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특한 형식의 소설입니다. 등장인물이 각각 다른 3가지의 이야기를 옵니버스형식으로 구성되었는데, ‘포르투갈의 높은 산’이라는 장소와 ‘침팬지’가 연결고리가 되고 있습니다. 바탕에는 기독교가 주장하는 바에 대한 회의가 깔려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남습니다. 3가지 이야기는 각각 시기도 각각 다른데, 첫 번째 이야기는 1904년 포르투갈의 리스본에서 시작하고, 두 번째 이야기는 1939년 높은 산 지역에 가까운 브라간사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이야기는 캐나다의 몬트리올에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인공들은 모두 포르투갈의 높은 산으로 향합니다. 사실 높은 산이라고 하는 지역은 말과는 달리 고산준령이 펼쳐지는 곳이 아니라 드문드문 바위가 흩어져 있는 사바나 지역으로 어중간한 높이라고 옮긴이는 설명합니다.
세 편의 이야기에서 주인공들은 각각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으로 인하여 심각한 마음의 상처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 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인 토마스는 아내와 아들을 급성전염병으로 잃었고, 두 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인 병리의사 에우제비오 역시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상심한 상황인데, 높은 산 지역에 사는 노부인이 모셔온 그녀의 남편을 부검하게 됩니다. 노부인은 토마스의 차에 치여 아들을 잃었고, 이어서 남편까지도 잃어 역시 상심하고 있었는데, 부검으로 연 남편의 몸에 자신의 몸을 가두어 달라고 합니다. 세 번째 주인공은 높은 산 지역에 살다가 캐나다로 이주한 포르투갈 사람의 후손인 상원의원 피터 토비입니다. 역시 아내의 죽음 이후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다가 오클라호마에 있는 영장류연구센터를 방문했다가 만난 침팬지에 마음이 끌려 사들인 다음에 포르투갈의 높은 산 지역으로 돌아간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2부에서 등장한 노부인과 가까운 친척이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옴니버스형식을 빌은 듯하지만, 전체 이야기가 하나로 연결되며, 일종의 환상적인 부분도 있어 보입니다. 옮긴이의 설명에 의하면, 이야기는 겉으로 보기에는 상실과 애도 그리고 이에 따른 고독이 주제처럼 보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종교적 믿음의 실체를 추구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전공이 병리학이며 한 때 법의부검을 맡아 한 적도 있어서 2부의 이야기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읽었습니다. “모든 시신은 들려줄 사연이 담긴 책이다. 각각의 장기는 소단원, 소단원들은 공통적인 서술로 어우러진다. 외과용 메스로 페이지를 넘기며 사연을 읽고, 마지막에 독후감을 쓰는 게 병리학자인 에우제비우의 임무다.(165쪽)” 법의관의 소명을 책읽기에 잘 비유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가 하면 그의 아내와 관련된 이야기로, “그녀에게 글쓰기는 육수를 우리는 일이고 독서는 육수를 마시는 일이며, 입 밖에 낸 말만이 푸짐한 닭구이다.”라는 표현도 재미있습니다.
예수와 관련된 이야기도 흥미롭습니다. “서기 1세기부터 이교도 저자들은 수백가지의 문건을 남겼어여. 예수는 어느 문건에서도 언급되지 않아요. 당대의 어느 로마인도-관료, 장군, 행정가, 역사가, 철학가, 시인, 과학자, 상인, 어떤 부류의 작가도-그를 언급하지 않아요. 공적인 비문이다 현존하는 개인 서신들 어디에도 예수에 대한 최소한의 언급도 없었어요. 게다가 그는 출생증명서도, 재판기록도, 사망증명서도 남기지 않았죠. 그가 사망하고 1세기 뒤에나-100년이 지나서!-이교도에 의해 단 두 차례 언급되었을 뿐이죠. 한 사람은 로마의 상원의원이자 작가인 소 플리니우스, 다른 한 사람은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예요. 편지 한통과 몇 페이지-제국의 열정적인 관료들과 자부심 강한 행정가들에게 나온 언급은 그게 전부예요.(…) 인간 예수에 대해 알려진 내용은 전부 네 명의 우화작가에게서 나왔어요. 더 놀라운 사실은 이런 이야기의 음유시인들이 예수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는 점이에요. 마태, 마가, 누가, 요한, 그들이 누구든지 간에 예수를 목격한 사람들은 아니었죠.(185-186쪽)” 정말 사실일까요? |
|
포르투칼의 높은 산에는 산이없다. 산이되기에는 너무 낮고 쓸모있는 옥토가 되기에는 너무 높은 메마른 황무지인 어중간한 높이의 땅. 그저 언덕들 밖에 없다. 그런데 제목도.. 작품속의 투이젤루를 지칭하는 지명이 포르투칼의 높은 산이다. 가족을 잃고 집을 잃어버린 남자 토마스, 남편의 시신안으로 들어가며 그곳을 집이라고 한 마리아, 돌고돌아 고향인 포르투칼의 높은산의 집으로 돌아온 피터. 100년이 안되는 시간을 거쳐 스쳐가는 인연이 있었던 사람들이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가 주는 공허함과 외로움을 떨쳐내기 위해 집으로 돌아오는 여정을 쓸쓸하지만 호기심넘치는 문장으로 표현해 냈다. 전체적으로 작품의 분위기는 쓸쓸함 그 자체다. 하지만 1부의 토마스에게는 “신문물”자동차가 그를 번거롭게 하고 2부의 에우제비우에게는 아내의 혼령이 찾아와 아가사크리스티의 작품과 복음서와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여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들게 하고 3부의 피터에게는 오도(침팬치)가 그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각 부의 내용이 독립적으로 한편의 소설로도 읽힌다고 하지만 3편을 같이 읽는 것이 마음의 위로를 주는것같다. 왜냐하면 1편에서 토마스는 십자고상이 예수가 아니고 침팬지라는것을 알고 되려 충격을 받았고 2편의 에우제비우는 아내의 의문사 이후 끝없는 정신적 고통의 나락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데 3부의 피터는 고향에서 평온하게 생을 마감하게되면서 무언지 모를 불안정한 상태가 끝나는듯한 느낌이었다. 신은 우리에게 늘 필요한것만 줄까? 우리가 필요한 것을 가져가기도 한다. 거기에서 신에대한 불만, 불신이 나오는것일 것이다. 신과의 밀당(?)속에서 내 마음의 안식은 나 스스로 찾아야 하는 것 아닐까? 피터가 오도와 함께함으로 마음의 안식을 얻은것처럼.. |
|
아주 예전에 책 <파이 이야기>가 유행하던 때, 제목만 보고서 수학 이야기겠거니 넘겨짚고 눈길도 안 줬다. 시간이 한참 지나 이안 감독의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가 개봉했을 때에도 수학 영화는 안 보겠다고 했다. 시간이 더 흐른 다음에야 수학과 전혀 관련 없는 내용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재개봉한 <라이프 오브 파이>를 보러 갔다. 이 영화를 논할 때 영상미를 칭찬하는 말이 빠져서는 안 되겠지만, 그래도 정말 반했던 부분은 이야기의 결말이었다. 차근차근 쌓아 올린 서사가 결말에 이르러 다른 차원의 의미로 도약하는 느낌을 받게 하다니 얼마나 매력적인지. <파이 이야기>의 저자 얀 마텔은 <포르투갈의 높은 산>에서도 ‘이야기’와 ‘믿음’에 관한 그의 세계를 독창적으로 엮어 나간다. 총 3부로 나뉘어 있지만 세 이야기는 서로 맞닿아 이어진다. 1부는 1904년 리스본의 박물관 학예 보조사인 토마스, 2부는 1939년 포르투갈의 높은 산 부근 병원에 근무하는 병리학자 에우제비우, 3부는 1980년 캐나다 상원의원 피터의 이야기다. 세 인물 모두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거대한 상실 속에서 삶을 붙잡아 버티는 사람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1부의 토마스는 가혹한 운명에 저항해 기독교 역사를 바꿀 만한 십자고상을 찾으러 포르투갈의 높은 산으로 떠나고 그 과정에서 한 아이를 차로 치고 만다. 아이를 잃은 부모는 빛을 잃은 채 살았는데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나자 부인이 2부에서 에우제비우를 찾아와 남편의 시신을 부검해 달라고 요청한다. 3부의 피터는 아내와 사별한 뒤 우연히 깊은 교감을 나누게 된 침팬지 ‘오도’와 함께, 피터 부모의 고향인 포르투갈의 높은 산으로 향한다. 얀 마텔을 믿고 그냥 쭉 따라가도 된다는걸 알면서도 이야기가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 들며 상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펼쳐지는 바람에, 도대체 종국에는 어찌 되려고 이야기가 이렇게 흘러가나 싶었다. 끝까지 다 읽고 난 뒤에도, 겉으로 드러난 내용들 말고 수면 밑에 가라앉은 어떤 의미를 찾고 싶어서 한참을 생각해야 했다. 어쨌든 이 소설도 얀 마텔이 들려주는 ‘이야기’이고, 이야기란 기본적으로 허구니까. 그런데 이 허구 속에 작가가 믿는 진실이 있다. 그 진실에 좀더 가까이 다가서게 된 것은 소설 2부에서 병리학자 에우제비우 앞에 죽은 아내가 찾아와 대화를 나누는 대목에서였다. 여기서 얀 마텔은 에우제비우 아내의 입을 빌려 ‘종교’와 ‘이야기’에 관한 저자 자신의 생각을 들려준다. 에우제비우의 아내는 우리의 삶에 이성만으로는 닿을 수 없는 부분이 존재하기에, 이성과 신앙을 균형 있게 포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오래 전 예수는 어떤 역사적 기록이 아닌 ‘성경’이라는 ‘이야기’를 통해 오래도록 우리 곁에 머물기로 선택했고, 이제 예수의 언어가 비유임을 인지한다면 더이상 복음서를 신문 기사처럼 받아들이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그러니 복음서 이야기 속 은유와 상징을 읽으려 노력할 때 진실을 마주할 수 있다고 말이다. “왜 예수는 비유로 이야기하려 할까요? 왜 그는 이야기를 하면서 동시에 이야기를 통해 자신을 드러낼까요? 왜 진실은 허구라는 도구를 쓰려 할까요?” (p.184) “이야기는 인간의 정신에 은혜를 베풀어요. 예수는 이야기를 통해 우리를 감동시키는 한, 우리의 놀라운 상상력에 지문을 남기는 한 우리와 함께할 것이며, 우리 역시 그와 함께할 것이라고 차분히 확신하면서 세상을 거닐었어요. 그리고 그는 말이 아니라 조용히 이야기를 타고 왔지요.” (p.187)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는 <이것은 물이다>에서 스스로 무신론자라고 믿고 있는 사람조차 ‘무엇(자신이 무신론자라는 사실)’을 믿고 있는 거라고 말한 바 있다. 나는 ‘믿음’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는데, 현실에서 믿음은 특정한 종교와 관련된 말로 통용되지만, 종교가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스스로의 운명에 대한 우주적이고 범신론적인 소망이 아주 없진 않을 테다. 또한 인간은 고통이나 역경을 겪으며 온 마음이 무너져내릴 때 초월적 존재를 찾아가고는 한다. 그중에 간혹 절망 끝에 신을 향한 믿음을 저버리기로 작정한 사람이 있다 해도(1부에 등장하는 토마스처럼), 그것 역시 신에게 저항하면 할수록 동시에 신의 존재를 강하게 긍정하는 셈이 되기에. 그러니 결국 인간이 삶에서 믿음을 완전히 몰아내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여겨진다. 삶이 그저 슬픔과 기쁨의 총합에 불과하다면, 계산기를 두드려 행복감과 고통감을 더했을 때 마이너스(-)인 사람이 삶을 계속 버티기가 어려울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삶이 슬픔과 기쁨의 총합 그 이상이라고 믿는다. 상실과 비탄 속에서도 사람은 자신만의 '포르투갈의 높은 산'을 향한다. 가혹한 운명 탓에 여력이 바닥나 더이상 아무 것도 이성적으로 기대할 수 없을 때, 내면에서 움튼 단순한 믿음이 삶의 다음 이야기를 기대하도록 이끈다고 <포르투갈의 높은 산>이 말해주었다. “이성은 현실적이고, 보상이 빠르고 그 작용은 명확해요. 하지만 슬프게도 이성은 맹목적이지요. 이성은 그 자체로는 우리를 어디로도 이끌지 못해요, 역경을 앞두고는 특히 그렇죠. 그 둘의 균형을 어떻게 맞춰야 될까요, 어떻게 신앙과 이성 모두를 지니고 살까요? 에우제비우, 당신에겐 이야기가 해결책이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p.200) <파이 이야기>에서 호랑이 리차드 파커스가 주인공 파이의 또다른 내면을 비유했던 것을 떠올리면, <포르투갈의 높은 산>에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침팬지 역시 단순한 동물이 아니라 비유적 존재일지도 모른다. (특히 3부에서 피터가 평온한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에 침팬지 ‘오도’는 평원으로 달려가며 사라진다.) 아무래도 내겐 소설 속 침팬지가 인간 안에 자리하여 머무는 신의 모습인 것만 같다. 얀 마텔이 들려주는 이야기 속에서 신은 침팬지의 얼굴을 하고서 온다.
|
|
[포르투갈의 높은 산] 얀 마텔. .... 음..... [포르투갈의 높은 산]은 총 3가지의 이야기로 구성되어있다. 1부 집을 잃다. 2부 집으로. 3부 집. 개인적으로 1부 '집을 잃다'의 초반부인 초기자동차의 세세한 설명과 무엇보다 토마스의 형편없는 운전실력을 오랜시간 묘사하는 부분 정확하게 89페이지까지~는 정말~지루했다. 증말~ 솔직히 이때까지는 이책을 의심했다!! 도마(토마스)처럼~ 미친 듯 흥분한 뒤에 미친 듯 낙담했다. 얀 마텔 [포르투갈의 높은 산]의 3가지 이야기는 사랑하는 자 - 아내 또는 아들 - 를 잃은 주인공들의 다른 시대, 다른 이야기들이다. 하지만, 각 이야기는 하나의 접점. 사건으로 연루되어있으며 여러가지의 장치들이 깔려있다. 그 장치를 통해 얀마텔의 말처럼 [포르투갈의 높은 산]에서 진실은 허구라는 도구를 쓰며 은유가 넘쳐나는 이야기들을 써내려간다. 그 진실 - 신,신앙,믿음... - 에 대하여 얀마텔 만의 상상적이며 마법같은 비유의 언어로 이야기한다. "우리의 삶을 신성함이라는...참으로 비이성적이고요. 신앙은 장엄하지만 비실용적이에요.... 이야기는 이성을 멋지게 내보이는 동시에 당신을 나사렛 예수의 곁에 있게 하니까요... 당신은 흔들릴지라도 신앙을 고수할 수 있어요. 그래서 당신에게 애거서 크리스티를 주는 거에요." 그리고, 애거서 크리스티 소설처럼 이 책 또한 핵심에는 늘 가장 무거운 죄악 - 목숨을 앗아 가는 것 - 이 있다. 그것은 살해 미스터리처럼 각 이야기는 금발과 파란눈을 가진 한 아이의 살해라는 목숨을 앗아간 사건으로 서로 연결되어있다. 2부의 마리아의 말처럼 "살해 미스터리는 늘 마지막에 해결되며 의혹이 말끔히 해소돼요. 우리 삶에서 죽음도 그래야만 해요. 아무리 어려워도 죽음을 해결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맥락을 살펴야 해요." "...살면서 적어도 한 번의 살해를 맞닥뜨리죠. 바로 자신의 죽음 말이에요. 그게 우리의 운명이에요. 우리 모두는 자신이 피해자인 살해 미스터리에서 살아요" 그럼~ 3가지 이야기를 풀면서 간단하게 줄거리를 이야기하자면..... 1부 ‘집을 잃다.’ 1904년 리스본에 살고있는 토마스는 부자인 숙부의 하녀 도라를 사랑하고 가스파르 라는 아들을 낳는다. 하지만, 도라와 5살 아들. 그리고 아버지가 월요일, 목요일, 일요일에 죽게된다. 그 이후부터 토마스는 신에 대한 반발로 뒤로 걷기시작한다. "뒤로 걷기는 ... 예측불허의 변화를 가져오는 운명을 견디도록 되어 있다고...세상으로부터 가릴 수있고, 그 익명성은 돌아보고 싶을 때 간단히 몸을 돌림으로써 자발적으로 깨뜨리는 거라고 말했다." 고미술 박물관의 학예 보조사로 일하면서 노예무역의 항구에서 세례를 주는 율리시스 신부의 일기장을 발견한다. 그리고, 일기장에 언급된 기독교 역사를 바꿀 만한 십자고상을 찾아 포르투갈의 높은 산을 찾아간다. "그게 뭔지 말할 수는 없지만 상당히 인상적인 물건입니다...그게 소동을 일으킬 거예요. 신은 내 사랑하는 아들에게 한짓의 대가를 이 물건을 통해 톡톡히 치르게 될 겁니다" 10일간의 휴가를 얻어 숙부가 준 프랑스산 르노 자동차를 타고 십자고상을 찾으로 가는 여행이 시작된다. 여행도중 이런 저런 일을 겪다가 토마스(도마)는 운전중 5살먹은 한 아이를 치어 죽게한다. 그리고 괴로움 속에서 인근 투이젤루의 교회에 도착해서 한 여인 마리아 도르스 파수스 카스트루의 인솔로 교회 안으로 들어간다. 그곳에서 그는 그 십자고상을 발견한다. "1년간 뒤로 걷는 것으로 표출한 분노와 절망을 이제 관습에 어긋나는 십자고상으로 표출하리라." 그런데 그가 발견한 십자고상의 예수는 침팬지였다. "...... 저게 뭡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지요.... 십자가에서 고난받고 계시지요. 인간의 형태요. 하느님은 저희를 사랑하신 나머지 그의 아들을 저희에게 주셨습니다.... 아니요! 토마스가 외친다. 그는 복부 근육이 몽땅 뒤틀리는데도 미소 지으면서 말을 잇는다. 여기 당신들이 갖고 있는 것은 침팬지입니다! 유인원이죠.... 당신들의 '사람의 아들'은 신이 아닙니다 - 그는 십자가에 달린 유인원일 뿐입니다!" ...보라고. 당신이 내 아들을 데려갔으니 이제 내가 당신 아들을 데려가는 거요. ....신이 아니다 - 동물에 불과하다. ...카스트로 부인은....눈을 감고 기도한다. 예수님이 유인원이라면 그러라지뭐 - 그는 유인원이다. 그래도 그는 여전히 '신의 아들'이다. ...우리는 멋대로인 동물이다. 그게 우리이고, 우리는 우리일 뿐 더 나은 무엇이 아니다 - 더 숭고한 관계 따윈 없다... 우리는 진화된 유인원일 뿐 타락한 천사가 아니다. 토마스는 외로움에 짓 눌린다. 아버지, 당신이 필요합니다! 그가 절규한다. 아브라앙 신부는 낚시 도구를 바닥에 던지고 애처로운 이방인을 도우러 달려간다." 2부 ‘집으로.’ 1938년12월31일 자정쯤 포르투갈의 높은 산 인근 브라간사의 병리학자인 에우제비우 로조라에게 (매혹적인 피조물) 아내 마리아 루이자 모타알 로조라가 부검실로 찾아온다. 아내는 복음서의 예수의 기적이 비유인것과 익명성을 통한 예수의 살해 실패한 메시아지만 죄짐을 지었고 부활했으며 애거서 크리스티의 추리소설과 성경 복음서의 비슷한점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애거서 크리스티의 신작[죽음과의 약속]을 선물로 주고 해어진다. 그런데, 아내는 이미 그전에 원인모를 사고로 죽었다. (인근에 소설제목 자살?) 1939년 새해에 마리아 도르스 파수스 카스트루라는 노부인이 찾아온다. 노부인은 가방에 죽은 남편 라파엘의 시신을 가져와서 부검해달라고한다.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 알고 싶어요." 마리아의 요청대로 발부터 부검을 하는데 토사물이 나온다. 그리고 다른부위에서는 은화,젓가락,망치,포크... 그리고 흉부와 복부 안에서는 평온하게 휴식을 취하며 옹골지게 누워 있는 어린 침팬지 한 마리와 침팬지가 보호하듯 안은 갈색 새끼 곰이 나온다. 침팬지는 라파엘의 신앙심. 늙지않는 믿음이며 갈색 새끼 곰은 죽은 아이다. "마리아 카스트루는 몸을 숙여 새끼 곰에게 얼굴을 댄다. 그녀의 남편은 이렇게 살았을까?...." 그리고 마리아 카스트루는 조심스럽게 남편의 몸속에 자리를 잡고 봉합해달라고한다. 그러면서 그녀는 중얼거린다. "여기가 집이야, 여기가 집이야, 여기가 집이야" 그녀는 몸 앞쪽에 침팬지의 등이 파묻히게 자리를 잡고, 침팬지와 새끼 곰을 끌어안으며 양손을 새끼 곰의 몸에 내려놓는다. 부검하면서 나온 물건은 시신을 가져온 낡은 가방에 넣어둔다. 그리고 마리아와 라파엘에게는 아들이 있었는데 아들이 죽은날부터 라파엘은 투이젤루의 뒤로걷는 이방인을 보고 뒤로 걷기시작한다. 물론 그 이방인은 토마스고 놀라운 금발의 파란눈을 가진 5살짜리 아이는 마리아의 아이며 토마스의 차로 살해된 아이다. 이 황금 아이는 후에 교회의 천사. 가경자-성자의 2단계 아래-로 추앙받는다. 3부 집. 1981년 캐나다 상원의원 피터 토비는 아내 클래라가 죽은후 미국 영장류 연구소를 방문했다가 '오도'라는 침팬지를 분양받는다. 그리고 오도는 피터의 삶을 차지해버린다. 그는 침팬지와 함께 부모님고향인 포르투갈의 높은 산 투이젤루로 이민을 간다. 투이젤루에서 집을 구하고 그곳에서 생활하던중 침팬지 오도가 낡은 가방을 찾는다. 가방엔 애거서 크리스티소설[죽음과의 약속]과 라파엘의 부검에서 나온 물건들. 그리고 종이 한 장엔 "라파엘 미구엘 산투스 카스트루,83세, 포르투갈의 높은 산 투이젤루 출신." 이라고 써져있다. 피터는 익명성을 버릴 각오를 하고 가족의 사진집에서 황금 아이가 증조부의 조카(당숙)인것을 알게된다. 라파엘 미구엘 산투스 카스트루는 피터의 조부인 바티스타의 동생이였다. 마을 사람들은 5살 먹은 마리아의 아이를 천사가 하느님께 데리고 가려다 실수로 떨어뜨려서 몸에 난 상처가 예수의 십자가 상처와 일치했다는 소문과 마을 사람 몇몇은 자동차가 사내아이의 죽음과 관련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천사가 아이를 떨군게 미안해서 아이에게 기도하면 임신을 한다는 이야기와 증언이있다. 물론 투이젤루 교회엔 침팬지 십자고상이 있다. "피터는 십자고상을 찬찬히 쳐다본다.... 이건 말도 안 돼요. 침팬지로 뭘 하자는 거죠? 벤(피터 아들)이 초조하게 두리번거리면서 덧붙여 묻는다. 그런데 아버지의 침팬지는 어디 있어요? .... 벤, 네가 나한테 물었지. 침팬지로 뭘 하자는 건지 나도 모르겠다. 내가 아는 것은 오도가 내 삶을 채우고 있다는 거야. 그가 내게 기쁨을 가져다준다. .... 끝내주게 신의 은총을 입은 상태네요. 벤이 말한다." 그리고 피터와 침팬지는 산책한다. 큰 바위를 오르면서 피터는 심장마비로 침팬지 품에서 죽고. 그후 오도는 이베리아 코뿔소가 있는곳으로 사라진다. 아무튼, 이 살해사건의 결론은 ... 얀마텔은 [포르투갈의 높은 산]에서 은유적으로 아이 살해 미스터리를 풀면서 허구의 도구를 걷어내며 "침팬지로 뭘 하자는거죠?" 라며 비이성적이며 비실용적인 신앙을 폭로한다. 마치 니체처럼~ 토마스는 "당신들의 '사람의 아들'은 신이 아닙니다 - 그는 십자가에 달린 유인원일 뿐입니다!" 라고 폭로하며 "당신이 내 아들을 데려갔으니 이제 내가 당신 아들을 데려가는 거요." 하며 1부에서는 아이를 살해하고 집을 잃는다. 이 아들은 토마스의 신앙인 침팬지이며 마리아와 대천사 라파엘의 아들 황금 아이 이기도하다. 그리고 집은 "오도처럼 현재의 순간을 사는 게 행복하다고 말하는 편이 더욱 적절하고, 그 현재의 순간에 과거의 주소따윈 없다. 아니다. 이곳은 집이 아니다..... 그가 오도와 함께하는 이야기가 집이다." 오도와 함께하는 이야기가 집이듯 피터에겐 도라와 가스파르가 함께하는 이야기며 에우제비우에겐 아내마리아. 마리아에겐 라파엘과 새끼 곰인 아들. 피터에겐 아내 클래라와 함께하는 이야기다. 그리고, 2부에서는 부검실에서 예수의 살인과 아이의 아버지 부검이 이뤄지고 3부에서는 사건은 포르투갈의 높은 산에는 산이 없듯 아이(예수)는 은총이 아니라 그저 교통사고로 살해되었다며 결론지어지게된다. 하지만 후에 살해된 침팬지(아이. 예수. 신앙. 신...) 다른 침팬지로 피터의 삶을 차지하고 은총을 입는다. 그렇게 피터는 새로운 침팬지를 통해 집을 찾는다. 마치 얀마텔의 복음서로 은총을 입듯말이다~ 아무튼 얀마텔의 소설은 경이롭다~ 파이이야기를 한번 읽어봐야겠다 끝. https://blog.naver.com/2009rainbow/222025233919 |
|
얀 마텔 작가의 <포르투갈의 높은 산> 리뷰입니다. 2017년 11월 작가정신에서 출간된 이 전자책은 대표작 '파이 이야기'를 쓴 얀 마텔의 소설로 역자는 공경희 씨입니다. 저는 파이 이야기를 책으로도 소장하고 있고 영화도 인상 깊게 봤기 때문에 얀 마텔 작가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포르투갈의 높은 산>을 구매한 계기도 작가 때문이었습니다. 이 작품은 인간의 상실과 그를 극복하는 방식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
|
얀 마텔, <포르투갈의 높은 산> <파이 이야기>를 재미있게 본 터라 작가의 이름만 보고 바로 구매했습니다. 아직 못 읽어보았지만 같은 작가의 책인만큼 이 책도 영화로 나오면 꼭 보러갈 것이라는 믿음이 있네요. 좋아하는 작가의 책인만큼 아껴서 볼 예정입니다. 대여로도 저렴하게 볼 수 있으니 관심있으신 분들은 보시기 바랍니다. 덧붙여 같은 작가의 작품인 <파이 이야기>도 추천드립니다. 반전이 어마어마하니 스포를 보지 마시고 보시길... |
|
"포르투갈의 높은 산" 안 마텔 - 파이 이야기의 작가 얀마텔의 신작 소설 포르투갈의 높은 산은 일상의 가장 소중한 것을 잃은 세 남자의 이야기 세 편이 담겨 있다 물론 각각의 이야기는 소설의 마지막에 가서 하나의 접점을 이루는 서사 구조를 보이기에 한 편의 소설 로 묶여있다. 그러나 굳이 이 셋을 이어 붙이지 않아도 각각의 이야기가 하나의 완벽한 서사 구조로 읽힌다는 것이 이 소설의 특이점이다 이 세 이야기의 각각의 주인공은 모두 아내를 잃은 혹은 아내와 아이를 잃은 남성이다 그리고 그들은 각각 그 상실을 극복하기 위해 제 나름대로의 방법을 찾아 행동한다 1부 ' 집을 잃다'의 토마스는 극복의 방법으로 포르투칼의 높은 산에 있는 교회의 십자고상을 찾아 떠난다 숙부가 떠안기다시피 선물한 기술문명의 도구인 자동차를 처음 운전하게 되고, 그로인해 죄충우돌하는 과정이 상세하게 기술된다 그리고 어느새 그의 슬픔은 지금의 고민거리에 밀려나 버린다 2부 '집'은 병리학자 에우제비우의 병동에서 하룻밤에 일어난 기이한 이야기가 뼈대를 이룬다 죽은 아내와 병원에서 성경의 구조와 애거서 크리스티의 추리소설의 유사점에 관해 논쟁하는 기이한 장면이 시종일관 긴장감을 준다 3부 '집으로'는 캐나다 상원의원 토비가 침팬지 오도와 만나 일상의 모든걸 버리고 포르투칼에 가서 마을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둘의 관계를 긴밀하게 만들어가는 이야기다. 이 소설은 다양한 층위의 이야기가 날줄과 씨줄로 엮여 해석의 다의성을 태생적으로 유발한다 때문에 작가나 번역자의 어떤 조언도 한 측면의 해석만을 보여줄뿐 결정적인 역할은 어려워 보인다. 독자인 내가 이 소설을 읽고 이해한 것은 세 이야기가 모두 상실의 극복 방안을 나름대로 펼쳐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다르면서 공통점을 또한 갖고 있다는 점이다 즉 인간은 소중한 것을 송두리째 잃었을 때 일상에 대한 열정이 급속히 무너진다는 것이고, 또한 그것의 극복 역시 일상의 번잡한 당면 문제를 해결하면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1부의 토마스는 처음 대하는 자동차에 적응하고 휘발류를 얻기 위해 동분서주하며 어느덧 자신의 고통을 잊는다 그가 심지어 신에 대한 반항으로 뒤로 걷기를 하는 것은 자동차를 벗어나서 거리를 걸을 때뿐이다 2부의 에우제비우는 죽은 아내와의 대화라는 충격적인 망상의 상황을 채 눈치채기도 전에 갑자기 나타난 여인이 가져온 시신을 부검하면서 그 기이한 작업에 몰입하며 전문가의 냉철함을 회복하는 듯 보인다 3부 토비는 침팬지 오도와의 친밀한 교제에서 아예 인간과의 관계 못지 않은 따뜻한 위로를 얻고 그 품에서 편안한 휴식을 취하며 눈을 감는다 즉 이 세사람이 사랑하는 이를 잃은 상실감을 극복하거나 잊을수 있던 것은 결국 그동안 일상과는 다른 일상에 관계하면서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것도 아예 정신을 쏙 빼놓을 정도로 낯선 것들을 경험하면서 가능했다 어쩌면 이것이 이 소설이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우리가 슬픔과 애통함을 극복하는 방법은 오로지 과거의 기억이나 추억을 곰씹거나 미래의 희망이 아니라 지금 이곳에서 나와 친밀한 그 무엇이 있다면 가능할지 모른다는 것. 무엇을 먹을지, 어디서 잘지, 어떻게 찾아갈지라는 기본적인 문제에 집중하다보면 결국 인생의 무거운 짐을 극복하는 게 가능하다는 것. 매일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는 우리나라에서 탄식과 원망과 거대한 슬픔을 극복하는 방법도 결국 하루빨리 의식주에 의식을 집중하고 가공의 이야기나 동물, 기계를 가까이 하는 게 어쩌면 최선이지 않을까 하는 것. 가장 중요한 점은 이 소설을 읽는 것이 그 극복의 한 방법으로 결코 빠질 수 없다는 것. |
|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를 워낙 좋아했던지라, 영화는 3번 넘게 봤지만 원작은 한 번도 본적 없었습니다. 하지만 포르투갈의 높은 산이 얀 마텔의 신작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이번에는 얀 마텔의 원작을 느껴보자는 심정으로 책을 구매하여 읽게 되었습니다. 일단 책 문구 자체가 굉장히 끌렸던 것도 사실이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우리는 무엇인가?" 이 얼마나 매혹적인 멘트인가. 이러한 궁금증으로 읽어 내려가기 시작한 포르투갈의 높은 산은, 사실상 엄청난 만족감을 주는 책은 아니었다. 약간 지저분하다고 할 수 있는 형식의 문체였고, 간결한 문체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그렇게 호감이 많이 가는 첫인상은 아니었다. 계속 나열하는 형식의 문체였는데, 특히나 1장과 2장에서 그 부분이 도드라진다. 아마도 캐릭터 설정에 따라 문체 또한 달리한 것 같기도 하다. 또 인문학이라는 것이 뭐든 그렇든 답이 없는 것이었지만, 이 책도 한 가지의 정답을 던져주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읽으면서 내내 흠... 이런 생각을 하게 만들었지만, 그럼에도 뒷 이야기가 계속 궁금해져서 계속 읽게 만드는 매력이 있는 책이었다. 그리고 끝까지 책을 다 읽은 결과로 보자면, 처음 가졌던 인상과는 달리 난잡한 느낌 보다는 훨씬 차분하고 정리된 인상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한 번 생각을 정리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기도 하다. 일부러 마지막 장의 주인공을 그렇게 배치했는지도 모른다. 첫인상이 그렇게 좋은 책은 아니었으나 충분히 매력적인 책이었다. 얀 마텔의 다음 신작이 기다려진다. |
|
얀 마텔의 히트작 파이 이야기를 굉장히 재미있게 읽어서 주저없이 선택한 책 상당히 정신없이 읽은 듯 하다 세 가지 이야기가 다른 듯 하면서도 같은 듯 하다 잔혹동화같은 느낌도 받았다 모든 소설은 결국 삶 사랑 죽음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얀 마텔의 스타일은 독특하다 코믹적이지만 동시에 슬픈 그런 분위기가 있다 한 번 더 읽어보는게 괜찮겠다 또다른 느낌을 받을 듯 하다 |
|
파이 이야기가 준 감동과 깨달음에 또 다시 작가의 작품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세 이야기가 시간의 차이를 두고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구조가 흥미롭고 더 깊게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게 했다. 이야기.... 인간의 뇌가 개발한 최고의 킬러애플러케이션이라는 말이 있듯 인간은 신화와 국가, 종교, 돈, 이념, 법에 관련해 이야기를 만들고 믿고 살아가고 있다. 그 중 진정 가치를 찾는다면 소설이 아닐까 진짜 중요한게 무엇인지 깨닫고 적어도 어디로 향해야할 지 생각하게 하니까. 비록 그것을 추진할 힘과 에너지는 또 다른 몫이지만 말이다. 다시 읽고 쓴다. 그 만큼 좋은 서사와 구성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