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정치적인 현안이 생길 때마다 수많은 말들을 접한다. 신문방송은 말할 것도 없고, 각 정당의 대변인을 통한 논평들이 그것이다. 그리고 공론을 모아야 하고, 공론이라고 말하면서 각자 자신의 정파가 옳다고, 또는 자신들이 옹호하는 가치를 위해 사실의 호도와 인신공격도 불사한다. 정작 주인이 되어야 할 국민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데 말이다. 민주주의의 발원지는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인 아테네이다. 아고라에서 아테네 시민들은 지배나 강제가 없는 완전한 정치적 자유와 평등을 향유했다고 한다. 그리고 언어를 통한 논쟁과 설득으로 공적 현안들을 다루었다. 아테네 직접 민주정치의 핵심은 이러한 공론의 정치였다고 한다. 그러나 현대국가에서는 아테네에서 이루어지던 직접 민주주의가 불가능하다. 그래서 저널리즘 매체인 신문이나 방송들의 미디어는 종종 현대판 아고라로 간주되고, 정치평론가(저널리스트)는 아테네의 시민에 비견된다고 한다. 한국정치평론학회 구성원들의 논문을 모아 펴낸 이 책은 그러한 정치평론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연구결과와 미디어와 정치평론이 가지는 상관관계 등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비전공자가 보기에는 다소 어렵고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기도 하지만, 우리가 일상에서 수없이 접하는 정치평론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는 생각이다. 정치세계를 구성하는 정치적 인간은 세 종류로 나눌 수 있으며, 정치행동가와 정치사상가, 그리고 정치평론가가 그들이라고 한다. 정치행동가는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으로 말보다 행위가 주이며, 그들의 말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동원되는 수사적인 말이라고 한다. 정치사상가는 정치이념과 사상에 대해 고민하고 평가하는 지적 탐구를 하는 사람이고, 정치평론가는 정치행위를 하지는 않지만 현실정치에 몸담고 있으며, 지적 탐구는 하지 않지만 현실정치에 대해 말하고 비판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인간사회는 원래 구두로 말을 주고 받으면서 형성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문자 위주로 사물을 생각하는데 익숙해져서 말이 인간세계의 근저를 떠받치고 있다는 사실을 종종 망각한다고 한다. 따라서 정치평론가라고 하는 저널리스트들은 그들의 말을 통하여 의사소통적 공동체를 형성하고, 그 공동체가 유지되기 위해서 필요한 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하는 일이 자의적이거나 강제적인 것이 되지 않도록, 의사소통 행위가 합의를 통한 공적의견 혹은 공론의 수준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고 필자는 말한다. 또한 전통적인 저널리즘은 사실과 실체를 다루었다고 한다. 따라서 뉴스는 사실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되었고, 저널리스트는 사실에 충실한 것이 기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자본, 기술, 저널리즘, 권력이 하나의 먹이사슬이 되어 서로가 서로에게 예속되었고, 또 예속시키고 있다. 그 결과 저널리스트들의 말은 공적의견 혹은 공론의 수준에 도달 하기는커녕 저급한 인신공격과 가정을 통한 사실의 호도에 앞장서게 되었고, 또 자신이 정치행동가로 나서기 위한 사전 준비단계로 삼고 있는 경우도 있어, 이것이 오늘날 정치불신을 가중시키는 주원인이 아닌가 싶다. 책은 또 한국의 정치평론에 대하여 이야기하면서 선조의 기질을 바꿔 임금과 신하들간의 진정한 소통을 이루려는데 목적을 둔 [성학집요]를 지은 율곡 이이를 정치평론가로 보고 있다. 율곡이 살았던 시기는 성리학이 꽃을 피운 시기이나 정치적으로는 쇠락의 길을 걷고 있었지만, 그는 성리학을 체계적으로 세우려는 노력보다는 시급한 정치문제 해결에 적극성을 보였기에 정치평론가의 모습에 더 가깝게 느껴진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구한말 독립신문과 만민공동회는 토론회를 활성화 시키고, 신하의 상소와 군주의 비답과 같은 전통적인 의사소통 방식을 근대적인 의사소통 방식으로 변화시킨 근대적 공론의 역할을 해내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와 우리나라 정당 대변인의 논평을 보면 약 70퍼센트 이상이 상대방에 대한 공격등 부정적 논평이라고 한다. 이는 타협에 도달하기 어렵고, 또 어렵게 도달한 타협이 쉽게 와해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고 한다. 이러한 한국의 반정치적 논쟁 패턴의 역사적 기원은 고려말 척불논쟁에서 찾을 수 있으며, 이것이 조선조 연산군 때는 사화로, 그리고 그 후에는 당쟁의 형태로 나타났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반정치적 논쟁 패턴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한국정치의 논쟁 패턴은 수백년에 걸쳐 형성된 한국정치의 관습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관습의 개혁 없이는 불가능 하다고 말한다. 그러한 관습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먼저 관습 그 자체의 실상을 밝혀내는 연구가 축적되어야 하고, 그리고 개혁 가능한 관습부터 꾸준히 개혁해 나가야 한다고 필자는 말한다. 책은 또 미국의 한반도 외교정책에 대한 정치평론을 싣고 있다. 미국의 한반도 정책은 미국 외교사학계가 끊임없이 제기해온 미국외교의 역사적 전통과 속성을 반영하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미국의 한반도 정책을 분석하려면 역학관계나 전략적 환경 등의 외생적 요인들도 고려해야 하지만, 미국외교 역사를 이끌어온 내생적 요인들에 대한 통찰이 요구된다고 한다. 한미동맹과 북한 핵문제도 이러한 통찰 속에서 파악해야 하고, 한반도에 투사되는 미국외교의 속성과 규범을 간파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백악관의 주인이 누가되던 미국 외교정책의 기조는 결코 바뀌지 않는다는 통설은 변화와 개혁을 기치로 내건 오바마 행정부 역시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 책은 민주주의와 공론정치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아렌트와 하버마스의 저작과 이론들을 매우 많이 인용하고 있다. 조금은 어렵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공론정치란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의 정치평론이 오늘날 왜 이런 모습인지를 설명하는 논문은 한국정치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할 시간을 주기도 한다. 파벌의 원인이 인간의 자연스러운 성향, 즉 본성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데이비드 흄은 말했다고 한다. 그의 말이 조금은 위안을 주는 까닭은 무엇일까 |
|
무엇이 정치평론인가? 이동수는 ”정치행동가1)와 같이 직접적인 정치행위를 하지는 않지만 현실정치에 몸담고 있으며, 정치사상가2)처럼 고상한 정치 일반에 대한 지적인 탐구를 하지는 않지만 현실정치에 대해 말하고 대화하며 비판하는 사람”3)을 정치평론가(political critic)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들의 역할은 흔히 정치가라고 부르는 정치행동가나 철학자라고 부르는 정치사상가와 달리 흔히 언론인이라고 부르는 자들과 유사하다. 그렇기에 혹자(或者)는 직접 민주정치의 발원지였던 고대 아테네의 아고라에서 시민들에 의해 행해졌던 정치행위를 이들이 행하는 정치평론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하지만 고대 그리스의 정치체제는 아무리 화려하게 꾸며도 민주정보다 과두정(寡頭政)에 가깝다. 예컨대 기원전 5세기 무렵 아테네의 인구 25만 명 가운데 시민의 숫자는 겨우 3~4만 명에 불과4)하다고 한다. 같은 시기의 스파르타는 그 숫자가 더 극단적으로 줄어들어 완전시민권을 가진 스파르티아테스(Spartiates)가 불과 5,000명5)에 불과하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고대 그리스의 정치는 사실상 확대된 과두정(寡頭政)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그렇기에 고대 그리스에서의 정치평론은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선택된 소수에 의한 여론몰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소위 정치평론이라는 것이 소수의 이익을 위한 언론플레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부정하기 어렵다. 기자 혹은 논설위원 등의 명칭을 가진 언론인들은 고대 아테네의 아고라처럼 말을 통한 논쟁과 설득을 통해 여론을 이끌어나간다. 아니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그들은 입법, 행정, 사법과 버금가는 “제4부”로 일컬어지고 있으며, 스스로도 일반인과 다른 우월한 존재라고 여긴다. 그렇다 보니 제대로 정치평론을 하려면 아렌느적 lexis6)와 하버마스적 logos7)의 두 차원을 동시에 만족시켜 주는 말이어야 한다8)는 것을 망각하고 자신의 감정에, 혹은 이익에 얽매여 정치평론을 하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공론(公論)임을 표방하면서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실을 호도(糊塗)하거나 인신공격도 불사하는 사론(私論)이자 사론(邪論)이 되어 버렸다. 물론 이러한 문제가 언론인 개인의 인성문제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다. 언론이 정치평론의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에는 5만 명이 넘는 기자의 대부분이 기본 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월급으로 생계를 꾸려나가야 하는9), 영세한 한국 언론의 구조적인 모순에서 야기된 부분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떠한 핑계를 대든 한국의 정치평론이 “공론(公論)”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인 셈이다. 어떻게 정치평론을 해야 하는가? 지금의 정치평론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해야 제대로 된 정치평론이 나올 수 있을까? 정치평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소통”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의외로 쉽게 해답을 찾을수 있다. “소통”이 없는 정치평론은 여럿이 함께 한 사안을 따져보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는 “의(議)”와 그 사안의 시비를 가리는 결론이라고 볼 수 있는 “논(論)” 가운데 “의(議)”가 결여된 상태를 의미한다. 이러한 상태의 문제점은 소위 “청류(淸流)”나 “깨끗함”을 강조하는 사람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자신만 옳다는 독선으로 흐를 위험성이 크다는 것이다. 조선 선조 때, 우리 조상들은 국인(國人)의 민정(民情)이 아닌 삼사(三司)만의 결정을 공론(公論)으로 인식하는 바람에 시비를 가리는 “논(論)”만 횡행하였다. 그 결과 공론(公論)이 아닌 당론(黨論)을 따르는 붕당(朋黨)의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고, 이러한 붕당(朋黨)에 따른 당쟁(黨爭)의 과정에서 상대와의 타협이나 소통을 거부하는, 제살 깎아먹기 식의 잘못을 저지르는 바람에 사태가 점점 더 악화되었다. 물론 당시 걸출한 성리학자였던 율곡 이이(栗谷 李珥)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일종의 정치평론서인 <성학집요(聖學輯要)>를 통해, 왜곡될 수 있는 민의(民意)보다는 현실정치에 대하여 느끼는 직접적 감정10)인 민정(民情)을 정치의 장에서 살려낼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를 통해 정책의 우열(優劣) 문제를 도덕적 시비(是非)/선악(善惡) 문제로 인식하여 발생한 붕당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였다. 하지만 그의 노력은 결실을 맺지 못했고, 그 실패가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는 한국사람이라면 모두 다 알고 있다. 비록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지만 이러한 것이 바로 제대로 된 정치평론이다. 오늘날처럼 논평이나 논설 등의 형태로 쓰레기와 욕심을 쏟아내는 현상이 지속된다면 결국 국민들의 외면을 받을 수 밖에 없다. 그런 점을 감안하면 언론인들이 자칭/타칭의 “제4부”를 유지하기 위해서, 율곡 이이(栗谷 李珥)처럼 제대로 된 정치평론을 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은 책에 대한 리뷰입니다. --------------------------------
1) 이동수는 정치행동가를 “세계의 현장에서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직접 행동으로 옮기며 적극적으로 구체적인 현실을 움직여 나가는 사람”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2) 이동수는 정치사상가를 “끊임없이 정치의 이념과 사상을 천착함으로써 보편적인 정치 일반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3) 이동수, “정치평론에서의 lexis와 logos”, (사)한국정치평론학회 편, <미디어와 공론정치 – 정치평론이란 무엇인가? - >, (인간사랑, 2011), p. 36 4) 페리 앤더슨, <고대에서 봉건제로의 이행>, 유재건/한정숙 옮김, (창작과비평사, 1990), p. 38 에서 “기원전 5세기 아테네에는 약 8만 내지 10만의 노예와 약 3, 4만의 시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하였다. 또한 기원전 5세기 초 아테네 제국에 대해 묘사한 같은 책 p. 37에서 “인구는 25만여 명에 불과했지만 ~ 그리스 최대의 도시국가였던 아테네 ~”라고 기술된 점을 감안하면 총인구에서 시민이 차지하는 비율은 높지 않았다고 보인다. 5) 배영수 편, <서양사강의>, (한울, 1992), p. 38에 의하면 그나마 100년 뒤인 기원전 371년에는 계속되는 전쟁으로 스파르타의 시민 숫자가 5,000명에서 1,000명으로 줄어들었다. 6) lexis란 “일반대중들이 사적인 공간에서 나누는 정치에 관한 대화”를 말한다. 7) logos란 “정치사상가들이 탐구하는 정치에 대한 철학적 담론”을 말한다. 8) 이동수, 앞의 글, p. 55 9) 임상원, “공적 영역으로서의 저널리즘에 관한 사유”, (사)한국정치평론학회 편, <미디어와 공론정치 – 정치평론이란 무엇인가? - >, (인간사랑, 2011), p. 20 10) 최진홍, “정치평론가 이율곡”, (사)한국정치평론학회 편, <미디어와 공론정치 – 정치평론이란 무엇인가? - >, (인간사랑, 2011), p. 1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