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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 박지원이 쓴 [열하일기]에는 일기체형식의 기행문 외에 연암이 열하와 북경에 머물면서 보고, 듣고, 느낀 것 또는 여정 중에 일어났던 일을 별도로 모아서 쓴 글들이 포함되어 있다. [열하일기 3]권은 1,2권과는 달리 모두 별도로 모아서 쓴 글들로 이루어져 있다. 애당초 연암이 [열하일기]를 쓸 때 그렇게 나눈 것은 아닐진대, 번역을 하다 보니 그렇게 편성되었을 것이다. 3권에는 총 12편의 글을 실려 있는데 이 중 3편은 보유편이다. 보유편이란 보충하여 쓴 내용을 말한다. 먼저 <환희기>는 황제의 생일에 맞추어 열하로 모여든 마술사들의 재주중에서 연암이 본 20가지의 마술에 대해 구체적으로 그 모습을 기록한 글이다. 연암은 이들 마술사들의 재주를 보면서 요술을 아직 보지 못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보여주려 기록했다고 말한다. <피서록>은 ‘피서산장에서 쓴 시화’란 뜻이다. 열하의 피서산장 밖 태학관 회나무 아래에서 시화를 쓰고 그 시화와 관련된 이야기들을 모았다. 불교와 관련된 시화를 쓰는 중에 사신일행의 이야기가 나온다. 서번의 중 반선이 선물한 불상을 얼떨결에 받은 사신일행은 아랫사람 윗사람 할 것 없이 허둥지둥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 연암이 정사에게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묻자 정사는 궤짝을 하나 짜라고 했다 한다. ‘그 불상을 가는 길에 있는 사찰에다 버리거나 방치하자니 청나라의 분노를 살까 두렵고, 그렇다고 그 물건을 가지고 귀국하면 말썽을 불러일으킬 것이 빤한 노릇이다. 그러니 우리와 저들이 마주하는 경계인 중간지점에서 물에 띄워 보내어 바다로 내버릴 수밖에 없을 터이니, 그런 장소로는 압록강만큼 좋은 곳도 없을 것이다.’(117쪽) 아마 연암은 정사의 심중을 읽었을 것이다. 연암의 생각은 유학에 매몰되어 유학 이외의 것은 모두 이단시하는 당시 조선 선비들의 편협한 사고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 같다. <피서록 보유>는 피서산장에서 쓴 시화를 보충한 글이다. <구외이문>은 ‘장성밖에서 들은 신기한 이야기’란 의미이다. 구외란 고북구 장성 밖이란 뜻으로 열하를 지칭한다. 연암은 자신이 직접 목격하거나 중국인에게 들은 내용을 체계나 순서없이 생각나는 대로 기록했다. 사슴처럼 생긴 반양, 조조의 수중무덤, 양귀비사당, 금서로 지정된 초사, 선비들이 입던 옷인 심의, 불경, 비파, 사자 등, 말 그대로 잡다한 것을 기록하고 있다. 연암의 눈썰미와 다방면에 걸친 호기심을 엿볼 수 있다. <옥갑야화>는 열하에서 북경으로 돌아오는 길에 옥갑이란 곳에 묵으면서 여러 비장들과 나눈 이야기를 옮겨 적은 글이다. 역관들이 중국을 오가면서 그들의 무역과 관련하여 겪었거나 들었던 여러 이야기들을 말하자 연암도 윤영이란 사람에게 들었다며 허생이란 선비에 관한 이야기 한 편을 들려준다. 우리가 알고 있는 [허생전]이다. 그 중의 백미는 마지막에 허생이 어영청대장에게 하는 말이다. 어영청대장이 허생에게 와서 북벌에 필요한 일을 묻자 허생이 계책을 알려주지만 어영청대장은 예법에 어긋나기 때문에 모두 어렵다고 한다. 그러자 허생이 한바탕 야단을 친다. ‘도대체 사대부라는 게 뭐하는 것 들이냐? 오랑캐 땅에서 태어난 주제에 자칭 사대부라고 뽐내고 앉았으니 이렇게 어리석을 데가 있느냐? 입는 옷이란 모두 흰옷이니 이는 상주들이 입는 옷이고, 머리는 송곳처럼 뾰족하게 묶었으니 이는 남쪽 오랑캐의 방망이 상투이거늘, 무슨 놈의 예법이란 말인가?’(295쪽) 예법에 사로잡혀 머리털 하나 옷차림 하나도 바꾸지 못하고, 자신들의 재물을 축내는 짓은 어떤 일이라도 하지 않으려는 욕심에 사로잡힌 사대부들이 입으로는 북벌을 주장하는 것을 보면서 아마 연암은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을 허생의 입을 통해 하고 있는 것일 게다. <황도기략>, <알성퇴술>, <앙엽기>는 북경에 머물면서 북경의 이곳저곳을 기록한 글이다. <황도기략>은 황성구문, 태액지, 금오교, 경화도, 만수산, 천주당, 황금대, 유리창 등 북경 곳곳의 명승지와 건물의 모습, 내력, 위치 등을 요약하여 정리한 글이다. <알성퇴술>은 ‘공자의 사당을 참배하고서’란 의미로 북경의 학교유적지에 대한 글이다. 북경의 최고 학교로 공자의 사당이 있는 순천부학, 국자감인 태학, 송나라 충신 문천상의 사당, 과거시험장인 시원 등을 둘러보고 그 유래와 모습 등을 기록했다. <압엽기>는 유교에서 이단으로 지칭하는 사찰과 도교사원, 민간신앙과 관련된 건물, 야소교 유적 등을 소개하고 있다. <앙엽기>는 적바림 모음이라 할 수 있는데, 적바림이란 나중에 참고하기 위하여 간단히 적어 두는 것을 뜻하는 순 우리말이라고 한다. 연암은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귀국한 뒤에 (북경에서 구경한 것들을) 기록했던 쪽지를 점검해보니 종이는 나비날개처럼 얇고 자그마하며, 글자는 파리대가리처럼 작고 까맣다. 모두가 바쁜 총중에 비석을 읽고 조급하게 베낀 것이라 엉성하기 짝이 없다. 드디어 편집을 해서 앙엽소기라고 하였다. 앙엽이란 옛사람이 감나무 잎에다 글자를 써서 항아리 안에 넣어 두었다가, 나중에 모아서 하나의 기록으로 정리했다는 것을 본받아 붙인 이름이다.’(407쪽) 연암이 사찰이나 사원 등 곳곳을 둘러보며 시간을 쪼개 비석에 쓰여 있는 글들을 베끼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렇게 항시 손에 종이와 붓을 들고 다니며 적고 또 기록하였기에 [열하일기]란 대작이 탄생되지 않았나 싶다. <동란섭필>에서 동란은 구리로 만든 난초를 가리킨다. 연암은 동란을 중국인에게 빌려 자신이 임시로 거처하는 방에 두고 그 방을 동란재라 하였다. 그곳에서 자신이 보고 느낀 잡다한 내용을 기록한 글이 <동란섭필>이다. 우리가 공무도가로 알고 있는 노래의 전후사정이 송나라때 이방이 편찬한 [태평어람]에 실려 있다며, 공무도가에 나오는 공후라는 악기를 찾아보고자 했으나 찾지 못했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금료소초>는 의약처방 기록으로 의학에 관한 이런저런 처방을 특별한 체계없이 기록하고 있다. 이밖에 북경 유리창의 서점에서 중국인들과 필담한 내용인 <양매시화>, 북경에서 만나 교유한 청조의 인물들에게서 받은 편지모음인 <천애결린집>이 보유편으로 실려 있다. 이들 보유편은 당초 연암이 [열하일기]에 포함하려 했으나 최종적으로 제외한 내용이라고 한다. 아마 문제의 소지가 있음을 알고서 스스로 제외한 것을 보면, 당시 조선의 사정이 연암 스스로 자기검열을 하게 만들지 않았나 싶다.
이처럼 [열하일기]에는 연암이 여행을 하면서 겪은 일상적인 일에 대해 빽빽하게 적혀 있다. 연암은 곳곳을 방문하면서 보고, 듣고, 느낀 것 모두를 적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주막에서 술 한잔 마시면서도, 길을 가다 만나는 중국인과 나눈 이야기도, 물을 건너고 말을 타고 가면서 들었던 생각도 모두 적었다. 그런 글들을 읽으면서 때로는 웃음을 참지 못했고 때로는 엄숙한 생각 마저도 들었다. 연암이 여행을 하면서 보았던 모든 것들은 자연히 18세기 조선이 처한 상황과 사대부들의 폐쇄적인 사고와 대비된다. 수많은 연행이 이루어졌음에도 조선의 선비들이 미처 보지 못했던 것, 보지 않으려 했던 것들을 연암이 볼 수 있었던 까닭은 그만큼 연암의 사고가 자유분방했기 때문일 것이다. [열하일기]를 통해 우리가 연암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지 않나 싶다. [열하일기]가 최고의 여행기라는 말을 비로소 이해할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