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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스러운 존재가 가족을 해체시키는 끔찍한 존재로 돌변하는 순간에의 공포! 여성에게 부여된 임신에의 공포와 의무감 혹은 모성애와 책임감이 어떠한 방식으로 왜곡될 수 있는가를 철저하게 보여준 소설!
1960년대 런던, 한 남녀가 직장 파티에서 만나게 된 장면에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두 사람은 만나자마자 서로에게 끌린다. 그들은 당시로서도 꽤나 보수적이라 할 수 있는, 이른바 문란한 혼전 성관계나 이혼 또는 혼외정사, 산아 제한 같은 것들을 거부하는 전통적 의미의 가정을 이루기를 원한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 ‘가정’은 행복을 결정짓는 인생의 중대한 목표였으며, 그 속에서 ‘아이’는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아주 중요한 요소였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자식을 많이 낳기로 결정한다. 가족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6명 이상의 자녀 계획에 걸맞은 큰 저택을 구입한다. 그리고 자신들의 왕국에서 6년간 4명의 아이들을 낳는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부부는 매년 크리스마스나 휴가 기간마다 흩어져 있던 가족과 친척들이 모여들고, 아이들의 음성으로 가득한 집안 풍경이 주는 만족감에 젖어 자신들의 선택이 최선이었음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행복. 행복한 가정. 로바트 가는 행복한 가족이었다. 이것은 그들이 선택한 것이었고 누릴 자격이 있었다. 데이비드와 해리엇은 얼굴을 맞대고 누워 있으면 때로는 그들의 가슴속 대문이 활짝 열리면서 아직도 자신들을 놀라게 할 만큼 엄청나게 강렬한 안도감과 감사의 정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느꼈다. 지금은 아주 오랜 기간처럼 보이는 그 시간 동안 인내하기란 사실 쉽지 않았다.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60년대의 시대 정신이 그들을 비난하고 고립시키고 자신들의 가장 좋은 면을 축소시키던 때에, 스스로의 신념을 지키기가 어려웠었다. 이제 보아라, 자신들의 완고한 개성을 방어하려고 사력을 다한 것이 옳았다. 그 개성은 너무나도 고집스럽게 가장 최상을 선택했다-바로 이 삶. / 30p
허황된 꿈이 낳은 비극
비극은 다섯째 아이가 뱃속에 들어서면서 시작된다. 아니, 부부가 애써 외면하고 있었을 뿐 고단한 현실은 이미 이전부터 야금야금 그들의 삶을 갉아먹고 있었다. 건강하고 매력적인 젊은 여인이 네 명의 아이를 낳으면서 잃게 되는 상실감, 엄마의 관심을 끌기 위해 끊임없이 달려오는 아이들로 인해 헤어 나올 길이 없는 피로감, 자신의 벌이로는 절대로 감당할 수 없는 지출을 나이든 아버지로부터 충당해야 했던 무모함, 거의 모든 육아를 어머니에게 전담해야 했던 미숙함까지. 그 모든 것들은 이미 충분히 그들에게 위협적이었음에도 이들은 결국 다섯째 아이까지 갖게 된다.
그런데 이 아이가 심상치 않다. 믿을 수 없게도 임신 3개월째가 될 즈음, 해리엇의 뱃속의 아이에게서 상당히 강한 태동을 느낀다. 그녀는 수시로 고통을 느끼다 못해 어떤 발굽이, 어떤 때는 갈고리 발톱이 그녀의 연약한 내장을 자르는 듯한 기분을 느낀다. 이따금 고통을 잊기 위해 시골길을 활보하거나 질주를 하고, 커다란 부엌칼로 자기 배를 갈라서 아이를 꺼내는 상상을 하기도 한다. 진정제를 먹어야만 잠잠해지는 아이 때문에 약을 먹을 지경이 될 때까지, 임신 기간 내내 해리엇의 시간은 고통과 인내, 환영과 망상들로 채워진다. 끔찍한 예감은 빗나가지 않는 듯 그렇게 태어난 다섯째 아이, 벤은 부부가 보기에 이상한 구석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벤은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난폭한 구석이 있는 데다 아이의 눈빛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차갑다. 천성적으로 활기차고 친근하던 넷째 폴이 유독 불안해하며 화를 내기 시작하고, 테리어 개가 죽거나 늙은 회색 고양이가 목 졸려 죽는 일이 발생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가족 모임은 해체되고, 벤은 부부가 꿈꾸는 행복한 가정에 위협적인 존재가 되어 가족을 파괴시킨다.
「난 너희들의 하인이야. 이 집에서 하인 일은 내가 다 하고 있지」 또는 「너희는 둘 다 정말 이기적이로구나. 너희들은 무책임한 사람들이야」 이런 말들이 감돌았지만 입 밖으로 나오지는 않았다. 그러나 만약 그녀가 시작만 한다면 이 정도로 그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그들은 잘 알았다. / 46p
반쯤 어두운 방 안에서 그 애는 정말 그곳에 웅크리고 있는 도깨비나 작은 귀신 같았다. 낮 동안 그 애를 가둬놓으면 그 애는 비명을 지르고 소리쳐서 온 집안이 시끄러웠고 식구들은 경찰이 올까봐 두려워했다. 그 애는 갑자기 이유도 없이 정원으로 달려 내려가 문 밖의 길로 뛰어나가곤 했다. 어느 날 그녀는 그 애를 잡으려고, 빵빵대는 차들이나 경고하는 사람들의 비명을 무시하고 신호등을 건너는 뭉퉁하게 웅크린 작은 모습만 보면서 1마일 이상 뛰었다. 그녀는 울면서 숨을 헐떡였고 반쯤 정신이 나가서 뭔가 끔찍한 일이 일어나기 전에 그 애를 잡으려고 결사적이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오, 그애를 치어요, 제발, 그래요……라고 기도하고 있었다. / 85p
이처럼 도리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는 이상적인 가정, 즉 전통적인 가족 이데올로기의 허상을 적나라하게 서술하고 있는 작품이다. 비정상적인 아이 하나가 태어남으로써 일어나는 가족의 붕괴를 매우 사실적이면서 충격적으로 묘사한다. 벤이라는 존재는 그 자체만으로도 공포스럽지만, 자기파괴적인 성격을 지닌 가정의 내밀한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상당한 의미가 있다. ‘의사의 얼굴에서 그녀는 자신이 기대했던 것을 보았다. 그 여인이 느끼고 있는 것이 투영된, 어둡고 고정된 시선이었다. 그것은 인간 한계를 넘어서는 것에 대한 정상인의 거부, 이질성에 대한 공포, 또한 벤을 낳은 해리엇에 대한 공포였다’는 문장에서 알 수 있듯 여성에게 부여된 임신에의 공포와 의무감 혹은 모성애와 책임감이 어떠한 방식으로 왜곡될 수 있는가를 철저하게 보여준다. 또한 벤과 같이 ‘사회적으로 제거된 아이들’을 가둔 요양소의 충격적인 장면을 통해, 우리 사회가 ‘비정상’을 소거하는 일에 얼마나 몰두해있는지를 냉정하게 보여준다.
그래서 집안은 옛날 같지 않았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긴장감과 경계심이 깃들였다. 해리엇은 벤이 자아내는 무시무시하고 불안한 호기심 때문에 사람들이 자기가 없을 때 그 애를 보려고 가끔씩 위층에 올라간다는 사실을 알았다. 자신을 쳐다보는 사람들의 눈길로 그녀는 그들이 벤을 보고 왔다는 것을 알았다. 마치 내가 죄인인 것처럼! 그녀는 분노했다. 그녀는 너무나 많은 시간을 마음을 끓이며 보냈지만 자신도 어쩔 수 없었다. 데이비드도 자신을 비난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그에게 말했다. 「이게 바로 옛날 원시시대에 변종을 낳은 여자를 어떻게 취급했는지 보여주는 거야. 마치 그 여자만이 잘못한 것처럼. 하지만 우린 문명시대에 살잖아!」/ 82p
왜 그녀는 그런 말을 하는가? 벤이 태어난 이후 권위를 가진 모든 사람들이 벤을 제대로 보지 않았다……. 그녀가 텔레비전의 군중 속에서 그를 보았을 때 그는 칼라를 세운 윗도리를 입고 스카프를 하고 있었고, 마치 데릭의 동생처럼 보였다. 그는 건장한 학생 같아 보였다. 그는 변장하려고 이런 옷을 입었던 것일까? 그 말은 그가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지를 안다는 말인가? 그는 자신을 어떻게 보는 것일까? 사람들은 항상 그를 제대로 보는 일을, 그의 본질을 인식하는 일을 거부할 것인가? / 177p
이 외에도 소설은 새로운 가정을 준비하는 커플이나 임신한 여성, 어린 아이를 키우고 있는 부부에게 많은 생각할 거리를 준다. 사랑과 행복으로만 가득할 것 같던 결혼 생활이 현실을 마주하는 순간 어떤 문제에 부딪치게 되는지를 현실감 있게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부부가 육아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신념과 가치관을 지키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줄 뿐만 아니라 때때로 자신의 신념이 다른 가족의 희생으로 이루진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대목도 있다. 벤에게 관심을 쏟느라 온전히 엄마의 시선을 받지 못한 폴에게 일어난 부정적인 변화를 통해, 부모의 정신적·육체적 환경이 아이에게 미치는 영향을 생각하게 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생명을 가진다는 것은 얼마나 많은 책임감을 따르게 하는지를 고민하게 한다. 덕분에 우리는 이러한 질문에서 피할 수 없다. 내가 벤의 부모라면? 나라면 벤을 온전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이게 바로 피임법이 발견되기 전에 여인들이 느끼던 감정일거야」 해리엇이 말했다. 「공포 그 자체. 매번 그들은 월경을 기다리다가 그것이 오면 한달간 처형 연기를 받는 거야. 하지만 그 여자들은 괴물을 낳을까봐 겁내지는 않았겠지」 / 88p
「그래요, 로바트 부인. 그 말이 사실이 아니라고 하시겠어요? 우선 저는 이것이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씀드려야겠군요. 그리고 또한 이런 일이 희귀한 일도 아니라는 사실도요. 우리가 복권 추첨에서 무엇이 나올지를 선택할 수 없듯이 아기를 갖는 일도 마찬가지랍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간에 우리는 선택할 수 없습니다. 당신이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자신을 비난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 139p
소설을 갈무리하며 또 하나 드는 생각은 이 가족을 파괴한 건이 정말 벤이었을까 하는 것이었다. 부부의 허황된 이상이, 그것을 바로잡지 못하고 끝끝내 외면한 것이 진정한 비극은 아니었을까. 짤막한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주제를 내포하고 있어 도리스 레싱이라는 작가의 필력에 감탄하며 읽은 작품이었다. 2000년에 발표한 후속작 『세상 속의 벤』도 읽어보고 싶지만 아쉽게도 국내에서는 번역되지 않은 것 같다. 언젠가 이 책도 내어주십사 출판사 측에 부탁을 드리며 그녀의 다른 작품들도 얼른 주행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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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하고 열 달 만에 첫 아이를 낳았다. 그 때 들었던 생각. ‘왜 어른들은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길러야한다고만 말해주고 그것이 얼마나 힘든 건지는 알려주지 않았을까?’ 아마 얘기해 줬을 지도 모른다. 내가 듣지 않았을 뿐. 하지만 내가 듣지 않더라도 어떻게든 말려야 했다. 집집마다 서넛씩 낳아 탈 없이 키우는 모습은 내게 결혼과 육아는 아무나 하는 만만한 일이라는 오해를 하게 했다. 주변에서 보면 나처럼 철없이 결혼하고 무모하게 아이를 낳는 사람이 드물지 않다.
그렇게 철없는 젊은이가 도리스 레싱의 작품에도 등장한다. 《다섯째 아이》의 주인공 데이비드와 해리엇. 보수적인 성향을 지닌 중산층 가정의 두 젊은이가 결혼한다. 그들은 60년대 대부분의 젊은이들과는 달리 아이를 여섯, 일곱쯤 낳아 기르고 친척들과도 어울리며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싶어 한다. 하지만 여러 아이를 낳아 키울 능력이 안 되는 그들은 양가부모의 도움을 받는다. 대가족에게 필요한 큰 집은 데이비드의 아버지 제임스의 경제력으로 장만하고, 가사와 육아는 해리엇의 어머니 도로시가 돕는다. 루크, 헬렌, 제인, 폴. 아이가 늘어갈수록 집안일이 많아지고 생활비 부담도 커지지만 그들은 부모의 도움으로 가정을 유지하며 그것이 행복이라고 믿는다. 다섯째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는.
다섯째 아이, 벤. 태어나기 전부터 엄마 해리엇을 힘들게 하더니 태어나자마자 난폭한 행동을 한다. 형제들을 힘으로 제압하고 반려동물들도 잔인하게 죽인다. 벤을 감당할 수 없는 가족들은 그를 요양소에 보내고 가정엔 평화가 찾아온다. 하지만 벤을 포기할 수 없는 해리엇은 그를 데려오고 가정은 다시 해체되기 시작한다. 친척들이 발길을 끊고 부부의 다른 자녀들도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일찍 집을 떠난다. 그리고 원망한다. 불행의 원인인 벤을 포기하지 못하는 해리엇을. 그렇게 세상과 어울리지 못하는 벤은 자라면서 계속 비행을 저지르고 그들의 집은 행복이 가득했던 보금자리에서 벤의 무리가 찾는 불량배 소굴이 되어간다.
해리엇 네가 틀렸어. 그 반대가 사실이거든. 사람들은 가족생활이 최고라고 세뇌를 당하는 거야. (p.39)
‘난 너희들의 하인이야. 이 집에서 하인일은 내가 다 하고 있지’ 또는 ‘너희는 둘 다 정말 이기적이로구나. 너희들은 무책임한 사람들이야’ 이런 말들이 감돌았지만 입 밖으로 나오지는 않았다. (p.46)
‘당신 왜 이 집이 쓸모 있는 줄 알아? 사람들이 왜 오는지 아느냐구. 단지 자기들이 즐기려고 오는 거야, 그것뿐이야’ (p.78)
그래서 집안은 옛날 같지 않았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긴장감과 경계심이 깃들였다. 해리엇은 벤이 자아내는 무시무시하고 불안한 호기심 때문에 사람들이 자기가 없을 때 그 애를 보려고 가끔씩 위층에 올라간다는 사실을 알았다. 자신을 쳐다보는 사람들의 눈길로 그녀는 그들이 벤을 보고 왔다는 것을 알았다. 마치 내가 죄인인 것처럼! 그녀는 분노했다. 그녀는 너무나 많은 시간을 마음을 끓이며 보냈지만 자신도 어쩔 수 없었다. 데이비드도 자신을 비난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그에게 말했다. ‘이게 바로 옛날 원시시대에 변종을 낳은 여자를 어떻게 취급했는지 보여주는 거야. 마치 그 여자만이 잘못한 것처럼. 하지만 우리는 문명시대에 살잖아!’ (p82)
다시 해리엇은 왜 자기가 항상 죄인 취급을 당해야 하는지 의아해했다. 벤이 태어난 이후 항상 그랬지, 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모두들 말없이 자신을 비난해 온 것이 사실인 것 같았다. 나는 불행을 겪었지 죄를 지은 것은 아니야. 그녀는 생각했다. (p106)
남다른 아이하나 품어줄 수 없는 중산층 가정의 허상. 임신, 출산, 육아라는 인생을 건 엄청난 일들이 ‘모성애’로 포장되고 그 책임 또한 오롯이 어머니에게 지워지는 현실. 장성하여 결혼한 자녀를 수십 년이 지나도록 돌봐야하는 늙은 부모... 켜켜이 떠오르는 해결되지 않는 의문들이 마음을 어지럽힌다. 그 중에서도 유난히 아팠던 건 행복한 가정을 파괴했다고 비난받는 벤의 존재였다. 부부가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다른 아이들과 너무도 다른 벤. 그 아이가 태어나자 부부의 행복했던 가정은 순식간에 붕괴된다.
만약 벤이 태어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그들은 아무 문제없이 오래도록 바라던 행복한 생활을 누릴 수 있었을까 실상 그들의 가정은 출발부터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행복한 가정에 대한 환상만 있을 뿐 감당할 능력이 없는 부부는 처음부터 부모에게 의존한다. 그렇게 이루어진 행복이 자신의 것이라 믿으며 계획대로 아이를 낳아간다. 아이가 많은 그 집엔 휴가 때마다 일가친척이 찾아와 북적대고 젊은 부부는 그 북적임이 자신들이 이뤄낸 행복이라 믿는다. 미숙한 부부가 만드는 위태로운 행복은 벤의 존재가 아니더라도 언제든 무너질 수 있었다. 벤은 시작부터 균열된 가정의 붕괴를 가속화시킨 존재였을 뿐, 불행의 책임을 영문 모르고 태어난 아이에게 모두 지우는 건 불합리하다. 벤이 태어나기 전에도 도로시가 며칠만 돕지 않으면 아이들은 돌봄을 받지 못했고, 제임스의 지원 없이는 집도 생활비도 마련할 수 없었다.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은 부부는 결혼한 지 20년이 되도록 늙은 부모에게 기대어 행복을 누리고자 한다. 해리엇과 데이비드에게 벤이 영원한 숙제이듯 그들의 늙은 부모에게는 결혼 후에도 수십 년씩 자립하지 못하는 그들이 벤 같은 존재일수 있다.
길지 않은 분량의 책이라 금세 읽었지만 생각거리가 많아 완독의 성취감보다 어려운 숙제를 받았다는 부담이 크다. ‘레싱의 작품 세계는 페미니즘,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인종 차별, 생명과학, 신비주의 등 20세기의 갖가지 정치, 사회, 문화, 종교, 사상 문제를 포괄한다.’는 책날개의 설명처럼 무겁지만 좋은 작품을 만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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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남녀 해리엇과 데이비드가 만나 가정을 꾸린다. 그들은 전통적 의미의 행복한 가정을 건설하려는 꿈으로 런던 근처 소도시에 빅토리아풍의 다락까지 달린 삼층집을 마련하고 "적어도 애는 여섯 명"이라며 엄청난 자식 계획을 세운다.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일은 어느 정도 잘 풀린다. 넷째 아이 폴이 태어났을 때까지만 해도 그런대로 순탄했다. 하지만 해리엇이 다섯째 아이 벤을 임신했을 때부터 일은 꼬이기 시작하고 소설은 웬만한 장르소설만큼이나 소름 끼치고 공포스러워진다.
임신 기간에는 해리엇에게 엄청난 고통을 가져다주었고, '전혀 아기같이 생기지 않았다', '도깨비나 요괴 같다'라고 묘사되는 이 아이가 앞으로 어떤 끔찍한 일들을 저지를지, 어떤 공포스러운 상황이 일어날지 너무나 걱정되기 시작한다. 벤은 개나 고양이를 목졸라 죽이거나, 같은 학교 아이를 바닥에 넘어뜨리고 팔을 젖혀버리는 등의 악행을 저지르기는 하지만, 책을 다 읽고 든 생각은 생각했던 것만큼의 끔찍한 악행은 별로 없었다는 것이다. 뭔가 더한 일이 생길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보다는 아니었다. 물론 벤으로 인해 해리엇을 포함한 가족 모두가 고통을 겪게 된 것은 사실이다. 그 고통은 삶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고통이지만 벤은 태생부터 그렇게 생겼고, 그 사실 때문에 어린 나이에 요양소에 보내져 죽음을 맞기에는 벤 입장에서는 억울하다는 생각도 들 법 하다. 이 책에는 벤을 향한 해리엇, 데이비드, 가족들의 시선은 나와있지만 역으로 그들 모두를 보는 벤의 시선은 나와있지 않다. 모두에게 벤이 너무나 다른 존재인 만큼 벤에게는 모두가 자신과 너무나 다른 존재이지 않을까?
이야기 후반에 해리엇은 벤에게서 수천만 년 전에 정점에 도달했던 어떤 종족을 본다. 그 종족은 곤봉 같은 뼈를 갖고, 도깨비 같은 눈을 하고 땅굴 속에 숨어 살았을 것이라고 상상한다. 그리고 벤도 자기와 같은 종족을 찾아 어딘가의 지하세계에서 살아갈 것이라고 예상하며 이야기는 끝이 난다. 저자는 빙하시대의 유전자가 우리에게도 내려온다는 한 인류학자의 글에 착안하여 이 소설을 쓰게 되었다고 밝혔다. 벤의 엄청난 식욕과 힘은 그의 원시적인 특성이었을 것이다. 작가는 벤이 절대악은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다. 모두를 힘들고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은 벤이라는 절대악이 아닌, 그로 인해 발생할 너무나 이질적이고 예측불가한 상황들일 것이다. 가족들이나 다른 사람들과 벤 간의 차이는 문명적인 것과 비문명적인 것 간의 차이이지, 선악 간의 차이는 아닐 거라고 생각해본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에게 친근한 것과 이질적인 것을 각각 선과 악에 연결시키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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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스 레싱의 소설은 처음 접해보는데 그리 길지 않은 중편 정도의 길이로 탄탄하면서 꽉찬 느낌이 들어 좋았다. 소재도 뭔가 그로데스크하면서 독특한 매력이 있었다. 다 읽고 나니 언젠가 보았던 틸다 스윈튼 주연의 영화 <케빈에 대하여>가 떠올랐다. 모성애란 모든 어머니에게 무조건 다 있는 것인가, 자기 자식이 보통의 다른 아이들과 다를 경우, 더 나아가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킬 경우 부모와 가정은 어디까지 보듬어 줄 수 있을 것인가 등등 상당히 복잡미묘한 생각을 하게 한 영화였는데 이 소설도 그에 못지 않게 비슷한 많은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경력도 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한 개인과 가정의 문제를 넘어서 보다 심오한 사회, 역사적 은유를 내포하고 있는 듯도 한데 글 속의 불행과 우울함에 한껏 눌려서인지 지금은 마음 속 무언가를 정리해내기가 쉽지 않다. 좀 더 시간이 흐른 후에 한번쯤 다시 읽어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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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가정을 꿈꾸는 두 남녀가 있다. 직장에서 만난 두 사람은 서로가 꿈꾸는 이상적인 합일점을 결혼과 함께 계획하게 된다. 런던의 부담스러운 주택 가격을 피해서 주변 도시에서 빅토리아풍의 3층짜리 거대한 주택을 눈여겨본다. 2여 년 동안 돈을 모아서 주택을 구입하면서 두 사람이 꿈꾸는 가족이 시작된다. 많은 아이를 낳고 가정적인 남편이 되는 이상적인 가족을 의미한다. 첫째가 태어나고 둘째, 셋째, 넷째까지 빠르게 임신을 하면서 아내는 체력이 많이 소진된다. 지친 아내를 살피지 못하는 남편, 쉬지 않고 출산과 임신을 반복적으로 생활하면서도 자신의 상태를 인지하지 못한 아내가 있다.
육아와 가사노동은 혼자의 힘으로 감당하지 못하여 어머니의 도움을 받는다. 매년 가족들과 파티가 이 집에서 여러 차례 열리고 수많은 방과 가족들의 생활비용까지도 감당하는 것도 이 부부와 시아버지의 몫이 된다. 부자인 시아버지는 수표를 매년 이 부부에게 주면서 재정적 지원을 지속한다. 많은 인원을 감당한 요리와 장보기는 누가 했는지 직시한다. 가장 힘든 일인 장보기와 요리는 이 부부가 결코 한 적이 없었다. 이 부부는 자신들의 계획인 아이들을 계속 임신하고 출산하는 것에만 충실하였다. 부가적인 재정적인 지원은 시아버지, 가사노동과 어머니 역할과 가사 노동은 친정어머니가 없었다면 가능했을까?
결혼은 독립적인 가정이다. 하지만 성인인 두 사람은 온전히 두 다리로 서있지도 못하면서 계속 출산을 거듭한다. 주변 가족들은 우려하면서 조언을 하지만 아내는 이들의 충언을 멸시와 조롱으로 받아들인다. 연이어 다섯째 아이가 임신하면서 그녀의 내면과 육체는 더욱 힘겨워진다. 불안과 고통의 8개월이 연속되면서 아이는 태어난다. 거대한 아이 벤이 태어난 것이다. 임신기간에도 남달랐던 움직임으로 임신기간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냈던 임산부였다. 하지만 산부인과 의사는 어떤 진단도 내리지 않는다. 아내는 홀로 힘겨운 8개월을 기억하고 경험하게 된다. 11파운드로 태어난 벤의 성장 속도도 괴물스럽게 전해진다. 산모의 젖은 멍이 들어있다. 아기가 먹는 양과 흡입력은 산모를 소진시킨다. 결국 벤은 다른 아이와 다르게 모유 수유를 빠르게 중단하게 된다.
정상적인 성장 속도를 넘어서면서 가족들은 벤을 평범한 아기로 보지 않는다. 생김새와 먹성, 애착을 보이지 않으며 말도 하지 않는 아기이다. 차가운 눈을 주시하게 한다. 집안의 개와 고양이 죽음을 벤과 연관성이 있음을 모두가 인정하면서 함묵하게 된다. 4명의 아이들은 벤을 두려워한다. 잠들기 전에 아이들은 방문을 잠그기 시작한다. 가족들이 모이는 파티에는 점점 모이는 가족들이 줄어든다. 벤을 직접 보고 동물들의 죽음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이 가정은 행복한 가정인가. 이 부부는 행복한 가족을 유지하고 지속할 수 있을까.
벤은 위협적이다. 이들을 모두 두렵게 만든다. 야생적인 모습들이 생생하게 전해진다. 닭고기를 생식하는 모습, 영화의 줄거리를 말하지 못하는 모습, 자신의 이름만 읽고 쓰는 아이, 힘이 놀라울 정도로 센 아이이며 싸우는 아이이다. 학습되지 않고 야생적 본성을 유지하는 아이는 사회적인 모든 것을 답습하지 못한다. 결국 가족들의 합의로 요양소로 보내진 아이는 어떤 일들을 경험할까. 주사기와 약물, 구속복, 굶주림이 벤과 함께 한다. 모성에 의해 홀로 벤을 다시 데리고 온 엄마는 아이들과 가족들, 남편에게서도 외톨이가 된다. 벤을 두려워하면서도 불쌍하다고 느끼며 외계인처럼 느끼고 있는 엄마이다. 공포감을 주는 말로 벤을 통제하면서 곁에 두고 감당하지 못하는 벤을 타인인 존의 일당들에게 보수를 주면서 벤과 함께하도록 유도한 부모이다.
부부의 양육 태도는 일반적이지 않다. 결국 아이들은 뿔뿔이 해체된다. 해체되고 자생적인 삶을 선택한다. 유일하게 부부의 집에서 생활하는 아이는 넷째인 폴이다. 폴은 신경질적인 아이가 된다. 온전하게 엄마와 애착 시기를 보낼 놓친 아이임을 작가는 놓치지 않는다. 이 부부가 가진 것들과 놓쳐버려서 잃어버린 것들이 두드러지는 소설이다. 거대한 주택은 존재하지만 텅 비어버린다. 텅 빈 방들, 호텔 같은 많은 방들은 더 이상 가치를 잃어버린다. 아이들도 더 이상 부부를 찾아오지도 않는 거리감만 존재한다. 행복한 가정은 무엇인지 질문한다. 확고하게 고집스러움으로 밀어붙인 다자녀 가정의 행복은 어디로 날려버렸는지 보여준다.
권력을 가진 의사와 선생님, 전문가와의 상담시간은 효용성이 있었는지도 보여준다. 그 누구도 벤을 그대로 평가하지 않았던 이들로 인해 이 부부는 벤을 어떻게 키웠는지 보게 한다. 일반적이지 않은 아이가 태어나면서 겪게 되는 가족들의 혼돈과 당혹스러움, 모성애와의 충돌, 죽음 앞으로 당겨놓는 사회적 시스템과 죄책감은 무수히 충돌된다. 가족의 행복을 선택하지 못한 대가는 처참하다. 또 다른 아이가 보여준 성향과 어울리는 집단은 이질감으로 그려진다. 길을 잃어버린 이 가족 이야기는 지금도 누군가의 이야기이며 정답이 없는 선택으로 남겨지게 된다.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의 작품이다. 꽤 흥미롭게 읽은 소설이다. 작가의 다른 작품들에도 관심이 간다. 술술 읽혀서 시간 가는 줄 몰랐던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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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챕터 구분이 없어서 어떻게 읽어야하나 고민했지만 그냥 커다란 하나의 챕터처럼 단숨에 읽어버렸다. 현대사회에서 낡은 가치관이 어떻게 배신당하고 붕괴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여기서 보여주는 낡은 가치관이라는건 가족중심의 가치관이다. 그리고 그 핵심은 모성애. 상의도 없이 첫 아이의 임신을 주도하고, 그리하여 헤리엇으로 하여금 엄마로서의 그 긴 여정을 시작하도록 만들어 놓고 이야기의 배경속으로 스르륵 빠져나가는 데이빗을 보면, 부성애는 낡은 가치관 속에서도 큰 자리를 차지하지는 않는듯하다. 개인적으로 모성애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자녀를 갖게된 여성이 자녀에 대해서 느끼는 어마어마한 책임감을 미화하고 신성시하고 '판매촉진&배포'하기 위해 만들어진 단어라고 생각한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헤리엇에게 주어진 운명은 참 가혹하다. 모성애 때문이 아니라 자신과 심하게 관련된 어떤 존재에 대한 책임감때문에 그렇게 싫었던 벤을 시설에서 데려온것이라면? 책임감마져도 낡은 가치관으로 볼 수는 없지 않은가. 한마디로 강한 충격을 주는 작품이다. 도리스 레싱의 다른 작품들도 꼭 읽어보고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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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늘하고 슬픈 이야기 숨을 고르며 천천히 읽었다
* 병원에 도착할 무렵 뒤틀리는 고통이 있었고 이것은 과거 어느 때보다 더 극심하다는 것을 그녀는 알았다. 아기는 나가려고 싸우는 것 같았다. 그녀는 멍이 들었다 - 그녀는 알 수 있었다. 자신의 내부에 엄청나게 거대한 큰 멍이 들었을 것이라는 점을 - 그리고 아무도 이를 알 수 없다는 것을.
* 그녀는 데이비드에게 말하였다. [우린 벌받는 거야. 그뿐이야.] [무엇 때문에?] 그녀의 목소리에 그가 증오하는 톤이 있었기 때문에 방어적으로 그가 물었다. [잘난 척했기 때문에. 우리가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우리가 행복해야겠다고 결정했기 때문에 행복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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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아이의 성장을 먼 곳에서나마 지켜보고 있다. 아이를 키우며 충돌하게 되는 고민들이 이야기 안에 잘 녹아있다. 넘치는 행복과 넘실거리는 불안들. 네게 가닿아 있는 접점들에 대한 것들. * 그 애는 자신을 <불쌍한 벤>이라고 부르는 습관이 생겼다. 누군가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들었나? 젊은이들 사이에서 누가 「불쌍한 벤!」이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자기에게 맞다고 생각했나? 그 애는 자신을그렇게 생각했던가? 만약 그렇다면 이것이 그들로부터 감추어져 있던 벤의 일면에 대한 창문이 아닐까? 이런 새각은 그들의 가슴을, 정확히 말하면 해리엇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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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에 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얼마만큼 관심이 있을까. 보통 생애주기를 요람에서 무덤까지 망라하는 발달 단계로 치면서도 어린이 시절은 빼놓고 얘기한다. 난 인스타그램에서 아이가 웃으면 귀엽다고 난리를 펴지만, 정작 어린이가 어떤 생각으로 사는지엔 무관심하다. 어린이를 우리 사회의 미래라고 떠받들지만 실상은 깍두기로 치부한다. 어린이를 보호의 대상으로만 여겨 개별적인 존재로 대우하지 않은 탓이다. 내가 한때 어린이였다는 이유만으로 쉬이 넘겨짚고, 세상모르는 미숙한 존재로 대상화한다.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그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소설과 영화와 같은 대중 매체도 마찬가지다. 어린이를 판에 박힌 이미지로 재생산하며 평면적으로 다룬다. 이렇게 별 고민 없이 어린이를 대하면 그들의 세계는 점점 더 헐거워질 수밖에 없다. 어린이를 주목해야 한다는 담론은 청년과 노년 세대의 문제만큼 다뤄진 적이 없다. 다시 한번 질문해봐야 한다. 지금 이 도시에서 어린이들은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해리엇과 데이비드는 첫눈에 반한다. 통하는 게 많은 두 사람은 두 달이 채 되지도 않았는데 약혼을 한다. 임자 만났다는 말이 이런 것일까. 일사천리로 부모의 돈을 빌려서 저택을 구입하고, 서둘러 성대한 결혼식을 연다. 그리고 이어서 바로 아이를 잉태한다. 그것도 넷이나. 다복한 가정을 꾸린 부부의 집은 인산인해를 이룬다. 그들의 행복을 나눠 갖기 위해서일까. 부부는 경제적으로 시달리는 와중에도 자신들의 행복을 의심치 않는다. 다산의 여왕 해리엇은 혼신의 힘을 다해서 아이들을 키워내지만, 친정어머니 손을 빌리고 시댁의 경제적인 지원을 받고도 힘에 부친다. 그렇게 점점 지쳐갈 무렵 젊은 부부는 부주의하게도 다섯째 아이를 잉태한다. 경악할만한 일이 발생했다. 갓 태어난 아이가 침팬지처럼 생긴 것이다. 남다른 발육으로 백일도 채 되지 않아 걷는가 하면, 몇 살이나 많은 형제의 손가락을 부러뜨리는 폭력 성향을 드러낸다. 이웃집 강아지를 죽이고는 마치 세상 다 가진 것처럼 웃어젖히는 아이를 보고 해리엇은 경악한다. 부부의 집을 찾던 이웃 친척들도 발길을 뚝 끊는다. 벤의 형제들 역시 위협을 느끼고 집을 피해서 하나둘 친척 집으로 떠난다. 부부를 도와주시던 양가의 부모님마저 두 사람에게 등을 돌린다. 데이비드는 일에 집착하며 집을 멀리하고, 해리엇은 견디기 어려운 양육의 고통에 시달린다.
작가 도리스 레싱은 두 번의 이혼과 세 명의 자녀를 키운 경험을 가진 작가다. 작가는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아 행복을 추구한다는 순리와 같은 흐름에 제동을 건다. 성인이 되어서도 스스로 삶의 양태를 정하지 않고, 의심 없이 남들이 하는 것처럼 답습하는 삶에 의문을 제기한다. 전통적인 가치관을 아무런 의심도 없이 받아들이는 것은 과연 온당한 선택일까. 그렇게 받아들인 결과가 벤처럼 돌연변이에 가까운 아이라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다섯째 아이>는 앞선 두 책과 달리 어른의 눈으로 이해할 수 없는 어린이의 기행을 바라보는 무력한 시선이 도드라진다. 자신의 배로 낳은 벤에 의해 삶이 망가져 버린 해리엇은 지나치게 넓은 저택에 홀로 앉아서 생각한다. 과연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어른들은 본능적으로 아직 어른이 되지 않은 아이를 무서워한다. 계산이 딱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예측 불가능한 존재는 불안을 자아낸다. 자식일 경우 영영 이해하지 못하면 어쩌나 고심한다. 소설은 문명을 이탈하는 돌연변이가 나타났을 때도 허울 좋은 교육의 가치를 논할 수 있는지 묻는다. 양육을 통해 사회에 적합한 사람으로 만들겠다는 순진한 계획을 배격한다.
도리스 레싱은 <다섯째 아이>를 발표한 지 12년 후인 21세기의 첫머리에 <Ben, in the World>라는 후속작을 발표했다. 돌연변이로 어디서 적응하지 못했던 벤이 결국 전 세계를 떠돌아다니면서 자신을 도외시하는 사람들을 관찰한 작품이다. 자신은 그저 그런 존재로 태어났을 뿐인데 비난하는 눈초리다. 다양성은커녕 조금만 달라도 배척하기 바쁜 이들이 도시를 가득 메우고 있다. 누가 누구를 이해해준단 말인가. 혐오와 배척의 문제가 여전히 화두인 2022년 요즘, 아이들의 눈은 저 밑에서 천연히 어른들을 응시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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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공포게임? 이라고 해야하나...무튼 그거 할때 단서중 하나로 나왔던 책이어서 내용이 궁금해서 읽어봤다 다섯번째 아이가 얼마나 무섭길래 그래! 하고 읽었더니 그저 정상적으로 태어나지 못한 아이였을뿐이었다. 왜 다른 네 아이들과는 다른걸까? 하면서 어느 시설로 보내버리는데 나중엔 죄책감때문에 다시 가본다. 그 곳에 있는 아이들은 그냥 죽어가고 있었다. 지금으로 따지면 지체장애가 있는거 같이 보인다. 요즘 세상엔 널리 알려진 질병이고 질병을 앓고있다해서 버리는 부모는 현저히 적겠지만... 알려지지 않은 질병이고 다섯 아이 중에 한명만 다르다면 저렇게 두려움에 떨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그럼에도 끝까지 보살펴주는 아이가 중학교에 들어갔을때 질나쁜 친구들을 사귀게된다. 근데 엄마는 그걸 보면서 내 애랑 왜 놀아주지? 하는 의아함만 간직한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다. 자신은 더 개입하기 싫은데 나쁜 친구들이랑 어울리는건 신경 쓰이는 복잡한 양가감정... 만일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너무나 밝은 쪽으로만 생각해서 우리 애들은 무조건 건강하고 좋은 아이일거야 라고 생각한 상태에서 벤을 낳았다면 어떻게 대응하게 되었을지 생각해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