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은 사월 -이선욱 잠이 든다 벚꽃이 핀다 한밤의 천변은 화사하리 누군가 그곳을 걷고 있다면 꿈꾸고 있으리라 내가 베개에 엎드린 채로 직시하고 있는 것들을 하얗게 만개한 꽃나무 숲속에서 흩날리는, 흩날리는 청춘은 낮이 되고 그녀는 찬란해지고 숙명은 기쁘게 화답하는 때로 인생에는 그처럼 신비로운 일들이 있었지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오직 꿈꾸는 자만이 그 향기를 맡을 수 있다니 오, 그곳으로 깊숙이 고개를 묻을 때마다 알 수 있었네 그럴수록 가까워지든 점점 더 멀어지든 선명하기만 했지 한 철의 은송이, 은송이들 이 종이 냄새 같은
바람이 불어오면 바람을 그대로 맞아주자는 마음이 들 때가 있다 그 시간이 돌아온다면 잘못을 하지 않고 거짓을 말하지 않을 수 있다고 다짐하는 바람개비의 하루를 그림자를 바라본다 어두운 책상에 앉아 연필을 움직이는 일로 내일을 다시 사월의 시간을 견딘다 |
|
우편 -이선욱 한 부인이 손끝으로 종이를 넘기며 글자로 그린 소식을 읽고 있네 변하지 않는 표정 속에 비스듬히 앉은 채로 낡은 의자처럼 삐걱거리며 우편함을 매일 쳐다봅니다. 집을 나설 때와 들어올 때. 텅 빈 우편함을 보는 일로 하루를 시작하고 마무리합니다. 소식 올 곳은 없습니다. 가끔 세금 고지서가 꽂혀 있곤 하지요. 신청한 적도 없는 홍보 책자가 오기도 합니다. 그 자리에서 뜯어 보고는 바로 분리수거함에 버립니다. 우표를 붙이고 우체통에 편지를 넣고 돌아올 답장을 기다린 적이 언제인지 아득하기만 합니다. 우체부의 오토바이를 소리를 놓치고 싶지 않아 텔레비전의 소리를 죽여 놓던 때가 있습니다. 노랗고 파란 빛깔의 봉투를 받을 때도 있었고 일반 봉투에 쓰인 편지를 받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 안에는 이곳의 안부와 소식을 묻는 다정하고 따뜻한 말들이 담겨 있었습니다. 때로 시는 수신인이 불분명한 우편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시인이 부쳐오는 안부의 말들을 읽으며 나는 낡은 의자가 되어 갑니다. 탁, 탁, 탁 -이선욱 그러니까, 가문 벌판이었지 저녁이면 한 무리 염소들은 그늘로 떠났고 목동의 손만 홀로 남아 벌판 한가운데 놓인 탁자에서 타자를 쳤네 타자를 쳤네 캄캄한 자판을 두드릴 때마다 솔가지 타는 소리가 허공에 퍼졌고 타자기에선 부서진 사막이 조금씩 흘러내렸다네 다 닳은 잉크처럼 어둠에 날리는 글씨들과 함께 이따금씩 타점이 강하게 울렸으나 휘어지는 바람을 따라 자판을 두드리는 속도가 달라지기도 했네 목동의 손은 가벼웠지 몸은 없고 손만 남았으므로 말없이 서술하는 시간은 활자판의 중심처럼 칸칸씩 이동할 뿐 꿈꾸듯 망설이는 타법은 아니었네 다만 슬픈 꿈의 오타만이 하얀 털뭉치처럼 바닥에 뒹굴고 있었으니 궁극의 어떤 형상 같았으나 궁극에는 자라지 못할 운명이었다네 자판은 타법에 빠르게 반응하고 있었지 아니면 무언의 잦은 행갈이였을까 어딘가 어둠은 글썽거렸고 그것은 타이핑한 글씨체였다네 때로는 벌판에 도는 메아리처럼 같은 문구를 연달아 치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땅금 갈라지듯 목동의 손뼈가 더없이 두드러지곤 했네 사방으로 길이 없는 벌판의 한가운데였지 끊이지 않는 서술의 소리를 따라 손끝에는 굳은살이 피어났고 그렇게 타자를 치던 어느 날이었다네 어둠에 날리는 글씨들은 점점 더 흐려졌고 타자기에선 부서진 낙타의 뼈가 흘러내리고 있었네 연달아 같은 문구들을 치고 있을 때였지 모가 닳은 자판 하나를 누르는 순간 무형의 뒤늦은 타점이 울렸네 무언가 손등에 떨어졌지 빗방울이었네 가문 벌판에서 목동은 타자를 칩니다. 탁, 탁, 탁. 홀로 남은 목동의 손은 자판 위를 떠다닙니다. 별이 쏟아지고 부서진 사막의 시간에서 글자들은 흘러내립니다. 말은 사라지고 언어는 종이 위에 쓰입니다. 그가 서술하는 문장들, 단 한 문장만이라도 훔치고 싶습니다. 어디로든 갈 수 있는 벌판이기에 길은 없습니다. 굳은살이 손가락에 베이고 글자들이 날아가 춤을 추면서 오타와 비문으로 글은 자리를 잡습니다. 같은 말을 쓰고 소리 내어 할 수 없는 말들까지 쓰자 목동의 손등에는 빗방울이 떨어집니다. 목동의 타자 치는 소리는 곧 빗소리로 전환됩니다. 이 시인의 상상력, 놀랍습니다. '타이프로 친 시도 있고, 시로 친 타이프도 있다'라는 시인의 말로써 추측해 보건대 이 시집은 타자 치는 소리로 타자를 유혹해 내는 진기한 재주를 보이고 있습니다. 어떤 매혹을 느껴보세요. 탁, 탁, 탁. 당신의 마음을 두드리는 그 소리를 상상해보세요. |
|
예술
이선욱 / 탁, 탁, 탁 / 문학동네 / 159쪽 / 2015 (20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