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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정태세문단세, 예성연중인명선, 광인효현숙경영, 정순헌철고순.. 학교에서 국사를 배울 때, 누구나 입에 달고 살던 조선시대 왕들의 이름이다. 지금도 기억 속에 선명한 이 이름들을 보면서 누구는 조이고, 또 누구는 왜 종인지 궁금하기는 했지만, 그저 적자계승이면 종이고, 아니면 조라고 어렴풋이 생각했던것 같다. 궁금했던 그 시간이 지나면 괜찮았던 것을 보면,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니었기에 스쳐 지나갈수 있었으리라. 전통시대 국왕의 이름들은 다양했다고 한다. 아명, 원명, 자, 호, 존호, 시호, 묘호, 전호, 능호등 10여 가지에 이르렀다고 한다. 자는 성인식인 관례 때 지어주었는데 이것은 성과 명으로 구성된 이름을 공경하고, 또 아무나 부를수 없었기 때문이다. 국왕은 세자에 책봉되면 비로소 이름을 정하였는데 이는 조상을 모신 종묘와 사직에 세자책봉 사실을 아뢸때 필요했기 때문이다. 존호, 묘호, 전호, 능호는 국왕과 왕비에게만 주어진 이름이며, 이중 존호는 살아 생전에 받는 이름이지만, 나머지는 승하 후에 올리는 이름이라고 한다. 전호는 상중에나 위패를 모신 사당을 두루 부르는 이름이고, 능호는 시신을 안치한 무덤의 이름, 그리고 묘호는 왕명으로 쓰이는 이름이며, 일종의 시호이다. 따라서 묘호는 사당이름인 한편 시호 혹은 왕명이고, 이는 두글자로 만들어졌다. 앞 글자는 시자로써 공덕을 평가할 때 사용할수 있도록 정해진 글자(시법)에 따라 정하는 것이 원칙이었고, 뒷글자는 종계와 조공종덕의 예제에 근거하여 조나 종을 사용했다고 한다. 당시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조종의 묘호는 중국 황제만 사용할수 있었고, 조선의 국왕과 신하들은 이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지만, 조종을 붙인 묘호를 계속 사용하였다고 한다. 이는 국왕의 권위와 정통성의 확립이 요구되는일 일뿐만 아니라 중국에 대해 조선의 자존과 자주권을 지키는 길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국왕 생전의 공덕이 옳은가, 그른가를 평가하는 후대 왕들과 수많은 대신들의 고심과 갈등은 깊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 이기도 하다. 저자는 삼국시대에서부터 대한제국에 이르기까지 역대왕조에서 사용된 묘호들을 살펴보고 있다. 삼국시대의 경우 왕명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서 전하는 단편적인 내용으로만 유추가 가능하다. 그러나 당나라이전에는 중국에서도 종법에 따른 묘호제도가 아직 정착되지 않았었다. 이것은 예제에 따른 이해부족이 아니라 제도를 정착시킬만한 국제사회의 안정과 정치사회적 조건이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고려는 왕호와 묘호제도를 체계적으로 정착시켰다고 한다. 왕건을 태조로하고, 그를 계승하는 역대 국왕은 종법을 철저히 적용하고 묘호를 올렸다고한다. 또한 고려는 왕과 황제를 혼칭하였는데 이는 당시 고려가 동아시아 국제질서에서 당당히 한 축을 담당하였고, 중국에는 주변국을 평정할만한 강대국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러다 원나라 간섭기에 중국에서 시호를내리는 사시가단행되어 국왕의 등급이 황제에서 왕으로 격하되었고, 또 성리학이 전래되면서 고려의 묘호는 조종에서 왕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이렇게 자발적으로 묘호를 바꾼것은 고려가 중국의 제후국이라는 국제질서를 스스로 인정한것이 되었지만, 그나마 공식적으로 종호개칭을 채택한적이 없다는점이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조선은 유교를 국가이념으로 채택하였으며, 태조가 즉위교서에서 제일 먼저 천명한 것이 예치국가였다고 한다. 따라서 그는 종법질서의 체계를 바로잡아 왕실의 정통성과 질서 및 안정을 도모하였다고 한다. 묘호를 정하는 일은 정치운명마저 좌우할만한 파장을 지녔기에, 세종때에 이르러서는 시법을 연구하여 묘호의 제정원리를 제도적으로 확립하였다. 묘호의 제정원리는 종법과 조공종덕 두가지라고 한다. 종법의 근간을 이루는 시자에는 고대로부터 인간들이 사회와 국가를 조직하고 운영하면서 쌓아온 무수한 경험들이 들어있다고 한다. 따라서 태(太), 세(世), 중(中), 인(仁), 성(成)등 시자 한글자가 갖는 역사적 함의는 대단히 클 수밖에 없다고 한다. 한 글자로 국왕의 평생의 업적을 재단하여 평가했기 때문이다. 선택방법은 승하한 왕의 공덕을 검토한 후, 중국의 역대 황제중 가장 유사한 황제의 시자를 찾아 정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시자 뒤에 붙는 조와 종은 국왕의 공과 덕에 대한 평가라고 할 수 있어 선택은 오히려 간단했지만, 왕권의 정통성 문제와 재위기간 중의 공덕과 관련이 있었기 때문에 왕과 신하, 그리고 정치세력 상호간의 견해차이로 갈등을 빚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저자는 조선왕조에서 반정으로 등극한 국왕들의 종호에 대해서 살펴보고 있다. 세조는 단종을 폐위하고 종법질서를 부정하였다. 세조가 죽자 대신들은 종으로 칭하였으나 예종은 이를 거부하였다고 한다. 위태로운 사직을 다시 일으켜 세워 반정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차원에서 시자는 재조의 공덕에 걸맞은 세(世)자에서 다른 주장이 허용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세종은 이미 있었기에 종자가 조로 정해졌다고 한다. 광해군을 몰아내고 등극한 인조의 경우도 시자와 종자에 대한 논란이 많았으나 효종에 뜻에 따라 인조로 칭했다고 한다. 중종은 세조나 인조와 같이 반정으로 등극했지만, 시호는 연산군의 혼란기에 나라를 중흥한 공을 높인다는 논리아래 중자를 택했지만, 종호는 종으로 칭하는 종법논리에 따랐다고 한다. 인종은 조로 칭하고자 했으나 성종의 아들로써 왕위를 이었다는 대신들의 억지논리아래 관철시키지 못했다고 한다. 왕과 대신들의 힘의 우위가 어디에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실례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가하면 후대에와서 종을 조로 개칭한 국왕들도 있다. 선조의 경우는 초기 선종이었으나 광해군 8년에 다시 선조로 개칭하였고, 영조는 오랜세월이 흐른 고종때 영종에서 영조로, 그리고 순조는 철종때에 순종에서 순조로 개칭 되었다고 한다. 이는 조와 종의 경중이 같다고 하나, 조를 종보다 낫게 여기는 풍조와 이에 편승한 일부 정치세력의 이해관계가 맞물려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왕의 자리에 올랐다고 해서 누구나 묘호를 가질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왕위를 계승했음에도 사후에 묘호를 정하지 않고 왕이라는 이름으로 사당에 모셔진 유일한 왕이 정종이라고 한다. 묘호가 추상된 것은 숙종때의 일로 그때까지는 공정왕으로 불렸다. 묘호를 얻기까지 무려 3백 년을 기다려야 했다고 한다. 이는 태조의 권위가 공정왕이 아니라 태종에게 직접 전해진 것으로 계통을 확립하고자 한 태종의 정치적 음모에서 촉발된 것으로 여겨진다고 한다. 묘호를 둘러싼 이해세력간의 다툼이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것 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한 글자로 국왕의 평생의 업적을 재단하여 역사에 올리는 묘호, 그것은 또한 왕권의 정통성을 다루고 있었다. 그러기에 조선의 국왕들은 묘호를 올리는 일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고, 두려워 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광복 이후 대한민국 위정자들은 어떠 했을까? 이들 사후에 조선의 역대 국왕처럼 묘호를 짓는다면 어떤 시자가 주어질까? 아마 미(美)시보다는 악(惡)시가 대부분일 것 이라는 생각이 든다. 재임기간 중 공과와 그에 따른 상징은 정권의 성패를 가름한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정통성을 주장하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국민들이 이해하고 동의해 주어야 가능하다. 묘호가 주는 교훈과 가치는 그래서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말하는 저자, 후대인들이 기억하는 그들의 이름이 곧 역사이고, 역사는 두려운 존재라는 것을 묘호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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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정태세문단세...’ 요즘도 이렇게 외우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이 순서를 외우고 있었다. 말하자면 필수 암기 목록 같은 거였다. 당시에는, 그리고 꽤 오랫동안 이게 그저 조선 임금의 이름인 줄 알고 있었다. 그러다 임금이 죽은 후에야 붙여지는 이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정도였다. 이 이름에 어떤 의미가, 어떤 갈등이 있었는지는 몰랐다.
임민혁의 《왕의 이름, 묘호》는 바로 그 ‘태정태세문단세’에 얽힌 이야기를 자세히 전해주고 있다. 그런데 읽기는 그리 쉽지 않다. 전문적인 용어, 그것도 한자를 쓰고 있으면서 친절하게 풀어주는 경우도 많지 않다. 그럼에도 몇 가지 궁금했던 것도 해소할 수 있었고, 또 처음 알게 된 것도 있었다.
우선 ‘태정태세문단세’가 묘호(廟號)라는 점이다. 국왕들을 부르는 이름은 무려 열 가지나 된다고 한다. 아명(兒名)에서부터 존호, 시호까지 참 복잡하기 이를 데 없다(여기서 간단히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이름인 묘호는 국왕이 죽은 후 (조선에서는) 대신들이 논의를 거쳐 3개의 후보를 정하면 새 임금이 낙점하는 형식이었다. 그런데 임금이 마음에 드는 이름이 없으면 재의를 요구하기도 햇고, 그 의미라든가, 조(祖)를 쓸 건지, 종(宗)을 쓸 건지에 대해서도 갈등이 컸다.
임금 이름에 ‘조’와 ‘종’을 달리 쓴 까닭에 대해 궁금할 수밖에 없는데, 꽤 오래 전에 ‘종’은 적장자 계승인 경우, ‘조’는 정통성이 좀 떨어지는 경우(즉, 적장자 계승이 아닌 경우)에 쓴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가만 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는 것을 알았음에도 그냥 그런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조공종덕(祖功宗德)’이라 하여 조에는 공이 있는 경우, 종에는 덕이 있는 경우에 쓰는 말이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조는 나라를 세우거나, 커다란 위험으로부터 구해낸 공이 있는 경우, 공이란 나라를 평안히 다스린, 수성의 경우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는 매우 애매할 수밖에 없는데, 이를 구분하기 위해 치열한 업적 평가가 있었다.
그러다 조가 종보다 더 권위가 높다는 인식이 생겼다고 한다. 아마도 극적인 상황에서 나라를 구했다는 게 더 큰 평가를 받는다고 여겼던 듯하다. 그래서 ‘종’이 ‘조’로 바뀐 사례도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선조다. 원래는 선종이었다고 한다. 그러다 대신들이 선조로 칭할 것을 건의하고 광해군이 받아들여 선조가 되었는데, 이에 대해서도 상당한 비판과 논쟁이 있었다. 이 말고도 영조가 그랬고(영조는 살아 있을 때부터 자신의 묘호에 영(英)자를 쓰라고 했다고 한다), 순조 역시 그랬다.
또 하나 알게 된 것은 정종에 관한 일이다. 조선의 2대 임금이라고 알고 있는 정조는 오랫동안 묘호를 받지 못하고, 공정왕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임금의 자리에 오르는 것을 원치 않았고, 오른 후에도 임금의 역할을 하지 못했고, 또 2년 만에 자리에서 스스로 내려와 태종에게 넘겨주었던 정종은 (아마도) 태종의 종통에 관한 의도, 혹은 음모 때문에 묘호를 받지 못하다 300년이나 지난 후에야 숙종 때에 이르러 묘호를 받게 되었다.
한 가지 웃픈 일도 있다. 사실 제후국을 자처했던 조선(고려는 그러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가 없었다. 원 지배 이전에는)이 조종의 묘호를 쓰는 것은 예법에 어긋난 것이었다. 그것을 조선의 사대부들은 잘 인식하고 있었다 한다. 그럼에도 자존심 때문에 그렇게 쓰고 있었고, 중국에서도 그에 대해 문제 삼지 않고 있었다. 그렇지만 늘 그걸 마음 한쪽 구석에 찜찜함으로 남아 있었다. 그러다 임진왜란 때는 조선을 도우러 온 명나라의 장군이 개인적으로 문제 삼는 경우가 생긴 것이다. 조선의 조정에서는 명나라가 공식적으로 문제 제기를 하고, 황제가 추궁을 하면 어찌 할 것인지 무척 고심하였고, 예상 답변까지 작성하면서 대책 마련에 골몰했다. 그런데 정작 명나라 조정에서는 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고, 청나라는 아예 이에 대해서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묘호를 어떻게 쓸 것인가는 엄격히 말하자면 탁상공론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게 바로 선대에 대한 업적 평가를 바탕으로 한 것이란 점에서 전혀 필요없는 일은 아니었다 볼 수 있다. 국가의 자존심이란 측면에서도 어느 정도는 이해할 만하다. 물론 그게 너무 형식적인 측면에서 치우치게 되고, 또 역사를 왜곡하는 방편으로도 사용되었다는 점 역시 분명히 인식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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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에서 모세는 자신앞에 나타난 신에게 신의 이름을 물어본다. 신이 자신에게 명령한 바를 따르기 위해 히브리인들에게 가서 자신이 겪은일을 말하기 위해서는 신의 이름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신이 신이지 신의 이름이 중요하다는 말인가? 고대에는 이것이 아무 중요한 질문이었다.
신의 현신은 아니지만 전근대에 신과 이어지는 고리였던 왕은 이름이 없었다. 지존의 자리에 있기 때문에 왕의 이름을 부를 수 없었고 아니 왕이라는 호칭도 할 수 없었다. 정말 "이름에 무엇이 있다"고 생각했다. 왕을 부르는 대신 자신을 낮추는 말인 폐하, 전하를 호칭으로 사용하였다. (殿下) 전하란 말하는 사람이 계단아래에 있을 만큼 존귀한 분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존귀한 왕도 죽으면 냉엄한 판단을 받아야 했다. 바로 묘호라는 이름을 받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부르는 태조, 태종, 세종 이라는 왕의 이름은 왕의 행적을 평가해 사후에 내리는 성적표와 같은 이름이다. 공이 있으면 ~조祖,, 덕이 있으면 ~종宗 을 붙이고 왕의 행적을 평가해 앞 글자를 결정하였다.
대부분 자식이 선왕의 묘호를 결정하는데 중요하게 개입하기 때문에 왕과 신하들이 갈등을 빚고 신하들끼리 당파에 따라 논쟁을 벌이기도 한다. 엄격한 역사평가는 이루어지지 못하고 대부분 좋게 좋게 결정된다. * 묘호 결정이라는 분야를 작은 책으로 만든 이 책은 묘호를 통해 조선의 역사평가를 엿 볼 수 있다. 문고판으로 작게 만드느라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지 못하는 것 같다. 확장판이 나오면 좋겠다. ** 보통사람-문민정부-국민의 정부-참여정부 처럼 정권이 자체적으로 정권의 이름을 붙이기도 하지만 현대에서도 정권을 평가해서 왕의 이름을 붙이면 재미있겠다. 물론 워낙 이념적 갈등이 심해 결정자체가 불가능하겠지만 말이다. 費宗은 누구일까요? ㅋ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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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부터 조선, 대한제국에 이르기까지 왕의 묘호가 만들어지는 배경과 역사적 의미를 담은 책이다. 예전에는 초등 정도 어린이들이 조선시대 왕의 묘호 앞 글자만 따서 노랫가락처럼 외우기도 했었다. 물론 그때는 일정한 가락을 붙여 '태정태세문단세...'라고 하던 그 뜻을 알고 외운 것이 아니다. 오늘날에도 태조, 세종, 연산군, 선조, 광해군, 숙종, 영종, 정조와 같은 왕의 묘호는 세간에 자주 오르내리는 편이다. 이런 묘호는 자연인으로서 왕의 이름이 아니고, 사후에 붙여진 시호이다. 옛사람은 이름을 함부로 다루지 않았다. 묘호는 '정명'의 과정이고, 그 왕의 통치에 대한 후대의 역사적 평가이기도 하다. 그래서 묘호는 사후 수백 년이 흐른 다음 붙여지거나 바뀌기도 한다. <왕의 이름, 묘호>는 무게가 가벼운 책이지만 묵직한 '묘호'의 무게를 전하는 책이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왕의 묘호가 어떻게 변천되어 왔는지, 묘호를 정하는 원칙은 어떠했는지 등을 흥미롭게 살펴본다. 묘호의 의미와 그 역사를 통해 오늘날에도 새겨 볼 만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필자의 의견에 찬성할 수 없는 곳도 있다. 대한제국기 묘호(고종, 순종)를 설명하면서, "...묘호만으로 보면 고종과 순종의 지위는 그전의 황제로서의 지위와 다름 없다. 적어도 선왕의 유제인 묘호와 시호의 예법을 수호하면서 그 지위를 유지해 나감으로써 적통의 고종과 순종은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황제로서의 지위를 잃지 않았다. 그러나 이왕 은이 격하된 이왕의 지위를 계승하고 복권될 기회를 상실하여 결국 대한제국 황실의 정통성은 단절..." 되고 말았다고 서술한 대목이 있다. 형식 논리에 매몰되고, 묘호를 망국과 지나치게 결부시킨 것이 아닌가 한다. 묘호는 전근대 왕조사회의 산물이다. 한국의 전근대 왕조사회는 실질적으로는 일제 식민지 강점으로 명운을 다했다. 그러나 1894년 농민전쟁으로 왕조가 지속되어야 할 근거나 명분은 사라졌다. 1919년 3.1운동을 통해 한국인은 일제의 폭압에 항거했고, 새로운 정체로서 공화정을 열망했다. 3.1운동의 결과물인 임시정부 수립은 그러한 갈망의 실현이었다. 묘호가 끊어졌고 이은이 왕으로 격하되었으며, 그 다음에도 황제로 복권이 안 돼서 대한제국 황실의 정통성이 단절되었다는 인식은 수용할 수 없다. 이렇게 수긍하기 어려운 대목에서야말로, '정명'이 주는 역사적 교훈을 더 깊게 새겨봐야 하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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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에 가서 호명을 하면 제이름을 듣고 나오는 왕이 있을까? 전에 누군가 재미삼아 물었던 기억이 난다. 아무도 나오지 않는다! 가 정답이다. 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데도 나오지 않는 것일까? 그것은 간단하다. 죽은 뒤 후세들이 만들어 바친 이름이기 때문이다. 이미 죽은 왕들은 자신의 이름이 어떻게 불리우는지 알 길이 없다. 그런데 우리는 왜 죽은 왕들에게까지 이름을 만들어주었던 것일까? 그것 또한 간단하다. 그 이름으로 왕의 업적을 판가름했다. 한마디로 역사적인 평가가 담겨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말하다보니 결코 단순하거나 간단한 일이 아닌 듯 하다. 정말 복잡하다. 우선적으로 어려운 말부터 이해하고 넘어가야 한다. 묘호, 시호, 종호... 도대체가 무슨 말인지... 이렇게 낯설고 생소하게 느껴지는 것은 우리가 흔하게 쓰지 않는 말이기도 하거니와 지금의 세대와는 거리가 먼 말인 까닭이다. 사전을 찾아보면 이렇다. 묘호는 임금이 죽은 뒤 종묘에 배향할 때 신위에 쓰는 임금의 호이고, 시호는 제왕이나 재상들이 죽은 뒤에 그들의 공덕을 기려 붙인 이름이다. 존호는 보통 상대를 높여 부르는 칭호지만 임금이나 왕의 덕을 기린다는 의미도 있다. 그런데 여기에 휘호라는 말까지 찾아보니 점점 더 어려워진다. 죽은 뒤에 시호와 함께 내리던 존호를 이르는 말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시호와 묘호와 존호따위의 의미를 한꺼번에 쓰기도 했다는 말이 된다. 태조의 신주를 보면, '유명증시강헌태조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이라고 쓰여있는데 '유명증시강헌'은 명나라에서 내린 시호인 강헌을 말하며, '태조'가 묘호이다. '지인계운'은 존호이며, '성문신무'와 '대왕'은 시호이다 (-53쪽) 이보다 더 머리아프게 하는 것도 있다. 고종시호의 경우 고종이라는 묘호 2자와 8자의 시호, 53자의 존호로 무려 63자로 구성되었다!
조선시대에 재위했던 스물일곱 명의 국왕은 저마다 고유의 왕명을 지녔다. 요즘 사람들은 태조니 세종이니 하고 부르는 이름들이 왕명인 줄 안다. 물론 왕명으로 이해해도 틀린 것은 아니지만, 본래는 묘호廟號 혹은 종호宗號 라고 해야 맞다. 묘호는 국왕이 승하한 뒤에 올리는 이름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당시의 신하들도 태묘太廟니 중묘中廟니 하여 사당 이름을 태조와 중종을 가리키는 호칭으로 사용했다. 따라서 묘호는 사당 이름인 한편, 시호 혹은 왕명이기도 하다. (중략) ... 묘호는 두 글자로 만들어졌다. 앞의 한 글자는 시자諡字로서, 시법諡法(시諡로 사용할수 있도록 정해진 글자)에 따라 정하는 것이 원칙이다. 뒤의 한 글자는 종계宗系(종가와 계통)와 조공종덕祖功宗德의 예제에 근거하여 붙이는 祖나 宗 중 하나를 쓴다 (-머리말중에서)
1. 삼국시대 국왕의 묘호 책을 펼치면 목차를 통해 이 책에서 다루고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볼 수가 있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禮" 를 상징하게 되었다는 묘호.. 그저 무의미하게 외워대던 왕조의 순서에서 조와 공으로 나뉜다는 것에 대해 헷갈리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 책을 통해 다시한번 알게 된다. 공이 있는 이는 조祖로 하고 덕이 있는 이는 종宗으로 한다는 조공종덕을 기억하면 될 것 같다. 그런데 그것이 끝까지 가지는 못했다. 경우에 따라서 바뀌기도 했고 또한 무시되기도 했던 듯 하다. 조종공덕을 통해 예치국가를 지향했다거나 국가 운영의 원리로 삼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하는데 그것은 좀 씁쓸하다. 시호를 정하는 일이 하나의 의례로 자리잡게 되었다는 말을 들으며 안타깝게도 명분에 죽고 명분에 살았던 선조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그것이 그리 쉽지않은 일이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이름을 남기고 싶어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늘의 뜻을 받든다는 형식을 취하며 왕에게 부여되었다는 묘호... 그 이름으로 인해서 자신의 업적이나 정통성을 인정받았다는 것은 하늘의 뜻과는 어쩐지 거리가 먼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평가는 하늘이 하는 것이 아닌 까닭이다. 수많은 당파싸움으로 인해 왕이 바뀌기도 했던 시절이었다. 왕이 되고 싶지 않았어도 왕이 되어야 했던 사람도 있었다. 그래놓고는 하늘이 뜻이다? 바로 그런 것이 조선이라는 나라가 아니었을까? 묘호를 일러 상당히 아름다운 의미를 두었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지만 말로써 말을 죽이고 살렸던 시절이었다. 가장 뚜렷하게 보여지는 정종을 보자. 이방원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던 정종은 죽은 뒤에 정통성마져도 인정받지 못했으며 왕으로써의 공적 또한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묘호없이 그저 사당에 모셔졌을 뿐이다. 300년이 지난 숙종대에 와서야 정종이라는 묘호를 받았다는 것만 보아도 하늘의 뜻과는 거리가 멀다는 말이다. 300년이라는 기간이 지나는 동안 몇 번 시도되어진 적은 있으나 그 썩어빠진 당쟁의 뿌리에 걸려 넘어지곤 했다는 정종의 묘호.. 죽었으니 알 길은 없겠으나 만약 영혼이라는 것이 있다면 바라보는 그가 편안했을까? 말이야 바른 말이지 적장자로써 제대로 왕위에 오른 이가 몇이나 된단 말인가? 또한 적장자였으나 왕위를 잇지 못한 세자도 많았다. 27명의 왕 중에서 제대로 절차를 밟아 즉위한 왕은 문종, 단종, 연산군, 인종, 현종, 숙종, 순종으로 7명뿐이었다. 그것뿐인가? 그 7명마져도 해석에 따라 6명이나 8명이 되기도 한다. 그 나머지는 다른 형태로 즉위했는데, 그 형태도 각양각색이었다. 그런 사람들이 자신의 왕위에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조공종덕이라는 원리를 제대로 따랐을리가 만무하다. 앞서 말했던 태조 이방원 역시 그 점에 대해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이다!
세世, 중中, 인仁 등 시자 한 글자가 갖는 역사의 함의는 대단히 크다. 한 글자로 국왕의 평생의 업적을 재단하여 평가했기 때문이다. 또하나 주목해야 할 점은 왕권의 정통성 문제이다. 성종과 인조는 종법에 어긋난다고 하여 왕권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왕이 아닌 생부를 왕으로 추숭했다. 그들이 덕종과 원종이다. 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결행했다. 종법상의 흠결을 치유하고자 하였다. 묘호의 이러한 성격 때문에 국왕들은 남겨질 이름을 두려워했다. 국가와 왕권의 기초 수립에 ㅈ러대적인 요소로 작용했던 묘효는 그야말로 터잡이 구실을 했다. 한갖 이름인 듯이 보이나 묘호는 국가와 사회의 운영원리를 배경으로 거대담론을 형성했다. 그래서 정통의 묘호를 갖는 일에 군신의 노력은 신중했다. 묘호는 당시의 유교윤리와 국가이념, 통치철학, 역사 등 인간의 사고를 통섭하는 가치판단으로 빚어낸 창조물인 것이다 (-156쪽)
태조, 세종, 세조, 영조, 정조... 우리가 배우고 익혔던 이름속에는 정말 많은 뜻이 담겨 있었다. 왕의 공덕을 평가하는 기준이기도 했고, 정통성을 부여하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런데 저자는 그 두 글자로 된 묘호속에서 더 많은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모든 역사의 흔적이 담겨있다고도 한다. 후대가 기억하는 이름이 역사라는 말에는 공감한다. 그런데 그 역사가 공정했다고는 볼 수 없다. 저자의 말처럼 그렇게 아름답기만 했던 것도 아닌듯 하다. 생각이 삐뚤어졌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내게는 그렇게 느껴졌다는 말이다. 바로 그런 의미로 인해 오백년의 역사를 간직할 수 있었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그 이름속에서 보여지는 폐단과 어긋남 또한 밝히고 넘어가야 하는 것이 진정한 역사평가가 아닐까 싶어서 하는 말이다. 이 조그마한 책이 아주 많은 시간을 요구했다. 어려웠다. 일단은 모든 사람들이 가장 어려워한다는 한국의 존대말이 생소했다. 서거라거나 승하라는 말을 넘어 훙서라는 말을 써야했다는 것만 보더라도 옛의미를 살리고자 했음을 알 수 있겠으나 내게는 어려웠다는 것이 솔직한 말이다. 왕이나 왕족, 귀족 등의 죽음을 높여 이르는 말이라고는 나와 있으나 대개는 왕의 죽음을 일컫는 말이었을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말이 너무 어렵다보니 그 말로 유추해 볼 수 있는 사실 또한 쉽게 다가오지 않았다. 이 책보다 좀 더 쉽게 다가설 수 있는 책을 한번 더 찾아볼 요량이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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