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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황은 죄일까? 기술일까? 이러한 난해한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생각 실험을 할 수 있다. 가령, 세상에서 제일 빠른 사람과 거북이가 경주를 한다면 누가 이길까? 사실상 이것은 경주가 아니다. 상대적으로 거북이가 약자(弱者)이기 때문에 불공평하다. 그래서 한 가지 조건이 있다. 거북이 먼저 100미터 앞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사람이 거북이를 추월하려면 100미터 지점에 도달해야 한다. 하지만 그 사이 거북이는 몇 미터 갔다. 다시 사람이 거북이를 추월하려고 해도 거북이는 그만큼 다른 지점에 있다. 이렇듯 논리적일 때는 사람이 거북이를 추월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하지만 우리의 경험은 어떤가? 사람이 거북이를 얼마든지 추월할 수 있다. 때로는 그 반대일 수도 있다.
돌이켜 보면 우리의 인생이 호기심 있고 매력적인 이유는 ‘예측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예측 불가능은 우리를 낯선 세계에 초대하면서 한계 상황에 도전하라고 한다. 하지만 예측 불가능이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다. 그리스어에 파르마콘(pharmakon)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의 뜻은 약(藥)이자 동시에 독(毒)을 말한다. 예측 불가능이 삶의 방향을 찾는 긍정적이라고 하더라도 얼마든지 방향을 잃어버리게 할 수도 있다. 이러한 예측 불가능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까? 우리는 방황을 달갑지 않게 여긴다. 굳이 불안하게 살아야 할 필요가 없다. 방황은 불안 그 자체다. 방황은 불안한 사람에게 죄라는 그림자를 따라붙게 만든다.
그러나『방황의 기술』의 저자 레버카 라인하르트는 우리의 생각과 낯설다. 저자는 오히려 우리가 ‘살아가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은 방황의 기술’이라고 역설하고 있다. 저자에게 방황은 인생의 장애물이 아니라 멋진 동반자가 된다는 것이다. 이 책을 추천하면서 철학자 강신주는 방황이 얼마나 매력적인 여행인가?를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우리에게 인간은 왜 방황해야만 하는지, 왜 방황할 수밖에 없는지, 그리고 방황이 인간에게 얼마나 커다란 선물을 줄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려고 한다. “낯선 것, 예측할 수 없는 것들과의 만남을 통해서만 이 세계에서 우리가 있는 자리가 어디인지, 인간이라는 것과 인간성이라는 것이 진정으로 어떤 의미인지를 알아낼 수 있다.”(10쪽)
이 책에서 말하는 방황의 기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사실을 알아야 한다. 첫 번째는 방황을 가로 막는 것이다. 두 번째는 방황을 위한 도구다. 방황을 가로 막는 것에는 ‘불확실성 시대의 확실성, 나르키소스 2.0, 과도한 이분법적 사고, 모든 것이 당연해진 일상’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방황을 위한 도구에는 ‘지름길 이해하기, 경계 넘나들기, 연속성 느끼기, 죽음 만나기, 기계 전원 끄기, 인생의 규칙 벗어나기, 일상 철학자 되기’에 관한 것이다.
첫 번째에서 눈여겨 볼 것은 모든 것이 당연해진 일상이다. 우리의 일상은 분주하다. 이런 저런 퍼즐을 맞추기 위해 우리는 기계적으로 작동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럴수록 삶은 공허하고 부조리해진다. 무력하고 무의미한 삶을 어떻게 해야 할까? 라인하르트는 시시포스에 답을 찾고 있다. 시시포스는 불손(hybris)의 죄를 졌다. 불신이란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인간의 오만을 말한다. 그래서 시시포스는 바위를 산 정상에 밀어 올리는 벌을 받는다. 여기서 벌은 한 번에 끝나지 않는다. 꼭대기에 오르자마자 바위는 도로 굴러 떨어져 시시포스는 다시 바위를 밀고 올라가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시시포스에 대하여 절망하는 동안 카뮈는『시지프 신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바위의 결정 하나하나, 어둠으로 가득 찬 이 산의 광물 하나하나가 오직 그것만으로 그에게 하나의 세계를 형성한다. 정상을 향한 투쟁, 그 자체가 인간의 마음을 가득 채우기에 충분하다. 우리는 이제 행복한 시시포스를 상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카뮈의 사유는 놀랍다. 삶이 부조리하다고 해서 절망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자살을 한다거나 권태롭게 인생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시시포스를 가엾게 생각하는 것이 불과할 뿐이다. 하지만 정작 시시포스 스스로는 불행하지 않았다. 시시포스는 고통 속에서 자신의 상상력으로 ‘자신이 고통을 초래했던 지식은 동시에 그의 승리를 완성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카뮈가 말한 ‘행복한 시시포스’는 행복한 상상력에 있다. 지금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불행한 시시포스가 아니다.
두 번째에서 눈여겨 볼 것은 지름길 이탈하기다. 지름길 이탈하기에서는 ‘가치를 계산하는 방법’에 대해 고민한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방향감각이 있다.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제 갈 길을 간다는 것은 여러모로 모험이다. 어느 정도는 인생의 목표가 있어야 하며 목표에 따라 방향은 바뀌기도 한다. 방향은 목표에 이르는 지름길이다. 그런데 방향이 안개에 가려질 때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 안개 때문에 방향을 잃어버리는 것은 혼돈이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저자는 그리스 영웅 오디세우스에서 많은 것을 얻었다. 식인 괴물 폴리페모스에게 벗어나기 위해 오디세우스는 포도주를 마시게 한다. 마음껏 취한 폴리페모스는 오디세우스에게 이름을 묻자, 오디세우스는 “내 이름은 ‘아무도 아니다(우데이스Udeis)요”라고 대답했다.
그러면 ‘아무도 아닌 자’ 오디세우스는 어떻게 영웅이 된 것일까? 막스 호르크하이머와 테오도어 아도르노는『계몽의 변증법』에서 오디세우스를 신화적 인물이 아닌 ‘계몽된 인간’의 상징으로 해석했다. 즉,
신화적 운명, 숙명은 입으로 나온 말과 하나였다. (…)하지만 그 차이를 이용하는 것이 꾀다. 사람들은 사물을 바꾸기 위해 말에 매달린다. (…)우데이스라는 이름이 ‘영웅’과 ‘아무도 아니다’ 둘 다를 의미할 수 있기 때문에, 우데이스는 이름이라는 마력을 부술 수 있다. (…)그는 “아무도 아니다.”라고 자신을 부인하면서 자신을 인정하고, 스스로를 사라지게 만들어 자신의 생명을 구한다.
『방황의 기술』에서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방황의 의미는 단순하면서도 명쾌하다. 방황은 ‘자발적 여행’이라는 것이다. 소심한 사람들에게 자발적 여행은 쓸데없는 고통이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타율적인 여행만 하는 것은 허무하다. 이런 허무함의 경계를 넘어서면 우리는 니체가 말한 초인(超人)을 알게 된다. 니체는 ‘존재의 가장 큰 수확과 가장 큰 즐거움을 거둘 수 있는 비결이다. 위험하게 살아라!’고 했다. 위험하게 산다는 것은 낭만적이지도 비관적이지도 않다. 오히려 그것은 지금까지의 모든 가치를 바꾸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너는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나는 할 것이다.’라는 메시지를 낯설게 깨닫게 된다.
오늘날 물질만능주의와 개인주의가 팽배하고 있다. 정상적인 두 가지 문명 때문에 삶이 안정되고 편리해졌다. 하지만 그만큼 우리는 삶의 가치를 잃어버렸다. 자발적 여행도 예외는 아니다. 방황은 여전히 부정적인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면 우리에게 오디세우스처럼 자신의 생명을 살릴 수 있는 희망은 없을까?『방황의 기술』의 통찰은 아주 유효하다. 방황을 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회복시키고 있다. 그것도 용기와 호기심으로 과감히 선택하라고 한다. 그래야 노발리스가 말했듯 ‘삶이란 주어진 소설이 나이라 우리가 만든 소설’이어야 하지 않을까? 자발적 여행을 통해 우리 삶을 되돌아보는 것은 매우 낯선 만큼 흥미진진한 일일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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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여행이다. 인간은 생물적으로 노쇠화되는 육체를 가진 유한적인 존재이다. 어찌 어찌하여 대대로 육체의 조상들로부터 살아 남은 DNA를 물려 받아 한 생애를 사는 존재이다. 그 한 생애는 마치 땅 따먹기하는 어린 날의 놀이처럼 자신의 영역을 조금씩 넓혀 가는 여행이다. 최초의 눈 뜨임과 사물의 확인. 부모의 보살핌과 자양분의 제공으로 무탈하게 살아남아 사회에서 밥벌이 할 수 있는 교육과정을 이수하고 독립된 자아의 세계로 나아간다. 이 때까지는 잘 조직된 사회와 부모의 전체적인 맥락 속에서 움직이는 패키지 여행이다. 한마디로 다소 안전한 여행이다. 자유 여행은 성인이라고 인정받는 사회적인 존재가 되는 순간이다. 지역적 울타리를 벗어나 새로운 인식의 셰계를 넓히고 가족과 현재의 친구 범위에서 벗어나 새로운 인간관계를 맺고 새로운 시간의 흐름을 설계하고 그 흐름 위에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 간다. 세상은 호기심의 대상이고 걸리버 여행마냥 흥미와 즐거움의 대상이지만 다소 위험이 따른다. 그러나 어느 순간 우리는 낯선 것이 익숙한 것으로 바뀌고 그 익숙한 것은 일상의 시간으로 자리잡고 그 일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의무와 책임감으로 점철된 시간의 지배는 우리들에게 권태와 무기력증을 안겨준다. 더 이상 세상은 재미가 없고 따분할 뿐이다. 국가의 체제 속에서 기본 교육과정을 이수해야 하며, 공공의 선을 추구하기 위해 도덕적 윤리와 법을 지켜야 하며, 정해진 시간내에 출근해야 하며, 정해진 시간에 휴식을 취해야 하며, 일정한 소득을 벌어야 하며 등 등 언제부턴가 우리는 동일한 시간과 장소에서 왕복하는 전동차같은 반복적인 삶을 살고 있다. 우리는 이것을 안전하고 평온한 삶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삶은 생각대로 결코 안전하지 않다. 삶은 여행이기 때문에 예상치 못한 좌절과 불행이 다가온다. 그 때 우리는 일상에서 벗어난 낯선 삶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과 세상을 비난하기 시작한다. 즉 방황이 시작된다.
저자 레베카 라인하르트는 방황의 시작은 여행의 시작이며 진짜 삶의 모습이라고 한다. 인간의 삶이란 만경창파의 고난의 바다와 같기 때문에 방황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저자는 방황을 자발적으로 받아안고 능동적으로 움직일 때 참 삶이 펼쳐진다고 한다. 이 책의 추천사를 쓴 강철주는 "낡은 나를 버리고 새로은 내가 되는 것. 이것이 여행의 본질이다"라고 한다. 방황은 여행인 셈이다. 저자는 "이 책은 미래를 두려워하고 해결을 지향하고 계산에 집착하는 이 시대에 더 많은 용기와 호기심을 갖자고 외치는 변론이다. 자신의 불완전함을 드러날 일을, 심지어 실패할 줄 뻔히 아는 일을 감행해보라는 초대장"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와 함께 사회적 안전망으로부터 단 한걸음도 떼지 못하는 현대인들에게 안전의 그물망을 뚫고 행복하고 재미있는 인생을 개척할 수 있는 방황의 기술을 제시하고 있다. 그 기술을 익히기 위한 예비 훈련으로 몇가지 사고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첫째, 내일을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 시대에서 확실한 것을 찾지 말라고 한다. 현대 사회는 무수한 전문가들이 범람하고 있다. 우리는 무슨 문제가 발생하면 빠른 시간 내에 해결하기 위해 전문가를 찾고 그의 절대적인 말에 의존한다. 타인으로 부터 마음의 평화를 얻는 행위는 결코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불확실한 것을 방황으로 삼아 자신을 탐구해야 한다.
둘째, '나'를 너무 사랑하지 말라고 한다. 저자는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 나오는 나르키소서의 신화를 제시한다. 자기애에 대한 경계를 신화를 통헤 일깨운다. 나르키소서의 죽음은 물 속에 비친 자기 자신에 대한 대한 사랑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 자신을 타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 말은 우리는 나 자신에게 너무나 집중한 나머지 '나'이외의 다른 것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점에 경종을 울린다. 랭보의 '나는 타인이다'라는 구절로 자신에서 벗어나야 만 새로운 세상이 보인다고 한다.
셋째, 과도한 이분법적 사고로 선과 악을 구분하지 말라 방황을 통해 낡은 나를 버리고 새로운 나를 재창조하기 위해서는 타인을 호불호 하지 않는 태도이다. 특히 악에 대한 판단은 유보해야 됨을 강조한다. 사람의 본성이 착함이라고 할때 나쁜 짓을 행한 이유가 본성에 있기 보다 악인을 둘러싼 주변환경과 정신신경학적인 문제이므로 과도하게 옳고 그릇됨을 구분하지 말라는 것이다. 도덕적 상대주의로 명확한 판단을 내리지 않는 모호함이 책임감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보다 더 인간을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인 셈이다.
넷째 빈곤해진 상상력에서 벗어나라 저자는 프랑스 철학자 알베르 카뮈의 시시포스의 신화를 통해 빈곤한 상상력에 대해 일타한다. 풍부한 상상력이 우리의 방황을 도와주는 셈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시시포스는 반복적으로 돌을 밀어 올리는 그의 고단한 뒷모습을 통해 고통받는 속죄자 혹은 자신의 이상을 위해 지치지 않고 노력해도 소용이 없는 무력안 인간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카뮈는 "정상을 향한 투쟁, 그 자체가 인간의 마음을 가득 채우기에 충분하다. 우리는 이제 행복한 시시포스를 상상하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하며 빈곤한 상상력에서 일탈하기를 권한다. 또한 상상력과 창의력으로 인생을 맞이할 때 조금 더 우리는 풍부한 삶을 살수 있다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네 가지의 예비 훈련을 통해 방황을 위한 오리엔테이션을 마치고 본격적으로 방황을 위한 생각도구들을 꺼집어 낸다. 레베카 라인하르트는 니체와 비트겐슈타인을 비롯한 철학자와 그리스 신화의 오디세우스와 디오니소스의 이야기를 제시하고 TV드라마인 24시의 잭바우어와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의 캐릭터까지 과감히 응용하면서 방황의 도구들을 차례대로 선보인다. 또한 카프카의 변신에 등장하는 그레고리 잠자의 인물도 있다. 저자는 방황의 탁월한 전문가로 오디세우스를 많은 분량을 할애하여 제시하고 있다. 오디세우스는 운명이 정해놓은 길을 거역한 유럽 문화 최초의 영웅이다. 10년의 트로이 전쟁과 10년에 걸친 방황을 끝내고 이카카의 해변에 도착한 오디세우스는 예전과 같은 사람이면서도 같은 사람이 아니라다라고 한다. 20년의 세월동안 친숙한 것을 낯설게, 낯선 것을 친숙하게 만들면서 새로운 인간으로 재탄생했고 그는 그 방황의 힘으로 축적된 내공으로 새로운 삶을 창조해 갔다. 오디세우스의 메시지는 수많은 세상이 있다는 것이다. 10년이 걸릴지라도 자신을 더 잘 알기 위해 낯선 것에 도전하라고 한다. 우리에게 조심성과 권태를 호기심과 용기로 대체하라고 한다. 무미건조하고 지루한 삶에 대한 탈피. 편견과 경계의 삶을 허물고 그 너머의 또 다른 삶을 확장한 인물로 마이클 잭슨을 예로 제시한다. 어린 아이이면서 어른의 삶을 살아야 했던 그. 어른이면서 어린아이의 삶을 살아야 했던 그. 흑인이면서 백인이였던 그. 선인이면서 악인이였던 그. 수만가지 가면을 쓰고 신이 주어진 경계를 뚫고 자신의 원하는 완벽한 인간이 되고자 했든 마이클을 통해 삶의 다양성을 주문한다. 그래서 저자는 "두려움과 편견을 버리고, 낯선 것과의 접촉에 적극 응하자"라고 말한다.
저자는 방황의 기술의 철학적 토대를 스토아 학파에서 찾으면서 에필로그를 갈무리하고 있다. 스토아 학파는 첫째 불확실하고 불안한 상황에서도 편안하게 느낄 수 있다는 자각이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 자신은 물론 주변 사람들과 끊임없이 교류를 나눠야 된다고 한다. 두번째는 자신을 알려면, 인생목표를 알려면 친숙한 곳을 떠나야 한다는 것이다. 세번째는 인생의 의미는 위기와 실패를 회피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자신이 불완전하고 상처 받기 쉬우며 언젠가는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며, 이 세상의 비밀이 우리의 인식 가능성보다 훨씬 다채롭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네번째는 매일 매일이 우리가 세상에서 만난 첫날인 것처럼 살아라는 것이다. 그러면 모든 것이 낯설고 감탄의 연속일 것이다라고 강조한다.
전체적으로 다소 철학적인 사변들과 난해한 구절도 군데 군데 보이지만 두번 읽고 정독을 한다면 보이지 않던 글자도 보이게 될 것이다. 정 읽기가 힘들다면 마지박 에필로그만 읽어도 자신의 방황에 도움이 될 것이다. 결국 방황의 기술도 인간의 행복으로 귀결된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방황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볼완전한 세상에 불완전한 인간으로 태어나 방황을 통해 자신을 재무장하고 세상을 관찰하고 탐험한다면 지금보다 나은 삶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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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방황의 기술을 알고 싶어 하는 독자에게 ‘방황은 이렇게 하는 거야’ 라는 식의 방법을 친절하게 안내해주는 책은 아니다. 그저, 방황이 두려워 쳇바퀴 돌 듯 일상에 매몰된 대부분의 현대인들에게 방황이 그리 나쁜 것이 아니며, 방황은 새로운 시작이고, 방황을 통해 진정한 나의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있다고 용기를 북돋아주는 책이다. 마치 ‘욕망해도 괜찮아’의 작가 김두식교수가 욕망은 감추고 숨겨야 하는 금지된 것이 아니라 솔직하게 인정하고 타일러서 풀어내야 한다고 권유했던 것처럼 ‘방황해도 괜찮아’라고 타이른다.
따라서 이 책에서의 방황은 좋은 것이다. 우리가 흔히 쓰는 ‘방황’이라는 단어의 뜻도 물론 있지만, 더 의미적으로 가까운 말을 찾아보자면, 자유를 찾아가는 여정,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한 도전, 안정에서의 탈 출, 새로운 것에 대한 시도 등이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방황을 자유를 되찾는 과정이라고 생각해보자. 우리가 태어날 때는 길들여지지 않았다. 두려움도 없고, 부끄러움도 없다. 내가 말하는 것이 나의 욕망의 표현이고, 내가 행동하는 것은 내 생각과 일치한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가면서 부모의 양육과 학교에서의 교육, 사회에서 요구되는 많은 것들에 의해 우리의 자유는 제약받는다. 우리는 혼나지 않기 위해서, 또는 남들과 모나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사회적으로 인정받기 위해서 스스로 경계선을 그어놓고 그 밖으로 한발작도 넘어가지 않는다. 이러한 웅크림은 우리의 자유로운 본성을 망각하게 할 뿐만 아니라 마음껏 날아야할 상상의 날개도 꺾어 버린다. 이제는 착한 아들, 모범적인 학생, 성실한 직장인에서 벗어나, 나의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자. 그리고 이렇게 얘기해보자 ‘저 그렇게 하기 싫습니다.’
익숙하지 않은 것은 불편하다. 집을 떠나 새로운 곳에 가면 불편한 것 투성이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도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것이 아니다. 그냥, 내가 있는 이곳에서, 지금의 내 주변사람 또는 나 혼자 그냥 지내면 안 될까? 뭐,세상 모든 만사가 예측가능해서 그렇게 내버려둔다면 모르겠지만, 이 세상에 고정불변한 것은 없다. 시간은 나를 배려해주지 않는다. 태풍이 나의 보금자리를 빼앗을 수도 있고, 사랑스러운 가족과 몸에 맞는 옷처럼 편한 친구들은 훌쩍 떠나버릴지 모른다. 여의치 않아 짐을 싸서 먼 길을 나서야할 때가 생길 수도 있다. 험한 파도에 떠밀려 도망치듯 떠날 것이냐, 아니면 스스로 짐을 꾸리고, 든 든히 차려입고서 파도를 타며 항해할 것이냐는 나의 선택에 달려 있는 것이다.
어느 것 하나 쉬운 것은 없다. 몇 년만 더 참으면 괜찮아지겠지. 돈을 좀 더 모으면 자유롭게 살아야지. 여유가 생기면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걸 할거야. 이렇게 확실하지도 않은 미래에 기대어 현재를 저당잡힌 채 하루하루 살아가면, 몇 년을 더 참아도 괜찮지 않고, 돈을 모아도 자유롭지 않으며, 영원히 그 여유란 것도 생기지 않을지 모른다. 그냥 지금부터 시작하자. 오늘부터 내 마음 속 깊이 묻어둔 자유를 꺼내어 나의 입술로, 머리로, 손발로 실천하고 마음껏 발산하자. 방황은 나를 성숙하게, 새롭게, 자유롭게 할테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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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의 글이기 때문인지 자기계발서나 기타 에세이와는 다른 방식으로 문제에 접근한다. 해결방법을 특별히 제시, 권유하지 않으며 단지 방황을 통해 자유를 찾는 것에 대해 긍정하고, 많은 곁들인 이야기들을 내포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