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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는 일전에 한번 읽은 적이 있다. 당시 완역본이라 생각하고 읽었는데 막상 읽다 보니 여행기위주로 7편만이 실려 있었다. 그후 완역본을 다시 읽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이제서야 읽게 되었다. 전에 읽은 7편의 여행기도 역자가 다르니 새로 읽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다. 한 권의 고전을 두세, 세번 반복하여 읽는 것도 나름대로 그 책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게 만들지만, 역자를 달리하여 읽는 것도 새로운 맛을 느낄 수가 있다. 바라보는 시각과 해석에 대한 차이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열하일기]는 말 그대로 연암이 열하 지역을 둘러보면서 보고 느낀 것을 적은 글이다. 조선 정조4년인 1780년, 청나라 건륭황제의 만수절 축하사절로 박명원이 정사에 임명되었다. 이에 연암은 삼종형 박명원의 개인수행원 자격으로 따라 나섰다. 그해 5월25일 한양을 출발하여 10월27일 다시 한양에 도착하니 장장 5개월에 걸친 여행이었다. 여행은 압록강을 건너면서 시작되어 연경까지 2030리길에 이르렀다. 여행이 여기서 끝났다면 [열하일기] 또한 다른 연행록과 큰 차이는 없었을 것이다. 헌데 황제는 연경에 있지 않았다. 피서 차 열하에 가 있었던 것이다. 다시 연경에서 열하까지 여행한 것이 [열하일기]란 제목이 붙게 만들었다. 연암이 [열하일기]를 탈고한 이후 책은 장안의 화제를 불러 일으켰고 필사본 형태로 급속하게 유통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필사의 과정을 거치면서 본래 모습과는 다르게 윤색되었다. 윤색은 좋지 않은 쪽으로의 변질이자 훼손이었다. 이는 경직된 사회에서 폐쇄적인 사상과 문학적 풍토에 의한 자기검열의 결과라고 한다. 역자가 말하는 윤색과 왜곡의 실제는 이렇다. 연암은 책을 쓰면서 청나라 연호를 사용하였고, 명이라는 국호를 쓸 때 명을 존숭하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다. 당대의 시각에서 연암은 불손하고 불온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필사본들은 청의 연호를 삭제하고 명에 대해서는 존숭하는 표현을 삽입하는 등 숭명반청 의식을 노골적으로 나타내었다고 한다. 연암은 또 우리말을 살려서 한자화하여 한문 문장에 섞어서 사용하였지만 필사본에서는 이런 표현들이 중국 고문식의 표현들로 바뀌었다. 천주교와 서양에 대한 연암의 관심은 관련용어들을 거리낌없이 사용하였지만 이 또한 다른 용어와 항목으로 바뀌었다. 특히 연암의 자유분방한 사고와 행동은 풍속이나 사회적 통념에 맞지 않는 내용도 보고 느낀 대로 기록하게 만들었다. 성적인 문제, 중국인의 동성애, 여성에 대한 인물묘사 등이 그것인데, 필사본들은 이러한 연암의 연암다운 개성을 몰각시키고 점잖고 교양있는 양반의 모습으로 분식했다고 한다. 역자는 이 책에서 이러한 표현들을 살려 최대한 원문과 가깝게 번역했다고 한다. 이 책 [열하일기 1]권은 압록강을 건너서 열하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인 <도강록>, <성경잡지>, <일신수필>, <관내정사>, <막북행정록> 등 5개편을 번역한 것으로 날짜상으로는 6월24일부터 8월9일까지, 지리상으로는 압록강에서 연경을 거쳐 열하까지 2450리 길이다. <도강록>은 6월24일부터 7월9일까지 압록강을 건너 요양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을 기록한 글이다. 연암은 여행을 하면서 말위에서, 길위에서 보고 느낀 것들을 기록한다. 여행하면서 만나는 중국의 문물은 연암에게 모든 것이 신기하기만 하다. 중국집을 보고는 그들이 벽돌로 집을 짓는 이유가 편리하고 실용적인 것이기 때문임을, 벽돌을 굽는 가마를 보고서는 그 원리까지 자세히 적고 우리네 가마와 비교하여 장단점까지 따져본다. 중국의 온돌인 캉을 살펴보고는 우리의 구들과 비교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보다 실용적인 그것들을 오랑캐의 것이라 하여 받아들이지 못하는 현실을 꼬집기도 한다. 봉황성에서는 그곳이 옛 안시성이라는 소리를 듣고 후세의 옹졸한 선비들이 부질없는 중국의 역사기록만을 믿고서 패수나 평양의 위치를 한반도 안에 가두어 자기나라의 국토를 스스로 줄인 것을 한탄하기도 한다. <도강록>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호곡장이다. 석문령을 넘어 요동들판에 들어서자 지평선밖에 보이지 않는다. 연암이 한바탕 통곡하기에 적당한 곳이라고 말하자 옆에 있던 정진사가 그 연유를 묻는다. ‘천고의 영웅들이 잘 울고, 미인들이 눈물을 많이 흘렸다고 하나, 기껏 소리 없는 눈물이 두어 줄기 옷깃에 굴러 떨어진 정도에 뷸과했지. (…) 사람들은 단지 인간의 칠정 중에서 오로지 슬픔만이 울음을 유발한다고 알고 있지, 칠정이 모두 울음을 자아내는 줄은 모르고 있네. 기쁨이 극에 달하면 울음이 날 만하고, 분노가 극에 치밀면 울음이 날 만하며, 즐거움이 극에 이르면 울음이 날 만하고, 사랑이 극에 달하면 울음이 날 만하며, 미움이 극에 달하면 울음이 날 만하고, 욕심이 극에 달해도 울음이 날 만한 걸세. 막히고 억눌린 마음을 시원하게 풀어버리는 데에는 소리를 지르는 것보다 더 빠른 방법이 없네.’(139쪽, 7월초8일 갑신일 글 中) <성경잡지>는 7월10일부터 14일까지의 기록이다. 성경은 심양의 옛이름이다. 연암은 심양에서 중국인들의 풍속을 살펴본다. 수역이 야간에 돌아다니지 못하게 단속하자 밤에 몰래 빠져나와 사람들과 필담으로 이야기를 나누며 중국의 풍속과 문물을 살펴보는 것이다. 상가의 제도를 구경하기 위해 상가집에 들어 갔다가 상주가 뛰어나와 곡을 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문상을 하기도 하고, 골동품집에서는 가짜 골동품을 만드는 방법을 듣기도 한다. 사람들이 글씨를 청하자 연암은 글을 써주면서 스스로 감탄한다. ‘배생이 또 빈 필첩을 꺼내며 써 주기를 청한다. 짙은 먹물을 부드러운 붓에 찍어 쓰니 자획이 썩 아름답게 되어, 내 스스로도 이렇게 잘 쓸 줄은 생각도 못했다. 여러 사람이 크게 감탄과 칭찬을 하는 바람에 술 한 잔에 글씨 한 장씩 쓰곤 하니, 붓 돌아가는 모양이 마음대로 종횡무진 누빈다.’(213쪽) 그런가 하면 점포를 둘러보면서 기상새설(欺霜賽雪)이란 글자가 걸려 있는 것을 보고서는 ‘장사꾼들이 자기 본분을 자랑하기 위해, 심지가 희고 깨끗하여 가을서리와 같고 또 희디 흰 눈 빛을 압도한다고 하는 것 아닐까’라고 생각한다. 전당포에 들어가니 주인이 글자를 청하여 기상새설이라 써주지만 주인의 얼굴색이 일그러지며 머리를 절레절레 흔든다. 자신의 글씨를 못마땅해서 그러는 줄 알고 연암은 속으로 욕을 하며 그 집을 나온다. 헌데 장식품 점포에 들어가서 그 글자를 써주니 마찬가지 반응이다. 알고 보니 기상새설이란 간판은 밀가루를 파는 가게를 뜻한다. ‘주인의 심지가 고결하고 깨끗한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고 가루가 서리보다 가늘고 눈보다 희다는 것을 자랑하려는 것이다.’(253쪽) <일신수필>은 7얼15일부터 23일까지 신광년에서 산해관에 이르는 여정 중 쓴 수필이다. 길을 메우듯 들어찬 수레들을 보고는 수레의 편리성을 그 원리와 함께 논한다. 조선에서는 길이 좁아 수레가 필요 없다고 말하는 자들에게 수레가 있으면 길은 자연히 생기게 되어 잇는 것을, 중국의 문물은 청나라의 그것이나 명나라의 그것이나 동일하지만 그저 오랑캐의 것이라는 핑계로 받아들일 생각을 안하는 선비들에게 한마디 한다. 또 [열하일기]하면 먼저 떠올리는 중국의 문물이 무엇인가라는 글이 이곳에 나온다. 우리가 여행을 다녀오면 주위에서 무엇이 좋았는지 묻는 것처럼, 중국에 연행사로 다녀오면 사람들이 중국의 장관이 무엇이냐고 물었던 것 같다. 연암은 이에 대해 일등 선비는 오랑캐에게서 볼 만한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고 말하고, 중간쯤 되는 선비는 군사를 몰고 가 중국천지를 말끔히 씻어낸 뒤에야 장관을 논할 수 있다고 말하겠지만, 연암은 ‘나는 삼류 선비이다. 나는 중국의 장관을 이렇게 말하리라. 정말 장관은 깨진 기와 조각에 있었고, 정말 장관은 냄새나는 똥거름에 있었다고. 대저 깨진 기와 조각은 천하 사람들이 버리는 물건이다. 그러나 민간에서 담을 쌓을 때, 어깨높이 이상은 쪼개진 기왓장을 두 장씩 마주놓아 물결무늬를 만들고, 네 쪽을 안으로 합하여 동그라미 무늬를 만들며, 네 쪽을 밖으로 등을 대어 붙여 옛날 동전의 구멍모양을 만든다. 기와 조각이 서로 맛물려 만들어진 구멍들의 영롱한 빛이 안팎으로 마주 비친다. 깨진 기와 조각을 내버리지 않아, 천하의 문채가 여기 있게 되었다. (…) 똥오줌이란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물건이다. 그러나 이것이 밭에 거름으로 쓰일 때는 금싸라기처럼 아끼게 된다. 길에는 버린 재가 없고, 말똥을 줍는 자는 오쟁이를 둘러메고 말꼬리를 따라다닌다. 이렇게 모은 똥을 거름창고에다 쌓아 두는데, 혹은 네모 반듯하게 혹은 여덟 혹은 여섯 모가 나게 혹은 누각 모양으로 만든다. 똥거름을 쌓아 올린 맵시를 보아 천하의 문물제도는 벌써 여기에 있음을 볼 수 있다.’ (270쪽, 7월15일 신묘일 글 中) 연암은 조선 선비들의 허례와 실익 없는 명분을 이렇게 라도 조롱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관내정사>는 7월24일부터 8월4일까지 산해관부터 연경까지의 여정을 기록한 것이다. 관내란 산해관 안쪽을 가리키는 말이다. 압록강에서 북경까지 2030리 길을 온 것이다. 도중에 옥전현에 도착하여 한가하게 구경하던 중 한 점포에서 피리소리와 노랫소리가 들린다. 들어가 구경하고 나오다 보니 벽에 기이한 문장이 적혀 있다. 주인에게 허락을 구하고 밤에 다시 그곳으로 가서 베낀다. 주인이 그 글을 베껴서 무엇에 쓰려 하느냐고 묻자 연암은 ”귀국해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한번 읽히려고 합니다. 응당 배를 잡고 웃다가 웃음을 참지 못해 뒤집어질 겁니다. 웃느라고 입 안에 있던 밥알이 벌처럼 뿜어 나올 것이고, 갓끈이 썩은 새끼줄처럼 끊어질 것입니다.”라고 한다. 그리고 정진사에게 중간부터 베끼라 하고 연암은 처음부터 베낀다. ‘숙소에 되돌아와서 등불을 밝히고 살펴보았다. 정진사가 베낀 곳은 잘못 쓴 글자와 빠진 글귀가 수도 없이 많아서 도무지 문장이 되질 않았다. 때문에 대략 내 생각으로 띄엄띄엄 땜질해서 글 한 편을 만들었다.’(416쪽) 흔히 우리가 연암의 대표작으로 알고 있는 [호질]은 이렇게 해서 탄생했다. 연경에 도착하자 연암은 무엇보다도 먼저 유리창을 찾는다. 연암은 사행사의 일정에 크게 얽매이지 않은 몸이었기에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구경을 하기에 열을 올린 것이다. <막북행정록>은 8월5일부터 8월9일까지 황성에서 열하까지의 여정을 기록한 것이다. 막북이란 사막 북쪽을 가리키지만 여기서는 만리장성 북쪽 변방을 의미한다. 힘든 여행 끝에 연경에 도착했지만 황제는 연경에 없었다. 황제는 열하의 피서산장에 가 있었고, 조선의 사신들을 그곳으로 오라고 부른다. 날짜가 촉박하자 정사, 부사, 서정관이 자신들이 데리고 갈 비장들을 선발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연경의 서관에 머무르기로 한다. 연암은 갈까 말까 망설이지만 정사가 천년에 한 번 만나는 좋은 기회라며 권유하자 가기로 작정한다. 열하로 떠나는 자들과 남은 자들 사이의 이별이 서럽기만 하다. 장복이 연암을 따라 떠나는 창대의 손을 잡고 슬피 운다. 연암은 이를 보고 선인들의 이별에 대한 시를 생각하고 심양에 끌려간 소현세자의 이별을 생각한다. ‘인간에게 가장 괴로운 일로 이별보다 더한 괴로움은 없을 것이다. 이별의 괴로움은 생이별보다 더한 것이 없으리라. 한 사람은 죽고 한 사람은 사는 저 생사의 영결쯤이야 족히 괴롭다고 말할 것이 못된다.’(493쪽)며 이별에 대한 사유에 잠긴다.
[열하일기]에는 연암이 여행을 하면서 겪는 일상적인 일에 대해서도 빽빽하게 적혀 있다. 주막에서 술 한잔 마시는 일도, 길을 가다 만나는 만주족과의 실랑이는 물론 물을 건너고 말을 타고 가면서 드는 생각도 모두 적었다. 때로는 폭소를 자아내게 하고 때로는 엄숙하기조차 하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이 연행을 다녀왔지만 그들이 본 것과 연암이 본 것은 차이가 있다. 그들은 조선의 예법이 몸에 베어 있어 해로운 것, 예법에 어긋난 것이라면 보질 않으려 했다. 반면 연암은 선비들의 위선에 혀를 내밀고 청의 문물에 매료되어 있던 터라 조그마한 것이라도 구경하고 그것을 적는데 열을 올렸다. 그래서 조선의 선비들이 본 것은 연암이 못 본 것이 되었고, 연암이 본 것은 조선의 선비들이 못 본 것이 되었을 것이다. [열하일기]의 다음 기록들은 또 연암의 어떤 면을 보여줄지 기대를 안고 펼친다. |
| 예전부터 읽어보고싶었는데 드디어 읽게 되었어요. 박지원의 걸작 열하일기. 대단한 이야기꾼 입니다. 관찰력도 뛰어나고 입담은 뭐 익히 아시는대로..! 우리 어르신들 술을 어찌나 좋아하시는지 제가 다 취한 것 같습니다. 여정이 자세하게 나와있고 그림과 사진이 풍부해서 즐겁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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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여행 갔을 때, 자금성을 보고 무척 놀랐습니다. 평소 궁에 대해 관심이 많았는데 자금성을 실제로 보고 나니, 중국이라는 나라가 조선에게 얼마나 크게 느껴졌을 것이며, 실제로 얼마나 큰지를 느꼈어요. 청나라에 왔던 박지원이 떠오른 것은 자연스럽게 느껴졌습니다. 그때부터 열하일기를 읽어야겠다 마음만 먹다가 책을 구입해서 읽고 있어요. 중국 여행 겨우 몇 박 며칠로 다녀온 건데 괜히 동질감도 느끼고ㅎㅎㅎ 어렵게만 느껴졌는데 여행을 다녀오고 나니 가깝게 느껴지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