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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조 정무문(精武門 Fist of Fury, 1972)의 주인공 이소룡은 죽은 지 오래이며 90년대에 정무문 리메이크(정무영웅 精武英雄 Fist of Legend, 1994)를 성공적으로 해냈던 이연걸은 병든 지 오래 된 지금의 중화권 영화계에서 정무문 속 진진을 제대로 연기할 배우는 어쩌면 견자단 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연걸 주연의 영화 무인 곽원갑의 주인공으로도 알려진 무술인 곽원갑이 설립한 정무체육회, 즉 정무문(精武門)은 실제 존재한 단체였으며 정무문 설립 이후 곽원갑은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곽원갑의 갑작스런 죽음은 독살설을 등장하게 만들었으며 독살설에 분노한 제자가 일본 군인들에게 항거한다는 상상은 정무문 스토리의 핵심이 되었습니다. 일본식 무술의 고수를 정점으로 일본 군대가 중국인들을 동아병부(동아시아의 환자)라는 명칭으로 멸시하고 있을 때 주인공 진진이 나타나 일본의 무술고수들을 물리칩니다. 일본인이 세운 홍구도장을 찾아가 일 대 다수의 격전을 치른 진진은 도장을 포위한 일본경찰들을 보게 되었죠. 특유의 괴조음을 내며 공중으로 날아올라 발차기를 날리는 진진, 그리고 그 장면에 이어지는 총소리. 정무문의 엔딩장면은 굉장히 비장하면서도 사뭇 여운이 남는 장면이었습니다.
견자단 주연의 정무문 영화, 정무풍운(精武風雲 Legend of the fist - Return of Chen Zhen, 2010)은 바로 그 가슴 먹먹한 마지막 발차기 뒤의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일본 경찰에 끌려가서 혹독한 고문을 당해 만신창이가 되느니 차라리 중화남아의 기개를 보이며 깔끔하게 죽겠다는 생각으로 발차기를 하고 그 직후 일본경찰들의 총알 세례를 받아 그 자리에서 즉사했을 것이다 정도로 정리되던 오리지널 정무문의 엔딩과 달리 정무풍운 진진 속 진진은 죽지 않고 살아있었습니다. 1차 세계대전 속 전장으로 끌려가 노역을 하던 중국인들 사이에 있던 진진은 특유의 무술실력으로 시가(市街) 곳곳에 은닉하고 있는 독일군을 물리칩니다. 이 영화의 장점이라고 볼 수 있는 시원시원하고 호쾌한 액션이 견자단이 연기하는 진진의 활약상을 중심으로 보여지는 가운데, 진진과 함께 전장에서 싸우던 중국인들은 기천원이란 동료의 죽음을 애도하게 됩니다. 그날의 전투 이후 진진은 죽은 동료 기천원으로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중국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진진과 중국인 동료들이 도착한 곳은 열강들에 의해 개방된 공간 상해였습니다. 상해 제일의 클럽 카사블랑카를 중심으로 일본군과 프랑스군 및 중국 내 군벌 세력들이 각자의 영역다툼을 하고 있었죠. 영화 속에는 중국 군벌 두 조직이 등장합니다. 일제와 손을 잡은 친일 군벌과 일제는 적으로 생각하는 항일 군벌, 이렇게 두 조직의 군벌이 등장하는데 교묘한 일본군은 이 두 조직을 이간질시켜서 중국 군벌을 박살내려고 합니다. 그러던 중, 친일본적인 행복을 펼치던 군벌의 아들을 습격하라는 명령이 비밀리에 내려집니다. 일본과 친화적인 행보를 걷던 아버지는 그 아들의 죽음을 항일 군벌의 소행이라고 여겨 군벌들과의 내전이 벌어질 것이고 일본군은 그 틈에 어부지리를 얻겠노라는 생각이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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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러한 일본자객들의 습격 속에 진진이 등장합니다. 상해 어딘가의 극장 장식장에 내걸린 천산흑협 복장을 꺼내 입은 진진은 군벌 세력간의 피비린내나는 전투를 불러일으키려던 일본군의 계략을 실패로 돌아가게 만듭니다. 상해의 경찰들도 일본군의 무력 앞에 속수무책인 상황에서 상해의 평화를 지킬 수 있는 것은 천산흑협의 가면을 쓰고 나타난 진진 뿐이었습니다. 일본군은, 일제의 만행에 반대하는 언론인, 정치인들을 살해하기 시작합니다. 일본군의 살생(殺生)이 전방위적으로 행해질 때 천산흑협은 먼 이국 땅에서 생사고락을 같이 했던 옛 동료들과 힘을 합칩니다. 참고로 이 영화 속 천산흑협은 이소룡이 미국에서 활동할 때 출연했던 TV 드라마 그린호넷을 통해 컬트적인 인기를 끌었던 카토 캐릭터에 대한 오마주입니다. 그린호넷은 몇 해 전에 할리우드 영화 버전으로 리메이크되었는데 이소룡이 연기했던 카토 캐릭터는 대만의 톱스타 주걸륜이 맡게 되기도 했었답니다.
낮에는 다정다감한 한량으로, 밤에는 정의의 사도 천산흑협으로 활동하며 상해를 지키는 진진의 주변엔 그의 정체를 수상하게 여기는 사람이 생기게 됩니다. 진진의 행동이 카사블랑카 안에서도 유별나긴 했으니까 말이죠. 일본군이 카사블랑카의 인기가수 키키에게 일본군가를 부르도록 명령하자 피아노 앞에 슬쩍 앉은 진진은 일본군가가 아니라 유럽에서 당시 유행하던 인터내셔널가를 피아노로 치며 키키가 일본군가가 아닌 인터내셔널가를 부르도록 재치있게 분위기를 유도합니다. 이렇게 만난 키키와 진진은 험난한 상해의 밤거리에서 달달한 데이트를 합니다. 하지만 이 키키라는 여인에게는 위험한 비밀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중국인이 아니라 일본군이었으며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카사블랑카에 잠입한 스파이였던 것이죠.
일본군의 집요한 공세 속에 둘로 나눠져 있던 중국 군벌들도 그 힘을 잃어가고 붓과 펜으로 민심을 지도했던 항일 언론인마저도 납치되어 살해되고 맙니다. 천산흑협이라고 해서 무탈할 수는 없었으니 정체가 어느새 드러나버린 진진은 어느 야심한 밤에 일본군의 습격을 받아 납치되고 맙니다. 혹독한 고문을 겪느라 만신창이가 된 그가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동안 그의 동지들은 하나씩 살해되었습니다. 설상가상, 진진의 여동생마저도 일본군에게 성폭행을 당하는 일마저 생기고 말았습니다. 일본군 대장의 아버지는 그 옛날 홍구도장 관장의 아들로, 진진에게 아버지가 죽은 것에 대한 복수를 하기위해 진진을 홍구도장으로 다시 불러들입니다. 모진 고문 끝에 체력이 약해졌긴 하지만 동료들, 동포들의 죽음과 심지어 진진과 인연이 깊었던 키키마저 살해되는 것을 눈 앞에서 목격한 진진은 혼신의 힘을 다해 일본군과 격투를 펼칩니다.
일 대 백 이상의 승부가 진진의 승리로 끝나갈 무렵, 일본군 대장이 직접 진진과 맞승부를 펼칩니다. 고문의 후유증이 채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무수히 많은 적들과 싸우느라 지친 진진은 일본군 대장의 뛰어난 무술실력 앞에 그로기 상태가 됩니다. 하지만 이런 류의 영화가 으레 그렇듯이 애국애족의 힘, 억울하게 희생당한 원령들의 기운은 주인공을 일으켜 세우고, 중국인은 동아병부(東亞病夫. 동아시아의 환자)가 아니라는 고함과 함께 매서운 몸놀림으로 일본군 대장을 쓰러뜨립니다. 경제대국 일본의 입지가 단단하던 시절에 만들어졌던 이소룡의 정무문은 와다! 하는 괴조음과 함께 보여준, 허공을 향한 발차기, 그리고 그 뒤에 울리는 총소리로 영화를 끝맺었습니다. 이제 중국이 미국과 더불어 세계 최강국의 대열에 들어서서 중국의 거침없는 행보가 주변국들에게 두려운 존재가 되어가고 있는 요즘에 만들어진 이 영화 정무풍운 진진은 높은 곳에서 일본군을 지켜보는 천산흑협 진진의 웅장한 모습으로 영화를 마무리합니다.
참고로, 진진과 그 동료들의 활약으로 인해 쑥대밭이 되어버린 일본군 군영(軍營)을 정비하는 장면에서 새롭게 전입해오는 인물 중에 남자처럼 군복을 입었으나 여자임이 분명한 인물이 한 명 눈에 띕니다. 영화 속 일본군들은 새로 전입해오는 독특한 이 인물을 카와시마라고 소개합니다. 카와시마 요시코, 만주식 이름은 아이신기오로 센위라고 하며 만주국 건국을 위한 배후공작을 꾸미기도 했다는 인물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겠죠. 서기가 연기하는 키키 캐릭터를 통해 일본인의 비밀스런 여성 스파이이며 남장(男裝)을 한 일본인 여군의 모습을 보여준 이 영화는 그 마지막에 키키 캐릭터에 영감을 준 것이 분명한, 실존인물 카와시마 요시코를 슬쩍 등장시키며 상상력 가득한 이 영화에 묘한 리얼리티를 불어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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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들 입장에서는 애국심 가득한 멋진 액션영화이겠지만, 이웃에 위치한 국가의 관객으로서는 중국인들의 뜨거운 애국심 고취에서 사뭇 걱정스러운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중국의 수많은 사람들이 애국을 강조할 때, 그리고 그 외세와의 투쟁을 강조할 때 그 뜨거운 감정이 어떻게 흘러갈 지 가늠이 안되니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이소룡 주연의 정무문(1972), 이연걸 주연의 정무영웅(1994) 못지 않은 재미가 있습니다. 특히 뛰어난 부분은 영화 초반부에 등장하는 제1차 세계대전 장면입니다. 견자단은 특유의 종합적인 액션실력을 선보이며 서양의 군인들을 물리칩니다. 줄을 잡고 공중을 날아다니는가 하면 칼을 들고 벽을 기어오릅니다. 그리고 덩치 큰 서양군인들과 몸싸움 끝에 승리를 거두게 되죠.
DVD 속 서플먼트에는 이러한 액션 장면을 촬영할 때 겪은 견자단의 고충이 생생히 수록되어 있습니다. 발로 차는 간격이 제대로 맞지 않아 무릎에 충격을 받은 견자단이 무릎이 탈구된 것 같다며 통증을 호소합니다. 줄을 잡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멋진 장면, 칼로 건물 벽을 찍으며 올라가는 장면들을 연출하는 과정에서의 고생담이 보여진 뒤 또다른 서플먼트 영상이 이 영화 속 클럽 카사블랑카의 세계로 안내합니다. 상해로 돌아온 진진은, 죽은 동료 기천원으로 신분을 위장하곤 클럽 카사블랑카에서 멋쟁이 한량처럼 지냅니다. 이때 진진은 피아노를 연주하며 인기 여가수 키키(서기)와 인연을 맺게 됩니다. 이 영화 속 피아노 연주 장면은 견자단이 직접 연주한 것이라고 하네요.
호쾌하면서도 비장하게 끝이 났던 이소룡의 영화 정무문은 견자단이 출연한 정무풍운 진진으로 인해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죽었다고 생각했던 진진을 그럴싸하게 살려내었음은 물론이요 이소룡의 이름을 알린 카토 캐릭터를 영화 속에 넣어 이소룡에 대한 오마주를 충실히 해냅니다. 홍구도장에서의 일 대 다수의 격투씬은 쌍절곤과 괴조음까지 동원하여 정무문 시리즈다운 특징들을 선보입니다. 상해의 독특한 풍경이라든지 영화 끝 부분에 슬쩍 등장한 카와시마 요시코의 존재 같은 것은 그때 그 시절 상해를 소재로 한 영화를 좋아하는 제게는 특별한 재미로 다가오는 영화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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