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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민음 지식의 정원 시리즈 서양사편 11권중 5권이다. 시리즈는 이번에 완간 되었지만 이 책은 2011년에 출간되었다. 어찌보면 당연할 법한 이야기들, 어찌보면 모르고있던 이야기들을 쉽고 재미있게 재구성하여 독자들에게 접근한다. 두꺼운 책인줄 알았는데 가볍고 활자도 커서 읽기 편했다. 마침 읽고있던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멸망 이후의 지중해 세계>와 대비되어 훨씬 흥미있게 읽을수 있었다. 저자는 동국대 사학과 교수인 남종국이다.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시기는 중세 후반이라는 11세기부터 16세기의 기간이다. 저자는 이 시기 지중해의 교류가 유럽의 발전에 큰 역할을 했기에 이 시기를 주목한다고 밝혔다. 단지 그 관점이 갈등과 전쟁이 아니라 교류와 접촉이라는 점이 다르다. 그래서 책의 내용은 지중해의 자연환경, 전환점이 된 사건, 교환된 물품, 해상수송능력, 교역 담당층 으로 분류되어있다. 역사에서 교역이란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너무나도 중요한 지역간 민족간 교류의 표현이다. 고금과 동서가 다르지 않다.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들어보았을 칼 폴라니는 특히 고대부터의 교역을 중시했다. 드러난 사료가 많지 않을때는 특히 교역의 문제가 포인트가 된다. 중세시기의 지중해를 정치나 종교상의 관점으로 볼수도 있고 다분히 그래오기도 했으나 교역을 중심으로 주변의 정세를 풀어나간 방식은 이 책의 특징이고 장점이 되겠다. 주요 내용을 소개해보면. 지중해는 해류, 바람, 해안선과 같은 자연환경과 기술의 한계가 항로를 결정했는데 이때 유리한 항로는 북쪽해안이었으므로 지중해 북부 기독교세력이 항해에 유리한 위치였다. 십자군전쟁은 이탈리아의 여러 해양도시가 무역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고 특히 1204년의 4차 십자군이후 베네치아가 가장 강한 해상세력으로 부상할수 있었다. 13세기 몽골의 서방진출은 지중해세계의 지리적 지평을 확대하여 인도와 중국에 이르는 안전한 육상교역로가 확보되었다. 이를 13세기의 세계체제라 부르는 학자도 있다. 몽골의 멸망이후 육상교역로가 막히고 지중해세계가 다시 중요성을 띠게 되었을때도 지중해전역을 통제하는 해상패권국가는 존재하지 않았고 오스만제국의 출현 뒤에도 동지중해를 봉쇄하거나 교역을 방해하지는 않았다. 지중해 무역을 쇠퇴시킨 존재는 포르투갈의 새로운 인도항로 개척이 아니라 16세기 이후 등장한 영국과 네덜란드의 대서양항로였다. 지중해 무역의 대표적인 상품은 향신료인데 이 향신료는 매우 다양한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즉 향신료에는 의약품과 산업원료를 포함한 쌀,꿀,설탕,건포도,염색재,원면,종이,유향 등 193개 품목이 포함되어있다. 따라서 지중해무역은 사치품무역이 결코 아니었다. 가장 중요한 상품은 향신료가 아니라 직물산업의 원료인 원면과 명반,인디고 등 염색재료였다. 면직물산업은 이 시기 지리적으로도 크게 성장을 보인 산업이었다. 모직산업의 발달은 동방수출의 증가로도 이어졌다. 음식에 쓰는 향신료는 동방이 공급자였으나 직물산업은 상호교환이었다. 그러나 지식과 기술의 전파는 역시 일방적으로 동방에서 서방으로 흘러들어왔다. 이를 통해 중세말 지중해의 항해혁명이 가능했다. 선박건조기술의 발달과 함께 나침반,해도,방위표가 등장하여 겨울항해가 가능해졌고 그에맞춰 경제규모 역시 크게 성장하여 대항해시대의 기반이 되었다. 기독교상인과 이슬람상인은 서로 배척하지 않고 함께 활동했으며 중소규모였으나 유대상인들의 활약도 있었다. 그중 가장 큰 활약을 보인 것이 이탈리아상인들이었다.
수요와 공급을 놓고볼 때 수요는 대개 유럽이었고 공급은 대개 동방 이슬람국가였다. 그러나 수요자들은 이를 받아들여 자기화하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한편으론 경쟁을 계속하여 마침내 대항해시대를 맞이할수 있었다. 시오노여사에게서 볼수 없는 전문성을 확인할 수 있었고 역사가에게 필요한 다면적이고 다양한 사고와 관점을 볼수 있어 좋았다. 얼마전에 동양과 서양에 대한 책이 새로나왔다는 소식을 접했다. 근대이전까지 동양이냐 서양이냐 하는 논의는 무의미하다. 확실하게 모든 면에서 동양이 우세했던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방세계는 침체했고 서방세계는 산업혁명을 통해 근대로 진입했다. 그것을 역사의 성주괴공으로 볼수도 있지만, 나아가고자 하는 욕망 개선하고자 하는 의지 즉 안주하지 않으려는 인간의 마음이 더 강하게 작용한 때문이라 생각한다. 다른 말로 욕심일지도 모르지만 욕심이 없다면 사람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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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세기 지중해 세계의 정치적 판도에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전 이슬람의 지중해 진출로 대륙으로 후퇴한 서방 기독교 세계가 경제 성장과 인구 증가에 힘입어 본격적인 지중해 진출을 모색하게 된 것이다. 서기 1000년부터 1500년 사이 500년의 시간은 지중해를 통한 교류가 유럽 세계의 성장과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지중해 교류의 핵심 거래 품목이었던 향신료는 유럽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많은 역사가들이 이 중세 후반 500년을 서유럽 기독교 세력이 주도권을 장악한 시기로 평가하며, 특히 이탈리아 상인의 활약상을 강조한다. 그 결과 상대적으로 유대 상인과 이슬람 상인의 역할과 비중이 축소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시각을 바로잡기 위해 이 책에서는 유대 상인과 이슬람 상인이 중세 지중해 무역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상세하게 살펴 볼 것이다. 이 책에서 무엇보다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중세 지중해 교류가 유럽 역사 발전의 원동력이었다는 점이다. 서유럽이 지중해로 다시 진출하던 1000년경은 비잔틴 제국과 이슬람 세계가 월등하게 발전된 시기였다. 후발 주자였던 서방 기독교 세계는 동방으로부터 다양한 방면에서 선진 문화를 섭취해 이를 바탕으로 도약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또한 이 시기의 교류는 서유럽 세계가 근대를 여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중세 말 이탈리아의 주요 상업 도시였던 피렌체와 베네치아가 근대의 여명을 알리는 르네상스 시대를 창조할 수 있었던 물질적인 배경은 지중해 교역을 통해 얻은 부였다. 그리고 중세 지중해 항해혁명이라 불리는 항해 기술과 선박의 발전이 없었다면 콜럼버스와 바스쿠 다 가마는 아시아와 아메리카로 항해를 떠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글은 갈등과 전쟁이 아닌 교류와 접촉의 시각에서 500년간의 지중해 역사를 재구성하고자한다. - 서문 십자군 전쟁은 지중해 무역사에서 전환점이 된 사건으로 이탈리아 여러 해양 도시가 지중해 무역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 베네치아 상인들은 십자군 전쟁이 시작되기 이전에 이미 비잔틴 제국에서 상업적 특혜를 누리고 있었다. 1082년 5월 비잔틴 황제 알렉시우스 1세는 남부 이탈리아를 장악한 노르만 족의 침략에 맞서 군사적 원조를 제공한 대가로 베네치아 상인들에게 큰 혜택을 부여했다.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이 기독교 왕국에서 세운 상업 거류지는 사실상 완전히 독립된 자치 구역이었다.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에 세워진 기독교 왕국은 여전히 이탈리아 해양 도시 국가의 도움을 필요로 했다. 해양 도시 국가의 상인들은 선박을 이용해 기독교 왕국에 필요한 물자와 병력을 정기적으로 공급함으로써 막대한 상업적 이윤을 챙길 수 있었다. 4차 십자군은 베네치아가 동지중해의 해상 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22-24쪽 동방의 상품은 크게 세 개의 경로를 통해 유럽으로 수입되고 있었다. 중앙아시아의 광대한 초원 지대를 가로지르는 북방 노선, 지중해와 인도양을 바그다드, 바스라, 페르시아만을 통해 연결하는 중앙 노선 그리고 알렉산드리아와 카이로, 홍해 지역을 아라비아 해와 인도양에 연결하는 남방 노선이다. 몽골의 사방 진출 이전에는 주로 중앙과 남방 노선을 통해 아시아의 상품이 지중해로 유입되었고 북방 노선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몽골의 서방 진출로 북방 노선의 중요성이 커졌고 흑해는 동방으로 가는 전초기지 역할을 하였다. 특히 크리미아 반도의 남단에 위치한 카파와 타나 그리고 흑해 남부 즉 소아시아 반보 북쪽에 위치한 트레비존드가 중국과 인도로 가는 출발지 역할을 하면서 상업적으로 더욱 번창하였다. 28-30쪽 일찍이 벨기에의 역사가 앙리 피렌은 중세의 시작점을 서로마 제국의 몰락이 아니라 7세기 이후 이슬람의 지중해 진출로 보았다. 39쪽 향신료는 라틴어 스페키에스에서 유래하였는데, 원래 의미는 땅에서 나는 모든 생산물, 구체적으로는 물건 또는 화폐였다. 60쪽 11세기 이후 지중해를 통한 원격지 무역이 활성화되고 유럽에서 여러 자치 도시들이 생겨나면서 도시의 인구 또한 증가했다. 그에 따라 늘어난 인구를 부양해야 하는 부담이 가중될 수 밖에 없었고, 특히 1300년 무렵 인구 10만을 넘었던 베네치아와 제노바 같은 대도시들은 주변 농촌 지역에서 생산된 곡물로는 인구를 부양하기가 불가능했다. 따라서 좀 더 먼 생산지역으로부터 곡물을 수송해야만 했다. 베네치아는 해외의 식민지에서 생산된 곡물들에 대한 독점권을 행사했다. 예컨대 중세 말 베네치아의 가장 중요한 식민지였던 크레타는 베네치아 정부가 정한 가격과 양의 곡물을 매년 베네치아 시에 공급해야만 했다. 그리고 흑해 지역은 제노바의 가장 중요한 곡물 공급원이었다. 술이자 음료수 역할을 했던 포도주도 지중해를 통해 대규모로 거래되었다. 포도주와 곡물 이외에도 지중해 연안 지역에서 생산된 다양한 식량 자원들인 소금, 올리브와 같이 일상적으로 소비되는 식품들 또한 가까운 지역뿐만 아니라 먼 지역으로까지 수송되었다. 올리브는 고대부터 줄곧 지중해 3대 작물 중 하나였다. 고가의 상품이긴 했지만 설탕 또한 지중해의 주요 교역품 중의 하나였다. 지중해 무역이 다양했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는 노예무역이다. 노예 거래도 지중해 무역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13세기 중엽 이후 이집트의 맘루크 왕국이 중요한 고객이었다. 67-72쪽
향신료나 직물과 같은 다양한 종류의 상품과 함께 지식과 기술도 전파되었다. 하지만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지식과 기술의 전파는 일방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는 것이다. 즉 선진 지식과 기술은 거의 항상 동에서 서로 흘러 들어왔다. 1차 십자군 이후 이슬람과 비잔틴 제국과의 교류가 확대되면서 서방 기독교 세계는 이들을 통해 다양한 방면의 선진 문화를 섭취할 수 있었다. 의학, 천문학, 화학, 지리학, 수학, 건축 분야에서 프랑크인들은 아랍 서적에서 지식을 흡수하여 모방하였고 때론 이를 뛰어넘기도 하였다. 농업과 산업 분야에서도 프랑크인들은 아랍의 선진 문명을 받아들였다. 제지술, 직조술, 알코올 증류법, 설탕 제조법 등이 아랍에서 기독교 세계로 전파되었다. 81-82쪽 일반적으로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지식은 중세 이슬람과 비잔틴 세계에서 한층 발전하여 서방 기독교 세계로 다시 전수되었다. 가령 고대 히포크라테스와 갈레누스의 의학 체계는 중세 이슬람 세계를 대표하는 과학자이자 의사였던 이븐 시나에 의해 더욱 정교해졌고 이후 유럽 기독교 세계에 수용되었다. 특히 이베리아 반도의 유대인 의사들이 이러한 전파 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11세기 말과 12세기 초 이베리아 반도를 새로 장악한 알모라비데 왕조와 알모아데 왕조는 그라나다의 유대인들을 축출했고 이렇게 축출된 유대인들은 이베리아 반도 북부, 남부 프랑스, 이탈리아 등지로 이주했다. 기독교 지역으로 쫓겨난 유대인 의사들은 라틴어, 헤브라이어, 카스티야어를 알고 있음에도 연구와 교육에서는 아랍어를 선호했고 15세기 초까지도 아랍어로 의학서를 저술하려고 했다. 아랍어가 의학 분야뿐만 아니라 전문적인 지식을 표현하고 기록하기에 가장 적합한 언어라는 인식은 기독교인들에게도 퍼져 있었다. 82-83쪽 서방 기독교 세계가 본격적으로 종이 생산을 시작한 것은 13세기 후반 무렵부터였고 그 이전까지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로부터 종이를 수입하고 있었다. 13세기 후반에 이베리아 반도에서 종이를 제작하기 시작했고, 이후 다른 지역들도 종이 제작에 뛰어들었다. 중세 말 중부 이탈리아가 주요한 종이 생산지로 부상했고, 특히 파브리아노에서 대량으로 제작된 종이는 전 유럽으로 팔려나갔을 뿐만 아니라 기존의 공급자였던 동방으로까지 수출되기에 이르렀다. 중세 말 종이의 대량 생산은 유럽 역사에서 큰 전환점이 되었다. 대량 생산이 이루어짐에 따라 가격이 낮아졌고 기록 생산은 이제 더 이상 성직자들의 점유물이 아니게 되었다. 상인을 비롯한 중간 계층들도 기록 생산에 참여할 수 있었다. 기록 생산이 늘어나면서 자연스럽게 사상과 정보의 교환이 활발해졌고 그 결과 14-15세기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었던 르네상스 문화가 알프스 이북으로 빠른 속도로 전파되었다. 16세기 독일 등지에서 일어난 종교 개혁이 널리 알려지고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 또한 종교 개혁가들의 사상이 글의 형태로 대중들에게 전파되었기 때문이다.84-85쪽 동방의 선진 기술이 서방 기독교 세계에 전달된 사례는 종이만이 아니었다. 견직물 산업의 경우가 기술 이전의 대표적 사례였다. 십자군 시절 서유럽은 비잔틴 제국에서 생산된 고가의 견직물을 수입해 왔다. 유럽에서 견직을 자체 생산하기 시작한 것은 12세기 후반에 들어서였고 그 중심지는 이탈리아 도시들이었다. 상업 기술과 제도도 서유럽 기독교 세계로 흘러 들어왔다. 선박 기술과 항해 기술의 전파도 유럽 세계를 변화시키는 데 크게 일조했다. 85-86쪽 이슬람 상인과 기독교 상인이 같은 선박을 이용하는 것이 당시로서는 그렇게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 배 위에서 무슬림들은 금요일에, 유대인들은 토요일에, 기독교인들은 일요일에 예배를 드렸다. 121-125쪽 <서구 문명은 동양에서 시작되었다:>의 존 홉슨은 중세 이탈리아 상업 공화국의 상인들이 이룬 성과가 독창적이지도 못하고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고 밝혔다. 확실히 홉슨의 주장처럼 중세 후반 지중해를 통해 이루어진 항해 혁명과 여러 기술적인 혁신과 변화의 기원이 동양이었음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중세 후반 지중해 교류에서 이탈리아 상인들이 했던 역할과 그 의미를 과소평가할 필요는 없다. 이전에는 유대 상인, 비잔틴 제국 상인, 이슬람 상인들이 하던 역할을 이탈리아 상인들이 이어받았던 것이다. 중세 말로 갈수록 지중해 무역에서 차지하는 이탈리아 상인의 비중은 더욱 커졌다. 134쪽 수송 분야에서 우위를 점했다고 해서 이탈리아 상인들이 지중해 무역 자체를 장악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수송 분야와는 달리 현지 시장에서 이탈리아 상인의 역할과 위상은 제한적이었기 때문이다. 135쪽 맘루크 제국 내에서 상업적으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맘루크 황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중세 말 맘루크 제국으로부터 가장 많은 특혜를 얻어 낸 세력은 베네치아였고 베네치아 상인들은 이러한 특혜 덕분에 동지중해 무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138쪽 1204년 4차 십자군의 성공으로 베네치아 정부는 비잔틴 제국 영토의 8분의 3을 확보했을 뿐만 아니라 이전까지 비잔틴 제국이 어떤 이탈리아 상업 도시들에게도 허용하지 않았던 흑해로의 통행권을 확보했다. … 제노바 상인의 영향력이 커지자 비잔틴 황실은 이를 경제하기 위해 다시 베네치아 상인들에게도 유사한 혜택을 부여했다. 그 결과 비잔틴 상업은 점점 더 이탈리아 상인의 수중에 들어갔다. … 중세 말 비잔틴 황실은 이탈리아 해양 공화국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서유럽 출신의 황후를 맞이하는 경우가 늘어났다. 시간이 갈수록 이탈리아 출신 황후가 늘어났고 이러한 국제 혼인 동맹을 주도한 것은 제노바였다. 그러나 14세기 후반 시작된 오스만 제국의 팽창은 이 지역에서 이탈리아 상인의 입지를 점진적으로 약화시켰다. 베네치아와 제노바는 에게 해 주변에 있는 식민지들을 점차 오스만 제국에 빼앗겼고 상업 활동도 제한받았다. 139-141쪽 중세 내내 이슬람 상인과 선박이 지중해 교역에서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중세 말 지중해 교역에서 이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기독교 상인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낮았다. … 이탈리아 상인들이 이슬람 세계에서 얻고자 했던 것은 아시아로부터 들어오는 향신료였다. 그런 점에서 이슬람 상인들에게 제일 수지맞는 장사는 인도양에서 향신료를 들여야 유럽 상인들에게 판매하는 것이었다. 이슬람 세계에서 유럽의 이탈리아 상인과 같은 국제적인 거상의 출현을 가능케 한 사업 또한 바로 인도양을 무대로 한 향신료 무역이었다. 그들은 카리미라 불리는 상인들로 향신료 무역에서 막대한 부를 축적했고 이집트 경제를 지탱하는 기둥 역할을 했다. … 카리미 상인의 전성시대는 12세기부터 15세기까지였다. 이들이 본격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계기는 12세기 후반 살라딘의 새로운 상업 정책 덕분이었다. 이집트를 정복한 살라딘은 홍해 무역에서 외국 상인들을 배제하고 토착 무슬림 상인을 적극적으로 육성하는 정책을 실시했다. 맘루크 제국에서도 카리미 상인들은 술탄의 지원 하에 사업을 계속 확장하며 이집트 경제에서 가장 중요한 세력으로 부상했다. … 술탄이 이들의 상업 활동을 적극적으로 후원한 이유는 이들에게서 상당한 세금을 안정적으로 거둘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 카리미 상인의 주요 거래 품목은 후추를 포함한 향신료였다. 그래서 그들은 향신료 상인으로 불리기도 했다. … 향신료를 예멘의 아덴항까지 수송하는 일은 주로 인도 상인들의 몫이었고, 아덴에서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까지 이어지는 해로와 육로 수송은 카리미 상인의 몫이었다. 143-145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