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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인문학상 심사위원들에게 몹시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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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동인문학상을 받은 장편소설이다. 심사위원들의 거의 만장일치의 지지를 받았다고 하는데, 개인적인 생각으론 글쎄요다. 이런 방식의 사고와 이런 방식의 글쓰기가 돋보일 수는 있으나 소설 본연의 목적과 대중의 이해에 부합했는지에 대해서는 이론이 클 수 있다. 아니, 작가가 창조한 '어떤 작위의 세계(문체, 생활스타일, 생각스타일)'를 굳이 독자가 이해할 필요도 없지만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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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동인문학상을 받은 장편소설이다.

심사위원들의 거의 만장일치의 지지를 받았다고 하는데, 개인적인 생각으론 글쎄요다.

이런 방식의 사고와 이런 방식의 글쓰기가 돋보일 수는 있으나 소설 본연의 목적과 대중의 이해에 부합했는지에 대해서는 이론이 클 수 있다.

아니, 작가가 창조한 '어떤 작위의 세계(문체, 생활스타일, 생각스타일)'를 굳이 독자가 이해할 필요도 없지만 그런 개인만의 작위의 세계를 창조한 소설가에게 매우 대중적인 소설가들이 모여서 매우 대중적인 상을 주는 건, 어떻게든 작위적이다.

쉽게 말해 이해하기도 어렵거니와 끝내 이해할 수도 없었다.

...잠깐 정영문의 문체를 흉내 내봤는데 매우 부드러운 예이고, 실제 그의 글은 매사 서너 문장이 결합될만큼 지루하게 길고, 동어 반복적이며, 앞뒤를 뒤틀고, 문장과 단어를 비꼬아서 해독도 어렵거니와 읽는 재미를 싹 반감시켜 버린다.

작가가 터득한 이 희귀한 문체는 단연 이 소설의 백미일 수 있겠으나 읽기 불편한 소설만큼 가치 없는 소설도 없다는 지론상 이 책은 절대 별 3개 이상은 불가하다.

문체의 불편함과 사고(그의 머리속은 세세히 평하지 않겠다.)의 실없음으로 낭비한 내 아까운 시간, 장시간 화장실 변기에 찍힌 엉덩이, 그리고 책값에 대한 복수로, 나는 정작 '어떤 작위의 세계' 챕터 바로 앞에서 읽기를 중단해버렸다.

통쾌하다.

 

<추신>

1.

한강의 '희랍어시간'과 김애란의 '비행운'이 얼마나 좋았는데...

2.

동인문학상 심사위원들.

스스로들 이 책이 진정 우수한 소설이었는지, 아니면 지적 허영, 즉 요런 해괴한 책 한권 정도는 꼽아주어야지 하는 잘난 체의 발로였는지 진심으로 묻고 싶다.

 

 

 

YES마니아 : 플래티넘 s***u 2012.11.23. 신고 공감 2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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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도 쿨하게 인정하고 있는 이 '자의식 과잉'의 한껏 허황된, 재미 고찰 보고서... 어떤 작위의 세계
"스스로도 쿨하게 인정하고 있는 이 '자의식 과잉'의 한껏 허황된, 재미 고찰 보고서... 어떤 작위의 세계" 내용보기
정영문의 소설은 내게 과거의 이인성이나 최수철, 최근의 정찬과 비슷한 맥락에서 받아들여진다. 전통적인 소설의 내러티브에 익숙한 사람들은 쉽사리 접근하기 힘든 보이지 않는 방벽을 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렇게 계간지나 이상문학상 수상집 등에서 간혹 읽는 단편들을 제외한다면 그의 장편 소설을 (그가 번역한 레이몬드 카버나 존 파울즈의 소설은 읽은 경험이
"스스로도 쿨하게 인정하고 있는 이 '자의식 과잉'의 한껏 허황된, 재미 고찰 보고서... 어떤 작위의 세계" 내용보기

  정영문의 소설은 내게 과거의 이인성이나 최수철, 최근의 정찬과 비슷한 맥락에서 받아들여진다. 전통적인 소설의 내러티브에 익숙한 사람들은 쉽사리 접근하기 힘든 보이지 않는 방벽을 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렇게 계간지나 이상문학상 수상집 등에서 간혹 읽는 단편들을 제외한다면 그의 장편 소설을 (그가 번역한 레이몬드 카버나 존 파울즈의 소설은 읽은 경험이 있지만) 끝까지 읽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실토해야겠다.


  아예 살 엄두도 내지 않았던 그의 소설을 이번에 구입한 것은 과거 여자 친구와 그녀의 멕시코계 남자 친구 운운하는 첫부분에서 그간의 작가가 보여주던 것과는 조금 다른 가벼움이 얼핏 읽혔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문화재단의 지원을 받아 샌프란시스코에 머물며 작성한 글이라는 실토와 함께 ‘지극히 사소하고 무용하며 허황된 고찰로서의 글쓰기에 대한 시도’라고 자신의 글쓰기를 폄훼하고 있는 모양이 더욱 독자인 나를 자극한 것이다.


  “... 내가 재미없게 생각하는 것들을 들면, 모든 종류의 소음... 시대를 반영하는 소설... 등장인물의 생각보다 행위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소설... 자의식의 과잉이 묻어나지 않는 소설... 상식적인 것, 뻔한 수작(을 부리는 사람)... 그리고 내가 재미있게 생각하는 것들은.... 말하는 것이 거의 없는 시와 소설... 자유자재로 말들을 갖고 놀 수 있는 경지에 오르는 것, 근거가 전혀 없거나 상당히 근거 없는 생각들, 아무것도 아닌 뭔가에 대해 혼자만의 이론을 펼치는 것...”


  더불어 스스로 밝히고 있듯 이 소설은 재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토로하는 글이기도 한데, 대략 ‘자의식의 과잉이 묻어나지 않는 소설’을 싫어하고, ‘말하는 것이 거의 없는 시와 소설’을 좋아한다는 위의 문장이 있는 부분을 살펴보면 작가가 가지고 있는 재미라는 것의 일단을 살펴볼 수 있기도 하다. 그리고 독자인 우리가 느끼는 재미의 대부분은, 이렇게 (읽기가 녹녹치 않은 작가군으로 분류되는) 작가의 속살을 들여다보는 재미에 다름 아니다.


  “... 이야기가 또 옆으로 새는데, 그것은 이 소설이 어디로 나아가도 좋기 때문이고, 이것은 또한 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내가 원하는 것은 하나의 이야기에서 또 다른 이야기가 파생하고 이탈해 그것들이 뒤섞이며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되는 소설이다.”


  사실 작가의 이번 소설은 그러니까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작가들이 보통 수상집에 한 편씩 덧붙이고는 하는, 자신의 글쓰기 작업에 빗대어 함께 싣는 자선작과 닮아 있다고 할 수 있다. 허황되고 무작위로 뽑혀진 것과 같은 상황과 사람과 동물과 자연이 어우러진 소설을 읽고 있자면 소설가 정영문이 지향하는 바 혹은 지양하는 바로서의 소설 내지는 글쓰기에 대한 구구절절한 설명이라는 엑기스만을 쭈욱 잡아 뽑을 수 있다.


  “... 나 자신이 세상의 누구와도 더 이상 관계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상태에 이르렀고, 그래서 관계가 문제가 되는, 인물들이 갈등을 빚는 소설을 쓰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내가 실제 삶 속에서도 관계가 문제가 되는 관계를 갖지 못하는 것이 어떤 불구 상태인 것처럼 여겨졌지만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글이 씌여진 장소가 샌프란시스코라는 점을 고려할 때) 아마도 우리나라 사회의 일반적인 삶에서 무척 지루함을 느끼고 있었던 듯한, 그리고 그러한 나라에서 그러한 나라의 사람들과 맺는 관계에 대해서도 불구라는 느낌을 받고 있었던 듯한 작가는 그러한 '지루함을 길게 표현한 것‘으로서의 소설을 작성하고 있다, 고 느껴질 뿐 아니라 스스로도 누차에 걸쳐 그런 뉘앙스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 이 소설에는 뜬구름이라는 제목을 붙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것은 내 생각에 자연계의 모든 것 중에서도 그 안에 핵심이 없다는 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뜬구름이기 때문이며, 동시에 생각과 말의 어지러운 장난에 지나지 않는 이 소설이 뜬구름처럼 아무런 핵심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스로 ‘작위의 세계’라고 밝히면서 그간의 자신의 이런저런 작업들 혹은 그러한 작업들의 대상으로 삼았던 세계에 대한 끊임없는 폄훼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야 하는지가 의심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이렇게 폄훼된 작가의 창작 작업은 위선이 판치는 문명계를 향하여 보내는 위악이라는 이름의 자연계의 반란처럼도 읽힐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시선 또한 갖게 되는 것이다.


  자신을 바라보는 (것처럼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일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다. 하물며 자의식의 과잉이라는 천형을 달고 살아야 하는 (작가 자신이 쿨하게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처럼) 소설가에게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그러니 이 한 편의 소설로 작가를 모두 들여다본 것처럼 너절하게 글을 쓰는 나 자신에 대해 미덥지 못한 마음을 품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다. 여하튼 자신의 스타일을 유지하거나 깨뜨리면서 창작 작업을 (고충 속에서도) 무난히 해내는 작가들에게는 눈길을 줄 필요가 있다.



YES마니아 : 플래티넘 k******i 2011.12.01.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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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를 기다리며- 어떤 작위의 세계 / 정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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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살스런 라마’를 닮아간다는 소설의 화자. 나는 익살스러운 라마를 본 적 없으니 소설 표지 뒷면의 작가 사진을 보며 ‘어두운 과거를 떠올릴 때의 어떤 동물의 눈’으로 ‘평생 혼란을 떨치지 못하는’ 시선을 지닌 익살스러운 라마를 상상했고 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나를 상상했다. 이 사진 속의 남자와 그가 구축한 ‘어떤 작위의 세계’ 속 상상하는 화자가 동일인인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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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살스런 라마’를 닮아간다는 소설의 화자. 나는 익살스러운 라마를 본 적 없으니 소설 표지 뒷면의 작가 사진을 보며 ‘어두운 과거를 떠올릴 때의 어떤 동물의 눈’으로 ‘평생 혼란을 떨치지 못하는’ 시선을 지닌 익살스러운 라마를 상상했고 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나를 상상했다.


이 사진 속의 남자와 그가 구축한 ‘어떤 작위의 세계’ 속 상상하는 화자가 동일인인지는 알 수 없다. 어떻든, 재미에 대한 작가의 생각이 빚어낸 샌프란시스코 표류기이자 체류기에서 이 둘은 서로의 상상에 개입하며 끈질기고 덧없는 상상을 이어간다. 나는 이 둘의 상상에 또 하나의 잡스러운 상상을 추가한다. 이것은 실체 없는 관념의 장광설이자 맥락 없이 지겹고 무의미한, 일방적인 수다였다가 마지막엔 뜬구름 같은 한탄으로 마무리할지도 모른다.


‘재미있어서는 안 된다는 어떤 풍조가 있는 한국 사회’지만 무의미와 존재의 근거 없음, 권태나 우울, 불안만큼은 귀신 씻나락 까먹는 한없이 재미없는 것으로, 지극히 자폐적인 나르시시즘으로 치부되곤 한다. 객관적 합리성의 세계에 닿지 않는 이야기들은 무용한 사변일 뿐이다. 한국 사회는 재미 공동체보다는 의미 공동체라 할만하다.


이 소설이 한 해에 문학상 3개를 거머쥐었다는 것은 ‘유희에 대한 어떤 끈질긴 욕망’으로 자폐적 무의미를 사회적 의미로 전환했다는 문학계의 승인이라 할 만하다. 그렇다면 이는 약간 재미있는 일에 속하고, 무의미를 인식하는 곳에서 의미가 출현한다는 아주 재미없지만 조금 의미 있는, 의미 공동체적 발상이라는 상상도 덧붙여본다.


무, 무의미, 존재의 근거 없음, 재미를 위한 상상, 복수로서의 소설 쓰기(치유와 위로가 아니다). 지겹도록(!)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이런 단어들을 이 소설의 헤시태그로 붙인다면 참 상당히 그럴듯해 보이겠군. ‘우울과 절망과 권태의 능력이야말로 지력의 핵심’이라는 자의 지루하고 뜬구름 같은 사변, 무의미에 대한 강박, 근거 없는 존재로서의 기이한 유희에 공감할 수 있는 것은 나 역시 지겹도록(!) 반복적으로 자문하는 어떤 질문, 삶이란 무엇인가(혹은 산다는 건 어떤 의미가 있나)? 라는 다소 ‘진부하지만 어엿한’ 질문 때문이다.


이 소설의 화자는 되고 싶은 것도, 이루고 싶은 것도 없다. 그의 일상에는 욕설도, 분노도, 싸움도 없다. 누군가와 맞선다면 늘 지는 쪽을 택한다. 심지어 섹스에도 별 관심이 없는 듯하다. 물론 ‘자지’와 ‘엉덩이’에 대한 상당히 독창적이며 부질없는 이론은 가지고 있다.


주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시간을 보내는 그는 무척 무료하고 주로 우울하다. 목에 난 종기나 지나가는 누군가 뱉은 침이 바지에 튀는 것에 약간의 불만을 품고 그것을 자주 울분으로 표현하지만, 특별히 화를 내거나 흥분하는 일 없이 울분에 가만히 잠겨 있는 것으로 울분을 잠재운다.


‘모든 의지는 잔인하고 가혹할 뿐이다.’

현실에 대한 불만, 특히 재미없는 사람들과 너무 열심히 뭔가를 하려는 사람들이 많은 한국 사회에 대한 불만은 있지만, 세계 전체 대한 불신이나 이성과 역사에 대한 총체적 회의, 불의와 위선에 대한 분노와 슬픔은 지니지 않은 듯하다.


‘이것들은 그 자체로 느껴야 하는 것임에도 그것을 어떤 생각의 처리를 통해’ 느끼려 하고, 언제나 적절한 비유를 찾는 데 고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뭔가에 오만 정이 다 떨어진 것 같았는데 그 뭔가는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라고 말한다.


삶에 실제적인 어떤 것이 있다면 그것은 ‘허기’이며 이를 ‘허기의 사실주의’라 부르는 이 화자 혹은 작가는 의미와 무관하게 어떻든 살고 있다.

사는 것에 의미가 없다는 말은 일종의 관용어라 할 만하다. 의지와 상관없이 우연히 던져진 존재, 어디로도 갈 수 없고, 꼼짝없이 갇혀 피치 못할 죽음을 맞는 존재가 바로 인간 아니냐고, 저 건조하면서 우울하고, 냉혹하면서도 낭만적인 철학자 하이데거가 물었던가.


인간에게는 단지 죽음에 대한 자각만 있을 뿐이고, 남는 건 시간의 고문이며, 거기에 불안이 찾아드는 건 당연하다, 고 말하면 거참 상당히 관념적이군, 이런 소리를 들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한데도, 그러거나 말거나, 어떻든 확실하게 존재하는 불안을 떨치려 흔히 그러듯 과거에 의미를 과도하게 부여하고 미래를 향해 자신을 용감히 투척하여 의미를 생성하려던 이 철학자는 결국 나치즘으로 뛰어들었던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걸어도 걸어도>에는 아들이 죽음으로 구한 한 아이가 어른이 되어 그냥 그저 그런, 아니 조금 모자란 사람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는 어머니가 있다. 매년 아들의 기일에 그를 오게 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고통을 주기 위해서.


살아남은 자들에겐 시간이 고문이다. 만약 한 사람의 희생이 세상을 더 나쁜 쪽으로 만드는 데 일조하기라도 한다면 오히려 책임을 져야 하는 걸까, 라는 의미 없는 생각은 접어 두고.

삶의 무의미와 존재의 근거 없음을 견딜 수 없는 이 화자. 매일 공포와 암담함과 참담함을 느끼는 하루, 매일 최후를 맞는 것 같은 이 느낌. 권태와 우울은 일시적인 무력감이나 절망, 혹은 나태함에서 오지 않는다는 화자의 생각은 언뜻 보들레르를 떠올리게 하지만 결코 보들레르의 독기를 지니고 있지 않다. ‘삶 자체가 억지 같은 그러한 삶을 앞으로도 계속해서 살게 될 거라는, 아니, 그렇게는 할 수 없을 거라는 그리고 그것을 알 수도 있다는 데 있는 것 같았다’라는 자각만이 삶에 유일한 긴장을 부여한다.


죽느냐 사느냐. 소설 속 화자는 많은 시간 자살과 추락, 죽음에 대해 상상한다. 죽음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으니 뭐라 할 말도 없다. 완벽한 무의미. '재미있어 보이기조차 한 상상'으로 죽음에 대해서도 의미 없는 복수를 한다. 이 삶과 죽음의 긴장 역시 상상의 반복으로 이어진다.


이제 근거 없는 생과 미지의 죽음 사이에 시간이 발생했다. 아니 시간이 남았다. ‘삶은 결국 남은 시간을 어떻게 허비하는지의 문제로 귀결’된다. 소설의 화자에게는 시간을 죽이는 것이 유일한 삶의 방식이 된다. 주로 술을 마시고 옥수수 알을 세듯 시간을 허비하는 것일 뿐인데 그러자면 지루하고 재미없으니 스스로 재미있다고 여기는 구름과 바람, 안개, 나무, 동물들, 주정뱅이들에 대해서 쓸모없는 상상을 이어가며 홀로 수다를 떤다. 그에게는 에스트라공 혹은 블라디미르 같은 친구는 없다.


시간을 허비하기 위해 상상하는 것은 당연히 의미가 없는 상상이어야 한다. 화자가 아이들과 동물들에게 관심을 두는 것은 상상을 즐기는 그의 유아적 세계관 때문이 아니라 동물과 아이들에게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삶이 의미 없다고 느낄수록 그 삶에 필사적으로 매달린다. 시간을 잊기 위해서. 시간을 인식하는 순간 고통은 시작된다. 살아가기 위해 발버둥 칠수록 무의미하다 느끼고, 또 그 시간만큼 의미에 집착하는 악순환. 우리가 사랑에 빠지거나 돈을 벌거나 섹스를 하거나 술을 마시는 일상의 행위는 의미 없으므로 집착하고 집착함으로써 의미를 갖게 되는 시간의 일들이기도 하다.


화자의 집착은 소설 쓰기와 기이한 상상이다. 그에게 이것은 피와 정념이 없는 뜨뜻미지근하게 처절한 복수다. 무의미한 삶에는 무의미한 상상으로, ‘어떤 말 할 수 없는 극심한 지겨움을 길게 표현’하는 것으로 어떤 작위의 세계를 구축해나간다. 그리고 더욱더 무의미하고 기이한 상상을 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면 신기하게 소설 한 편이 끝나 있고 어이없어한다. 이렇게 살다 보면 언젠가는 삶의 끝에 도달할 것이고 어이없어할 것처럼. 무의미, 존재의 근거 없음의 영원한 순환으로 빠져든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 했던가? 그러나 문제는 비극은 존재한다는 것이다.


소설의 화자는 짐 모리슨을 떠올리며 만나는 사람마다 아메리카 인디언을 보았는지 묻는다. 짐 모리슨 유년의 원초적인 기억으로 자리 잡은 ‘늘 울고 있는 인디언’, ‘고속도로 위에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인디언 가족’은 오랜 추방의 역사를 지닌 채 살아남은 원주민 가족이 결국 길 위에서 비명횡사하는 비극적인 이야기는 마치 죽음의 불공평과 무자비함을 떠올린다. 깊은 우울로 침잠하게 하는 것 외에 어디로도 갈 곳이 없는 이야기.


소설 <어떤 작위의 세계>는 인간 존재의 비극적 ‘뜬구름’을 뜬구름 잡듯 이야기하며 무의미한 의미로 채워진 객관적 실재에 복수를 가한다, 라고 말하는 건 참으로 재미없고 지겹다.

어떻든 나는 이 복수극을 장장 보름에 걸쳐 읽게 되었는데 그 와중에도 현실의 넘쳐나는 온갖 비극들, 미얀마에서, 아프리카에서, 중동에서, 미국에서, 유럽에서 일어났고, 내 주변에서도 역시 불의한 죽음, 또는 일상의 자연스러운(?) 죽음이 있었을 것이라 생각하니 이 모든 죽음 자체가 잔혹한 비극이고 그래서 더욱더 삶은 무의미하고 존재는 근거 없다고, 결국 죽고 말 것을,,, 이렇게 생각하다 보니 분노와 울분보다는 ‘허기의 사실주의’에 빠져 자주 먹었고 또 먹은 만큼 아무것도 하기 싫어서 주로 잠을 잤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기 죽음에 대해서 쉽사리 떠올리지 않는다, 성공적인 삶을 사는 사람일수록 현재의 활력 덕택에 이 죽음이나 소멸에 대해서 거리를 둔다. 혹은 성공적인 삶이 아닐지라도 오래된 모종의 책임감으로 인해 자기 죽음은 못마땅한 것으로 여긴다. 이와 전혀 상관없이 세포는 생성보다는 소멸에 더 가까워지고 있음에도 오히려 현재의 삶에 더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며 더욱더 빠르게 소멸로 향한다. 죽어라 하고 죽을 둥 말 둥 의미를 찾다 죽는 것을 의미 있게 여기면서. 반면 죽음은 늘 우리의 의지 밖에서 잔혹한 미소를 짓고 있다. 그렇다면 폭력도, 불의한 죽음도, 모두 다 용인해야 하는가? 삶과 죽음이 그런 거라고? 이것이야말로 무의미가, 죽음이 우리에게 가하는 복수다. 용인할만한 죽음이란 그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대중의 비난마저 열광의 표출이 된 미셸 우엘벡이 그의 소설 <어느 섬의 가능성>에서 밝힌 ‘주체가 필멸할 운명일 때 윤리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라던 불멸의 전망은 탐욕의 또 다른 이름 아닐까. 결국 우리는 윤리적 명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는 벗어났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무용하고 기이한 상상이나 소설 쓰기로 언제나 우리를 덮칠 준비를 하는 죽음에 대한 가엾은 복수, 죽음이 우리를 해치우기 전에 우리가 죽음을 해치우겠다는 필사적인 복수밖에 없다. 생은 언제나 불길한 긴장 속에 존재한다. 이 ‘불길함의 정체’를 어찌해야 하나?


'어떤 작위의 세계가' 단순히 ‘실재 세계의 객관적 합리성에 대한 반성적 세계’가 아니라는 것은 바로 이 불길함 때문이다. 실재 세계를 무너뜨리고 한 개인이 세계의 중심인 절대적 무의미의 세계를 구축하려는 시도, 그것을 문학이나 혹은 예술이라 해도 좋다. 이 원대한 시도는 바로 그 불길함으로 인해 실패할 수밖에 없다. “어떤 작위의 세계” 역시 결국 침묵과 상상의 멈춤으로 그 패배를 기록한다.


이 불길함이 어쩔 수 없는 것이라면 돈과 사랑과 섹스의 트라이포드가 이 불길함의 징후마저 감추는 재미없는 한국 사회에서, “죽음이 후세의 아들들에게 전해질 것”이라는 누군가의 지겨운 망상과 수 천 년 이래 종교가 약속했고 지금은 과학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영생과 불멸의 전망을 믿으며 일순간 흔적 없이 사라지는 무의미의 복수, 죽음의 복수를 기다리는 것 외에 별다른 도리가 없는 것일까.


과학은 종교와 마찬가지로 믿음의 영역으로 들어가고, 실재하는 비극조차 자신의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반복하고 재생산하는 현대의 문학은 범람하는 치유와 위로의 문학적 수사를 상품으로 개발한 산업의 게임이라 해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그곳에서 위대한 문학예술의 열망이 죽음에 저항하리라는 믿음은 역시 덧없다. 아니 뻘쭘하다.

<어떤 작위의 세계>의 필연적 실패는 존재 그 자체가 유일한 저항이라는 진부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결론으로 인도한다. 영생과 불멸의 전망도 없는 나에게 남겨진 질문은 단 하나. 어떻게 존재하는가? 그것일 텐데, 나는 어떤 방식으로 죽음에 저항할 것인가.

-인간 조건에 절망하는 자는 겁쟁이이며 그것에 희망을 품은 자는 바보다- A.Camus

b******t 2025.04.01.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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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내가 지향하는 소설이다! 다만 좀 재밌으면 좋았을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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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을 열기 시작한 것은 어느 봄날 밤이었는데 결국 폭염의 어느날 오후에야 독서를 끝냈다. 뭐, 별 재미가 없다는 뜻이려니. 그러나, 이 소설의 특성만큼은 바로 내가 늘 갈구하던 그런 것이다. 즉슨, 고상한 주제나 장난스러운 반전 따위가 없는 소설이다. 강렬한 캐릭터라든가 의미심장한 사건 따위도 물론 등장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억지스러운 면이 조금도 없다. 화자인 '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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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을 열기 시작한 것은 어느 봄날 밤이었는데 결국 폭염의 어느날 오후에야 독서를 끝냈다. 뭐, 별 재미가 없다는 뜻이려니.

그러나, 이 소설의 특성만큼은 바로 내가 늘 갈구하던 그런 것이다. 즉슨, 고상한 주제나 장난스러운 반전 따위가 없는 소설이다. 강렬한 캐릭터라든가 의미심장한 사건 따위도 물론 등장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억지스러운 면이 조금도 없다. 화자인 '나'가 샌프란시스코와 뉴멕시코와 하와이와 또한 그런 비슷한 미국의 각지를 다니며 걷고 만나고 생각하고 뜬금없이 그런 생각을 후회하는 이야기들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이어주는 주제의식이나 캐릭터는, 정말, 없다. 말이 말을 만들고,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물고, 그러한 말과 생각들 사이에 가끔 썰렁한 위트가 있을 따름이다.

 

소설의 해설을 쓰신 평론가는 작가 정영문의 그러한 글쓰기를 '삶의 무의미에 대하여 오히려 무의미하게 대응'하는 것이라고 평했던 것 같다. 흠, 사실, 정영문의 이 소설 <어떤 작위의 세계>만을 읽은 사람이이라면 그러한 이해를 길어내기 쉽지 않겠지만, 그 평론가처럼 정영문의 <검은 이야기 사슬>이나 <달에 홀린 광대> 같은 다른 소설을 읽어온 사람이라면 그러한 이해를 길어내기 쉬울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정영문의 이전 소설들에는 그러한 '삶의 무의미성'이 꽤나 노골적으로 표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뭐, 삶의 무의미성에 대하여 굳이 어떤 의미를 부여하려는 일반인들의 심리에서 다소간 벗어나려는 노력을 기울인 작가가 정영문이 처음은 아닐 것이다. 이를테면 이번 여름에 우연히 읽게 된 우디 앨런의 짧은 소설 모음인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쓰레기 같은 세상>(원제는 Side Effects)에 실린 '니들만에 대한 기억'이라는 단편만 봐도 "無에 대한 체계적인 재평가" 운운하며 삶의 무의미성을 환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내가 역시 이번 여름이 뒤적거렸던 도널드 바셀미의 <죽은 아버지>는 바로 그러한 무의미성에 대하여 매우 진지하게 탐구하고 도전한 문학적 성과일 것이다.

우디 앨런이나 바셀미의 이름을 난데없이 들먹이는 까닭은, 정영문의 소설도 그들의 글만큼 좀 재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삶의 무의미성에 대하여 극도로 무의미한 방식으로 대응하는 것까지는 대단히 존경스러운 일이지만, 그러한 도전의 기록이 뭐 이렇게까지 썰렁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r******a 2012.08.21.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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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작위의 세계(정영문 장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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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작위의 세계         어떤 작위의 세계는 제17회 한무숙 문학상’, ‘제43회 동인문학상’ 그리고 ‘제20회 대산문학상’ 소설 부문 수상으로 문학상 3관왕을 차지한 소설이다.  얼마나 대단한 소설이길래 하는 호기심이 생겨서 읽어봤다.     소설? <어떤 작위의 세계>는 뚜렷한 플롯 없이   그저 한 남자의 머릿속 생각만 서술되고 있다. 관념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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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작위의 세계

 

 

 

 

어떤 작위의 세계는

제17회 한무숙 문학상’, ‘제43회 동인문학상’ 그리고 ‘제20회 대산문학상’ 소설 부문 수상으로

문학상 3관왕을 차지한 소설이다.

 얼마나 대단한 소설이길래 하는 호기심이 생겨서 읽어봤다.

 

 

소설?

<어떤 작위의 세계>는 뚜렷한 플롯 없이  

그저 한 남자의 머릿속 생각만 서술되고 있다.

관념과 실재가 혼란스럽게 얽혀있고  

사실과 상상이 공존한다. 

 
소설! 

   작가가 소설이라고 세상에 내놓으니 

사람들이 소설이라고 동의하고 소설 부문 문학상까지 줘가면서 권위를 부여했다.

 소설인가보다.

 

 

작년에 내가 스크랩 한 기사 중에

http://blog.naver.com/duddms1000/130153246696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주변에서 이 소설에 대해 물어보면 나는 

     "재미없는 소설인데 의미가 있는 소설이고, 그 나름대로 재미를 지닌 소설이란 점에서 재미가 아주 없다고  할 수는 없다"

고 답한다.  

 

 

솔직히 이 소설을 읽긴 했는데 도저히 감을 못 잡겠다.

그러니 위의 인용을 이용해 보기로 한다.

 

 

1. 재미없는 소설인데,,,,

 줄거리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 소설이니

이야기를 통한 재미를 찾겠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끝없이 이어지는 의식의 흐름이 전부다.

 당연히 재미없는 소설 맞다. 

 

 

 2. 의미가 있는 소설이고,,, 

 의미?

대체 의미라는 것이 여기서는 무슨 의미를 뜻하는 거지?

 

 새로운 형식이 시도된 소설의 탄생을 의미 있게 볼 수 있다는 그 의미? 

아니면,,,

작위라고 이름 붙여진 세계가 의미하는 내용 그 자체가  의미있다는 것인가? 

 

의미가 있는 소설?

어떤 의미로?

 

 

3.그 나름대로 재미를 지닌 소설이란 점에서 재미가 아주 없다고 할 수는 없다.

 그 나름대로 재미를 지닌 소설이라,,,,그렇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처음엔 지루하게 느껴지던 소설이 읽어갈수록 재미가 나긴 하더라.

가속이 붙는다고 해야 하나?

재미가 아주 없다고 할 수는 없다라,,, 

 말장난처럼 보이지만 읽어보면 이 말이 왜 나왔는지 알게 되리라,,,,

 

 

4. 한국어가 한국어 같지 않더라.

일단 번역 투 문체가  너무 거슬려서 읽는 내내 멈칫했다.

 작가 자신은 이걸 두고 다른 작가와 구분되는 장점으로 이야기를 하더라 만은

글쎄,,

정확한 문법으로 쓰인 반듯한 문장을 읽고 싶다. 

 

 

 

5. 궁금하다.

이 소설을 과연 사놓고 다 읽은 사람은 몇 %나 될까?

아,,,

나는 물론 다 읽었다. 

  작위라는 단어를 엄청나게 싫어함에도 말이다. 

 

 

 

d********0 2013.03.15.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