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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18일 광주에서 있었던 그 사건. 사건이 발생한 지 30년이 넘었는데도 아직 그 사건이 마무리 된 듯한 느낌이 깔끔하게 들지 않는데 10년, 20년 전에는 어땠을까. 이런 의문을 갖고 출발한 것이 주인석의 <광주로 가는 길>이라는 소설이 아닐까 한다. 소설의 첫머리에서는 그 사건의 명칭을 놓고 하는 고민으로부터 시작된다. ‘광주사태’인지, ‘광주민주항쟁’인지, ‘광주무장봉기’ 혹은 ‘광주민중봉기’인지 말이다. 분명히 같은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특정 단어를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그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객관적인 진실이나 실체라는 것을 규정하는 일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 하고 의문을 던지는 것이다. 여기 이런 의문을 체화한 김민수라는 사람이 주인공을 맡아 이 이야기가 시작된다. 주인공 격인 김민수 씨는 1990년 서울 모 대학 연극영화과 교수로 갓 임용된 사람이다. 교수로 임용된 지 두 달쯤 지났을까. 준채라는 학생이 극예술 연구회라는 서클의 지도교수를 맡아달라고 하며 귄터 그라스의 <민중들, 반란을 연습하다>라는 연극을 상영하겠다고 한다. 학생이 찾아와 무언가를 하겠다는데 고양된 교수 김민수 씨는 흔쾌히 그 요청을 수락하는데, 이로 말미암아 곧 곤욕을 치르게 된다. 공연 예정 일자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어느 날 당초의 약속과 달리 공연의 제목이 ‘광주는 우리에게 무엇인가’로 바뀐 채 학내에 대자보가 붙었고, 아직 최루탄의 향기가 봄꽃의 내음을 짓누르던 시절인지라 학과장과 다른 교수들이 김민수 씨를 찾아와 당장 이 연극을 취소시키라고 압박을 가했던 것이다. 일말의 배신감까지 느낀 김민수 씨는 준채를 찾아가 공연을 취소하든지 당초의 약속대로 진행하든지 양자를 택하라고 요구하지만 준채는 선생님께는 죄송하지만 선생님을 속이면서라도 그 일은 해야만 했다고 강변한다. 진실을 살려내기 위해, 민중이 고통받는 현실을 변혁시켜 민중이 주인 되는 세상을 만들어야 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연극이니 그것을 통해서 원하는 바를 성취하길 바랐기 때문이었다. 광주의 그 날을 있게 한 원흉들이 여전히 군림하고 있는 현실은 분명히 잘못되어 있으며 연극을 통해 그 원인과 해결책을 모색하고자 했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신의 교수를 위해서 함께 광주로 가자는 제안을 하게 된다. 79년, 광주의 그 일이 있기 전 미국으로 떠나 7년 동안 공부를 하고 온 김민수 씨로서는 대체 광주의 의미도, 광주가 이 학생들에게 주는 의의도 이해할 수 없었기에 학생의 제안을 덜컥 받아들여 드디어 이 소설의 제목이 탄생되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광주로 가기로 한 날, 서울역은 물론 버스 터미널, 대전역, 고속도로 톨게이트 할 것 없이 전경과 군인들이 광주로 가는 길목을 봉쇄하고 있다. 여기서부터 김민수 씨의 생각은 조금씩 흔들린다. 하지만 아직은 완고한 김민수 씨. 제자 준채에게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라쇼몽>에 대해 이야기한다. 산길을 가던 부부가 산적을 만났는데, 산적은 남편이 보는 앞에서 부인을 범하고는 부인이 도망가는 사이에 남편을 죽이고 값나가는 물건을 챙겨 떠난다. 산적은 결국 체포되어 자백을 하지만 같은 사건을 대하는 부인의 말도, 무당에 의해 소환된 남편의 영혼도, 산적의 자백도 모두 다르다. 이 영화의 줄거리는 김민수 씨가 생각하던 광주에 대한 인식과 참 닮았다. 짜맞춘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즉 완전히 종결된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현재로 이어지고 있는 사건은 그에 참여했던 주체의 인식과 상황에 따라 객관적으로 규정될 수 없다는 유보적인 판단 말이다. 하지만 그 사건의 현장에는 목격자가 한 명 더 있었다. 모든 사건을 멀찍이서 지켜봤던 나무꾼이 있었다. 더 구체적으로 김민수 씨의 말을 빌려보자. “광주도 마치 그 영화 속에서 벌어진 사건과 같지 않을까. 진상은 밝혀질 수 없고, 사람들은 각기 나름의 해석된 광주를 갖고 있을 뿐이지. 그 해석된 광주란 바로 자기들의 이해와 의도에 따라 해석된 광주일 테고 말이야.” 준채는 거기에 몇 마디 말을 던진다. “그럴지도 모르죠. 어차피 인간에게 세계란 해석된 세계니까요. 하지만 중요한 것은 변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올바른 것은, 가장 중요한 것은 있습니다. 해석하기 이전에 존재합니다.” 여기서의 변혁이란, 10년 전 광주 학살의 원흉이 아직도 통치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정치 현실을 올바른 방향으로 되잡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대화를 나누던 김민수 씨는 생전 하지 않던 멀미를 느끼며 어지러운 머리 속에 하나의 문장이 부유함을 인식한다. ‘나는 나무꾼이 아닐까.’ 그와 동시에 광주로 향하는 밤길을 걸으며 이제야 7년간 떠나 있었던 이 땅의 역사 속으로 다시 들어오는 것을 느낀다. 그들이 결국 광주에 도착했느냐, 하지 않았느냐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소설의 끝머리에는 <라쇼몽>의 마지막에 나무꾼이 사실 모든 것을 목격하고도 살인 현장은 신경쓰지 않은 채 값나가는 물건을 훔친 것이 자기임을 털어놓았더니 그 말을 듣던 승려가 인간에 대한 신뢰를 잃게 해주지 않아 고맙다고 하며 떠나는 장면을 제시한다. 끝나지 않았고,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은 더욱 아니었던 1990년의 어느날, 객관성이라는 허울 뒤에 숨어 현실에 발을 붙이고 있지 않던 한 지식인이 자신의 제자와 함께 역사의 현장으로 향하면서 겪은 인식의 변화 과정을 차분하게 그려낸 소설이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민중들 반란을 연습하다>와 <라쇼몽>의 메시지와 작품 전체의 메시지가 직접적으로 일치하는 것이 상당히 작위적이라는 느낌을 떨칠 수 없으나, 30년 전 그날에 대한 의견이 분분-대체 왜 분분해야 하는지 모르겠으나-한 오늘, 한번쯤 읽어보고 고민해볼 법한 소설이다. 객관적 사실이라는 명분 뒤에 숨어 끝나지 않는 상처에 대해 유보적인 나무꾼 같은 사람이 될 것인가, 현실을 직시하고 올바른 방향을 고민하며 실천할 것인가. 당신의 선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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