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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지성으로 꼽히는 노엄 촘스키. 그는 살짝 앞선 시대를 살고, 또한 동시대를 살았던 버트란드 러셀에 대해 호의적인 발언을 해온 바 있다. 촘스키는 다른 지식인들에 대해 긍정적인 의견을 잘 내놓지 않기로 유명한데, 러셀에 대해서는 아주 예외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책에 실린 강연을 통해 러셀의 철학과 자신의 철학을 하나의 덩어리로 연결했다. 언어철학을 공부하지 않은 사람에게 '세계를 해석하는 것에 대하여'라는 이름이 붙은 부분은 어렵고 난해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정치철학을 다루는 '세계를 변혁하는 것에 대하여'는 무난하게 읽을 수 있을 듯하다. 또 '지적'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멋진 그림과 함께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특히 이 책은 촘스키와 러셀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선물이다. 그래서 내게 이 책은 존재만으로도 세간에서 인정하는 한정판 명품의 가치에 견줄 만한 선물이다.
지금도 잊히지 않는 중학교 졸업 후의 겨울 방학, 도서관 출입에 혼을 빼놓기 시작하던 그 시절 생애 최초의 촘스키 저서를 읽었다. <촘스키,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 였다. 표지에 반해 집어 들었던 책에 기대 이상의 충격을 받았고, 이렇게 세상을 신랄하면서 고급스럽게 지적할 수 있는 사람이 동시대에 존재한다는 것이 놀라웠다. 분명 지금보다 충만하던 당시의 반항욕구도 촘스키를 읽으며 어느 정도 채울 수 있었다. 누군가 더 큰 것에 대해 잘못이라고 꼬집는 것을 보면서, 또 그 사람이 엄청난 영향력을 지닌 인물이라는 점에서 일종의 대리만족에 가까운 카타르시스를 느낀 것 같다. 곁다리이긴 하지만 지금도 사회 비판에 열의를 올리는 사람들, 특히 청소년들을 보면서 조금 걱정스러운 생각이 드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소신 있는 사람들이 변화의 목소리를 높이는 데에 힘을 보태는 것은 분명히 좋은 일이며 필요한 일이지만,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이어서가 아니라 내가 느꼈던 일종의 반항심 같은 걸 채우기 위해, 혹은 '멋져 보이니까' 같은 노선에 서려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지금 생각해봐도 청소년기의 내가 촘스키를 좋아했던 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이돌을 좋아하듯 빠져든 경향이 있었다. 무엇이 옳은지 어렴풋한 의견을 가질 수는 있었지만 그것에 대한 확신은 부족했다. 그래서 지금은 내가 촘스키를 예전만큼 좋아하는지는 모르겠다. 우리시대의 지성이기는 하지만 그가 살아있는 시대에 살고 있는 나로서는 그가 정말 옳은가에 대한 답을 내리기가 어렵다. 그의 언어학이나 정치철학 모든 것에서 말이다. 물론 그가 옳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 그의 말과 행적은 나를 감동시키지만 그가 '확실히 옳은가'에 대한 자신이 없다. 다만 내가 아는 현존하는 모든 지식인들 가운데 그는 단연 최고의 지성인 듯하다고 생각할 뿐이다. 그런 한편, 내가 태어나기 거의 20년 전에 작고한 러셀에 대해서는 맹목적인 찬양을 보낸다.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이기에 그의 일생을 놓고 생각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비교적 판단이 쉽다. 역시 표면적인 것이며 모든 것을 알아도 '옳다'의 문제는 답하기 어렵지만 말이다. 또 그의 정치철학보다 순수학문과 에세이를 통해 받은 감동이 우선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의 자유로운 결혼관 따위는 여전히 내가 그를 좋아해도 되는가 하는 문제에서 내적갈등을 일으키기는 하지만.
옳음과 지식, 확실성에 관한 문제는 러셀의 인식론을 공부하면서 내 인생에 큰 문제로 자리 잡게 된 것인 만큼, 누가 옳고 그른가에 대한 이야기를 러셀에 관한 책을 읽고 말하기가 참 난감하다. 하지만 러셀은 내가 제일 옳은 생각을 한 사람이라고 여기는 인물이고, 그를 옳다고 여기는 촘스키에 대해서도 어쩐지 신뢰가 간다. 당연히 타당한 근거는 아니지만, 그저 좋아서 읽은 한 권의 책 때문에 너무 무겁고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나의 두 우상을 한 권으로 만나게 된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하니까 말이다.
인간이 어떤 절차를 통해 세계를 특정한 방식으로 해석하는지 밝히는 것이야말로 세상을 이해하는 일의 핵심이다. 그것은 생물학적으로 주어진 복잡하고 특정한 체계인 인간의 정신mind이 물리적이고 사회적인 세계와 어떻게 상호 작용하는가를 연구하는 일이다. (21쪽)
인류 진화의 현 단계에서, 언어 구조의 특정한 원리가 생물학적으로 주어진다고 가정하는 것은 아주 합리적이다. 게다가 모노의 말을 더 빌리자면, 인간의 대뇌피질은 진화 초창기에 언어 능력 습득의 영향을 깊이 받았으므로, 분절된 언어는 "문화의 진화를 허용했을 뿐 아니라, 인간의 신체적 진화에도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인간 두뇌의 단계적 발달 과정에서 나타나는 언어 능력은 이제 '인간 본성'의 일부"가 되었으며, 초기부터 이루어진 분절적인 언어 사용으로 말미암아 특정한 방식으로 진화했을 인지 기능의 다른 측면들과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가정에는 전혀 모순이 없다. (32쪽)
러셀이 종종 언급했다시피 인간의 "진정한 삶은 예술과 사상과 사랑으로 이루어지고, 또 아름다움의 창조와 감상, 세계에 대한 과학적 지식을 탐구하는 데서 가능하다"면, 그리고 이것이 "인간의 진정한 영광"이라면, 우리가 경외감을 느껴야 할, 그리고 가능하다면 탐구의 대상으로 삼아야 할 대상은 바로 우리 정신의 내재적 원리들이다. 일상적인 언어 사용과 같은 인간 지성의 가장 친숙한 성취를 살펴보면서 우리는 한 규칙 체계 안에서 자유롭게 창조되는 그 독창적인 특성에 경외감을 가지게 된다. (94~95쪽)
권력의 분배 방식은, 갖가지 개혁운동이 벌어졌음에도 근본적으로 전혀 바뀌지 않은 채 유지되고 있다. 권력 재분배를 위한 운동이란 돌이켜보면 "현존하는 권력 구조를 타파함으로써 혹은 혁명을 통해서 권력과 정책의 우선순위를 근본적으로 바꿔야만 성취될 수 있는 것을 합리적이고 온건한 개혁으로 성취하고자 하는 헛된 시도"에 불과했다. 미국 사회는 자유 속의 평등에 대한 허울뿐인 언명조차 내팽개치고, 국내에서나 해외에서 정의에 반反하는 기존 체제 유지라는 "지상 목표"를 위해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사용하기로 작정했다는 것이 모겐소의 결론이다. 공산주의에 대한 우리의 두려움과 "권력에 대한 우리의 순응주의적 복종"이야말로 미국 사회의 약속이 깨진 데 대한 책임이 있다. (137~138쪽)
우리를 옥죄는 것은 혁명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다. 최근에는 박해의 희생자들와 인류 자체의 생존이 문제가 되고 있다. 국가가 특권과 패권을 독점하기 위해 인류 전체의 파멸까지 무릅쓰고 있기 때문이다. (…) 우리의 세계가 "소유에 집착하거나 남의 것을 빼앗으려는 욕망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만들어가려는 욕구에 바탕을 둔, 창조 정신이 살아 있으며 삶이 희망차고 즐거운 모험이 되는 세상"으로 탈바꿈할 수 있다는 희망을, 서구 선진 사회에 태어나는 행운을 누린 사람들이 잊거나 포기한다면 이는 비극이 아닐 수 없다. (186~187쪽)
한국은 IMF의 가혹한 요구 조건을 모두 수용한 반면 말레이시아는 IMF의 요구 사항을 거부했는데, 현재 두 나라는 모두 외환위기를 탈출한 것으로 평가되지만 그 내용은 상반된다. 촘스키는 단적으로 말해 구제금융을 받은 사람은 한국의 국민이 아니라 국제 투자가들이라고 지적한다. 한국 국민들은 가혹한 구조조정 프로그램으로 고통을 당했는데, 그것은 은행가와 투자가들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한 사회적 비용이었다. 이에 비해 말레이시아는 자본의 국외 유출을 통제한 결과, 비록 당시에는 많은 경제학자들의 비난을 받았지만 결과적으로 말레이시아의 자산을 지키는 데 성공한다. (230쪽, 옮긴이 해제)
촘스키는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바로 지식인들이 이런 관행에 일조하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지식인들은 권력이 허용하는 틀 안에서만 문제를 제기하고 정부를 비판하며 기업을 감시한다. 미국에서 베트남전쟁을 반대했던 지식인들은 미국이 베트냄에 군대를 보낼 권리가 아예 없다는 얘기는 하지 않았다. 다만 너무 비용이 많이 든다, 질 것이 뻔한 싸움에 자기네 젊은이들이 희생된다는 말만 했다. (236쪽, 옮긴이 해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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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스키의 연구실에는 러셀의 사진이 걸려 있다고 한다. 촘스키와 러셀의 공통점에 대해 생각해보았지만 선뜻 떠오르지 않았다. 신랄하고, 이성을 중시한다는 것? 이런 건 너무 피상적이고 수박 겉핥기에 가까울지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두 사람은 거장이고 현대 철학과 삶에 영향을 크게 미쳤다는 사실이다. 옳고 그름을 떠나 '지식의 거장의 반열에 오른' 사람들의 생각을 들여다보는 것은 유익하다. 러셀이라는 한 시대 이전의 철학자를 촘스키라는 현대의 철학자이자 지식인이 논하는 행위는 현대인들에게 많은 의미를 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