하이머와 내연 관계였던 여인숙의 주인(하류층 계급)과 그녀가 이해할 수 없었던 상류층 계급(베르트하이머를 포함한 나와 글렌 굴드까지)의 대립을 통한 계층적인 대립도 선보인다.

 

 특히 암울한 배경 묘사를 통해, 작가는 자신이 느끼고 있던 조국(오스트리아)에 대한 반감을 유감없이 표현하고 있다. 과감하고 파괴적인 언어로, 우회적인 방법이 아닌, 직설적인 돌직구를, 작품 안에서 나의 목소리를 통해 내던진다. 잘츠부르크, 오스트리아의 다른 도시들, 스위스 등 더불어 모차르테움의 교육관에 대해서도 여러 배경 묘사를 통해 사회 전반적인 모든 것들을 비판하고 있다. 뒷부분에 베르트하이머와 관계를 나눴던 여인숙의 주인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작은 이야기를 통해서도 작가는 퇴폐한 오스트리아의 법제 제도를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다. 소설 자체가 인물의 행동도 그렇지만 배경의 비판을 통해서 상징하는 것들이 유난히 많았다.

 

 음울한 분위기, 인간의 고질적인 모습인 질투와 경외를 적절하게 섞어서 다룬 이 소설을 보며, 나 역시도 지난날의 뛰어났던 친구나 다른 사람에게 느꼈던 박탈감과 상실감, 그리고 경외심을 떠올리게 만들었었다. 작가의 극단적인 표현을 통해, 얼마나 조국을 비난하고 있는지도 느낌이 왔으며, 음울한 배경 묘사 속에서 던진 돌직구는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과도 비슷하다는 생각도 많이 했었다. 어쨌든, 책의 내용은 간단하지만, 시점과 서술 방식, 그리고 대립되는 상징으로 전혀 간단하지 않게 만든 작가의 표현력에도 대단한 경외심을 느낀 책이었다.  

 

k******m 2013.11.27.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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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을 이기지 못한 자의 고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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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면서 나를 알아주는 이를 만나는 건 행운이다. 그 행운의 존재를 우리는 친구라 부르기도 한다. 그 친구가 같은 분야에 있다면 인생의 경쟁자가 될 것이다. 한데 그 분야의 최고자라면 어떨까. 누군가는 계속 경쟁을 하며 지내겠지만 누군가는 다른 궤도로 수정할 것이다. 예술이라는 장르는 특히 그렇다. 어느 분야든 마찬가지지만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알아본다고 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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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아가면서 나를 알아주는 이를 만나는 건 행운이다. 그 행운의 존재를 우리는 친구라 부르기도 한다. 그 친구가 같은 분야에 있다면 인생의 경쟁자가 될 것이다. 한데 그 분야의 최고자라면 어떨까. 누군가는 계속 경쟁을 하며 지내겠지만 누군가는 다른 궤도로 수정할 것이다. 예술이라는 장르는 특히 그렇다. 어느 분야든 마찬가지지만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알아본다고 하지 않는가. 그렇기 때문에 『몰락하는 자』속 화자와 친구가 천재 피아노 연주자 글렌 굴드를 단 번에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이다.

 

 소설은 천재적인 예술가의 등장으로 예술을 포기한 이들에 대한 이야기다. 그러니까 예술가의 길을 선택했지만 글렌 굴드와 만나면서 한 사람의 생이 어떻게 비참하게 몰락하는지 그 과정을 설명한다. 화자의 독백 형식으로 반복적인 문장들로 강조하며 이어진다.

 

 쉰한 살의 화자는 친구 베르트하이머의 장례식에 참여 한 후 친구의 마지막 여정이었던 별장 근처 여관에 투숙한다. 베르트하이머의 자살이 28년 전 함께 피아노를 공부했던 글렌 굴드와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며 그 시절을 회상한다. 불친절한 화자는 세 사람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시간의 순서없이 들려준다. 부유했지만 예술에는 무지했던 가정에서 자란 화자와 베르트하이머는 피아노의 대가가 되기를 꿈꿨다. 글렌 굴드를 알기 전까지 말이다. 글렌 굴드와 함께 피아노를 배우고 친구가 되었지만 예술가가 되기를 포기한다.

 

 베르트하이머는 아버지의 기업을 이어받을 수도 있었고 자신이 원하는 다른 무언가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피아노만이 전부였고 글렌 굴드를 의식하는 삶이 전부였던 것이다. 불행을 자초한 것이다. 때문에 자신에게 최선을 다하는 여동생을 괴롭히고 친구인 화자에겐 권태로운 삶을 자살로 마감할 것이라 비아냥 거렸다.

 

 첫 눈에 서로를 알아 본 세 명의 친구 중 둘은 죽었고 화자는 살아남았다. 예술과 피아노라는 공통 분모가 있었지만 그들은 서로 달랐다. 한 사람은 평생을 예술가로 살았지만 나머지 둘은 그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화자는 베르트하이머처럼 자살하지 않았기에 몰락하지 않은 자라 할 수 있지만 그 역시 글렌 굴드의 주변을 맴돌며 살았다. 

 

 베르트하이머는 글렌 굴드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피아노를 그만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의 생은 글렌 굴드로 인해 수정된 것이다. 화자 역시 피아노를 포기하지만 베르트하이머의 절망과는 달랐다. 한 사람의 등장으로 인해 삶의 기반이 흔들릴 수있다는 건 가능할 것일까? 만약 글렌 굴드가 심장마비로 죽지 않았다면 베이르트하이머는 자살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을 테니까. 그것이 불행이든, 패배자든, 몰락하는 자이든 말이다.

 

 ‘사람은 그 누가 됐든 유일무이한 존재라고 난 끊임없이 혼잣말로 중얼거렸고 그렇게 함으로써 살아남았다. 베르트하이머한테는 그런 정식적 지주가 없었다. 즉 자신을 유일무이한 존재로 바라볼 생각조차 못 했던 건 그런 조건을 조금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야, 모든 사람은 유일무이하며 그 자체만 놓고 본다면 인간은 유례가 없는 최고의 예술작품이야, 라고 난 생각했다. 베르트하이머에게는 그런 생각을 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항상 글렌 굴드이기를 원했거나 구스타프 말러나 모차르트 혹은 다른 친구이기를 원했던 거야, 난 생각했다. 그게 베르트하이머를 계속해서 불행하게 만들었어, 꼭 천재여야 유일무이한 존재가 되는 것도, 자기가 유일무이하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 난 생각했다.’ 92쪽

 

 소설은 글렌 굴드의 등장만으로도 흥미로우나 특별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지루하지 않다. 냉소적이고 독단적인 독백의 반복만으로도 충분하게 독자를 이끈다. 예술을 향한 인간의 욕망과 집착이 얼마나 집요한지 잘 보여준다. 더불어 인간에게 절망이라는 게 얼마나 견디기 힘들고 빠져 나오기 어려운 늪이라는 사실을 확인시킨다.

r*********s 2012.12.16.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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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하는 자 -토마스 베른하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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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하는 자 -토마스 베른하르트       지금까지 살면서 몰락 및 절망을 경험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자기가 정한 목표에 도달하지 못해서 서서히 망가져 가는 모습.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서 본인 스스로 망가져 가는 모습. 자신의 롤 모델이 현실에서 달라서, 그 인물에 대해서 실망하고 분노를 하게 되면서 본인을 몰락시키는 모습. 주위를 둘러보면 몰락하는 정도의 차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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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하는 자 -토마스 베른하르트

 

 

 

지금까지 살면서 몰락 및 절망을 경험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자기가 정한 목표에 도달하지 못해서 서서히 망가져 가는 모습.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서 본인 스스로 망가져 가는 모습. 자신의 롤 모델이 현실에서 달라서, 그 인물에 대해서 실망하고 분노를 하게 되면서 본인을 몰락시키는 모습. 주위를 둘러보면 몰락하는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누구나 몰락 및 절망하는 경험을 직, 간접적으로 체험한다. 

 

이 소설은 토마스 베른하르트가 지은 <몰락하는 자>이다. 이 소설은 베르트하이머 라는 인물이 글렌 굴드(이상적인 예술)앞에서 끊임없이 좌절하고 ‘몰락’하는 인간상을 날카롭게 그려낸 작품이다.

 

이 소설의 줄거리를 간단하다. 쉰한 살의 ‘나’는 28년 전에 함께 피아노를 공부했던 친구 베르트 하이머가 죽었다는 전보를 받게 된다. 친구의 여동생이 살고 있는 스위스 쿠에의 장례식에 참석한 ‘나’는 베르트하이머가 불의의 사고로 죽은 것이 아니라 자살했다는 사실, 그것도 여동생의 집 앞에 있는 나무에 목을 매달아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친구의 자살에 대한 단서를 찾기 위해 ‘나’는 베르트하이머가 죽기 전에 혼자 살았던 오버외스터라이히 주에 있는 마을을 찾아간다. 본인의 고향에서도 그리 멀리 않은 방크함에서 ‘나’는 베르트하이머가 즐겨찾곤 했던 여관에 투숙하고, 그곳 여주인과 대화를 나눈 뒤에 베르트하이머가 살았던 사냥 별장을 찾아가 집안 일을 돕는 벌목꾼과 얘기를 나눈다. 그 사이 사이에 ‘나’는 왜 베르트하이머가 자살했는지에 대하는 생각과 회상을 하면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간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곳에 도달할 수 없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하지? (이 책에서 굴렌을 이상적예술로 상징을 했음) 현실의 삶에서 아무리 노력해도 그곳에 도달할 수 없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하지? 이 같은 사실을 애써 외면하고, 더욱더 노력하는 것이 나은가? 이 사실을 받아들여서 다른 방식의 길을 찾는 것이 나은가? 어느 것이 더 좋은 선택이지?  

 

분명 베르트하이머도 굴렌 만큼은 명성이 자자하지 아니지만, 그래도 괜찮은 연주자로써, 성공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최고가 아니면 의미가 없다는 ‘나’의 말에서 보면 최고만이 되어야 괜찮은 삶이 라는 것을 였 볼 수 있다. 

 

p84

하지만 나는 아니다. 왜냐하면 글렌을 만나기 전부터 피아노를 그만두겠다는 생각을, 내 노력이 참 허무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딜 가도 제일 잘하는 사람은 나였고 내가 최고하고 지지해주던 사람들이 있었고, 그런 상황에 익숙했던 나였지만, 그만 둬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최상급에 속한다는 것만으로 만족 할 수 없었고, 최고가 될 수 없다면 아무것도 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피아노를 그만두고 스타인웨이를 알트뮌스터에 사는 교사의 딸에게 줘버렸지, 나 생각했다.

 

   

 

최고만을 인정하는 예술가의 모습과 오늘날 한 개그맨이 말하는 “1등만 생각하는 더러운 세상”것과 유사하지 않을까? 

어느 분야에서든지 최고가 되는 자는 한정되어 있다. 그곳에 들어가려고 애써도 못 들어 가는 자가 대다수 일 것이다. 대다수 사람들은 베르트하이머가 체험하는 몰락의 크기는 다양할 것이다. 즉, 대상물들과의 비교를 통해서 대부분은 절망감을 느낄 것이고 극 소수만이 그나마 덜 절망감을 느낄 것이다. 우리가 베르트하이머처럼 극단적인 절망하는 자가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소설 속 ‘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p91 절망하지 않으려면 스스로를 유일무이한 존재로 여기고 또 그래야만 하는데 베르트하이머는 그럴 줄 몰랐던 거야 

 

 



a*******2 2012.09.02. 신고 공감 0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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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몰락하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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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몰락하는 자 (1983)   천재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와의 만남으로 서서히 파멸해가는 한 남자의 이야기 이상적 예술 앞에 몰락하는 자를 위한 진혼곡   바흐만, 한트케와 함께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죽음과 절망의 작가 토마스 베른하르트   몰락하는 자, 표지 中    이상향에 대한 인간의 갈망, 욕구, 좌절에 따른 시련. 인간이 기본적으로 느끼는 한계점에서 다가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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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하는 자 (1983)

 

천재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와의 만남으로

서서히 파멸해가는 한 남자의 이야기

이상적 예술 앞에 몰락하는 자를 위한 진혼곡

 

바흐만, 한트케와 함께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죽음과 절망의 작가 토마스 베른하르트

 

몰락하는 자, 표지 中

 

 이상향에 대한 인간의 갈망, 욕구, 좌절에 따른 시련. 인간이 기본적으로 느끼는 한계점에서 다가오는 감정을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왜곡하며 인간의 내면 속 나약함을 직시하게 만드는 작품,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1983년 작품 '몰락하는 자'이다.

 

 작품은, 천재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로 인하여 자신의 존재를 거부당하고 점차 파멸해가는 베르트하이머의 행로를 서술하며 진행된다. 이 작품의 두드러진 특징이기도 한 이 부분은 독자로 하여금 서술자인 '나'의 감정에 동화되게 만들고 글렌 굴드와 베르트하이머를 끊임 없이 비교하게 만든다. 또한 이 부분에서도 '몰락하는 자'의 서술은 결코 가볍지 않다. 사실, 고전 작품은 누구에게나 매끄럽게 읽히지는 못한다고 생각하는데 특히 이 작품은 그러하다. 작가인 토마스 베른하르트만의 특징이 독자들에게 '몰락하는 자'속으로 빠져들게 만드는 것을 강력하게 저지한다. 화자인 '나'를 이용하여 독자들의 개인적인 생각을 철저하게 차단하고 베르트하이머에 대한 '나'의 생각이 마치 독자 '자신'의 생각으로 만들기 위한 '나'의 '생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물론, '몰락하는 자'는 서술 방식에서만 그 특이함을 지닌 것은 아니다. 작품에서 서술하는 장소와 시간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사실상 가장 주된 내용의 배경은 '나'가 생각하는 현재가 아닌 과거이다. 그러나 '나'는 현재의 짧은 순간에 과거를 상기시켰으며, 한 권의 책 분량이 나올 정도로 글렌 굴드와 베르트하이머를 생각을 해낸 것이다. 그 속에 글렌 굴드의 천재성을 발견하고, 베르트하이머는 점차 몰락해갔다. 많은 독자들도 처음에는 이 부분에서 혼란을 겪고 작가의 각종 방해로 인하여(혹은 자신의 글읽기 능력에 따라) 짧은 분량의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릴 것임에 틀림이 없다. 상당히 사색하게 만드는 작품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인간의 욕망, 인간의 내면 속에 기본적으로 잠재되어 있는 이상향에 대한 갈망과 실현되지 않는 현실에 대한 좌절. 베르트하이머는 천재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에 인하여 파멸되어갔다. 화자인 '나' 또한 베르트하이머와 마찬가지로 글렌 굴드에 의하여 좌절감을 맛보았지만 결국에 베르트하이머는 파멸하였으며 자살로 이상적인 죽음에 조금이라도 더 근접하길 소망했다. 그러나, 누가 마지막의 승자일까. 그것은 조금 고민해 볼 주제가 아닌가 생각한다. 천재 피아니스트 였지만 가장 먼저 자연사한 글렌 굴드, 가장 유복한 가정에서 행복할 수 있었던 조건이 갖추어 졌지만 결코 행복하지 못했던 베르트하이머, 그리고 결국에는 마지막으로 살아 남은 '나'. 그들의 이상향에 도달한 글렌 굴드가 승자일까, 결국에는 혼자 살아남아 그들의 이야기를 자신의 뜻대로 남길 수 있는 '나'가 승자일까. 또는, 스스로 가장 이상적인 죽음을 택한 베르트하이머가 승자일까. 가장 괴기하고도 모순적인 그들의 삶이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여관의 여주인과 베르트하이머의 사냥 별장의 관리인인 프란츠를 통하여 개인적인 결론을 도출했다. 그들은 '몰락하는 자', 자신을 항상 불행하다고 말하는 베르트하이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항상 불투명한 미래에 공포심을 지니고 있었는데, 그들의 공포심은 자신의 생명을 연명시켜 줄 '부'라는 존재의 부제에서 비롯되었다. 그들의 공포심은 바로 '재물'이 없기에 파생된 하나의 두려움이었다. 그러나 베르트하이머는 그의 생명을 충분히 보장해 줄 '부'를 지니고 있었으며 그의 공포심은 '재물'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이상향'이 없기에 파생된 또 다른 두려움이었다. 여관의 여주인과 별장의 관리인인 프란츠가 베르트하이머와 같은 환경에서 태어났다면 행복했을까. 베르트하이머가 여관의 여주인과 별장의 관리인인 프란츠와 같은 환경 속에서 태어났다면 이상향에 대한 공포심을 느끼며 자신을 스스로 파멸시키는 '몰락하는 자'가 되었을까. 가치의 차이는 때론 그것을 가지지 못한 타인에게 비난을 받게 만들고, 자신을 점차 불행하게 만들며, 각각의 다양한 몰락으로 점차 인간의 마음을 잠식시킨다.

 

 작품 '몰락하는 자'를 권유하기에는 이 작품의 내용은 슬프다. 특히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이 작품이 건내는 하나의 주제가 씁쓸하지 않을 수 없다. 항상 자신을 타인과 비교하고 자신의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지니고 있으며 자격지심, 우월의식에 도취한 현대인들에게 이 작품의 주제는 결코 간과할 수 없는 현실이다.

 

54번째 만남

2012. 06. 03 ~ 2012. 06. 26

j*****7 2012.06.26.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