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주주의란 무엇일까? 우리는 민주주의하면 우선은 국가의 체제에 대한 제도로써 이해한다. 공산주의 혹은 전체주의와 대척점에 있는 제도로써 이해하며, 마치 민주주의가 절대선(善)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우리가 해방 후 미국의 정치체제를 도입하면서 자유보통선거와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을 민주주의의 모든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또한 사회를 통제하고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던 군사독재시절, 우리는 그러한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을 민주화라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도 우리는 민주화투쟁때 얻었던 가치들이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그런 것들이 다시금 바로 세워진다면 민주주의가 회복되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즉, 우리사회에는 민주주의의 이념을 공고화하고 심화시켜 나가야 한다는 민주주의 당위론만이 담론으로 되고 있다. 그러나 과연 현대사회에서 민주주의란 그런 것일까? 자본주의와는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을까? 아직은 우리의 민주주의에 대한 경험이 일천하기 때문에 서구의 그것과는 분명히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지만, 이제 우리도 민주주의의 실체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와는 다른 담론에 대해서도 귀 기울일때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이나 비관론은 유럽사회에서는 일상적인 담론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것은 근대 시민혁명 이후 민주주의를 고도로 심화시킨 서방 선진국에서는 보편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며,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의 공간은 서구사회, 그 중에서도 21세기의 프랑스에서 특히 심하다고 한다. 이 책의 저자인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는 민주주의를 근대적 대중사회 속의 개인들의 무제한적 욕구가 지배하는 사회체제라고 정의한다. 또한 민주주의는 최초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에서 출현했을 때부터 민중의 통치하에서는 모든 질서가 파괴된다는 부정적인 믿음 속에서 발달되어 왔다고 말한다. 오늘날, 우리는 민주주의 국가의 모델로 주저없이 미국을 들고 있다. 또한 미국은 무력을 사용하여 민주주의를 확산시키는 유일한 국가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들이 확산하는 민주주의는 선거, 언론의 자유와 같은 민주주의의 혜택만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라, 혼란도 가져다 줄 수 있음을 우리는 이라크에서 목격하고 있다. 민주주의가 선사하는 자유는 악(惡)을 행할 수 있는 자유이기도 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민주주의는 국민 스스로 국민의 정부를 수립하는 평화의 노래가 아니라 욕망을 충족하려는 열정에 기초한 무질서가 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또한 포스트 모던사회에 진행된 소비사회는 민주주의와 소비를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여, 민주주의적 평등을 소비의 평등으로 만들고, 민주주의적 인간과 소비자로서의 개인이 동일한 것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 결과 지배는 구성원 모두가 소속되는 공적인 차원과 개인의 자유에 기초하여 존재하는 사적인 차원으로 구분되지만, 여기서 개인의 자유는 사회 내에서 권력을 가진 자들의 자유로 지배되게 만들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정치라는 것은 더불어 살아가는 기술과 공동선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고대 철학자들은 정의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와 그러한 정의는 사라지고 민주적인 소비자들은 자신에게 남겨진 특권만을 이기적으로 방어하게 되었다고 한다. 민주적 삶의 고유한 특성인 집단적 행동은 공공영역에 대한 토론에의 광범위한 민중참여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모든 에너지를 개인적 만족을 추구하는 쪽으로 돌리는 사회생활의 한 형태가 되었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현대에 들어 사회학자들은 옛날 그리스의 아고라에서 행해졌던 직접민주주의가 현대에는 맞지 않고, 요즘처럼 거대해진 국가나 근대적 사회에 맞는 제도는 오직 대의 민주주의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대의제도는 민주주의의 한 형태가 아니라고 저자는 말한다. 대의제는 공공영역을 담당할 권한을 가진 소수가 전체를 대표하는 과두제이며, 선거는 체제를 민주적으로 보이게 하는 하나의 형식에 불과하다고 한다. 또한 선거라는 형식을 통한다 할지라도 소비자들은 개인적 만족만을 추구하기 때문에 과두제나, 민주제를 불문하고 통치는 항상 능력 있는 자들이라 칭하는 유산계급들이 하게 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나 모든 통치에는 반드시 공공영역이 나타나게 되고, 통치행위는 공공영역을 줄이려는 경향과 그것을 통치권 내부로 흡수하여 사유화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민주주의는 바로 이런 사유화에 반대하는 투쟁이자 공공영역의 확대과정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따라서 민주주의는 자신들의 사적인 행복을 추구하며 그것에만 매달리는 개인들의 생활방식과는 거리가 먼 것이라고 한다. 우리는 흔히 정부의 작동방법을 민주주의라고 부른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국가의 형태는 아니며, 현대사회는 국가차원의 과두제와 경제차원의 과두제의 결탁에 의해 공공영역이 장악되어 있다고 한다. 즉, 우리는 과두제적 법치국가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다. 정치의 개념이 상실된 상태에서 민주주의라는 용어는 우리가 더 이상 사용하기를 바라지 않는 지배체제라는 말을 대신하는 용어가 되었고, 그러기에 민주주의는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는 생각이다. 민주주의는 민(民)의 이름으로 과두정치가 난무하는 것을 허락하는 통치형태도 아니며, 교환경제의 논리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사회 형태도 아니라고 주장하는 저자, 그것은 공공영역에 대한 과두적 정부의 독점을 지속적으로 파괴하는 행위이며, 생활 전반에 대한 유산계급의 강력한 영향력을 끈질기게 뿌리뽑는 행동이라고 말한다. 불평등사회는 원칙적으로 평등사회를 잉태할 수 없듯이 재력에 기초한 권력의 평등을 주장하는 자본주의 또한 마찬가지라고 한다. 이러한 민주주의의 모습은 사상의 힘을 사용하는데 익숙한 자들에게는 공포심을 줄 것이지만, 어느 누구와도 공평하게 권력을 나눠 가질 수 있는 사람들에겐 용기와 기쁨을 선사해줄 것이라고 한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른 민주주의 담론을 접하였다. 저자는 미국식 민주주의가 프랑스 사회를 어떻게 파괴하는지를 분석하기 위하여 이 책을 썼다고 한다. 우리의 경우 애당초 미국식 민주주의라는 옷을 입고 출발하였다. 그래서일까? 점점 더 자본주의, 아니 신자유주의 논리 속으로 함몰되어 가는 민주적 가치들을 발견한다. 이제부터라도 우리 또한 이러한 민주주의 담론에 귀 기울여야 되지 않을까 싶다. 자크 랑시에르 말처럼 민주주의 사회를 잉태하기 위해서는 재력에 기초한 평등을 아예 뿌리 뽑아야 하기 때문이다. |
|
민주주의는 왜 증오의 대상인가 이런 제목에 의아했다. 민주주의를 위해 희생한 많은 사람들이 존재했던 우리 땅에서. 이전에 비해 나아진 민주주의,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무어냐고 물으면 할 말이 별로 없다. 항상 공산주의니 사회주의와 대척적인 것으로 여기고, 비교를 통해서 좋다고만 생각했기에 아는 것이 별로 없다. 그리스에서부터 시작되고. 이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하였다고, 하지만 현실에서 민주주의란 단어를 만나면 별 감흥이 없다. 어쩌면 당연한 것으로 인식하는 것 아닌지? 심지어 증오와 혐오의 대상으로 전락한 느낌이다. 다수를 위한 행복이 점점 위협을 받고, 이루지 못함 꿈이 되어가는 현실이 있기에 그런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민주주의의 역사는 유럽의 국가에 비해 상대적으로 짧은 편에 이루어졌기에 경제만큼 문제도 많은 것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원칙과 기본이 우선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자유와 평등은 제도가 아닌 생활수준과 경험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는지? 민주주의는 욕망을 충족하려는 열정에 기초한 무질서라는 정의로 시작한다. 공권력과 정책지향적인 지식인들로 인해 민주주의는 추락할까? 아니면 권력에 가까이 있으면서도 권력의 행사에 배제되는 지식인들이 만들어가는 개념일지도, 권력에 제한이 명확하지 못한 정치형태이며 민주주의적 삶은 국민권력에서 나오는 것일까? 그럼 민주주의를 외치는 나라 유럽이나 미국은 과연 민주적인가? 그들의 국내적으로는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민주주의를 외치며 중동이나 아프리카에서 행하는 그들의 일들을 민주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 이런 일들이 민주주의 전부가 아님을 명심해야 할 것 같다. 누구의 승리인가? 민주주의 아니면 범죄적 민주주의. 이제 모두들 민주주의를 외치지만, 과거 폐쇄적 정체성을 띤 ‘국가의 원리’때문에 비난 받았던 것이 이제는 무제한적인 ‘사회적 원리’ 때문에 비난 받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집단적인 종교와 군중의 무분별한 열광 앞에서 개인의 권리를 희생시키는 급진적이며 평등적인 민주주의, 선한 민주주의(자유민주주의)는 평등적이나 집단적인 나쁜 민주주의로 구분할 수 있을까. 이기적인 개인이며 탐욕적인 소비자가 민주주의적 인간이다. 평등에 대한 요구는 민주주의적 개인을 양산했으며 국가 내에서 구현되는 공동재산의 구축을 방해하고 점점 복지민주주의는 계약적인 관계모델로 변하고 있다. 개인은 사적 영역에만 관심을 가지기에 민주주의는 곧 소비가 되었다. 무엇보다 민주주의적 소비자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정치의 순수한 의미를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다. 민주적 정치생활의 지나친 면과 대중적 개인주의의 과도함, 인간들의 탈 정치적인 삶과 소비자인간의 조그마한 즐거움에 집착을 경계해야 할 것 같다. 민주주의의 해악성. 민주주의는 신과 관계를 파기한 상태에서의 사회조직 형태이다. 무엇보다 정치는 근대적 무신론이다. 이제는 민중의 권력이라는 유토피아를 과감히 포기해야 한다. 무엇보다 합당한 통치의 기초는 다름아닌 그 기초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국민들에 의해 선출된 자들의 위임통치와 권력행사를 갈망하는 사실에서 합당한 통치는 통치행위를 갈망하지 않는 자들에 의한 통치와 권력 장악에 몰입하는 무리들을 배제해야 한다. 또한 민주주의는 혈연적인 관계와 그 위계질서와의 단절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자신들을 통치할 만한 자격을 가진 자들에 의해 통치를 받는다고 여긴다. 혈연과 신성에 기초한 출생의 우월성, 생산과 재생산활동의 조직 역량에 기초한 경제적인 능력에 의한 통치는 물리적인 힘과 지식 그리고 통치력과 무자격의 자격(통치할 자격도 통치 받을 자격도 없는 자들에게 부여하는 자격) “인민의 권력이란 사회 구성원 전체의 권력이 아니며, 다수의 권력도, 노동계급의 권력도 아니다. 그것은 단순히 통치 받을 자격만큼이나 통치할 자격을 가지지 못한 자들의 고유한 권력인 것이다.”에 의한 통치이다. 어떻게 보면 추첨과 우연성에 기초한 사회의 통치가 진정한 민주주의인지 모른다. 우월한 자들의 권력은 평등한 자들의 권력에 의해서만 결정적으로 그 정당성을 부여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이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리고 정치의 존재는 예외적인 특수한 자격에 의존한다. 국가에 대한 통치는 그것이 정치적인 때에 그 정당성을 갖게 된다. 민주주의는 통치되어야 할 사회도 아니며, 한 사회의 통치체제도 아니다. 민주주의, 공화주의, 대의제. 민주주의는 사유화(공공영역을 줄이려는 경향)에 반대하는 투쟁이자 공공영역의 확대과정이다. 민주적 통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만장일치이나 우리는 대의민주주의(의회 체제, 다원적 헌정체제)를 택하고 있다. 민주주의는 자연과의 분리, 타고난 자질과 통치구조 사이에 존재했던 연결고리의 붕괴상태를 보여주는 것이다. 기존의 선거에 저항, 대표성을 통해 지배집단의 이익을 보호, 선거를 통해 사회적 동의까지 이끌어내는 것이다. 또한 공적인 차원에서 집단적 성격을 띠어 지배는 공적, 사적 영역을 분리한다. 무엇보다 자유는 부의 증대법칙이 지배하는 제국이다. 민주주의 운동의 기초가 되는 인권, 하나의 국민공동체에 속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권리도 없는 것이다. 헌법 조문상의 시민은 정치적 주체이고, 민주주의는 정치의 불순성이다. 공화주의의 이념은 지육을 통한 지식의 전수와 덕육을 통한 사적영역에 기반한다. 무엇보다 법과 공화국 가치를 가지는 도덕관습을 필요로 한다. 인간이면서 동시에 시민으로 존재하고 교육은 이미 사회 내에 존재하고 사회적 이용, 정치적 차원에 적용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지육(지식의 분배)과 덕육의 혼합은 공화주의의 본질이다. 절대적 개인주의는 어떠한 것에도 구속 받지 않으면서 사회적 행위를 할 수 있는 것으로 개인들의 원자화가 이루어지고 지식을 분해하고 사회적인 지위를 재분배하는 과정이다. 공화주의는 평등과 불평등의 공정한 비율을 찾아주는 과학을 통해서 민주주의적인 평등한 통치를 실현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불가능한 일인 것 같다. 민주주의가 증오의 대상이 된 이유는 무얼까? 우리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산다. 대의적인 제도와 민주주의의 적절하고 정당한 기준의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최악의 정부는 권력만을 지향하면서 권력을 장악하는 데 능숙한 그런 사람들에 의해 세워진 정부이다. 국가와 정부의 작동과정이 민주주의이나 국가차원의 과두제와 경제 차원의 과두제의 결탁에 의해 공공영역이 장악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악의 근원인 소수독재자들의 탐욕이고 우리는 이런 과두제적 법치국가속에서 살고 있다. 국가안보와 개인의 자유 그리고 인간과 시민의 권리 어느 쪽을 중시할지, 자신에게 현실을 부여하는 사람들의 권리는 무엇일까? 투표는 다수결에 의해 극단적인 정당 제거하고 다수당에게 통치 할 수단 제공하는 것이다. 그러나 민중들의 열정보다는 전문가들의 지식에 비중을 두는 해결책을 채택하고 있다. 이런 합의문화가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고, 통치를 담당하는 부담으로부터 해방된 대중들에게는 사적, 이기적 열정만 남게 된다. 그래서 공익에 대한 무관심과 선거참여 하지 않고, 투표는 자신들의 이익이나 소비자적 변덕 성향으로 투표가 이루어진다. 합의적 세계관, 세상에는 하나의 현실만 존재한다. 경제는 부라는 권력의 무제한성이기에 자본의 힘을 국가구성원 이익에 귀속시키는 것이 정부가 해야 할 일이다. 자본의 무제한적 팽창인 국민국가는 최적의 균형(근대화)와 부(자본)의 원리와 새로운 과두제적 정당성의 기초를 세우는 과학(지식)원리의 결합이다. 전문가 지식에만 의존하는 해결책이 국민적 선택에 종속되는 것에는 위험이 따를 수 있다. 권위는 국민의 선택과 통치자들의 능력에 좌우된다. 그러나 자본과 지식의 과두적인 동맹으로 모든 권력 장악한다. 근대화는 부(자본)의 원리와 과학(지식)의 원리의 합체에 지나지 않는다. 자본과 지식 동맹으로 경제 세계화 그리고 노동권, 의료, 연금문제 끊임없는 추락만이 남았다. 선거는 집합적인 승인이고, 포퓰리즘는 지배적 합의사항에서 벗어나는 모든 것들은 제어하는 것이다. 낙오자들의 무지함과 과거에 대한 집착과 국민이 없는 통치와 자본의 자유로운 순환이 미래의 복지를 사라지게 한다. 자본주의 작동을 위해서 자본이 순환되게 그냥 내버려 두는 것으로 충분하다. 국제자본주의와 국민국가들 간의 권력 나눔 현상은 국가를 약화시키기보다는 강화한다. 그리고 비국가적 기관이 거대화된다. “복지국가의 소멸은 ‘자본주의 논리’와 ‘국가적 직접 관리’라는 두 입장이 복지 차원의 여러 제도와 기능들을 서로 조정하여 재분배하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공공의 이익, 특혜 받는 조합의 퇴보적 이기주의와 국경 내에 한정된 투쟁으로 국가는 강화된다. 지식인들은 여론 관리에 만족하고 일치된 지배여론의 형성을 주도한다. 또 마르크스주의는 현실 이면에 숨겨진 진실을 파헤치는 것, 고발, 전통과의 단절을 통해 비난 대상을 대체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소비의 지배, 상거래의 지배, 무한성의 원리, 자본의 원리 그리고 민주주의적 인간, “민주주의적 인간은 정상적인 틀을 벗어난 존재로서 상품, 인권, 텔레비전의 볼거리를 게걸스럽게 탐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며, 또한 자본주의적 이익의 법칙이 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새로운 예언자(지식인)들이 이러한 지배에 대해 불만을 털어놓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이다” 경제체제와 국가체제를 고발한다는 것은 그것들에 대한 변화요구이다. 민주적 인간은 얼빠진 젊은 소비자의 인간성 상실을 애도한다. “민주주의 비판자들은 현대 문명의 민주주의적인 부패를 고발하면서도, 동시에 금권정치의 전도사적 군사행위를 민주주의라는 문명의 이름으로 지지하고 있다.”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 혼란양상들 중 하나는 민주주의를 하나의 사회형태로 간주(국가 과두제 지배를 은폐)하는 것으로 경제과두제의 지배를 숨기고 있다. 무엇보다 민주주의 용어의 이해는 이 용어 내에서 일어나고 있는 투쟁을 이해하는 것 민주주의 정당성의 근거는 평등적 우연성으로 특별한 자격 없음과 통치자와 피통치자간의 구분 없음에 지나지 않는다. 국가권력과 금권(자본)은 저의를 가지고 연합하여 자본의 흐름과 인구이동을 과학적으로 관리하고 있다. 민주주의는 공공영역에 대한 과두적 정부의 독점을 지속적으로 파괴하는 ‘행위’이며 생활전반에 대한 유산계급의 강력한 영향력을 끈질기게 뿌리 뽑는 행동이다. 사회주의는 하나의 역사적 관점이고, 집단적 지능과 집단적 세력 형성한다. 하나의 지배체제에 의해 만들어진 집단적 지능은 그 지배체제의 지능일 뿐이다. “한국민주주의 어디까지 왔나”를 읽든 중 문득 민주주의가 뭐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민주화에 투쟁한 세대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별로 아는 것이 없었다. 우리나라의 현실은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이라 할 수 있는 종교, 동문, 혈연 등의 배제를 하지 않는 지배층과 선거나 사회활동에 참여하지 않는 보통 우리들이 진정 민주주의를 증오할 수 있을지, 참여가 없는 민주주의는 존재할지 의문이다. 대선이 있는 올해, 아직도 과거에 붙잡혀 있는 우리, 사회지도층이라는 집단은 변하지도 않는다. 단지 그 속에서 우리는 선택할 뿐이다. 과연 우리를 위한 민주주의는 없단 말인가? 우리의 노력이 부족함을 여실히 깨닫게 되는 시기이다. 이기적인 개인주의로 철저히 무장하고서 민주주의를 외치는 우리들 자아성찰이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무엇보다 역자도 이 책이 난해하다고 한다. 부정적인 언어를 통한 긍정이 아닌가 생각된다. |
|
무엇이 ‘민주주의’인가 우리는 흔히 민주주의 국가니 민주주의 사회니 하면서 ‘민주주의’라는 말을 절대선(絶對善) 내지는 당위(當爲)인 것처럼 쓰고 있다. 하지만 정작 ‘민주주의’가 무엇인가라고 물어보면 그 구성원 개개인이 주인인 체제라고 말하거나 자유선거 등 민주주의의 제도를 언급하는데 그칠 뿐이다. 하지만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는 ‘민주주의’에 대한 다른 관점을 보여준다. 먼저 그는 민주주의를 “근대적 대중사회 속의 개인들의 무제한적 욕구가 지배하는 사회체제“1)라고 정의하여 기존의 민주주의에 대한 우리의 관념을 흔들기 시작한다. 더 나아가 ‘민주주의’라는 용어 자체가 처음 나타났을 때부터 ‘모든 질서의 파괴’라는 부정적 그림자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려주면서, 민주주의 자체가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와 더불어 성장해왔음을 암시하고 있다. ‘민주주의’는 왜 비판의 대상이 되었는가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의 이면에는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이 존재하고 있다2)고 한다. 따라서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에 대해 살펴보기 이전에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을 먼저 살펴보고자 한다.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은 크게 두 가지 형태를 가지고 있다. 우선, 귀족과 학자출신 입법자들의 것이 그것인데, 그들은 이미 기정 사실로 간주되었던 민주주의와 타협하고자 했다. 그것은 힘(역학구도)의 구축 작업이었으며, 제도적 장치들의 균형화 작업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형식적인 민주주의의 법이나 제도들은 외형에 지나지 않으며, 이러한 법과 제도하에서, 즉 이러한 도구들을 통해서 부르주아 계급의 권력이 행사된다. 결국 법과 제도라는 민주주의의 외형과의 투쟁이 실질적인 민주주의를 향하는 길이 되는 것3)을 의미한다. 결국 이러한 이상주의적 입장에서는 소위 언론에서 “민주주의의 승리”라고 부르는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의 무력에 의해 외부에서 주입되는 민주주의의 외형은 오히려 국민 스스로 자신들의 정부를 수립하려는 평화적 노력에 억누르는 반(反) 민주주의 혹은 가장된 민주주의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외부에서 주입된, 외형적 ‘민주주의’는 타도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또 다른 형태의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은 독특하면서도 어떤 의미에서는 초심(初心)으로의 회귀를 강조하는 듯하다. 즉, 이들은 어느 누구도 보다 더 실질적인 민주주의를 요구하지도 않고 있다. 이들은 (전자와 달리) 인민권력에 기초한 제도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대중들과 그들의 품행에 불만을 품고 있는 것이다. 이 비판자들에게 민주주의는 부패한 통치체제가 아니라, 국가와 사회에 부정적인 문제를 야기하는 하나의 문명적 위기인 것이다.4) 관점에 따라서는 이들이 개개인에게 ‘민주주의의 위기’의 책임을 돌리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떠한 제도도 그 제도를 운영하는 사람의 수준에 따라 달라지듯이 ‘민주주의’도 그 제도/체제를 제.대.로 운영할 수 없는 사람들의 손에 떨어지면 순식간에 중우정치(衆愚政治)로 변질될 수 밖에 없는 것을 감안하면, 민주주의는 어떠한 제도적 장치에 의해 보장되는 것도 아니며 역사적 필연성도 없는 존재인 셈이다. 게다가 엄밀히 말하자면 소위 ‘간접 민주주의’라는 것이 ‘민주주의’의 외양을 뒤집어 쓴 ‘과두정(寡頭政)’, 즉 과두제적 법치국가 체제라는 것을 감안하면 더욱 이들의 주장이 그럴 듯하게 들린다. ‘올바른 민주주의’란 자크 랑시에르는 “올바른 민주주의는 민주적 삶의 고유한 특성인 집단적 행동의 지나침이나 참여 부재로 대표되는 과도한 정치적 무관심이라는 이중적 과잉을 제어할 수 있는 정치형태인 동시에 사회형태여야만 한다.“5)고 주장한다. 이러한 민주주의에 대한 이중적인 담론은 분명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유럽인들은) 민주주의를 최악의 정치 체제라고 보는 데에 익숙해져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에 대한 새로운 반감은 이 보다 더 복잡하고 혼란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 반감에 따르면, 모두가 평등하면서 동시에 차이가 존중되기를 바라는 민주주의적 시민사회의 영향으로 민주주의 정부가 부패를 방치할 경우, 이 정부는 나쁜 정부라고 지적하고 있다라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민주주의 정부가 시민사회의 무기력한 개인들에게, 문명간의 투쟁이라고 하는 문명의 가치를 방어해 주는 전투적 에너지를 고취할 경우, 이 정부는 좋은 정부라고 말한다. 따라서 민주주의에 대한 새로운 증오는 다음과 같은 하나의 간단한 명제로 요약될 수 있다. 즉 지구상에는 오직 하나만의 선한 민주주의가 존재하는데, 그것은 민주주의 문명이 만들어 낸 재앙을 통제할 수 있는 그런 민주주의인 것이다.6) 민주주의 당위론을 넘어서 자크 랑시에르 등 유럽 지식인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관점이 전적으로 올바르고 유일한 해석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민주주의’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이 책은 다른 관점으로 새롭게 세계를 보는 첫걸음이 되리라 생각한다. *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은 책에 대한 리뷰입니다. |
|
‘민주주의’란 우리에겐 결코 낯선 용어가 아니다. 또한 마치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선명하지는 않지만 막연하게 알고 있는 것이며, 민주주의라는 체제 속에서 살고 있다는 생각에 그리 저항감이 들지도 않는다. 게다가 민주주의는 선(善)한 것이지, 악(惡)한 것과는 결코 친한 것이 아니라는 믿음이 있으며, 자신이 소속된 국가의 통치권력은 자신들로부터 나오는 것이며, 통치자들은 당연히 자신의 권리를 위임받아 수행하는 대표자들일 뿐이라는 점에 의문을 달지 않는다. 대체 민주주의에 대한 어떤 이해와 신념이 이런 환상을 갖게 한 것일까? 더구나 정말 우리사회가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사회임에는 분명한 것인가?
이처럼 이 책은 민주주의에 내재되 있는 그 이중적 모습과 현대사회에서 민주주의가 어떻게 정착되고 운용되고 있는지, 나아가 민주적 삶이란 것이 오늘날 어떤 형태를 띠고 있는지, 민주주의가 만들어 낸 세계의 실상을 성찰하고 있다.
|
|
많은 책 가운데 '제목'에 반해 마구 읽고 싶어지는 책이 있다. 이 책이 그 가운데 한 권인데, 요즘 뒤숭숭한 <민주주의 용어논쟁> 덕분에 더욱 그러했다. <민주주의> 앞에 '자유'를 덧붙여 <자유민주주의>라고 일러야 '대한민국의 정체성'이 더욱 확연해진다는 주장 때문에 학생들이 배우는 [역사교과서-한국근현대사] 가운데에 <민주주의>라고 서술된 내용을 <자유민주주의>라고 바꿔야 한다는 내용의 논쟁이다. 나름 명분도 있고 논리적이긴 한데 '대한민국 정체성'을 확고히 해야 한다는 주체가 '한국의 근대화는 일제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서술하기도, '대한민국의 건국은 UN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사실'도 함께 서술해야 한다고 주장을 해서 그 명분을 헛갈리게 만든다. |
|
거리에 지나가는 행인을 붙잡고 한번 물어보자. "당신은 민주주의자입니까?" "네" 이렇게 금방 대답하는 사람은 좀 모자란 사람이다. 이번에는 이렇게 물어보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입니까?" "글쎄요" 이 질문에 이렇게 머뭇거리는 사람은 좀 모자라거나 생각이 지나치게 많은 사람이다. 우리 사회는 개인보다는 집단 차원에서 민주주의를 바라보는 관점이 우세하다. 그래서 개인의 사적인 신념이나 체험이 아니라 국가 제도와 사회 시스템으로 민주주의를 바라본다. 자, 이번에는 자신이 싱가폴에 있다고 생각하고 행인들에게 똑같은 질문을 해보자. "싱가폴은 민주공화국입니까?" 그리고 "당신은 민주주의자입니까?" 대답이 궁금해지는데 아마 우리와는 정반대의 대답이 나오지 않을까? 개인적인 차원에서 다시 생각해보자. 나는 정말 민주주의자인가? 만약 "네"라는 대답이 절로 나온다면 민주주의를 위해 나는 도대체 무엇을 했는지 고민해보자. 자유와 민주의 가치를 중시한다? 추상적이다. 신성한 투표를 행사했다? 투표가 매일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또 말해다오. 386세대처럼 민주화투쟁에 참여했다고 모두가 다 민주주의자가 되는 것인지. 내 생각은 아니라고 본다. 민주투사가 곧바로 민주주의자인 것은 아니다. 유명한 학생운동가 출신의 인물이 실은 전체주의자일 수도 있고 엘리트주의자일 수도 있다. 정치적 권력을 추구하는 극단주의자일 수도 있고, 이념의 광신자일 수도 있다. 이런 이들이 평범한 생활 속에 실천하는 민주주의자가 될 수 있을까?
그럼 대체 민주주의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한번 따져보자.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는 《민주주의는 왜 증오의 대상인가》(인간사랑, 2011)에서 민주주의에 관한 묵은 편견들을 다시 들추어낸다.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에서 태어난 '민주주의'는 당시에는 천박꾸러기였다. 서구사상사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혐오의 계보가 긴 편이다. 가령 철인정치를 내세운 플라톤의 종족들은 민주주의를 우매한 민중의 통치라고 폄하했다. 저자가 보기에 민주주의에 대한 이런 폄하와 증오를 프랑스의 콧대높은 지식인들이 그 유해한 유산을 물려받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저자가 비록 프랑스 지식인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를 강조하고 있지만, 나는 오히려 한국의 보수적인 식자층의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의 표출 방식을 강조하고 싶다. 그것은 바로 입에서 '포퓰리즘'이라는 말을 자주 내뱉는 인사들이 저지르는 형태이다. 예컨대 한국에 불어닥친 포퓰리즘의 표어들은 은연중에 엘리트들에 의한 민주주의에 대한 경멸과 증오를 드러내고 있다. 프랑스 지식인들과는 다른 한국 식자층들의 민중지향적인 노선에 대한 강한 혐오감을 드러낸 것이라 볼 수 있다. 한국은 그놈의 일등주의와 엘리트주의 때문에 민주주의의 기반이 취약한 편이다.
우리나라 중고등학생들도 상식적으로 민주주의의 두 가지 유형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민주주의가 자유와 평등을 모두 핵심가치로 내걸고 있지만, 둘 중 어느 것을 보다 강조하느냐에 따라 '자유민주주의'와 '급진민주주의'로 구분이 가능하다. 균형있게 말한다면, 자유민주주의는 국가의 축소와 개인의 자유를 지향하고, 급진민주주의는 광범위한 민중참여와 평등을 지향한다. 그런데 비판자들의 눈에는 두 유형의 나쁜 면모 또한 비춰지고 있다. 가령 자유민주주의는 시장경제의 논리가 지배하는 소비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로 전락했고, 급진민주주의는 과도한 정치적 관심으로 인해 무정부주의적인 폭동으로 치닫을 수 있다는 비판이 그러하다. 자유민주주의에 반대하는 급진적인 탈근대론자들이 보기에, 민주주의의 자유는 어느덧 소비의 자유로 변질되고, 민주주의의 평등은 계급을 떠나 소비의 평등으로 전락하고 말았다고 비판한다. 민주담론에서 이런 구분은 심각한 충돌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가령 우리 사회의 예를 들어보자. 정부가 지난날 발표한 교과서 서술지침에서 '민주주의'를 '자유민주주의'로 변경한 것에 일부 자문기구 위원들이 반발하여 사퇴를 벌인 맥락도 사실 이런 이분법에 기반한다. 충분히 납득할만한 논란이다. 왜냐하면 '민주주의'를 '자유민주주의'로 수정한 것은 우리식 민주주의의 의미폭을 대폭 축소시킨 것이기 때문이다. 좌우지간 우리나라 사람들은 '민주'를 너무나 사랑해서 말썽이다. 이럴 땐 민주주의를 증오하는 프랑스인들을 다소 본받을 필요가 있지 않을까. |
|
프랑스의 철학자인 자크 랑시에르가 그들의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민주주의에 대한 거부감에 대하여서 자신의 생각을 그리고 있는데 프랑스와 우리나라의 상황이 다른 부분이 많아서 이해가 안되는 부분들도 있지만 미래의 일이라고 생각을 하면서 읽으면 좋을것 같다. 1. 민주주의 프랑스는 유럽에 위치를 하면서 고대 그리스에서 파생된 민주주의를 받아들이고 발전을 시킨 나라인데 그들이 그러한 정치행위를 받아들이는데는 많은 피를 흘린 대혁명이 있었다는 사실이 자신들 만의 정치체계를 발전을 시키고 유지를 하는데 많은 공헌을 한것 같다.
현재 세계에 퍼지고 있는 민주주의는 미국의 군사력을 동원한 방법에 의한 것들이 많았는데 그러한 행위를 통하여서 만들어진 민주주의가 꼭 선을 위한 것만은 아니고 악을 위한 행위에도 도움이 되는 현상에 많은 학자들이 우려를 표하고 있고 다른 방식의 민주주의를 제창을 하고 있는데 민주주의라는 정치체계가 가지고 있는 모습이 악을 포함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더 알려주고 있다고 한다.
2. 악의 민주주의 민주주의는 많은 구성원들이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개진을 하고 그러한 의견의 개진을 위하여서 많은 방법을 동원을 하는 것이 보이는데 동원이 되는 방법들이 꼭 비폭력을 우선을 하는 방식이 아닌 폭력을 이용을 하여서 자신의 의견을 들어내고 그러한 방식을 통해서 정치인들에게 자신의 뜻을 개진을 하는 방식도 민주주의에 내포되어있는 한가지의 방법이기 때문에 꼭 민주주의를 행하여 지만 자유로운 국가가 아니고 민주주의도 많은 문제점들을 가지고 있고 그러한 문제들을 해결을 하기 위하여서 구성원들이 이성적으로 생각을 하고 합의를 하여서 처리를 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3. 민주주의가 왜 증오의 대상인지에 대한 설명 민주주의를 구성을 하는 사람들은 불특정다수의 시민들이 자신들의 생각을 바탕으로 선거를 통하여서 뽑게 되는데 그러한 일들이 예전부터 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기득권층에게는 문제라고 생각을 할수가 있는 계기가 되고 그러한 계기들이 자신들이 계속하여서 권력을 가지고 운영을 하는 체제를 원하는 모습으로 등장을 하면서 현재의 민주주의를 증오를 하는 사람들이 발생을 한다고 한다.
실제로 선거에 등장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능력으로 만들었던 아니면 물려받은 것으로 포장을 하던지 많은 부분에서 평범한 사람들이 아닌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나 한분야의 전문가라라는 사람들이 후보로 등장을 하고 그러한 사람들이 자신의 능력을 이용을 하여서 득표활동을 하고 그 활동이 자신의 당선을 결정을 하는 시스템으로 움직이는데 이러한 문제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표로 인하여서 권리를 얻은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과는 다르게 행동을 한다고 믿고 체제를 원망을 하는 마음을 만들어 주는 효과를 보인다고 생각을 한다.
민주주의라는 체제에 대하여서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의 말을 인용을 하고 그러한 현상들이 어떠한 모습으로 현대의 체제로 변화가 되었는지 진정한 민주주의란 무엇이라고 생각을 할수가 있는지에 대한 모습들을 가르쳐주고 있는 책인것 같다.
※ 이벤트 당첨 도서입니다. |
|
신 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 가닥 있어 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 김지하, ‘타는 목마름으로’ 중에서 ‘민주주의’라는 단어만큼 정체가 모호한 것이 또 어디에 있을까? 실은 '민주주의'라는 게 현실에서 존재할 수 있을까? 자크 랑시에르가 이 책을 쓴 목적은 ‘민주주의의 해악’을 드러내며 '민주주의'를 공격하는 유럽 지식인들을 향해 ‘민주주의에 대한 현대적 해석과 그 가치’를 말하기 위함이지만, 한국 사회에서 이 책에 대한 독서는 ‘민주주의 그 자체’를 향한다. 혈통에 기초하는 사회질서에 반대하는 민주주의의 범죄성은 우선 정치 차원의 범죄인 것이다. (83쪽) 민주주의는 우선 통치를 위한 모든 자격을 배제하는 무정부적 체제이다. (96쪽) 즉 민주주의는 혈연적인 관계, 그리고 그 위계질서와의 단절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103쪽) 랑시에르는 고대 아테네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민주주의'가 어떻게 해석되어져 왔는가를 되짚으며, 민주주의의 현재를 묻는다. 즉 민주주의는 통치되어야 할 사회도 아니며, 한 사회의 통치체제도 아니다. 그것은 통치 불가능 자체이며, 이러한 통치 불가능성에서 모든 통치행위가 그 기초를 찾아야 하는 그런 것이다. (111쪽) 민주주의의 정의(definition)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고 민주주의 앞에서 민주주의에 반대하는 이들의 주장을 옮긴다. 왜 민주주의가 문제시되고, 증오의 대상이 되는가를 비판적으로 옮기면서 도리어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묻는다. 근대 민주주의는 근대 사회의 고유한 특성인 무한성의 법칙을 통해서 정치의 경계를 붕괴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40쪽) 결국 우리가 반대하는 것은 혈연이거나 정치경제적인 부라든가, 물리적인 힘이 아닌 모든 사람들의 뜻이 반영되는 어떤 정치체제-민주주의-일 것이지만, 그것은 기존 질서에서 보자면 정치적 범죄이거나 혁명이고, 현재에서 보자면 '이기적인 개인들의 소비적 차원에서의 평등 상태'가 된다고 말한다. 정치의 개념이 상실된 상태에서의 "민주주의"라는 용어는 우리가 더 이상 사용하기를 바라지 않는 "지배체제"라는 말을 대신하는 용어이다. 동시에 그것은 사라져버린 '이중적인 주체'(지배체제를 감수하는 동시에 고발하는 개인)을 대신하여 나타난, 자신의 욕망만 추구하는 '사악한 주체'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것이다. 왜냐하면 바로 이러한 주체적 개인의 혼합된 모습을 통하여 민주주의에 대한 논쟁은 그 체제에 사는 인간의 전형적인 자화상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민주적 인간은 다름 아닌 팝콘, 리얼리티쇼, 안전섹스, 사회보장, 차별화의 권리, 반자본주의 환상 또는 대안적 세계화의 환상 등을 추종하는 얼빠진 젊은 소비자인 것이다. (183쪽) 책을 읽으면서 민주주의란 어쩌면 책에서만 나오고 현실에서는 실현 불가능한 어떤 이상같은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빠지곤 했다. 플라톤이 민주주의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것은 '하나의 정치체제이면서도 동시에 정치체제가 아니'라고 말하며, '민주주의는 하나의 구조만을 갖고 있지 않으며, 모든 형태의 구조를 수용한'다고 지적하듯이, 민주주의는 결국 그것을 실현시키기 위해 스스로의 기반을 무너뜨리는 어떤 체계가 된다. 민주주의와 그것의 본질인 제비뽑기라는 스캔들은 '추첨'이라는 자격이 '자격 그 자체가 없는 자격'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으며, 동시에 사회의 통치는 종국에는 우연성에 기초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폭로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이다. (107쪽) 그래서 이 책을 통해 만나게 되는 것은 '민주주의의 치부이거나 약점, 모호성'이 되며, '민주주의는 아직 오지 않은 것'이 된다. 역자는 유럽적 상황과 한국적 상황이 다르다고 말하나, 글쎄다. '민주화'의 진전으로 득을 본 것은 소비주의이지, 정치적 환경의 개선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쩌면 민주화가 진전되다가 도리어 '반-민주화'적 경향이 생기고 있으며, 그 경향은 랑시에르가 말하듯 소모적이며 판단내리기 어려운 반-사회적 현상에 대한 반응으로 해석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거짓으로 꾸며낸 이야기로 자신이 폭행의 피해자라고 하여 프랑스 사회 전체를 숨막히게 만든 여인; 학교에서 이슬람교도의 머리 가리개 벗기를 거부하는 중, 고등학교의 여학생들; 항상 적자 상태인 사회보장 보험; 고등학교 졸업시험인 바칼로레아 시험 주제에서 라신과 코르네이유를 대체한, 보다 근대적인 몽테스키외, 볼테르, 보들레르; 기존의 연금제도를 수호하기 위해 시위하는 봉급생활자들; 빈곤층 출신 학생들 대상의 입학 할당제를 도입한, 전문 엘리트 양성을 위한 고등교육기관(grande e'cole); 폭발적인 성공을 거두고 있는 텔레비전의 리얼리티쇼; 동성인들 간의 결혼과 인공수정을 통한 인간 생식, 이상에서 열거한 것들보다 더 잡다한 것을 찾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중략) 이들에 따르면, 이 모든 징후는 동일한 병적인 증세를 보여주는 것이며 또한 이러한 현상은 하나의 원인에서 비롯된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민주주의라고 불리는 것으로서, 근대적 대중 사회 속의 개인들의 무제한적 욕구가 지배하는 사회체제이다. (19-20쪽) 정치 체제로의 '민주주의'는 오지 않았으나, 근대 부르주아 계급은 '인간 각 개인의 존엄성을 단순 교환가치로 전환시켰으며, 비싼 대가를 치르고 얻은 여러 가지 자유를 하나의 자유, 즉 무자비한 상업적 자유로 대체했다.'(54쪽) 그리고 그 상업적 자유와 평등을 '민주주의'의 결과로 해석하는 것이다. 자끄 랑시에르는 '민주주의의 주변'을 훑으면서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를 고취시킨다. 실은 민주주의란 어떠어떠한 것이기에, 어떻게 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책을 읽으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현대 소비 사회의 여러 가지 해악을 민주화의 결과물로 곡해하고 있는가를 되새기게 되었다. 그리고 '민주주의'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이 책의 분류를 따지자면, 꽤 어렵고 전문적인 '정치 철학 서적'에 속하겠지만, 책을 다 읽은 후의 소박한 바람이 있다면 많은 이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민주주의나 민주화 같은 단어를 일상 생활에서 한 번이라고 이야기해본 사람이라면 말이다. 민주주의는 자신만이 보유하는 고유하며 항구적인 '행위'(acte)에만 자신의 운명을 맡기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민주주의의 모습은 사상의 힘을 사용하는 데 익숙한 자들에게 충분히 공포감과 증오심을 자극할 만한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어느 누구와도 공평하게 권력을 나눠 가질 수 있는 사람들에게 민주주의는 용기와 기쁨을 선사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97쪽) |
|
엘리트들에게 개인성은 좋은 것인가. 19세기 지식인들의 지배적 담론은 과연 오늘날에도 정치의 전 영역에서 하나로 통합이 되고 성숙한 인간의 못브을 보이고 있는지 궁금하다. 무엇이 전통이며 무엇이 교양있는 엘리트의 상징이란 말인가. 정의에 관한 책을 읽었다가 또 다른 주제에 매달리고 싶어 민주주의에 대해 독창적인 사유를 통해 하나의 문제를 제기한 책을 읽게 되었다. 그것은 민주주의는 왜 증오의 대상인가 라는 책이다. 이 책은 민주주의의 범죄에 대한 고발이 아닌 이 시대가 획득한 자유에 대해 하나의 현상을 들여다 보고 있다. |
|
자크 랑시에르... 솔직히 고백하자면 처음 들어본 학자입니다. 미학과 정치를 접목시킨 독창적인 논리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학자라고 소개되어있지만 이 책을 접하기 전까지는 제 삶과 지구반대편에 있는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그런 그가 민주주의에 대해 에세이적으로 글을 썼습니다. 그것도 민주주의가 증오의 대상이라는 과격한 주제로 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