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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내게 세 개의 단어로 남았다. '후까시'와' 주눅' 그리고 '북극성'. 이 세 단어는 예술을 대할 때의 우리의 자세를 비근히 보여준다. 그래서 우습기도 하고 조금 애처롭기도 하다. 예술을 대할 때 우리는 알게 모르게 주눅이 든다. 재미라도 있으면 자연스런 감정 표현이라도 하련만, 재미조차 없을 때는 자신이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표징을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폼을 잡게 된다. 어깨에 힘이 들어간 그 폼 잡는 행위를 박성봉은 후까시라 했다. 그런데 예술 작품이 재미있거나 자신의 눈을 뜨게 했을 때 그는 북극성이 떠올랐다고 표현했다. 이 세 단어에 외에 어떤 단어가 더 필요하랴. 이 핵심 키워드들을 잡고서 나는 책을 읽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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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하면 헉 ! 하는 거부감이 있는 그저 나는 일반인이다. 예술무정부주의, 무척 어렵게 들리는 이 책은 박성봉교수의 대중예술 강의모음집이다. 이책은 나같은 일반인이 예술이란 무엇일까에 대한 의문점을 해소해 주는 동시에 시대의 변화속에서 예술의 의미 또한 변하고 있음을 느끼게 해준다. 그럼 우선 저자가 말하는 대중예술에 대한 정의를 들어보자.대중예술이란 문화 권력을 갖고 있는 누군가에 의해 예술 동네의 변두리로 밀려난 예술입니다.(p17) 여기서 또 문화권력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문화 권력이라는 것은 쉽게 표현하자면 미술관에서 그림을 보는데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화가의 일반화된 지식을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모나리자나 고흐를 보며 정형화된 틀에 나를 맞추어 그림을 판단하게 되는 것처럼 문화 권력이란 복잡한 개념이지만, 굳이 정의를 내리자면 '나의 것이 아님에도 왠지 무엇인가가 중요한 것처럼 느껴지게 나에게 행사하는 힘' (p55) 인것이다. 예술에 관해 모두가 다 다른 생각을 하는 순간, 세상의 모든 문제들이 해결되지는 않겠지만, 세상은 조금 더 살만해지지 않을까, 나는 생각합니다. 만일 우리가 서로의 다름을 껴안을 수 있다면 말이지요. 이것이 예술을 포함하는 문화라는 말의 올바른 쓰임새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따라서 예술무정부주의란 이 모든 정형화된 틀안에서 자유로워지는 혼돈의 자유를 추구한다.
저자가 주장하는 예술이란 누군가 정해준 틀 안에 있는 짜 맞춰진 예술이 아닌, 스스로 ‘예술이다’라고 느껴지는 감정이 진정한 예술을 만드는 것이라고 정의하는데 저자는 그 감정을 ‘북극성이 떳다' 란 표현을 한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 정체성과도 관련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즉, 재미와 감동을 느끼는 와중에 어느새 자기 내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고, 그것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일종의 지표로서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술무정부의 개념에서 북극성이 뜨는 경험은 무척 중요하다. 누구에게나 자신의 입맛이 있듯이 북극성이 뜨는 경험을 누구는 할 수 있고 누구는 북극성이 뜨는 경험을 하지 못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내가 좋아하는 음악 해바라기의 <사랑으로>가 들을 때마다 내 안의 잠자고 있던 뽕끼를 일깨우지만 젊은 사람에게는 아무 감흥이 없을 수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북극성은 전염성을 가지고 있다. 비록 느끼는 감흥은 틀리지만 나의 느낌을 전달하여 느끼게해줄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는 것도 예술무정부주의의 개념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내가 '나'를 놓지 않으면서 동시에 '너'와 함께 우리'가 되는 경험인 것이다.
근대에서 현대사회가 이르는 동안 많은 개념들이 깨지고 사라지고를 반복하다가 현재의 문화가 형성되었다. 예술무정부주의는 새로운 개념의 대두가 아니라 급변하고 있는 사회에서 대중예술이라는 코드에 관한 새로운 시선을 제안한다. 컴퓨터산업의 발달로 게임이라는 분야는 급속한 발달을 가져온 것에 반해 점점 우리가 알고 있는 획일화된 예술에 관한 이미지는 쇠퇴하고 있다. 컴퓨터와 인터넷의 엄청난 발달은 이제 더이상 정의되어진 예술이란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누구나 쉽게 모나리자를 알수 있고 누구나 고흐를 안다. 희귀성이 떨어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모나리자 가치는 수백억이 넘는데다가 엄청난 자금을 들여서 예술작품을 보존하려 한다. 예술작품을 보존하기 위해 박물관에 설치하고 있는 경비만해도 천문학적숫자이다.저자가 모나리자가 죽어야 젊은 예술가들이 먹고 살수 있다는 말처럼 문화권력이 만든 예술은 창조를 막는 동시에 능력있는 젊은 예술가들을 굶겨 죽이는 행위이다.
강의실에서 만나는 젊은 학생들이 책을 읽지 않기 때문에 책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게임에 관한 이야기를 해야 대화가 되는 현실에서 우리에게 정의되어있는 예술의 의미가 변화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여기서 한가지 중요한 것은 게임에 친숙한 젊은이들을 부정적인 시선으로 볼 것이 아니라 게임적 상상력과 감수성을 깨워주는 사회적 장치로서의 예술적접근이 필요하단 사실이다. 예술에 대하여 갑론을박을 할 것이 아니라 과거 300년전 웅변이나 조경이 예술의 한 분야였듯이 게임도 어쩌면 하나의 예술이 되어갈지 모른다는 가정은 모든 것이 과도기인 이 시대에 필요한 시각인지도 모른다. 저자<예술무정부주의>에 따르면 우리는 모두 예술인이다. 내 안의 뽕끼를 일깨워주는 문학이 있고 또는 그림에서 북극성이 뜨는 경험을 하며 음악이 주는 감미로움과 영화가 주는 감동의 세계속에서 내안의 뽕끼가 휘몰아치는 세계, 그 안에서 느껴지는 예술의 진정성이 바로 대중예술이란 사실을 , 그리고 이제는 또 다른 예술이 형성되는 시대가 도래했음을 깨닫게 해주는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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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봉의 《대중예술과 예술무정부주의》는 한마디로 대중예술에 대한 끝없는 구라의 미학서다. 이 책은 어느 박식한 문화엘리트의 커피숍 수다처럼 다가온다. 자신을 예술주관주의자, 예술무정부주의자, 예술무제한주의자라고 규정하는 저자는 이런 예술한담이 분명 '즐거움의 대화'였을 것이다. 그러나 책에서 무언가를 기대하는 독자로써 이런 식의 한담은 오히려 '고통의 대화'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저자는 영화, 만화, 애니메이션, 음악, 소설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수많은 작가들의 작품들을 입에 담지만 특정 작품에 대한 심도 있는 분석은 턱없이 부족한 편이다. 물론 이런 '깊이에의 결핍'도 '무엇이든 예술이 될 수 있다'는 저자의 의도에 따른 설정이겠지만 그래도 자신이 이 책에서 제기하는 두 가지 이론적 주장, 즉 '예술무정부주의'와 '충동적 장르론'에 대해서는 좀더 체계적인 접근과 정리가 필요하지 않았나 싶다. '방법론적 무정부주의'를 주창한 과학철학자 파이어아벤트도 적어도 이런저런 인식론적 도그마에 대항하여 자신의 인식론과 방법론을 심화하는 작업에 노력을 기울였다. 그런데 저자는 이런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그저 해석의 개방성과 다양성만을 원칙적으로 강조하면서 모든 해석이 가능하고 정당하다는 '맘편한 논리'를 전개한다.
저자는 예술에는 그 어떤 올바른 해석기준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예술무정부주의'를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예술엔 단 하나의 '정답'이 없다는 얘기다. 예술을 인식론적인 측면에서 바라볼 때 그저 입맛따라, 개성따라, 취향따라 개방적으로 평가하자는 견해다. 그런데 입맛이든 개성이든 취향이든 자기 '필'에 꽂히는 그 무언가를 저자는 '북극성'이라는 상징으로 비유한다. 자연계의 길잡이별 북극성은 단 한 개의 기준이지만, 저자가 생각하는 수용미학의 북극성은 지구별의 인구수만큼 다양하다. 누구나 저마다의 북극성을 찾아야 한다는 논리는 '월인천강'에 대한 저자의 오독(誤讀)에서 잘 드러난다. 다양한 취향을 존중하기에 저마다의 북극성을 강조하는 저자는 천 개의 강에 비추는 달의 모습을 자신이 강조하는 예술무정부주의의 또다른 이미지로 설정한다. 저자다운 '내맘대로식 해석'이다.
저자의 논리는 많은 허점을 드러내보인다. 먼저 저자가 주장하는 예술무정부주의가 그리 확고하지도 않고 심지어 모순적인 측면도 없지 않음을 지적하고 싶다. 저자 자신도 한편으론 급진적인 예술무정부주의자이자 다른 한편으론 보수적인 미학전통주의자인 자신의 이런 이중적 모순을 인정하고 있다. 저자의 예술무제한주의는 그다지 무제한스럽지도 않고 기존의 고급예술과 대중예술의 묵은 논쟁을 지속적으로 재생산하는 커다란 문제점을 드러낸다. 예컨대 포르노그래피는 저자에게 있어서 결코 예술이 아니다. 저자는 문화산업에 대한 자기만의 이중잣대를 가지고 있다. 가령 포르노그래피에 관해서는 보수적인 미학전통주의자의 입장에서 반대하고, 대중예술에 대해서는 모든 해석이 다 허용되는 예술무정부주의를 들이댄다. '똥'과 '오줌통'이 버젓이 미술관의 예술작품이 되는 오늘날, 포르노가 여전히 예술의 전당에 오르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서 저자는 그저 "응어리의 악순환" 운운하며 보수적인 미학자의 시선을 번뜩인다. 내가 보기에 저자의 예술무정부주의는 저자가 말한 의미 그대로의 '사이비'에 해당한다.
"나는 가치론적으로 무엇이 예술이고 무엇이 예술이 아닌가를 객관적으로 구별할 수 있는 잣대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가치중립적으로 예술은 사회의 약속일뿐이니까요. 300여년전에는 웅변이나 조경도 예술이었습니다. 내 생각에 예술이라는 개념의 중요성은 그것이 가치지향적이라는 점입니다."(403-4쪽)
앞의 인용구도 저자의 예술과 예술의 가치에 대한 모순된 입장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예술이 가치중립적이라고 말하면서 동시에 예술의 중요성은 가치지향적인 측면에 있다고 항변한다. 어떻게 가치를 지향하는 동시에 중립적일 수 있는가? 오줌통이 미술관에서 예술작품이 될 수 있는 것은 가치지향적이기 때문이고, 포르노가 예술작품이 될 수 없는 것은 "사회의 약속"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아서인가?저자의 대답을 듣고 싶다.
다음으로, 저자가 이른바 '문화권력'에 대해 커다란 반감을 갖고 있지만 내 눈에 저자는 또다른 의미의 문화권력이 되고 싶은 욕망을 내비치고 있다는 강한 느낌을 지적하고 싶다. 문화권력이란 문화동네 혹은 예술동네에서 힘자랑하는 엘리트들로, 저자의 ‘동네에서 힘겨루기’ 비유를 빌리면, 고급예술이란 예술동네의 노른자 땅을 독차지한 것들이고, 대중예술이란 예술동네의 언저리 구석으로 밀려난 것들이다. 저자는 이런 고급예술과 대중예술의 묵은 논쟁을 '품끼와 뽕끼'라는 말로 재생산하고 있다. 저자가 들려주는 품끼와 뽕끼의 작품은 순전히 주관적인 구분이고, 품끼를 뽕끼로 해석하는 류의 '지나친 해석'을 옹호하는 주장도 이따금 펼치고 있다. 독자들의 코 앞에서 움베르토 에코의 해석학을 언급하면서 자신의 일방적인 예술무정부주의 논리를 전개하는 저자가 다소 무모하다는 생각이 든다. 근거있는 오독에 대한 저자의 강변은 "포스트모던적 오버의 허무함"이 무엇인지 내게 생생히 일깨워주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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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시절 공학인증제로 전공 관련 과목만 120학점 들었던 내게 이 책은 재밌는 교양 수업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심어주었다. 대학교 시절 교양 과목은 그저 학교에서 채우라는 학점만 채우면 된다고 생각하고 전공과목 시간표 다 짜고 남는 시간에 맞춰 아무거나 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매번 교양 과목 선택은 실패였다. 뭐하나 제대로 얻지도 못하고 앉아 있다 나오는 수업이 대부분 이었는데, 이 교양수업은 참 재밌었다.(물론 실강이 아닌 책이지만..) 교수님께서 내주신 과제를 나도 한번 쭉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생들이 낙산사 화재를 접하고 수업을 소재로한 소설을 지어내고, 뽕끼의 절규 탄생만으로도 참여하는 학생들의 재미와 흥미가 느껴졌다. 더군다나 그런 학생들의 레포트 하나하나 간직하고 이렇게 책 각 장마다 활용을 하시다니 그것만으로도 재밌는 교양 수업의 아우라가 느껴졌다. 무엇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적어도 내가 이 책을 펼치기 전의 대중 예술에 대한 무관심과 편견이 조금은 달라졌다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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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예술이란 다소 모호한 주제를 가지고 현직교수가 강의한 내용을 묶은 책입니다. 강의 내용의 모음과 강의하는 문체의 글은 몇 해 전 읽은 신영복 교수의 <강의(나의 동양고전 독법)>과 비슷했지만 다루고 있는 내용을 완전히 달랐습니다. 얼핏 보기에는 고전을 강의한 신영복 교수의 책이 더 어려울 것 같았는데 평소 예술이란 문제에 대해 생각을 해본적도 많이 없거니와 대중예술에 대해 생각은 더더욱 해 본적이 없어서 인지 개인적으로는 이 책이 쉽게 읽혀짐에도 더 어려운 이중적이 모습으로 다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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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쏘공에 선정되었다. 흔하디 흔한 미스코리아 선발대회에서 소감을 물을때처럼이나 나는.. '될 줄 몰랐다.' 라며 하지만.. 은근히 기대심리가 증폭되어 '되지 않을까?'란 생각을 하였는데 되었다..! 그리고 선정 도서로 올라온 목록을 보는데 가장 눈에 띈 책이자 나의 선정도서이다. 참 운도 따라 주는 것인지? 읽고 싶은 책을 먼저 선정하고 생각하는데 아래에 보니 조별로 일구어진 내역에 이 책이 포함되어있었다. 될 아이는 되나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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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때 가장 인상깊게 들은 수업이 무엇이냐고 나에게 묻는다면 "2000년 겨울에 한국외대에서 들은 박성봉 교수님의 <대중예술론>입니다"라고 아주 또박또박하게 이야기해 줄 수 있다. 타대생이 졸업 학점 맞출 목적으로 이름만 보고 선택한 과목에 불과하지만 편안한 인상, 매우 대중 친화적인 입장, 당시 유행하는 대중문화를 꿰고 있는 잡다함까지, 모두 오직 그 수업에서만 느낄 수 있었던 특별함이었다. 그리고 몇 년 후 우연히 갔던 COEX 도서전에서는 특가로 팔던 <마침표가 아닌 느낌표의 예술>을 망설임 없이 집고 득템한 기분으로 신나게 읽으며 즐거워했었다. 또다시 우연처럼 이 책 <멀티미디어 시대 대중예술과 예술 무정부주의>이 내게로 날라왔고, 역시나 열일 집어 치우고 그간의 궁금함을 해소할 요량으로 읽어대기 시작했다. 책날개의 결의에 찬 듯한 점잖아 보이는 프로필 사진이 눈에 띈다. 강의만 15년 이상 하신 분이니 이제 무게감이 있어 보일만도 할 듯 하다. 그만큼 세월이 많이 흘렀으니 이제 그 옛날 자유분방한 시선이 한 점으로 모였을까 궁금해졌다. 며칠을 낑낑대며 읽은 결과, 시선이 명쾌해지기는 했지만 이론이 명료해지지는 않았다는 인상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여전히 발랄하지만 불행히도 깊이도 여전했다. 글 머리에 적힌 그대로, 그리고 '무정부주의'라는 제목 그대로 대중예술에 대한 입장에 거리낌이 없어졌다. 이전에 읽었던(혹은 들었던) 내용 중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천편일률적일 수도 있는 대중예술 중 소수의 몇몇 작품들은 왜 대중의 환호를 받게 되는가', 이 책 식으로 표현하자면 '북극성을 띄우는 작품들의 공통점'이었다. 내심 이에 대한 한 걸음 나아간 논의를 기대했는데, 불행히도 책 내용에서는 찾기가 힘들었다. 대신 전작에 적힌 조지 디키의 말을 빌자면 '어느 대상을 놓고 "나는 이 대상을 예술작품이라고 명명한다"고 누군가가 말한다면 그 대상은 곧 예술작품이다'라는 예술 무제한주의자로서의 면모가 책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눈에 차지 않는 장르(현대미술이나 연극)에 대한 불편한 심기가 전면에 드러나고 광고와 게임에 대한 논의는 새롭게 등장한다. 또한 충동적 장르론 등 견고하지는 않지만 '독창적인 이론'이라고 할 수 있는 주장도 곳곳에 나타난다. 그리고 예전과 마찬가지로 언뜻 뻑뻑해 보이는 주장을 밀고 끌기 위해 그간 열심히 모은 대중예술작품을 무차별적으로 들이붓는다. <희생>, <이나중 탁구부> 등 중요한 몇몇은 재탕을 하기는 했지만 예시로 들고 있는 작품들 중 2000년대 초반을 나름 대표하는 작품도 섞여 있다. 그러나 한 작품을 잡고 이론과 연결시키는 대신 여러 작품을 나열하고 있어 이론들과 작품들이 잘 엮여져 있다는 인상을 받지는 못했다. 어쩌면 음성 지원이 되는 듯한, 즉 강의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문체로 인해 재미있는 예시만 눈에 들어오고 뻑뻑한 이론은 손에 잡히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또 책 내용의 분류는 각론(장르별 분류)로 되어 있는 반면, 내용의 전개는 통론(대중 예술의 논점/이론)으로 되어 있어 전개가 조금 어색하다는 인상도 받았다. 이전 책보다는 분명 주장이 강한 책이니만큼 장르별 분류의 비중을 낮추고 이론을 두드러지도록 편집했다면 좀 더 명료한 내용이 되었을 것 같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인 '발랄함'을 놓치는 셈이 될 것이다. 누가 뭐래도 이 적잖은 나이의 교수님에게 기대하는 모습은 '쌍/박/규'에 대해 열변을 토하고, "TV, 책을 말하다"에 <멋지다 마사루>를 추천하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비록 2007년까지의 강의 내용을 담은 책이라 극최근의 대중예술작품은 찾을 수 없었지만 수년 간의 강의 내용과 과제물들을 모아 놓은 내용 만으로도 읽는 즐거움을 준다. 다양한 시선들(과제물)을 읽으며 잊고 있었던 자신만의 북극성을 다시 생각하고, '그림을 거꾸로 걸어놓는' 담대함을 기르는 것도 삶을 재미있게 만드는 한 방법이 되지 않을까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