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방이나 육이오 전란과 같은 과정을 거쳐오면서 작가 최일남은 끊임없는 자기 반성을 거듭해왔다. 가난한 살림에도 불구하고 대학을 다니기 위해 서울로 유학간 작가 최일남의 개인사가 소설 속에서는 비난받을 구조의 인물로 나타나곤 하는 것으로 보아, 자기반성의 끈을 쉽게 놓지 않으리라는 것을 확인한다. 그의 초기작 중 하나인 <너무 큰 나무>에 등장하는 주인 아저씨는 시골에서 올라와 출세한 사람의 전형이다. 촌놈의 외양은 변했으나, 그 내면은 오히려 속물 근성으로 꽉 차 있는 것이 최일남 소설에서 출세한 사람의 기본 구조라 할 수 있다. '명사'인 주인 아저씨는 밖에서는 꽤 저명한 인물로서 권위를 가지고 있으나, 가정에서는 전혀 그렇지 못하다. 한 인물의 안과 밖이 이처럼 차이를 가지는 것은, 시대를 거스른 당시의 사회 구조적 모순을 나타내고 있다. 우리 사회는 민주주의 체제를 도입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정권을 잡은 사람들은 입으로 '민주주의'를 부르짖었으나, 보다 많은 사람들의 자유를 억압하면서 군림하고자 노력했고,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갖은 술수를 쓰고는 했다. 이와 같은 일련의 과정들이 한 인물 속에 모두 내포되어 있기 때문에, 사실상 작품에서의 정치를 발견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또한 <너무 큰 나무>의 화자는 식모로서, 명사의 집에서 일한다는 자부심은 있으나 오히려 다른 식모보다도 적은 월급을 받는 상황이다. 이는 명사와 식모의 대립, 즉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대립을 극명하게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명사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심지어는 고물장수와도 실랑이를 벌이는 사람인 반면, 식모는 훌륭한 아저씨 집에 있으므로 그깟 돈 몇 푼 안 받아도 괜찮다는 식의 태도를 보인다. 이러한 대립구도가 정치의 모티브를 띠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드는 것은 '해학과 풍자, 유머러스한 구절 등을 어떠한 관점으로 보아야 하는가' 이다. 얼핏, 최일남의 문체는 우리사회에 만연해 있는 모순을 비난하기에는 상당히 어울리지 않는 듯하다. 작가 최일남의 작품을 읽는 동안, 나는 작가 김소진이 떠올랐다. 토속적인 언어를 절묘하게 구사해내는 김소진의 입담과 최일남의 쉼 없는 '말'이 닮아 있다고 생각한 때문이다. 과연 이러한 문체가 주제의식을 드러내는 데 기여하는 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이 땅의 무거운 정치를 한없이 가볍게 포장함으로써, 암울한 시대상을 최소화시키려고 한 최일남의 노력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또한, 문학은 시대를 반영해야 하되, 또 반영해서는 안 되었던 당시의 사회에서 작품을 살리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생각도 든다. 마지막으로 최일남이 생각하는 정치의 범주를 인식한다면, 굳이 애를 쓰지 않아도 문학과 정치의 관계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최일남은 앞에서 언급했던 거창한 민주주의가 아니라 하더라도, 가족의 해체나 개인의 혼란 등을 정치의 틀에 껴 맞춘 것이다. 다소 표현이 부정확할지도 모르겠다. 개인의 일상사를 정치로 바라보는 시각에 대한 이해가 깊이 요구되는 작품이 아닐 수 없겠다. <서울 사람들>의 네 남자가 시골에 갔다가, 서울이 못내 그리워 급하게 올라온 것처럼 우리는 그냥, 있어야 할 자리에서 본인의 삶을 정당하게 정치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