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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뜨면 숲은 분주해집니다. 일출에서 일몰까지 숲의 낮은 온갖 생명들의 노동과 창조로 가득합니다.
생명이 시작됩니다. 한동안 도토리가 새싹을 틔우는 모습을 유심히 살펴본 적이 있습니다. 그가 어떻게 뿌리를 내리고 그 가는 줄기를 뽑아 올려 저토록 넓은 잎을 내며 수백 년의 첫 삶을 시작하는지 계절을 바꿔가며 관찰해보았습니다. 땅에 떨어진 도토리는 단단한 껍질을 깨고 붉은빛이 감도는 뿌리를 뻗어 땅으로 향했습니다. 그 연약한 뿌리의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도토리는 땅을 뚫고 자신의 뿌리를 박는데 어렵지 않게 성공했습니다. [중략] 나는 이 과정을 통해 도토리라는 한 알의 씨앗 속에 참나무의 수백 년의 삶이 이미 담겨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모든 생명은 하나의 주체로서 살 권리와 능력을 이미 그 씨앗 안에 부여 받고 태어납니다. 나무는 온전히 서 있는 채로, 태어난 자리의 환경 및 주변과의 관계를 극복해야 하는 생명체입니다. 이 버드나무는 자기를 타고 오르는 칡넝쿨보다 더 높이 자기 잎을 키워내야 합니다. 그러지 못하면 버드나무는 자신의 하늘을 열 수 없습니다. 자신이 하늘을 열지 못하면 그는 안타깝게도 머지않아 죽음을 맞을 것입니다. 인간에게도 그것은 숙명입니다. 힘겨운 자리에 태어난 억울함이 있다 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어떤 생명체도 태어나는 시간과 장소에 대해 선택할 권리를 부여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무엇 보다 그것은 자기 씨앗에 담겨 있는 본원을 확인하고 그 힘을 믿는 일이며, 자신이 살아가야 할 ‘시대와 공간’을 아는 일입니다. 나를 아는 것, 내가 태어난 때와 그 여건을 아는 것, 그리고 생명체로서 내게 주어진 놀라운 힘을 믿고 끝까지 힘차게 살아내는 것! 이것이 생명이 주어진 자들이 할 일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들 모두가 주어진 자리를 받아들이는 것으로부터 삶을 시작한다는 점입니다. 나무는 숲을 지배하려는 욕심을 품지 않습니다. 나무와 들풀들은 이 빛의 길이와 주기를 알아차리고 휴면, 생장, 개화의 때를 조절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햇빛을 잃으면 나무는 살아갈 힘을 잃게 됩니다. 겪어 보니 꿈을 품고 산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래서 모두들 자기를 닮은 꿈 하나를 깊이 간직하고 살아가기를 권합니다. 이왕이면 우리의 꿈이 빛을 탐하는 식물을 닮았으면 좋겠습니다. 나무는 숲을 지배하려는 욕심을 품지 않습니다. 우리가 갖는 꿈도 그렇게 나무를 닮아서, 들풀을 닮아서 과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로지 자기다움에서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생명 안에는 성장을 위해 키워 왔으나,시간이 흐르면 더 성장하기 위해 버려야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모든 나무가 낙엽을 만들고, 가지를 떨어드리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다운 삶을 살고자 하는 이는 모색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가시는 자신을 지켜내기 위한 강력한 방어수단입니다. 두릅나무를 보며 알게 되었습니다. 어린 나무일수록 가시가 도드라집니다. 새순을 좋아하는 노루나 고라니 같은 동물들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스스로 지킬 힘이 생긴 나무들만이 가시를 버렸습니다. 성장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지킬 힘이 없을 때에는 어쩌면 가시 돋은 나무처럼 자신을 지킬 가시 하나를 키울 수도 있습니다.세상이 더 아름다워져야 한다는 믿음으로 내밀었던 새싹들도 대부분 잃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좌절이 깊어 질수록 내 몸에 가시를 돋우고 사는 두릅나무의 모양이 되었습니다. 사람이 가시를 달고 있다는 것은 세상을 향해 응축된 에너지를 쏟아낸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으로 자기의 분노를 응고시켜 세상과 맞서는 것입니다. 하지만 스스로 그 가시를 떨어뜨릴 줄도 알아야 하고 두려워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만나기 위해서는 잃기도 하고 버리기도 해야 합니다. 누군가 담담하게 지니고 있는 상처야말로 그다운 모습이며 그다운 향기입니다. 풀과 나무도 살아가는 지혜가 있습니다. 덤불은 수초에서 10분 이내 사라지는 빛을 받아들이고 생산에 활용하기 위해 잎의 구멍을 20분간이나 열어놓고 빛을 기다릴 줄도 압니다. 경계를 사는 작은 풀들에게는 이러한 작은 떨기나무의 그늘조차 방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녀석들은 아주 이른 봄에 서둘러 피고 서둘러 질 줄 아는 지혜를 키워왔습니다. 초목들의 자식사랑도 그러합니다. 자식을 더 멀리 떠나 보내기 위해 부단히 애를 씁니다. 단풍나무는 열매에 프로펠러 모양의 날개를 달아 더 멀리 보내려 하고, 소나무는 그 씨앗이 발아래 떨어질 위험을 피하려 합니다. 그래서 비가 오면 솔방울을 오므립니다. 새로운 하루를 만나야 합니다. 자연에 오기 전에 나 또한 비슷한 도시인이었습니다. 내게도 도시는 휴식을 모르게 하는 공간입니다. 오늘날의 도시에서 우리의 삶은 쉼표를 만들기가 참 어렵습니다. 비가 오는 날, 소나무의 잎을 자세히 보면 그들도 잎을 모으고 휴식에 듭니다. 어쩌면 나무들이 오래 사는 이유가 그들의 휴식에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는 비록 자연의 흐름을 따르기 어려운 도시에 산다 할지라도 삶을 점검하고 돌이켜 날마다 새로운 하루를 세워야 합니다. 그 동안 앞만을 보고 열심히 달려왔습니다. 이번 여름휴가는 자연과 숲에서 충분한 휴식과 재충전으로 더욱 행복해지는 여름을 기대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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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과 나무 그리고 숲 왜 이 하필이면 시점에 이렇게 마음을 사로잡을까? = 안면이 있는 분이 책을 내었다. 책을 읽다가 보니 "생강나무"를 생각나무라고 오타를 친 부분이 눈에 뜨인다. = 오늘은 그가 전하는 숲의 소식을 기다리는 날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열어보니 그의 글이 올라와 있다. 그분이 책에서 말했던 것처럼 나도 아마도 가시가 있는 어떤 나무를 닮았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세월이 흘러 나 자신을 스스로 보호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시를 떨어뜨리지 못함은 미망일 것이다. 나 또한 작가처럼 예전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주었던 상처들을 나는 기억한다... 어쨌든 책을 읽으면서 수많은 좋은 것들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에 거슬렸던 것을 적다가 보니 이것은 아니다 싶었다. 생각해 보니 예쁜 초목들의 사진을 흑백으로 실어서 그 아름다움을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고 생각한 것이 나의 미숙함 때문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답글의 내용을 바꾸었다. 생각해 보니 탈색된 그 모습에서도 아름다움을 볼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배려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이다. 또한 생각나무의 오타도 가을 소풍때 그 숲속에서 생강나무라는 것을 맞추었었는데 생강나무를 보면서 생각을 많이 하라는 우연이 만들어준 계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상황은 바뀐 것은 없지만 해석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법이다... = 살아온 세월을 뒤집어 보면 꽃이 지금 내 마음속에 들어 올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음을 이제야 깨닫게 된다. 어머니는 꽃을 참 좋아하셨다. 장독대 앞에 항상 화단을 만들어서 여러가지 꽃을 심고 키우셨을 뿐 아니라 옛날 살던 집에 문에 창호지를 바를때면 언제나 지난 가을에 말린 국화나 코스모스들을 창호지 안에 넣으시는 작은 풍류를 누리셨던 것으로 생각난다. 집이 어려웠지만 그렇다고 작은 아름다움을 포기하지 않는 그 모습을 봐 왔던 것이다. 세월이 지나 도시로 이사오고 어머니가 신발공장 고무공장을 다니시면서 직접꽃을 가꿀수 없으셨다. 꽃을 좋아하시는 어머님이 선택하신 것이 조화를 사다놓는 것이었다. 그 때 당시만 해도 조화는 정말 조악했다. 나는 마치 무당집에 꽃힌 꽃과 같은 느낌이 들어서 그것을 무척 싫어해서 자꾸 버리라고 했는데 아마도 당신께서는 그런 꽃이라도 보았기에 그 어려운 시절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이제 마흔이 넘어서야 든다. 그런 환경에서 자라왔으니 나무와 꽃이 마음으로 들어오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보고 자란 것이 그런 것이니 말이다. 봄이다.. 이제까지는 봄이 되어도 어떤 꽃이 피는지 그냥 계절이 가는지 조차 못느끼고 살았었지만 이제 그런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니 세상이 참 아름답다는 느낌이 든다. 피어나는 꽃 피어나는 새싹..피어나는 새싹의 연두색 또한 참 이쁘다. 안면이 있는 분의 책을 읽고 나서 그 흑백사진을 보고나서 이런 소망이 늘어났다. 색으로 드러난 아름다움 뿐만 아니라 그 색으로 가리워진 존재 자체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나가 되기를 말이다... 이번 봄은 "봄"과 "들음"에 대한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그래서 참 좋다.. = 마지막으로 오늘도 숲소식을 전해주시고 좋은 생각거리를 제공해주신 아름다운 놈 김용규님께 감사를 드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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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연히 편안하고 좋다고만 생각했던 '숲'을 다시 바라보고 생각하게 된, 이유. 질경이는 여러 해를 사는 다년생 풀입니다.
주로 길의 가장 자리나 빈터 등 다른 풀들이 살기 어려운 자리에서 자랍니다. 길 위의 수레바퀴 위에서 자주 발견된다 하여 한방에서는 잎을 차전, 씨앗을 처전자라 부르며 약용합니다. 녀석의 살아가는 방식을 가만히 들여다 볼 때마다 나는 '혁명'이라는 단어를 떠올립니다. 누간가는 혁명을 얼음 위에 불을 피우는 일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불가능에 가까운 상황을 전복해야만 겨우 가능해지는, 실로 어려운 일이 혁명일지도 모릅니다. 질경이는 그렇게 어려움이 많은 혁명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개척한 들풀입니다. 녀석은 주로 옥토보다는 비전박토의 척박한 딸을 골라 자랍니다. 왜 옥토가 아닌 박토의 땅을 골라서 자랄까요? 그것은 누구도 침범하기 힘든 자신만의 터전을 확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숲에게 길을 묻다》(p.124) -
숲에서 건지는 희망과 소망, 그리고 나 의심할 여지없이, 봄이 내렸다. 더할 나위 없이, 당신도 함께 내린다면야 더 좋겠지만, 그건 잠시 묻어두자. 지금은 봄의 지저귐에 귀 기울일 때다. 물론 좀 과잉이다 싶게, 후끈 달아오른 감도 없진 않지만, 그래도 어쩌겠는가. 지금은, 봄이다. 설마 당신, 컴퓨터 앞에 코 박고, ‘오로지 일!’만을 사수한답시고 디지털 사막에서 허우적대는 건 아니겠지? “바이 바이 바이 정든 도시여 굿바이/ 너를 두고 나 돌아간다…♩ 논 갈고 밭가는 나의 진짜 집으로 나 돌아간다/ 도시여 안녕♪ 촛불하나 밝히는 나의 진짜 집으로 나 돌아간다/ 도시여 안녕~♬”(조영남 ‘도시여 안녕’) 지난 6일 경희궁의 낮. 녹음은 짙음을 더해가고 있었고, 햇살은 따사롭다 못해 따가웠다. 도시의 비슷비슷한 얼굴들 틈에서 산속 사람의 포스를 지닌 한사람. 모처럼 충북 괴산의 오두막에서 서울 나들이에 나선 그를 만났다. 영락없는 산사람이었다. 길게 늘어뜨린 머리는, 일종의 표식이자 징표였다. ‘더 이상 이 도시가, 사회가 요구하는 대로 살지 않겠어’라며 숲과 합궁하기로 결정하면서 길렀던 머리. 단정하게 매만졌을 CEO의 헤어스타일은 과거일 뿐. 그는 이미 그렇게 숲의 일부가 돼 있는 듯 했다. 그리하여, 아래는 숲생태전문가이자 농부, 김용규와 나눈 숲의 대화다. 9가지 열쇳말로 본 그의 이야기. 어쩌면 당신과 나, 우리의 마음 어느 한 구석에 둥지를 튼 어떤 희망과 소망, 용기의 속삭임. 나를 만나는, ‘숲’ 우선, 숲으로 향하기로 마음먹은 출사표를 보자. “나는 이제 나답게 살 것이다. 나답게 산다는 것은 어떤 삶인가? 그것은 돈이나 출세 때문에 비굴해짐이 없는, 자존과 자립으로 가득한 삶. 나의 편리를 도모하고자 타인의 이익을 빼앗지 않는, 죄짓지 않는 삶. 숨 막히는 도심에 갇힌, 자연에 대한 그리움을 마음 놓고 채울 수 있는 고삐 풀린 삶. 모색하고 싶으면 싶은 대로, 그만두고 싶으면 싶은 대로, 그렇게 가슴이 시키는 대로 창조의 자유를 벅차게 누리는 삶. 그리하여, 마침내 마음이 두어 뼘 더 자유롭고 평화로워지는 삶. 이 모든 것으로 조금 더 아름다운 세상을 이루는데 기여할 수 있는 삶. 내가 나답게 산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삶이다. 내가 내 삶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삶이다.”(p.174) 나이 마흔 살. ‘도시여, 안녕’을 고하기로 마침내 마음먹었다. 2년을 준비했다. 혼자서 숲을 공부했고 1년여는 집중적으로 숲생태전문가 양성과정과 필드강사 등을 거쳤다. 살 곳을 찾기 위해 1년여 강원도를 헤집으며 돌아다녔다. 한군데가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자금 마련 등으로 아쉽게 사흘 차이로 놓쳤다. 그리고 결정된 곳이 충북 괴산. 우리 기술로 지은 수력발전소가 있는 괴산댐 주변이었다. 숲에 들어가기로 결정하기 전, 6개월 동안 산 구석구석을 누볐다. 새벽, 한낮, 저녁, 비 등등 각기 다른 조건과 환경의 모습에서. 산에게 묻고 또 물었다. “나를 받아주시겠습니까?” 답이 당장에 있을 턱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가죽나무가 말을 건넸다. “나를 베지 마라.” 귀가 번쩍 뜨였다. 두 번째로 숲과 교감한 경험. 그러니까, 숲의 조건부 승낙이었다. ‘나를 받아주겠다는 거구나. 베겠다는 내 마음을 질책하는 것이구나.’ 일단 저지르고 보자, 더 필요하면 배워보자, 의 마음이었다. 아 참, 첫 번째 교감은 국립광릉수목원에서였다. 전나무길이었는데, 누워서 20여분을 있으면서 무아지경을 경험했다. 온 세상은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나도 없고, 세상도 없는 첫 경험. 지금도 그런 경험은 어려울 정도로 놀랍고 신비로운 것이었다. “숲에 기대어 사는 삶을 시작하면서부터 숲은 나에게 스승이 되어 주었습니다. 그의 가르침을 얻기 위해 내게 필요했던 것은 다만 더 나은 삶을 위한 기술과 기교를 내려놓는 것이었습니다.”(p.39) 직장과 도시 ‘탈출’ 도시에 사는 모험기업의 CEO. 힘겹고 스트레스도 많았다. 오십견까지 올 정도였다. 학교 졸업 후 유학을 생각하고 유학비를 벌기 위해 들어간 것이 회사였는데, 어떡하다보니 모험기업의 CEO까지 오른 터였다. 그러면서 꿈도 잊고 회사에 짓눌려 있었다. 더구나 기러기 아빠. 유일하게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길은 주말마다 가는 산이었다. MTB를 타고 오르내렸다. 힘들어서 찾기 시작한 그곳에서 생명력을 느끼고 문제의식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 나무는 왜 이렇게 휘었을까’ ‘이 나무는 어떻게 바위틈에서 자라는 걸까’ 신기했다. 그렇게 숲의 생명들이 주변과 관계를 맺고 자기를 실현하는 모습에 점점 빠져들었다. 식물이름과 같은 분류학보다 생명 그 자체가 주는 신비와 생태에 매혹됐다. 그러면서 마음의 소리를 듣고 느꼈다. 산에 있으면 행복하고, 좋았다. 숲의 생명도 보게 됐고 산의 몸짓과 바람결 등이 뭔가를 말하고 있음을 감지했다. ‘그래 나 아닌 옷을 입고 살고 있었구나. 가야겠다, 도시를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꿈이 절로 생겼다. 여느 도시의 우리들처럼 그에게도 도시는 이랬다. “도시는 도무지 휴식을 모르게 하는 공간이었습니다. 빈한하면 빈한한 대로 고달프고, 풍요로우면 풍요로운 대로 고달프기 쉬운 곳이 그곳이었습니다. 오늘날 도시에서 우리의 삶은 쉼표를 만들기가 참 어렵습니다.”(p.180) 문제는, 아내를 설득해야 했다. 구본형 선생은 이런 말을 건넸다. “아내를 설득할 수 없는 꿈은 꿈이 아니다.” 설득과 회유. 협박 아닌 협박(?)까지 섞어가면서 그야말로 강온양면정책. ‘사오정’과 같은 직장 정년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따져보면 나름의 ‘카드’였다. “요즘은 45세에 떠나는 사람이 많아졌어. 나도 얼마 남지 않았잖아. 이건 무능이 아닌 사회구조야. 그러니까 지금 숲에 가면, 나중에 나랑 손잡고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숲도 보고 근시안적 행복이 아닌 롱런의 행복을 누릴 수 있어.” 쉽지 않았지만, 도시형 여성이었던 아내도 차츰 생각을 바꾸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내는 나름 위험을 분산할 수 있는 방안으로 양평을 제안했다. 집 지을 땅을 사서 조직에서 좇아내면 그때는 거기에서 살아보자고. 양평이 일종의 중간거점이 됐다. 땅을 놀리느니 농사를 짓자고 했다. 고추와 고구마 등 농사를 지었다. 희한하게도 아내가 일을 더 잘했다. 친구들도 일부 규합했으나, 그들은 이내 포기했다. 기름값이 많이 든다며. 그때 알았다. 기름 값은 농사와 치환되지 않는구나. 그러면서 확실히 알았다. ‘자기가 땀 흘린 만큼 생명과 애정이 싹트는구나. 이건 돈으로 치환되는 것이 아니구나.’ “학교나 학원, 혹은 유명하다는 전략 강좌 따위에서는 ‘나’답게 살 수 있는 어떠한 지혜도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그곳에는 삶을 조금 더 편하게 다룰 수 있는 도구만이 있을 뿐, 나답게 나를 꽃피우며 사는 데 필요한 가르침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예상치 못한 폭풍우나 가뭄, 혹은 혹한이 우리 삶을 가로지르며 끼어들 때 그동안 배웠던 도구와 기술과 지식은 무용했고, 더러 짐이기까지 했습니다.”(p.27) 즐거운 나의 오두막, ‘백오산방’ 그의 숲 하루를 잠깐 들여다보자. 그는 이렇게 묘사한다. “이곳 오두막에서 지내는 나의 하루는 철저히 해의 길이를 따릅니다. 해가 뜨면 하루의 삶이 열리고 해가 지면 하루의 삶이 닫힙니다. 그것은 마치 나무들의 하루와 같습니다. 낮은 노동과 창조의 시간이고 밤은 휴식의 시간입니다. 날이 밝으면 깨어나 숲과 들을 들러보고 끼니를 먹는 것으로 하루를 엽니다. 낮이면 곡식을 돌보거나 집을 고치거나 정리할 곳에 손길을 줍니다. 숲 속을 거닐며 수많은 생명들을 만나고 살피고 생각하고 기록하는 일도 중요한 일과입니다. 때로 땔감을 줍고 장작을 패는 일도 중요합니다. 이는, 궂은 날과 추운 날에 대한 대비이기도 하고 운동이기도 합니다. 약간의 시간을 떼어 읽고 쓰는 작업도 지속합니다.”(pp.177~179) 백오산방. 오두막 이름이다. 살 곳을 결정하기 전, 구본형 선생에게 요청했다. 가죽나무가 말을 걸어온 충북 괴산의 산에 함께 가서 봐달라고. 그런데 막상 가니, 표정이 좋지 않았다. 산세가 험한 까닭이었다. 바깥에서 보면 막혀있고 험한 산이었다. 내부에 들어가 바깥을 봤건만, 무엇보다 나무가 말을 걸어준 곳이건만, 그 내부의 속살을 엿보지 못한 사람에겐 당연한 반응이었다. 구 선생은 차라리 괴산댐 어귀의 다른 곳을 권하기도 했다. 며칠 뒤, 전화가 왔다. 하늘에 물어보자는 구 선생의 전화. 약속을 잡고 갔더니 역술인이신 초아 서대원 선생(『주역강의』의 저자)이 나와 계셨다. 술 한 잔 걸치고 지어준 호가 백오(白烏). 흰 까마귀. 왜 하필 까마귀, 그것도 흰 까마귀인가 했다. 고구려의 시조새가 까마귀, 즉 삼족오였고, 그 중에서 흰 까마귀는 상서로운 길조란다. 그리고 돌연변이. 상서롭긴 하나 무리에 섞이지 못하는 돌연변이. 자신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상서롭고 사람 시각으로 보면 외롭지만 원래 무엇이나 홀로 사는 건데, 자기 길을 뚜벅뚜벅 걸으며 하늘을 나는 자유로운 새”가 바로 백오 아니겠나. 그리고 초아 선생을 모시고 애초 눈여겨 본 그곳을 보여드렸다. 말을 건 나무를 짚으시고는 예견을 하셨다. 이곳에 둥지를 틀면 변화가 많을 것이라고. 백오산방은 그렇게 탄생했다. 마을에서도 1km 떨어져 있지만, 이 또한 좋지 아니한가. 고라니가 일주일에 한 번씩 보이는 즐거운 나의 집. 집을 찾아 돌아다닐 때도 좋았지만, 백오산방에서 잠들고 깨어나고 일하면서 정말 살아있구나를 느낀다. 과거에 대한 회상은 있으나 회한은 없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은 거의 없어 걱정으로 불변하는 밤도 없다. 나무 심는 일을 꾸준히 하면서 죽은 나뭇가지를 주워 구들방을 데우는데 그때마다 역시나 느낀다. ‘아 온전히 나는 살아있구나. 이 순간을 살아가는구나.’ 소망과 교감이 있는 ‘공동체’ 숲에서 새로운 희망과 빛을 찾고 싶은 사람들, 지혜를 찾고 싶은 사람들 6명이 모인 공동체가 있다. 이름 하여 ‘행복숲 공동체’. 말하자면 모험공동체다.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생각하고 있다. 도시 등에서 상처받은 마음을 심리적 툴을 통해 진단하고 어루만지는 ‘포레스트 테라피’가 이뤄지는 행복학교 설계부터 가족대상의 캠프, 창작공간 마련, 유기농 재배 등 다양하다. 무엇보다 도시와 농촌 간에 놓인 다리를 놓는 일도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곳은 그러니까, 교육, 창작, 도농교류 배양․확대 등이 이뤄지는 공동체다. 그리하여 진정으로 연대와 관계를 통해 공동체를 다시 복원하는 일. “생명은 오직 연대와 관계 속에서만 생명일 수 있습니다. 그것이 자연의 법칙입니다.”(p.108) 도시에서는 공생과 연대가 허물어지거나, 이를 지키기가 쉽지 않다. 자본의 방해공작이랄까. “사회적으로 중심에 있지 못한 사람들이 가난을 죄처럼 끌어안고 살아야 하는 구조가 강화되고 확산되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성장하는 것이며, 재생산하는 것이며, 그리고 우리의 이웃과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공생에 대해 연구하는 톰 웨이크퍼드의 이 말은 틀림없는 진리입니다.”(p.110) 그렇게 만들어가는 지점. 수많은 사람의 꿈과 소망이 담겨 있는, 함께 만들어 놓는 정원. 그것이 또한 꿈이요, 소망이다. 아는 사람들이 이미 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책을 읽고 따뜻하고 좋았다며 작은 성의를 보이고 싶다는 기부금을 내겠다는 독자도 있었다. 그러나 불편하고 부담스러워서 차라리 나무를 심는 게 어떠시냐고 권유했다. 이번 일요일에 나무를 심기 위해 백오산방을 찾아오시기로 했다. 그렇다. 그렇게 소망을 담은 나무들이 모여, 소망을 품은 숲이 될 터. 이야기가 흐르는 숲이 될 것이다. 자연성과 생명력을 회복하면서 건강한 농산물이 도농 간에 교류되는 우리들의 공동체. 그냥 무작정 숲으로 들어간 것만은 아니다. 또한 숲 강의와 사람과 자연과의 교감 등을 통해 가능성도 엿보고 있다. 숲 학교를 사회적기업 형태로 모색하는 것. 지금 이 시대에 소망 하나 품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너, 나가’ ‘너, 해고야’ 하면 쫓겨나고 방황해야 하는 공포와 불안이 지배하는 시대. 숲을 통해 배우고 기록하고 돕는 일을 통해 각자가 소망을 품는다면 사회적 문제가 조금이라도 줄고, 이 사회도 조금이라도 나아지지 않을까. 행여 소망에 참여할 수 없거나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나무를 심도록 할 수 있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심은 나무 한 그루가 다른 사람에게 소망을 심어줄 수 있다면, 숲이 건네 준 선물. 잃고 모색하면서 찾는, ‘길’ 나답게 산다는 것. 숲에서 사는 것이 나다운 것임을 알 수 있었던 것은 결국 길을 잃어봤기 때문이다. “‘나로서 살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길을 잃을까 두려워 할 이유가 없습니다. 생명 모두는 언제나 길을 잃음으로써 자신의 진정한 길을 찾기 때문입니다. 헬리 데이빗 소로우의 말처럼 “길을 잃어 보기 전에는, 다시 말해서 세상을 잃어버리기 전에는 자기 자신을 찾아내지도, 자신이 지금 서 있는 위치와 자신이 맺고 있는 무한한 관계를 깨닫지도 못하는 것”이 삶이기 때문입니다.”(p.29) 수많은 모색이 필요하다. 길을 잃어봐야 내 길이라고 느낄 수 있는 것. 징표는 그것이다. 그 일로 기쁘고 행복하고 창조로 연결될 수 있는 것, 사회에 아름답게 기여할 수 있는 것.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뚜벅뚜벅 걸어봐야 한다. 이 책은 그래서 나온 것이다. “길 위에 서 있다고 믿지만 사실은 길을 잃은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을 바칩니다.”(책의 서문) 그래서 택했던 것이다. “그 길 위에서 더 이상 희망일 수 없는 지점에 다다랐을 때 나는 그 길을 버리고 새로운 길 위에 서기로 결심했습니다. 기업이라는 조직을 떠나기로 했고, 도시를 버리기로 했습니다. 삶의 굽이를 따라 흐르다가 까맣게 잊었던 꿈, 버려야 했던 꿈을 되살려 불러내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로 했습니다.”(pp.11~12) 죽을 때가 되면 누구나 삶이 별게 아니라고 생각하게 된다. 죽음에 대해 장기기증을 서약하면서 정리를 해 보기도 했지만, 책이 ‘나고 살고 이루고 죽는 것’을 은유처럼 제시한 것은 생명의 큰 흐름을 다루고 싶었던 까닭이기도 하다. 얼마나 큰 아파트에 살고, 어느 학교를 나오고, 어느 직장에 있는 것이 죽음 앞에 얼마나 의미가 있을까. 그것보다 살면서 나를 모색하면서 아름다운 변화에 기여했는지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 가시 있지만 향기와 바람을 담은, ‘음나무’ 도시생활, 음나무처럼 가시가 많았다. 그렇지만 가시를 많이 뺀 지금도, 음나무와 스스로가 닮았다고 생각한다. 성목이 된 음나무도 큰 줄기에서는 가시가 떨어지지만, 새 가지에는 가시가 있다. 음나무는 무엇보다 향이 좋다. 그 고유의 향기가 깃들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렇게 과하지 않은 꿈을 품고 말이다. “우리의 꿈이 빛을 탐하는 식물을 닮았으면 좋겠습니다. 식물들에게는 과한 꿈이 없습니다. 나무와 들풀은 오로지 자신을 꽃피우려는 꿈, 그래서 어떻게든 열매를 맺는 것으로 자신이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된 이유를 증명하려 합니다. 나무는 숲을 모두 지배하려는 욕심을 품지 않습니다. 들풀은 제 자리가 아닌 곳을 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갖는 꿈도 그렇게 나무를 닮아서, 들풀을 닮아서 과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p.68) 숲을, 세계를 형성하는, ‘관계’ 숲에 오기까지, 아니 와서도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고 받고 있다. 서대원 선생과 구본형 선생은 물론이요, 많은 사람들이 관계 속에서 숲 생활과 일상을 짓고 있다. 책을 내고 나서도 마찬가지다. 책이 나오자, 과거 같이 일했던 동료들도 홍보를 해 주고 있다. 참 고마운 사람들이다. 과거 그들과 같이 일하고 있을 때, 그런 말을 듣곤 했다. “조직에 맞지 않는 사람 같다. 왜 학교를 안 갔느냐”고. 모험기업을 하면서 어려움을 함께 넘나들던 이들이었다. 사업상 어려움에 부딪혔을 때, 자신을 해고시켜달라고 말했던 사람도 있었다. 무엇보다 그들이 숲을 보러 다닐 때, 눈치 보지 않게끔 적극 밀어줬다. 그리고 여러 사람을 만났다. 다른 곳에 돈 투자한 것을 빼서 도와 준 사람. 오두막을 지을 때 밑의 마을에서 건축 프로젝트를 담당하던 흙건축연구사무소 ‘아키떼르(www.architerre.org)’의 생태건축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혼자 짓기에 가장 유용하고 집 방향, 창문, 지붕 등을 생태적으로 짓도록 설계를 거의 헐값에 해주기도 했다. 대신 품앗이 개념으로 대학 강의 때 생태특강을 해주는 그런 조건으로. 자립할 수 있는, ‘농부’ 농사, 농업, 농부. 세상에서 이미 저 멀리 한 켠으로 밀려난 이름들. 분명한 것은, 그럼에도 지금 이 엄혹한 시대에 다시 그 이름을 불러야 할 이유가 점점 분명해지고 있다. 자립할 수 있으며 비굴해지지 않아도 되고, 착취당하거나 하지 않아도 되는 직업이 바로 농부다. 귀농운동본부에서 알았다. 나로 살면서 더불어 살려면 자립, 생태가 필요하고 발자국을 덜 남기는 것이 이로운 것임을. 도시가 아닌 자연에서 이루는 것이 맞다는 것을 확인했다. 조직과 도시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이유? 스스로 설 용기와 스스로 설 수 없다는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직도 비어 있는 농촌이지만 개인들이 많이 들어와야 한다. 기업이 들어오는 것은, 반대다. 농촌이라는 영역은 빠른 것보다는 느린 것, 자주 변하는 것보다 자주 변하지 않는 것이 어울리는 법이다. “내 내면의 깊은 곳에 닿아 있는 나다운 꿈은 사라지고 사회를 지배하는 자본적 가치에 대한 열망만이 나를 깊숙이 좀먹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정말 좋아하고 잘 할 수 있는 것, 빠른 것보다는 느린 것, 쉽게 변하는 것보다는 잘 변하지 않는 것, 크고 화려한 것보다는 작고 소박한 것, 나 하나만을 살찌우는 것보다는 모두를 살찌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 사색하고 연구하기 시작하고부터 몇 년 지나지 않아 나는 새로운 꿈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p.68) 고마운, ‘가족’ 열두 살 난 딸이 한번은 물었다. 아빠 직업을 뭘로 해야 돼? 당시 김매고 있을 때라, ‘농부’라고 알려줬더니, 잠시 답이 없다. 어린 그 딸에게도 ‘농부’는 뭔가 망설이게 하는 직업군이었던 것이다. 사회가 그렇게 만들었다. ‘숲생태전문가’라는 말이 어떠냐고 했더니, 작가라고 쓰고 싶었나보다. 탈고를 하지 않은 상태라 그건 좀 그렇다고 했더니, 숲생태전문가가 좋겠단다. 딸에게 아빠랑 농사짓자고 하니까, “아빠와 나는 꿈이 다르”단다. 농촌 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다. 나중에 영국을 가고 싶어하는 딸은 ‘해리 포터’의 창조주, ‘조앤 K. 롤링’이 자주 갔다는 커피하우스를 꼭 가보고 싶단다. 무엇보다 책이 좀 팔리면 일본을 가고 싶다. 아내를 위로하고 싶은 것도 있다. 마침 오늘이 결혼기념일이다. 이 책이 그렇게, 지금 거닐고 있는 길이 사막의 길이 아닌 생명의 길이라는 첫 번째 증명이길 희망한다. 일본의 숲도 거닐어 보고 싶다. 일본 숲은 자연치유에 대한 이야기도 많고 유기농이 발달해 있다. 물론 여전히 숲과 더 많은 이야기와 교감을 해야 한다. 이미 8년 전에 전원으로 돌아간 큰 형님은 아직 농부가 덜 됐다며 종종 나무라신다. 서울에 오기 전에도 형님 집에서 품앗이를 하고 왔다. 휴대폰도 통하지 않는 형님 집을 보면 아직 멀었다는 생각도 들지만 숲사람이 어차피 하루 아침에 되는 것은 아니지 않겠나. 다음 책? 겨울 농사하는 셈치고 책을 짓고 싶다. 겨울에 산속 생활을 하다보면 게을러 질 수 있는데 스스로를 정리하는 개념으로 조금 가볍게 읽을 수 있는 그런 책. 이곳 생활을 통해 생명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움직이고 모색하는지를 벤치마킹하면서 탐색하는. 가제는 ‘숲에서 듣는 희망의 노래’. 물론 언제 나올 수 있을지는 모른다. 우리 삶이 왜 생태적으로 살아야 하는지, 좀더 자연스럽게 살아야 하는 이유를 담을 것이다. 그리고 아동용 책도 짓고 싶다. 딸을 위해서, 딸과 함께 짓고 싶다. 딸이 글 쓰고 읽는 일을 좋아한다. 딸과 이메일을 주고받는데, 책도 그렇게 딸과 함께 공유하는 방식으로 쓰고 싶다. 딸 또래의 아이들에게 자연과 숲에 대해 친근감과 호기심을 갖게 하고 꿈을 자극하는 그런 책. 숲은 그렇게 가족과 함께 꾸는 꿈이다. 당신의 소망과 꿈은, 안녕하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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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점점 들어가서인지 이젠 자신의 삶을 반추하면서 새로운 시각으로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그런 종류의 책들이 점점 좋아진다. 이 책도 그런 종류의 책이다. 벤처회사의 CEO를 그만두고 시골 고향으로 내려가 생태경영 전문가로 변신한 저자의 아름다운 삶을 찾는 자기경영 이야기이다.
"왜 나이를 들어가면서 숲은 황홀해지고 인간은 황망해지는가?" 나이 마흔을 앞두고 CEO로서의 삶을 정리하면서 자신에게 던진 말이다. 도시의 삶은 생활의 편의를 가져다 줄지언정 참다운 나의 삶은 없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항상 좋아했던 학교와 숲을 찾아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다.
수억년 삶을 이어온 또다른 세계인 숲 속의 생명들. 그들은 우리 인간과는 전혀 다른 그들만의 생존 파라다임이 존재한다. 그들은 태어나면서 자신의 환경을 탓하는 법이 없다. 성장을 하면서 주변의 환경과 생존을 위한 경쟁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과 경쟁하여 자신만의 세계를 완성하기 위한 것이다. 살을 내어주는 아픔을 딛고 이룩한 연리목의 숭고한 사랑도 있고, 자신의 씨앗을 품속에 두려하지 않는 식물들의 자녀교육법도 있다.
저자는 자연과 교감하고 대화하면서 그들만의 삶의 방식과 생존 패러다임을 이해하게 된다. 이것은 더 이상 우리와 관련없는 또 다른 세계의 이야기만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진정 우리의 진실된 모습이 무엇이고 더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우리 자신을 위한 생태적 자기경영법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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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책 제목보다 초록빛이 가득찬 커버가 더 맘에 와닿았던 책.
이 책은 숲 속의 수많은 생명체들 특히, 나무, 꽃, 풀 등의 삶과 죽음.
'생명을 보라, 벌과 나비를 만날 수 없다고.
비교적 삶에 대한 자유로운 선택과 그로 인한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누구든 태어난 때와 장소, 부모를 선택할 수 없다.
그리고 탄생을 거쳐 삶의 꽃을 피우는 성장과정에서 부딪치는
그래서 자연의 흐름에 맞춰 살아가는,
인생의 한 복판에서 제 갈 길을 두고 방황하는 이들에게 그래서 가슴 한켠 답답하게 자리한 숨통을 시원하게 뚫어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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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문사의 숲에서, 양평 용문사의 은행나무를 보면서 천년의 세월을 이겨낸 그의 모습을 보면서 난 숲에게 길을 묻다의 책 내용을 회상했다. 》
숲에게 길을 묻다. 우리네 인생의 물음표들이 풀리지 않거나 때로는 우리네 인생의 행로에 대해 의문점이 들 때 우리는 지인이나 선인들에게 그 물음표를 던졌었었다. 나도 또한 그랬었고... 하지만, 경영CEO에서 에코CEO의 길로 변신한 '숲에게 길을 묻다'의 저자인 김용규님은 숲에게서 그 길을 묻고 그 해답을 찾았다한다. 나면서 삶을 마칠때까지 우리는 무수한 문제들과 직면하게 되고 그것을 헤쳐나가는것은 숲의 나무들과 비슷한 모양새지만,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리내의 모양새와는 사뭇 다르게 삶을 받아들이고 개척해가는 나무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많은것을 배워야함을 깨닫게 된다. 이 책을 읽고자 했던 가장 큰 이유는 나무들의 아름다운 사랑의 모습을 내가 직접 읽고 배우고자 했기를 소망했기 때문이다. '따로 또 같이, 사랑하려면 혼인목과 연리목처럼' 사랑하라 혼인목과 연리목에 대해 들어보기는 했지만 실제로 그 모습을 보거나 그들이 어떠한 방법으로 사랑의 모습을 완성해가는지 보다 상세하게 알아보고 싶은 마음이 더 컸었다. 서로 다른 나무가 서로의 하늘을 열며 성장을 하다가 서로의 공간을 침범하게 될즈음이면 그들 스스로 서로를 탐색한 뒤 서로의 가지를 합하여서 함께 세포를 합치고 새로운 껍질을 만들어 마치 하나의 나무처럼 살아간다는 '연리지' 서로의 맨살위로 새로운 살을 만들어 덮어야만이 비로소 연리지요 연리목이 된다는 그들의 사랑법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연리지와 연리목의 사랑의 모습도 아름답지만, 혼인목의 사랑법은 나에게 다른 신선한 충격을 준다. 연리지와 연리목이 자신들을 내어주고 서로에게 합하여주는 모습이 절대적인 숭고한 아름다움과 깨달음을 준다면 혼인목은 각자의 모습에서 성장을 하되 서로의 하늘을 침범하지 않으며 양보하고 배려하며 아름다운 나무의 모습을 갖추어나간다. 나에겐 서로에게 나의것 상대방의 것까지 합하여서 내어주는것보다는 혼인목처럼 나의 모습도 나름대로 아름답게 가꾸어가면서 서로에게 내어주고 배려해주고 서로에게 서로의 하늘을 배려해주면서도 너무나도 아름답게 성장하고 있는 혼인목의 모습에서 보다 더 자유스러운 모습과 함께 서로의 아름다운 모습을 지켜주면서 서로의 하늘을 열어주는 그 배려가 더 매력적이었다. 이들은 끊임없이 서로의 하늘을 열어주기 위해서 가지 끝 하나하나에게도 무척이나 세심한 배려를 끊임없이 해야하는 인내와 끈기가 동반된다는 그 모습이 보이기에 내가 더 혼인목에 더 끌리는 이유가 된다. 우리네 인간들도 결혼이라는 틀에 서로를 묶어두기 보다는 서로의 모습에 아름다운 모습이 갖춰지는것에 서로를 위해 더 많이 노력하고 인내하고 배려를 할 수 있다면 그 마음들에 끈기가 더해진다면 요즘같은 만나고 헤어지는 일에 더 앞장서는 부부들이 줄어들거라고 생각을 해본다.
나무는 태어나면서부터 그 태어남의 위치에 대해 절대 비관하거나 낙담하지 않는다한다. 그들은 그들이 어느곳에서 그 씨앗을 튀우든지간에 그 자리에서 그들의 몫을 다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태어남은 선택이 아니라 숙명인것을 그들은 일찌감치 깨닫고 현실적으로 받아들일 줄 아는 그 모습. 그 용기가 가상하다. 바위틈에서 그 씨앗을 튀우든, 큰 참나무 밑에서 그 씨앗을 튀우든지간에 그들은 끊임없는 노력으로 그들의 하늘을 열기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네 사람들도 참으로 많은것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태어남의 장소와 형평에 대해 불평하며 인생의 노예로 살것인가, 태어남의 장소와 형평에 대해 불평하지 않고 숙명으로 받아들여 인생의 주인으로 살것인가.... 그것은 분명 나무들에게서 숲에게서 배워야 한다.
자식에 대한 교육열은 특히나 우리네 한국사람이라면 세상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을만큼 대단하다. 우리는 우리네 사람들에게서 많이도 배우고자 노력하고 알아가는 현실을 보면서 참으로 인생의 어떠한 진실한 답이 없음을 알고 많은 물음표만을 던져야 하는 현실에 직면하게 될 때, 숲에게 그 길을 물어야 한다. 숲에게서 우리는 그 길을 찾아야 한다. 숲은 서로의 길을 침범하지 아니한다. 서로의 하늘을 열기 위해 노력할 뿐이다. 나의 하늘을 더 많이 열기 위해 다른 나무를 짓밟지 않는다. 그렇게 해서 소수의 나무만 사는것이 아니라 그들은 그들 모두가 사는 길을 택한 것이다. 권력을 잡기 위해서 재물을 얻기 위해서 남들보다 더 위에 서기 위해서 우리네 사람들은 서로를 짓밟고 서로를 무너뜨리기 위해 남들보다 더 잘 살기 위해 남을 무너뜨리기에 습관화가 되어가고 있는 이 인간사의 현실에서 많은 깨우침을 가지게 되고 자신의 인생을 보다 더 새롭게 계획하고 설계하는 일에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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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이 들수록 숲은 황홀하고 인간은 황망해지는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 마흔의 길목에서 벤처기업의 CEO라는 명함을 버리고 홀연히 숲으로 들어간 사람 김용규. 책은 저자가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충북 괴산의 산 속에 오두막을 짓고 숲의 식물과 생태를 들여다보면서 발견한 참 삶의 길을 숲의 목소리로 전해주고 있다. 그는 시종 이렇게 이야기한다. "숲을 보라! 이곳에서 나고 살고 이루고 떠나는 모든 생명체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라! 그들이 어떻게 사는지 마음으로 보라!" 이 이야기는 그가 숲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럼 어디, 그가 전하는 숲의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자. 숙명: 숲에는 태어난 자리를 억울해하는 생명이 없다 혹시 살면서 태어난 자리가 억울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면 그 생각을 잠시 내려놓고 조금 더 숲의 가르침에 귀 기울여보면 좋겠습니다. 숙명이 지천인 숲이라지만, 생명 각자는 발아한 그 자리에서 눈부시게 아름다운 그들만의 삶을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나는 아직 주어진 자리가 억울하다고 분노하는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꿈: 나무에게는 빛, 사람에게는 꿈 식물은 매일 빛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공평하게 비추는 햇살을 생명 저마다의 처지와 환경에 맞게 맞이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매일 그렇게 자기를 자라게 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고 있습니다. 사람도 그래야 합니다. 사람도 꿈을 쫒아 살아야 행복의 문에 들어설 수 있습니다. 빛을 잃은 모든 생명이 그 순간부터 시들듯이 꿈을 잃은 사람도 그 순간부터 시듭니다. 경쟁: 다퉈라! 그러나 제대로 다퉈라! 숲은 타자와의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오히려 숲은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오직 자기 자신과의 경쟁이요, 새로운 영역의 창조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욕망과 욕망이 충돌하는 핏빛 대지에서 영혼을 고갈시키며 앞을 다투는 경쟁이 아니라, 나만의 푸른빛이 가득한 공간에 서는 것. 감히 추한 욕망이 넘보지 못할 자기만의 세상을 창조하는 것. 타자를 파괴하여 내 하늘을 여는 것이 아니라, 나의 낡은 나날을 부숴 새로운 세상을 맞이하는 것이 경쟁의 요체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혁명: 버려진 땅을 골라 자신의 영토를 세우자! 이른 봄 아직 모두가 잠들어 있는 시간, 숲 속에 자신의 깃발을 가장 먼저 올리는 것으로 곤충의 사랑을 이끌어내는 이들의 개화는 가히 혁명적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배고픔과 늦추위의 위험까지도 기꺼이 감수하고 자신의 꽃을 피워내는 이들의 혁명 정신이야말로 치열해지는 이 사회에서 빽빽하게 들어선 잣나무 숲 아래에 놓인 우리가 주목해야 할 대목인지도 모릅니다. 소통: 꽃의 유혹?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배려! 사람이건, 사회건 성숙한다는 것은 소통의 그릇이 커지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마치 꽃들이 이어내는 세상과도 같아지는 것입니다. 꽃들을 보십시오. 꽃은 모두 자기다운 빛깔로 피어납니다. 그러면 이제 자연을 이루는 위대한 생명의 가족들이 그들 각자의 빛깔에 화답합니다. 바람과 물과 나비와 벌과 나방과 새들이 그들을 찾아들고 세상을 수만 갈래의 빛깔로 이어냅니다. 그렇게 자연이 벌이는 소통은 끊이지 않아 이 별이 늘 푸른 것입니다. 상생: 홀로 숲을 이룰 수 있는 나무는 없다 모든 숲은 상생으로 깊어집니다. 어디에서든 나무들을 보십시오, 홀로 살지 않는 나무가 없습니다. 그러나 더 자세히 살펴보면 주변과 함께, 그리고 그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 나무가 없습니다. 나무는 땅과 함께 존재합니다. 나무는 땅을 딛고 그 속에 자신의 근거를 의탁해야 비로소 설 수 있습니다. 수많은 지렁이와 곰팡이와 미생물이 그들의 뿌리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스미고 흐르는 물과 영양분을 잡아주고 공급해주는 공간이 자신의 발아래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숲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생존과 번영의 원리입니다. 놓음: 썩어져라! 한 순간도 살지 않은 것처럼! 나무는 죽으면서 다른 생명들에게 많은 선물을 주고 갑니다. 죽어가는 나무는 곤충과 애벌레에게 자신의 몸을 허락합니다. 곤충이 자신의 몸에 파고들어 집을 짓게 하고 그 안에 애벌레들을 위한 기숙사를 제공하기도 합니다. 수많은 곤충과 그 애벌레들이 자신의 육신에 기대어 태어나고 자라나도록 허락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길러낸 그들이 봄부터 가을까지 하늘을 날며 온갖 풀과 나무의 전령사 노릇을 하게 함으로써 어디선가 자라고 있을 자신의 2세들에게 자신의 육신을 마지막으로 헌납하는 것입니다. 숲의 이야기를 전하는 저자의 목소리는 여느 자기계발 서적과 달리 참 나지막하다. 하지만 약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메시아의 길을 예비한 세례요한만큼이나 그의 목소리에는 힘이 있다. 숲을 파괴하고 생명을 죽이며 낸 길이 아니라, 숲 그 자체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참 삶의 길이라는 준엄한 메시지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길을 잃은 그대, 더 이상 길에서 길을 찾지 말고 숲으로 들어가라! 거기서 나무와 들풀, 새와 곤충, 해와 달, 바람과 물이 보여주는 ‘나고 살고 이루고 죽는 것’에 대한 지혜를 배우라!" 저자는 숲에서 엿본 삶의 지혜를 우리 인간의 지혜로 삼자고 제안하며, 그 지혜를 자기경영의 전략으로 삼아보자고 권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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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게 길을 묻다>는 한마디로 굉장히 감동적인 작품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흔하게 볼 수 있는 산, 숲이 전해주는 신비움과 아름다움, 그리고 사람에 관한 이야기가 놀라울 정도로 가슴에 와닿는 작품이다. 이 책의 저자 김용규씨는 나이 마흔을 앞두고, 조직과 결별하면서 자신에게 '왜 나이 들수록 숲은 황홀하고 인간은 황망해지는가?'라는 물음을 던진다. 김용규씨는 국내 유명 금융회사와 이동통신 회사에서 인사와 경영전략을 담당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너무나 부러운 성공적인 인생을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던 그는 갑자기 마흔의 길목에서 도시의 삶과 CEO라는 명함을 버리고 숲으로 들어갔다. 그는 사단법인 '숲 연구소'에서 공부했고, 2006년 행복한 삶을 배우는 숲 학교'와 창작과 문화와 교육이 어우러진 '행복숲 공동체'를 만들고 있다. 현재 그는 '행복숲'에 지은 '백오산방'이란 오두막에 살며 공동체 추진 대표를 맡고 있다. 앞으로 '생태'와 '자기경영'이 결합된 생태경영 컨텐츠를 생산하여 오늘과는 다른 삶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노력하고 있는 그의 모습이 정말 멋지고 존경스럽다. 나에게 있어서 성공의 기준은 좋은 집과 좋은 차 등을 살 수 있을 정도로 돈을 버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책의 저자 김용규씨는 내가 생각하고 있던 성공적인 인생의 표본과도 같은 인생을 살아왔다. 하지만 그는 모든 사람들이 꿈꾸는 인생을 과감히 버리고 숲을 선택했다. 숲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도대체 어떤 마력이 숨어있기에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은 것일까. <숲에게 길을 묻다>는 그 이유를 숲의 가르침에서 찾고 있다. 수많은 나무와 꽃, 풀, 곤충 등 모든 동식물들이 함께 살아 숨쉬는 숲이라는 곳은 태초의 신비와 비밀이 아직도 숨어있는듯 하다. 바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며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것만을 쫓아가다가 어느 순간 행복한 삶, 희망이 넘치는 삶에 대해서 우리들은 잊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희망의 길, 더 아름다운 삶에 대한 희망을 난 이 책 <숲에게 길을 묻다>를 통해서 발견할 수 있었다. 이 책에는 숲의 탄생을 시작으로 성장과 결실, 그리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숲의 생존 메시지가 가득하다. 난 이 책을 읽으며 너무나 강인하고 아름다운 숲의 생명력에 몇 번이나 감탄을 했는지 모른다. 천년 이상을 살아가는 나무에 비해 인간의 수명은 고작 100살을 조금 넘는다. 이렇게 즐겁고 행복하게 살기에도 너무 부족한 우리 인생을 난 얼마나 조바심을 내며 눈앞에 보이는 이익만을 쫓아 살아왔는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는 가치있고 아름답다. 지금부터라도 이 아름다운 삶에 숲의 가르침을 담아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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