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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비텐베르크에 95개조 논제를 붙일 때 루터는 의도는 어떠했나 슈테판 비르크는 루터를 본래 겁 많고 순종적이 사람으로 표현했다. 종교개혁 전 루터는 비텐베르크 수도회 내부에서 지위가 높아졌으며 대학에서는 신학교수직을 얻었다고 한다. 아우구스티누스회 수도원 별채의 독방을 사용할 수 있게 되자 “초라한 쪽방에서 나와 교황의 권세를 누리게 되어”라고 회고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루터는 당시 로마 가톨릭 내에서 안정적인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보여 진다. 그는 구태여 불만을 표출하여 감정을 살 필요가 없었다. 그 자리에서 충분히 인정과 존경을 받으며 살아갈 수 있었다. 성공을 원했다면 면벌부 판매를 지지할 수도 있었다. 디트마르 피이퍼는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한 손에 망치를 들고 성당 벽에 못을 박는 루터의 모습에 의문을 던진다. 루터의 비서 뢰러에 따르면 95개조 벽보는 비텐베르크의 여러 장소에 동시에 붙여졌다. 당시 비텐베르크의 토론 관행은 보편적이었던 것으로 성당문은 대중에게 정보를 알려주는 게시판 역할을 담당했다. 95개조 논제는 이렇게 시작한다.
진리를 향한 사랑과 진리를 밝히고자 하는 열정으로 아래와 같은 논제를 가지고 토론할 것을 요청한다.
이 전에 나는 비텐베르크 정문에 논제를 붙이는 루터의 행위가 도전적이고 파격적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당시 토론이 활발했던 점을 볼 때 면벌부 문제를 정식으로 다뤄보고 싶었던 것 같다. 일상적인 것이었다. 개혁을 위해 파격적인 행보는 한 것이 아니다. 신학교수의 입장에서 자신의 배운 바에 완전히 어긋난 면벌부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낸 것이다. 그의 목적을 95개조 논제의 앞머리에서 확인 할 수 있다. 다니엘 벨린그라트는 루터의 논쟁이 근대 유럽의 대중매체가 최초로 다룬 이슈로 설명한다. 1450년경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개선한 뒤 수많은 인쇄소가 생겨 대량 인쇄물을 찍어낼 준비가 되어있었지만 그런 적은 거의 없었다. 왜냐하면 많은 소비자가 관심을 가질 만한 주제가 전무했기 때문이다. 루터가 반박문을 시작으로 출판한 여러 책자들과 정통 가톨릭 신자들 사이의 지면논쟁, 개신교 종파들이 해석에 관한 논쟁을 벌이며 엄청난 수의 글이 쏟아졌다. 인쇄술의 발달로 종교 개혁이 확산 될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루터가 출판 매체의 장점을 인지하고 활용했을 거라고 추측했다. 그러나 당시 인쇄술은 발달 되었지만 출판을 이용해 대중에게 영향을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한다. 루터는 인쇄물을 통해 자신의 논지가 널리 전파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 했을 것으로 보여 진다.
Q. 왜 루터는 가톨릭과 분리되어야만 했나 쉘링은 루터가 추구한 가장 큰 목표를 놓쳤다는 점에서는 실패했다고 전했다. 루터의 목표는 ‘기독교 전체의 개혁’이었으나 개혁교회만 설립하는 데 그쳤기 때문이다. 그렇게 루터에게 개혁교회는 잠시 후퇴하는 정도였다. 개혁교회로부터 복음주의운동이 전체 기독교로 펴저 나가리라 기대했다. 500년이 넘은 오늘날도 계속될 줄은 몰랐을 것이라고 말했다. 루터의 처음 바람을 알게 되었다. 부분적 교회를 되돌리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교회 전체가 본래 상태로 회귀하기를 원했다. 종교개혁 과정 중에서 루터가 느낀 답답함과 고민들을 생각해 볼 수 있었다. 개혁 과정에서 많은 관심과 지지자들이 생겼지만 기쁨이나 성취감을 누리지 못했을 것 같다. 루터가 원한 전체 개혁은 당시 교황과 교회 시스템에서 불가능한 것이었다. 에바-마리아 슈누어가 1521년 보름스 제국의회를 재구성했다. 1월3일 목요일 교황 레오10세는 루터를 파문했다. 3월11일 보름스로 출두하라는 황제의 전령이 전달되었다. 4월16일 루터 일행은 비텐베르크에서 보름스에 도착했다. 4월18일 두 번째 심문에서 책들을 수정하거나 철회할 것인지 물었다. 루터는 자신의 책들은 세 종류인데 신앙의 기본이 되는 설교, 그리고 성경해석, 마지막으로 교황에 반박하는 글이자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관한 논쟁이라고 설명했다. 앞에 두 가지 종류의 책 내용은 철회가 불가능 하지만 세 번째 책의 경우는 성경의 내용을 근거로 하여 잘못이 드러난다면 직적 흔쾌히 불에 던지겠노라 말했다고 한다. 4월25일의 심문에서 대주교가 몇 가지 타협안을 제시했고 그 중에는 루터가 몇 개의 주장만 철회하면 나머지 주장들은 눈감아 주겠다는 제의도 있었다. 그러나 루터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보름스 국회의 결과 루터의 법적권리가 박탈당하고 그가 쓴 책의 유포를 금지했다. 루터와 가톨릭의 관계가 분명히 갈리진 것 같다. 가톨릭은 루터를 파문했고 루터는 타협안을 거절했다. 이미 예상 가능한 결과였다. 가톨릭은 루터지지 세력들의 반발이 거세질 수 있는 위험이 있었고 루터는 법적 권리를 잃고 책의 유포가 제재를 받게 되는 불이익이 생겼다. 이 모든 것을 감수할 수 있을 만큼 견해차가 컸다.
Q. 루터는 종교개혁 과정 중 여러 이해관계로 변질 되는 일이 없었나 요하임 모어는 루터의 보호했던 현명공 프리드리히 폰 작센에 대해 정리하였다. 선제후로서 독일제국에서 가장 중요한 군주였던 그는 30회 이상의 제국의회에 참여했으며 막시밀리안 황제의 조언가 역할을 했다. 분명히 루터를 너그럽게 사랑하고 아꼈으나 루터의 책한 권을 가리켜 1522년에 “마음에 드는 내용이 하나도 없는 저 책을 위해 말이지.”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루터는 바르트부르트를 떠나지 못하게 금지하는 선제후의 명령에 “그렇게는 못 하겠습니다, 전하.” 라고 당당히 거절한 했던 사람이다. 루터의 지지자 중 가장 영향력 있고 강한 힘을 가진 작센이지만 루터의 신앙과 주장에 개입하지 않은 것으로 보여 진다. 많은 정치적 영향을 받는 과정 중에도 루터는 자신의 개인적 추구를 최우선으로 하였던 것이다. 그는 자신이 믿는 바대로 했다. 타협은 없었고 어설프게 편을 들어 주거나 적당한 목표를 설정해 함께하지도 않았다. 자신의 원칙대로 개인적으로 행동했다. 카우프만은 루터의 유대인에 대한 태도 변화를 말했다. 1523년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인으로 나셨다』 라는 책에서 호의적이였던 태도가 생애 마지막 글 「유대인에 관한 경고」에서 매우 공격적으로 변했다. 호의는 유대인들을 개신교로 개종시키기 위함이었는데 그들은 거의 개종하지 않았다. 번역 성경을 통해 복음을 읽을 수 있었기에 더 이상 교황 추종자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도 없었다. 루터 이해가 변한 예는 유대인들을 대하는 것을 통해서 볼 수 있다. 루터는 완벽하지 않았다. 유대인에게 했던 기대가 충족되지 못하자 완전히 돌변한 것을 볼 수 있다. 유대인들을 대하는 태도가 강압적이고 과격해졌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19세기와 20세기에 인종차별적 반유대주의의 토대를 제공했다. 루터에 대해 앞으로 더 공부해 보고 싶은 부분이다.
Q. 왜 루터는 생전에 여러 교파들과는 통합할 수 없었나? 닐슨 민크마르는 신학자 토마스뮌처로 대표되는 급진개혁파의 독일농민전쟁을 소개하면서 그들을 비판했던 루터를 보여준다. 불법 체포에 항의하기 위해 북을 울리는 시민들의 외침은 “진리와 복음의 편에 서고 싶은 사람은 성당으로 모여라!”였다. 잘 알려진 복음의 개념들이 억압받던 정치와 법적 현실을 새롭게 변화시키려는 도구가 된 것이다. 역사학자 쉴링이 말했듯이 그는 세속의 법과 신의 통치 영역을 구분하여 했다. 농민전쟁과 관련해서는 나에게도 의문이 있었다. 강의를 들은 EBS 세계사 강사가 루터에 대해 “농민들의 편에 서지 않고 제후들의 손을 들어주는 바람에 평가가 엇갈린다.”라는 설명을 들었을 때 부터였다. 루터는 급진개혁파와 함께 약자였던 농민들 편에 서지 않은 것은 제후들을 의식해서 일까? 나는 이 때 루터의 선택이 가장 그의 진실성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약자의 편이 선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들은 성경과 여러 경제적, 사회적 이해관계를 섞어 놓았다. 루터는 자신의 원칙을 지켰다. 사미하 샤피가 루터의 경쟁자로 소개한 훌드리히 쯔빙글리와는 어떤가. 성찬식을 할 때 예수 그리스도가 정말 현존하는지에 대한 문제였다. 루터는 그리스도의 몸이 빵에, 피가 포도주에 실제로 들어있다고 주장했고, 츠빙글리는 포도주와 빵을 먹는 것은 구세주가 인류를 위해 자신의 몸과 생명을 희생한 사건을 기념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1529년 헤센의 필립에 의해 두 신학자의 만남이 성사 되었지만 별 성과는 없었다. 몇 시간 논쟁 끝에 양측은 허용범위를 넓게 하는 것으로 타협했다. 이 후 쯔빙글리는 1531년 개혁군을 이끌고 전장에 나가 전사했다. 개인적으로 아쉬움이 남는다. 정말 성찬식에 관한 문제 때문 만이었다면 더 더욱 그렇다. 이때 쯔빙글리와 루터가 힘을 합쳤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오늘 날에도 계속되고 있는 개신교 교파 다툼의 시작으로 보여 져 더 안타깝다. 어느 한 쪽의 책임으로 판단 할 수는 없다. 틸 하인은 마르틴 부처를 중재자로 소개했다. 그의 꿈은 루터파와 츠빙글리파의 종교 개혁가들이 잘 타협하여 하나의 통일된 개신교를 이루는 것이라고 한다. 또 그는 교회와 세속권력의 긴밀한 협력을 원했다. 1534년부터 1539년 까지 말을 타고 작센, 헤센, 독일남부와 스위스를 오가며 1만2000킬로미터를 달렸다. 멜란히톤과 독일 남부의 종교 개혁가들에게는 동의를 얻어냈지만 츠빙글리 추종자들이만 성찬문제로 타협안을 거절했다. 교회 통합 시도들이 왜 다들 실패 했는지 알 것도 같다. 의도에 정치적인 것들이 있었다. 성경에 의한 하나 됨이 아닌 여러 목적으로 더 큰 세력을 위해 하나 되기를 추구 했다. 진정성이 부족해 설사 모두가 동의했다 하더라도 분명한 결과를 창출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루터 희미한 모습들이 조금씩 선명해졌다.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일이 있으면 실천하며 토론했다. 종교 개혁 시도들은 루터 이전에도, 동시대에도, 그 이후에도 있었다. 그러나 루터만큼 개인적이었던 사람은 없었다. 그는 사람들을 선동하지 않았다. 여러 이해관계가 섞이지도 않았다. 얼마 전 봉준호 감독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감독상을 수상하며 인용한 마틴 스콜세지의 말이 생각났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이다.” 루터는 개인적이었다. 종교 개혁가들의 움직임 중 가장 개인적이었던 그가 가장 큰 파장을 일으켰다. 개인의 내면에서 솟아오르는 동기는 그 어떤 야망이나 이익집단을 뛰어 넘는 것을 확인 할 수 있었다. 비텐베르크에서부터 아니 그 전 시계탑에서부터 아니 그 전부터 그는 개인적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