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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 전원책이 처음 내 눈에 띈 건 텔레비전 토론프로그램을 통해서였다. 군가산점제를 주제로 한 토론에서 상대 여성패널을 높은 식견과 탄탄한 논리로 꾸짖는 모습은 참으로 볼만했다. 당시 그는 대한민국 젊은 남성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았다. 이후 그는 정치·사회를 주제로 한 텔레비전 토론에 자주 등장하며 건강한 보수의 입장을 대변했다. 말빨있고 순발력 넘치는 진보논객들이 활기를 띨 때 전원책의 존재는 보수의 입장에서는 오랜 갈증을 푸는 한 모금의 물과 같은 것이었다. 진중권과 유시민을 상대할 수 있는 보수논객이 있다는 것은 즐겁고 흥미로운 일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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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라는 이념은 근대정신의 주요사상이다. 자유는 낭만철학자 헤겔의 자유론에서 절정을 이룬다. 왜 그들은 자유를 부르짖었나. 그 당시 자유가 없없기 때문이다. 장사할 자유가 없었고 정치적 자유가 없었고, 자유를 일부 소수가 독점했기에 자유가 절실했다. 그래서 자유를 외쳤고 자유는 민주주의의 대표 이념이 되었다. 그러나 헤겔의 착각은 자유가 극대화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리라는 정말 낭만적인 낙관론 진보론이 있었다는 것이다. 자유의 양이 많을수록 좋은 것이라는 착각이 자유주의의 치명적 약점으로 드러난다.
자유를 절대화하면 헤겔의 목적은 달성된다. 그러나 이런 목적은 천당에서나, 헤겔은 신학자다, 가능하지 지구상에서 실존 속에는 불가능하다. 어떻게 자유가 무한대로 가능하겠는가? 가능하지도 않고 또 자유가 많을수로 좋은 사회라는 생각도 잘못이다. 법으로 자유를 제한할 때만 자유는 보장된다는 역설을 받아들여야 한다. 내 자유라고 아무나 가서 상대를 폭행할 수 있는가? 무서워서 거리를 어떻게 다니겠는가?
자유는 법으로 그 자유의 한계를 철처하게 한정지을 때만이 자유다. 무한한 자유는 자유롭지 못한 상태를 야기한다. 그래서 헤겔도 법철학을 철저하게 했다. 한극의 기업가들은 규제를 풀기만하면, 자유가 확대되기만 하면 좋은 줄 안다. 규제는 무조건 나쁜 것인가? 신자유주의는 규제를 풀라고 한다.
규제를 풀어서 이득을 보는 자들은 자유가 좋다. 그러나 손해보는 자들에게 자유는 악이다. 자유는 어느 선에서 한계를 지어야 가장 이상적일까? 그 결정은 그 사회 구성원의 합의에 의해서 정할 문제다. 자유의 양을 늘리기만 하면 혹은 줄이기만 하면 좋다는 절대주의는 답이 아니다. 자유는 유한한 자유만이 자유다. 3차원 안에서는.
지금 20년 동안 흥행했던 신자유주의는 세계에서 심각한 문제를 야기했다. 각국이 모두 빈부격차에 시달리고 있다. 미국이 1위고 한국이 2위. 일본 같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득세한 나라가 모두 빈부격차가 심하다. 이는 사회공동체를 망가트리고 있다. 자유의 적 이라는 표현은 자유가 절대가치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자유를 부정 제한하는 것은 다 적이다. 이런 개소리를 신자유주의가 실패했다는 판단이 나오는 지금도 하고 있다니..... 참고로 썰전 같은 프로 보지 말기를. 뉴라이트를 조장하는 저자의 소리는 궤변으로 이루어졌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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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100분토론과 최근의 썰전으로 유명한 전원책변호사의 좌파비판으로 좌파의 근원부터 시작해서 마르크스 레닌 스탈린 모택동까지 이어가며 낱낱이 해부하고 비판한다. 사유재산을 폐지하고 빈익빈부익부가없는 유토피아를 만들자고 주장한 그들 대부분이 그이념에 반하는 재산에 대한 과한 욕심이 있었으며 평등을 주장한 그들이 실제 그들주변의 노동자에게 무지막지한 차별을 했다는 사실을 알린다. 그들의 거짓선동으로 이념만 믿고 달려든 순진한 군중들은 그들에게 이용당할 뿐이다 여기서 재밌는점은 공산주의의 평등을 불평등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여지없이 비판하는 저자가 민주주의에 대해 언급한것인데 민주주의의 부정부패는 권력자의 미성숙으로인해 생기고 이것이 민주주의의 단점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성숙한 인간은 있긴 있는것일까 있다해도 이 성숙한 인간이 비도덕적인 정치판에서 살아남아 권력을 쟁취할수 있는것일까? 이런점들을 이념의 보완으로 고쳐나갈수 있을까? 공산주의는 실패한 이념으로 증명되었고 자유민주주의는 아직 진행형이다. 그래도 이런 희생으로 우리의 미래는 점점 더 희망적일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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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책 변호사가 쓴 '자유의 적들'에서 '적들'은 자신과 반대편에 선 자들일 것이다. 저자는 보수주의는자는 사회에서의 자유를 옹호하고, 진보주의자는 평등을 추구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보수주의자임을 자처하는 저자에게 자유의 적들이란 사회의 평등을 추구하는 자들과 그들의 집단인 것이다.
저자는 경제와 관련해 효율성(efficiency) 과 평등(equality) 의 대립을 강조한다. 이런 이유로 보수주의자 혹은 자유주의자는 평등을 추구하는 사회는 비효율적인 경제체제가 될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하며 자유주의 경제체제를 옹호한다. 하지만, 우리가 깊이 숙고해봐야 할 점은 보다 "넓은 평등을 추구하는 경제체제가 과연 보수주의자의 주장대로 효율적이지 못한가" 하는 것이다. 사회에서 우리는 한 개인에게 어느 정도의 자유까지 보장하며 얼마만큼의 평등을 추구 할 것인가
많은 사람들이 자유방임주의에 대해서 오해하는 점은 개인의 자유를 헌법과 분리시키고 정부의 역할을 시장의 방관자로 본다는 점에 있다. 자유방임주의 경제체제의 시초라고 볼 수 있는 애덤 스미스는 오히려 사회의 법을 강조하고 정부를 시장의 심판으로 세움으로서 시장은 더욱 자유롭고 효율적으로 성장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우리가 꼭 집고 넘어가야 할 점은 한 사회에서 헌법의 테두리 안에 만인이 평등하다는 점이다. 즉 헌법을 준수함으로 평등과 자유를 동시에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흔히 우리는 "사람 낳고 법 낳았지, 법 낳고 사람 낳았냐" 라고 주장 할 때가 있다. 언뜻 들으면 한 개인이 숭고하게 자유를 옹호하는 발언같지만, 모순일 수 밖에 없는 말이다. 태어날 때부터 사회에 속해 사회에서 타자와 함께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우리 인간은 사회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 법(나는 헌법이라고 주장하고 싶다)에 예속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과 법의 인과관계를 물어 한 개인의 주권을 주장한다는 듯한 발언은 무지이거나 마치 자기자신을 인권주의자로 포장하려는 가식일 수 밖에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