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년 12월에 초판이 발행되었고, 93년 10월에 4쇄가 발행된(내가 소유하게 된 것은 그래서 93년 이후라는 이야기) 롤랑 바르트의 책을 이제서야 읽었다. 너무나 오래 간직하고 있던 책이라 누가 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을 읽었느냐고 물으면 냉큼 읽었지, 라고 이야기했는데 이번에 책의 구석구석을 찬찬히 살펴보니 전혀 읽지 않은 책이다. 내용도 내용이려니와 어디 한 군데 밑줄 그은 흔적도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정말 그렇다. 그런데 도대체 왜 나는 철석같이 이 책을 이미 읽은 책이라 여겼던 것인지 모르겠다. 알튀세르나 푸코, 들뢰즈나 데리다 등 프랑스 철학자들을 읽어 제끼던 시절 그렇게 묻혀서 입에 되뇌어지고, 책은 책꽂이 한켠에 묻히게 된 것은 아닐까. 여하튼 책은 (이미 80년도에 고인이 되어버려 농담하기 송구스럽지만서도) 누가 프랑스 사람 아니랄까봐 현학적이고, (번역상의 문제일 수도 있겠고, 그들의 문장이 갖는 특수성일지도 모르지만) 절과 구의 혼잡이 극심한 문장으로 읽기는 버겁다. 하지만 이런 미로들을 조금은 큰 걸음으로 건너갈 재간이 있다면 시작과 끝을 환하게 내려다보며 즐겁게 읽을 수 있다. 제목에서 이미 밝히고 있듯이 책은 사랑에 대한 짧은 생각들의 모음이다. 롤랑 바르트가 "1974년에서 76년까지 파리 고등연구실천학교의 세미나에서 ''사랑의 담론''이라는 이름으로 사랑/정념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대상으로 행해진 강의의 결과"가 바로 이 책이다. 책은 사랑에 대한 구조적인 관찰의 결과물이다. 물론 아무런 의심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다. 사랑을 하나의 심리적 상황으로 보고 이를 철학적으로 파악한 다음(작가는 이것이 사랑의 철학으로 분류되기를 거부하여 사랑과 함께 떠오르는 단어를 무작위적인 알파벳 순서로, 그러니까 랜덤으로 나열했다고 하지만, 읽다보면 그것이 어쩌면 사랑의 순서가 아닌가 싶다. 그러니까 만남과 진행, 스킨쉽과 섹스, 이별과 슬픔 등이 차례대로가 아니라 때로는 순서를 바꿔가며 또는 동시에 발생하기도 하는 것이므로 사랑에는 순차적이라는 의미 자체가 성립 불가능이 아닐까. 그리고 작가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사랑에 대해 차츰차츰 전진해 가는 독자의 마음은 일정한 흐름을 갖게 되어 버린다.) 그 구조를 축성하는 것이 가능할까, 아니 사랑의 각각의 단계와 그로 말미암은 마음의 상태를 거창하게 명명하고, 이를 무수한 담론들의 첨부와 함께 분석하는 것이 가능할까. 하지만 이러한 의문보다 앞서는 것은 학문적 관심으로부터 멀어지고(이미 책이 출간된 70년대 말에도 충분히), 그 자리를 섹스와 이색적인 사랑의 형태가 채워가는 동안에도 사랑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여지가 남아 있었구나 하는 반가움이다. 그리고 이러한 반가움은 일상에서 발견되는 사랑을 향해 들이대는 철학자 특유의 비범한 사유와 베르트르의 슬픔이라는 텍스트를 토대로 하고 있는 구체성과 보편성으로 어줍잖지만 환호가 된다. 그러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서러운 감정으로 나의 책읽기는 마무리된다. 왠지 이렇게 사랑에 대한 담론을 읽을 때마다 사랑은 이제 창조되는 무엇이 아니라 반복되거나 번복되고, 기억되거나 잊혀지고, 해석되거나 분석되고, 확대되거나 축소되는 무엇이 되어가는 것 같아서이다. 사회적으로도 또 개인적으로도 말이다. * 이 책의 매 챕터는 하나의 단어와 그에 대한 짧은 설명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나머지 부분은 그 서두를 부연설명하는 식이다. 이 80개의 단상, 그리고 그 단상의 핵심이 되는 단어 중 몇 개만 여기 옮긴다. 근사한 adorable.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대상에 대한 자신의 욕망의 특이함을 이름짓지 못하여 조금은 바보 같은 근사하구나! 라는 말에 귀착한다. 취소 annulation.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 자체의 무게에 짓눌려 사랑의 대상을 취소하게 되는 언어의 폭발. 사랑의 고유한 변태성에 의해, 주체가 사랑하는 것은 사랑 자체이지, 그 대상이 아니다. 파국 catastrophe.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의 상황을 결코 빠져나올 수 없는 결정적인 막다른 골목이나 함정으로 체험하여, 자신이 완전한 파멸 상태에 이르렀다고 여기는 격렬한 위기. 공포 cannivence. 사랑하는 사람은 연적과 더불어 사랑하는 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상상한다. 이 이미지는 이상하게도 그에게 어떤 공모의 즐거움을 야기한다. 이미지 image. 사랑의 영역에서 가장 생생한 아픔은 아는 것에서보다, 보는 것에서 더 많이 온다. 질투 jalousie. 사랑에서 시작되어 사랑하는 이가 다른 사람을 더 좋아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야기되는 감정(『*리트레 사전』) *프랑스에서 발행되는 사전의 이름. 우수 langueur. 소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무엇인가가 결핍되었다고 느끼는 사랑의 욕망의 미묘한 상태. 물건 dbjets. 사랑의 대상이 만졌던 물건이면 모두 그 육체의 일부가 되어 사랑하는 사람이 열정적으로 매달리는 것. 왜 pourquoi. 사랑하는 사람은 왜 자신이 사랑받지 못하는가를 집요하게 자문하면서도 동시에 사랑하는 이가 자기를 사랑하면서도 다만 말하지 않을 따름이라는 신념 속에 산다. |
| 어려운 명사들의 책을 인용하고 주석이 덧달아 씌여진 이 책을 처음 잡은 게 언제인지 모르겠다. 시간이 이만큼이나 흘렀는데 '대단해!'라는 말 한 마디가 전부다. 나는 이 책을 처음 손에 잡으면서부터 롤랑 바르트를 이야기하고 싶어 간질간질했다. 그런데 이야기 할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이야기 해야지, 앞에서 나는 바보처럼 '바르트는 정말 대단해' 라는 말 밖에 나오지가 않는 것을!!! 정확한 논리의 정연함, 이성에 치우치지 않은 감성에의 - 자존심 상하게도- 정확한 전달자. 모호하여 자신 스스로조차 정확히 알 수 없는 감성이라는 불규칙 곡선, 그것도 인간의 가장 깊숙한 심중에 들어있는 사랑이라는 것을 끄집어내어 이만큼의 필력을 가지고 써낼 수 있는 자가 도대체 존재하고 있었단 말인가. 소설이라면 어느 연인의 사건, 배경을 담아 사랑은 이런 거예요,말하며 울게도 하고 웃게도 하여 감동을 주려니. 그는 기호학자란다. 프랑스의 문학비평가이며, 구조주의 문학의 대가이고 마르크스 주의자이며 바슐라르 적이고 프로이트 적이라는 칭송을 받는다. 그러나 그를 한 마디로 표현하는 사람은 없다. 애매한 감성만큼이나 그는 뭐라 꼬집기 모호하다. 너무 다양하며 텍스트 적이어서 그는 모든 것이 정확하며 논리적이다. 그가 말하면 구름이 움직여 사과가 된다. 집이라고 말하면 구름이 옮겨가 집모양이 된다. 나는 적어도 단면적인 걸 싫어한다. 미물이라손 치더라도 한 가지 특성만을 지녔겠는가. 모든 것은 다면성을 지니며, 그 다면성은 존중되어야 하고 사전적 의미 하나를 전부인냥 신처럼 믿어버리는건 억지스러워 싫다. 특히나 사람의 감성을 이런 것이다,하고 규정 짓는다니!!! 그건 하등적인 논리이며, 자기오만에 잘난 척인 것이다. 그래서 모든 것을 규정짓지 않는 - 못하는 - 습관이 생겼다. 흰 것이 꼭 흰 것이겠느냐, 좋은 것이 꼭 좋기만 한 것이겠느냐, 는 식의 애매모호한 것들이 내 안에 가득하다. 나는 편리한 구조를 좋아했던 것이다. 롤랑 바르트는 내게 충격 자체였다. <사랑의 단상="">이 감동적인가? 그건 아니다. 그의 사랑의 단상은 말 그대로 단상일 뿐이다. 베르테르와 로떼의 사랑, <잔치>에서 가져온 고대 철학자들의 사랑, 괴테, 프로이트, 라캉 등에게서 빌려온 사랑... 그는 얼마만큼의 책을 읽었으며 얼마만큼의 지능으로 그걸 다 꿰차고 있는 것인지 놀랍다. 하지만 더욱 그를 존경에 마지않도록 하는 것은 그는 사랑을 이성적인 근거의 판단 기준으로 늘어 놓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가 재구성하여 늘어놓은 것들이 아니라, 의미들의 형식구조를 꼭 끼이지도 않게 헐렁하지도 않게 우리들에게 내미는 것이다. 사랑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아~' 하고 신음에 가까운 환희에서 시작되어 아픔과 오류를 지나는 과정에까지 놓치지 않고 해석한다. 그는 분명히 사랑을,지독한 사랑까지도 경험한 것이 분명하다.잔치>사랑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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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비전 광고는 도발적이면 도발적일수록 더 성공하기 마련이다. 여기 한가지 사례가 있다. '너 사랑이 뭔지 아니?' '내가 대답하지 못했을 때 △△는 삼만삼천오백오십건이란다' '내 사랑도 그곳에 있을까?' 대답은 물론 당연히 '그곳엔 없다'이다. 하지만 누가 그걸 모르는가! 모두가 첫사랑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것만큼이나 다양한 사랑의 기억들을 간직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질문을 바꿔서 '왜 당신의 사랑은 그곳에 없나요?' 혹은 '당신의 사랑은 어디에 있나요?'라고 누군가가 다시금 물어 본다면 그때 당신은 뭐라고 대답하겠는가?
비록 몇백만 또는 몇십만 개의 인터넷 사이트에는 미치지 못하겠지만, 인류가 사랑에 대해 남겨놓은 기록들을 읽고서 그 흔적들을 모아둔 책이 바로 여기 있다. 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Fragments d'un discours amoureux)}이 바로 그것인데, 원제목처럼 그야말로 사랑에 대한 일종의 소(小)사전이라고 할만하다. 당신은 원하는 단어를 선택하고 마우스를 클릭하듯이 책장을 넘겨 사랑의 암호를 해독할 수 있다. 밤하늘의 무수한 별들이 남기는 자취처럼 사랑의 언어에는 끝이 없다. 나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의 기호들 중에서 단지 하나, 내게 다가온 별 하나를 당신에게 선사한다―사랑이란 자신이 가지지 않은 것을 주는 것이다. 누구에게? 사랑하는 사람에게―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면 아무도 사랑에 대해 말하지 않으리라.
기다림: 사랑하는 이를 기다리는 동안 별 대수롭지 않은 늦어짐(약속 시간·전화·편지·귀가 등)으로 인해 야기되는 고뇌의 소용돌이 5. "나는 사랑하고 있는 걸까?―그래, 기다리고 있으니까." 그 사람, 그 사람은 결코 기다리지 않는다. 때로 나는 기다리지 않는 그 사람의 역할을 해보고 싶어 다른 일때문에 바빠 늦게 도착하려고 애써본다. 그러나 이 내기에서 나는 항상 패자이다. 무슨 일을 하든간에 나는 항상 시간이 있으며 정확하게 일찍 도착하기조차 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숙명적인 정체는 기다리는 사람, 바로 그것이다.
영화 {러브 레터}의 처절하도록 아름다운 마지막 메시지―'잘 지내고 있나요?' '나는 잘 지내요.'―는 왜 그토록 깊은 여운을 남기는 것일까?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 보내는 말이나 편지에 대해 사랑하는 이가 대답하지 않거나 혹은 인색하게 대답하면 괴로워하기 마련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나의 사랑은 버려진 폐품처럼 갈 곳을 찾지 못해 방황한다. 그러나 사랑의 영역에서 가장 생생한 아픔은 아는 것에서보다, 보는 것에서 더 많이 온다. 그가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보다는 그가 남긴 이미지 속에서 그녀는 그를 영원히 사랑하게 된 것이다. 그는 헤아리기 힘든 사람이었다. 그 이유는 그의 욕망에 대해 그녀가 아무 것도 몰랐었다는 데 있다. 이제 그녀는 그의 죽음이라는 사실보다는 그가 남긴 하나의 이미지 속에서, 그의 욕망 속에서 그를 알 수 있게 되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세계는 이미지 그 자체이다.
사랑은 정의가 아니다. 나는 '그/녀는 과연 어떤 사람일까?'라고 묻는 대신에 '내가 알려고 하는 그/녀는 무엇을 원하는 걸까?'라고 물어본다. 이제부터 그/녀가 내게 안겨주는 고통과 즐거움에 의해서만 그/녀는 정의된다. 사랑이란 정확히 바로 이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말할 수 없는 상태에서 나와 그/녀 사이의 관계를 '근사한' 것으로 만드는 욕망의 함정. 이제 나는 '사랑의 장소'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모든 사람들처럼 사랑해야 하고, 질투해야 하고, 버림받아야 하고, 또 상처에 가슴 졸여야 하는 곳에서 사랑은 웃음거리가 될 뿐이다. 사랑의 진실은 사랑뿐이다. 그러나 그 사랑은 조심스럽게 반복되어야 한다. [인상깊은구절] "내가 준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이 마음이다. ... 마음은 계속해서 내게 남아있는 것이며, 이 마음속에 깊이 간직되어 있는 마음, 그것이 바로 "잊혀지지 않는" 마음이다. 스스로에 의해 채워진 썰물의 잊혀지지 않는 마음(사랑하는 사람과 어린아이만이 잊혀지지 않는 마음을 갖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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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처음 알게된 것은 대학교 2학년 교양필수 문장작법시간이었다. 책에 인용된 그의 글 한페이지는 날 흔들어놓았다. 도서관에가서 이 책을 발견하고 또 그 안에 그어진 무수한 밑줄에 난 두 번 행복했다. 이런책도 있구나.. 원래 난 밑줄을 긋지 않는다. 하지만..밑줄을 긋기 위해 난 이 책을 샀다. 그런데, 난 밑줄을 많이 긋지 못했다. 대신 해당 페이지 하단에 동그라미 표시를 했다. 이 책의 감동은 밑줄로는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내 가장 친한 친구가 성년을 맞던 날, 나는 이 책을 선물했다. 학교 앞 서점에서 누렇게 변한 이 책의 흰표지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제발, 읽어보라고... 시간이 지나면서, 내 전공서적에 등장하는 <롤랑 바르트="">를 보며, 문학사에 있어서의 그의 존재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책을 통해 알게된 김희영씨는 <미메시스>가 나오기 전, '무슨 책을 읽을까?'하는 고민에서 나를 편하게 해주었다. 무슨 책을 읽든지, '원어의 참맛'을 느끼고 싶은 나의 '허황된 소망'은 적어도 이 책에서 만큼은 들지 않았다. 그의 번역보다 더 잘 이해하리라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인상깊은구절] <난-널-사랑해> 에는 여러 가지 사교적인 대답이 있을 수 있다. "난 사랑하지 않아요" "난 당신의 말은 한마디도 믿지않아요"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죠?" 등등. 그러나 진짜 거절은 "대답 없음"이란 말이다. 나는 청원자로서뿐만 아니라 발화자로서도(적어도 그 의례적인 표현을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는) 부인되기 때문에 더 확실히 취소된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 부인된 것은 내 부탁이 아닌, 내 실존의 마지막 수단인 내 언어이다. 내 부탁만 거절하는 것이라면, 나는 기다렸다 그것을 다시 시작하거나 재개할 수 도 있었을 텐데. 하지만 이제 질문할 권리 마저도 빼앗겨 버린 나는 영원히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난-널-사랑해>미메시스>롤랑> |
| 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은 아름다운 책이다. 언어의 아름다움이 그대로 손끝으로 묻어나는 그런 책이다. 굳이 바르트의 명성에 힘입지 않더라도 이 책은 그렇게 나의 감성의 굳은 살을 벗겨내는 힘이 있다. 프랑스인의 문화적 깊이와 정서적인 섬세함이 베어 있어서 그런 것일까? 각 장들이 하나의 어휘를 분석하면서 사랑이란 무엇인가를 파고들어가는 그 묘미가 새롭다. 예컨데, 이 책의 '사랑'은 에리히 프롬 식의 '사랑'이라기 보다는 마르셀 프루스트 식의 사랑이다. 회상하고 기억하는 그런 사랑 말이다. 연인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해야 할까 망설이고, 연인의 작은 행동에도 그가 혹시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닌지 두려워하는 그런 사랑 말이다. 너무나 선명하다. 마치 봄햇살에 손 등의 실핏줄이 아릿아릿 드러나는 그런 느낌이라고 할까? 바르트의 언어는 사랑의 살갗을 아주 조심스럽게 들춰낸다. 누군가 나에게 사랑이 이 세상 최고의 가치가 아니냐고 묻는다면, 고개를 흔들지 모르겠다. 그러나, 사랑의 감정은 짜릿하고 황홀한 것이 아니냐고 묻는다면 나는 고개를 끄덕이겠다. 그것이 비록 이별로 끝을 맺을 수도 있겠지만, 서로 좋아하는 두 사람이 만나서 같이 있는다는 그 시간들은 보이지 않는 무수한 의미와 감정의 交通을 낳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대한의 행복이리라. 바르트는 그러한 사랑의 황홀함과 격정을 잘 아는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렇게 정갈하게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 지금 사랑에 빠져 있다면 뒤늦지 않게 이 책을 읽어보는게 좋을 것이다. 물론, 위에서 언급한 프롬의 <사랑의 기술="">이나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도 탁월하다. 당신이 좀더 진실되고 영원한 사랑을 할 수 있게 도와줄 것이기 때문이다. 혹자는 번역자인 김희영씨는 이 책이 '사랑의 이야기'나 '사랑의 철학'이 아닌데, 너무 곡해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물론, 바르트는 기호학자이고 텍스트의 의미분석을 위해 이 글을 쓰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글의 행간을 잘 살펴보면 사랑에 대한 바르트의 생각이 묻어나온다. '프라그망'이란 것이 그런 의미 아닌가? 조금만 시간의 여유를 낸다면 지금까지 여러분이 만든 사랑의 추억과 그 설레임에 다시 빠져볼 수 있을 것이다. 그 때의 기억에 다시 황홀해하거나 아쉬워하면서, 사랑에 대한 성찰을 더 고양시켜 보기 바란다.잃어버린>사랑의>사랑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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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말로, 언어로 정확히 나타낼 수 있을까. 또한 그것이 과연 정답이 될 수 있을까. 나는 이 두 가지 의문은 지닌 채 책 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날 유난히 자극했던 '질투'에 관한 단상을 읽으며 나의 경험을 떠올렸다.
나 : 그 여자완 일로 만나는 것도 싫어. 신경쓰인단 말야.
애인 : 질투하니? 넌 안 그럴 줄 알았는데. 남과는 다를 줄 알았어. 실망이다.
나 : 내가 유치하게 그런거나 하는 애로 보여?
지금 생각하면 명백한 '질투'임에도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롤랑바르트는 이런 나를 끈질기게 추적하였다. 자신이 배타적인, 공격적인, 미치광이 같은, 상투적인 사람이라는데 대해서 괴로워한다고 나의 '질투'를 기호화 하였다. 사실이 그랬다. 나는 그렇게 네 번 괴로워했던 것이다. (197쪽에서 인용)
하지만, 바르트는 자신의 언어로 적혀진 사랑의 단상을 강요하지도 않으며, 그것을 입증하기 위해 그 많은 (괴테작 베르테르의 슬픔, 라캉과 프로이트의 이론, 보들레의 시, 니체, 신화등) 것들을 인용한 것도 아님을 밝히고 있다. 다만, 그 자신도 간접적으로나 직접적으로 경험했을 '상상적인 것'을 우리의 언어로 더 가깝게 말 하고 싶었을 것이다. 또한 그 경험을 있는 그대로 내보이고 싶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어쩌면 '롤랑바르트식 사랑의 단상'이란 제목이 더 어울릴지 모르겠다.
흔히 사랑을 얘기할 때처럼 남자, 여자로 나누지 않은 채 '인간'의 사랑을 때로는 뜨금할만큼 끔찍하게 정확한 언어로, 때로는 생각지 못한 상념을 언어로 적나라하게 드러내려 노력한 바르트가 감탄스럽다. 그렇지만 일차적으로 가슴으로 느껴지는 사랑을 전부 기호화하려는 작업을 한 것에 조금은 기가 질리기도 한다. 아직까진 내면에 숨겨지는 언어의 미덕들에 매력을 느끼고 있는 또다른 '인간'이기에.
우리는 흔히 사랑을 모르겠다고 말한다. 어쩌면 영원히 알 수 없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이겠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존재로써 사랑이 있음을 믿고 느낀다. 결국 우리는 바르트의 바램처럼 그것을 긍정하게 되는 것이다. 사랑은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으며, 말로 정확히 표현하기란 어렵기 그지 없다. 이처럼 어려운 것을 인간은 문학으로 삶으로 끊임없이 표출하려고 노력해왔고 앞으로도 멈추지 않으리라는 것을 자연스레 알 수 있었던 경험이었다.
"난 너의 다음 사랑이 되고 싶어." 내게서 떠나가는 이에게 하나의 '기호'를 던져보았다. 물론 소용없는 짓이었지만. 그 사람은 떠났지만 앞으로 다가올 나의 사랑을 향해 다시 한 번 속삭일테다. 겉은 같으나 속은 다른 언어로, 깊은 의미로. [인상깊은구절] 그대로 tel.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이를 정의해야만 하는 그 끊임없는 요청 앞에 자신이 내리는 정의의 불확실성 때문에 괴로워하면서, 모든 형용사가 배제된, 있는 그대로의 사람을 받아들이는 지혜를 꿈꾼다. |
|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온 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 이 책은 아쉽게도 YES24에서는 절판되었다고 하는데 어딘가를 뒤져보면 나올지도 모르겠다. 이 책의 원 제목을 살펴 보면 '사랑의 담론에 관한 단상'이라고 하는데 어느쪽 제목이 더 나은지는 쉽사리 판단이 되지 않지만 아무래도 '담론'이라는 낱말에 대한 일반적인 무게감이 부담이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행복해하고 힘들어하는 사랑에 대해 단편적으로 써내려간 그야말로 담담하게 적어내려간, 여러 심리에 대한 편린을 모아놓은 글인데 역시 부담없이 읽을 수 있는 미셀러니 형식의 책이라 할 수 있겠다. 물론 번역본을 읽었기 때문에 영어 원어의 맛을 느낄 수가 없지만 번역자가 바꾸어놓은 우리말 표현만으로도 원 언어의 서정성과 탐미성을 충분히 - 사실 결코 충분하지는 않지만 - 느껴 볼 수 있다. 번역은 제2의 창작이라고도 하는데 이책의 경우 그 말이 딱 들어맞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중간중간 쉽사리 이해되지 않는 - 아무래도 번역상의 오류이거나 적절한 우리말 표현의 부족으로 기인하겠지만 - 문장들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전혀 옥의티라고 할 부분들이기 때문에 그리 궤념치 않아도 될 것으로 보인다. 무라카미 하루키 류의 언어적 구사로도 보이고 또 이미 책에서도 보이듯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류의 영롱한 표현들이 사랑이라는 감정 표현으로 잘 녹여 있다는 점에서 감상해 볼 만한 책이라 할 수 있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