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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라는 수식어가 붙은 사람을 보면 용기 있는 사람이구나 혹은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아무도 시도하는 않았던 그 무엇인가를 이루었다는 것은 사회와 다른 많은 사람에게 새로운 길을 보여줌으로써 변화를 이끌어가는 영향력을 발휘하게 됨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조선 최초의 여의사 김점동(1876~1910)도 남존여비사상이 짙었던 조선, 붕괴돼 가는 봉건사회 조선에서 앞으로 세상이 또 여성이 어떻게 변화할 것인지를 그 길을 예고해준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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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점동,그녀는 이화학당에 네번째로 입학하면서 학교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이화 학당은 1886년에 외국인 선교사가 설립한 최초의 여사립학교로, 당시 입학생을 구하는데 애를 먹고 있었다. 그렇잖아도 여성교육에 대한 인식이 빈약한데다 외국인들이 아이들을 외국으로 빼돌린다는 괴소문까지 보태져 입학을 기피하는 소동까지 벌어졌던 것이다. 김점동의 경우 이와는 달리, 아버지 김홍택의 권유에 이화학당에 쉽게 입학했다. 그는 신문물을 받아 들여 딸도 교육을 시켜야 한다는 깨인 인물이었으니, 그런 아버지 밑에서 성장한 김점동이 의술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여성의 경우, 정신적으로 아버지의 지원과 응원을 받은 경우가 많다는데, 김점동의 경우는 그런 경우였다. 개화했을 뿐 아니라, 배운 지식을 남을 위해 사용하길 바랐던 아버지야말로 김점동이여성이라는 약점을 이겨내고 자신을 꿈을 이루는데 백만원군이나 마찬가지였다.
김점동이 미국으로 유학을 가 조선 최초의 여의사가 돼 귀국하는 과정을 보면 최초라는 타이틀을 따기 위해서는 본인의 노력과 각성 외에도 여러가지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여러 사람의 지원과 시대적 여건이 받쳐줘야 가능하다는 것인데, 김점동은 아버지의 지원 외에도 입학한 후에 이화학당 안에 최초의 여성 전용병원인 보구여관이 개원하면서, 의술에 쉽게 접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또 선교사를 통해 영어를 익힐 수 있었고, 외국으로 유학할 수 있는 길이 마련됐던 것도 다 그런 시대의 흐름 위에서, 그녀는 자신의 길을 개척한 것이다.
하지만 김점동에게도 고민이 있었다. 결혼문제였다. 그녀에게 결혼은 신앙생활과 그녀의 꿈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여성의 직업과 꿈을 허용하지 않는 유교적가치 가부장적 가치관에 젖은 조선사회이기에 그녀는 망설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평범한 결혼을 하게 된다면 그녀는 꿈을 향한 날개를 펴보지도 못하고 접을 수 밖에 없었을텐데, 다행히 아내의 꿈을 지원해주는 남편을 만날 수 있었다.
독실한 신심을 가진 박유산을 만나 정동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부부의 연을 맺게 됐고, 그와 함께 미국 유학길에 오을 수 있었다. 김점동의 인생에는 신앙생활과 의학이라는 길로 채워져 있었는데, 박유산은 김점동의 이 두길을 모두 이해해주는 훌륭한 동반자였다.
김점동이 의사기 되겠다는 꿈을 가진 것은, 이화학당 시절이었다. 서양 의술로 언청이 환자를 치료해주는 것을 보고나서 였다. 언청이라는 이유로 고개를 들고 다니지 못하던 딸이, 이제는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있다며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환자 어머니를 보면서, 점동은 의술을 통해 사람들에게 행복을 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던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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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미국에 간 김점동은 고등학교에 입학해서 기숙사 생활을 했고, 남편은 홀 부인의 농장에서 일을 거둘어주었으니, 부부가 함께 기거하지는 못했다. 김점동이 박에스더라고도 불리게 된 데에는 남편의 성을 따르는 그곳 관습과 그녀의 세례명 에스더가 합쳐진 것이었다. 에스더는 히브리어로 '별'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드디어 오늘날 존스 홉킨스 의과대학으로 잘 알려진 볼티모어 여자 의과대학을 졸업하게 됐다. 동양여인이 그것도 어려운 의학을 전공했으니 그 어려움이야 충분히 상상이 된다. 하지만 경사를 앞둔 그녀에게 행복만 가득한 것은 아니었다. 졸업을 불과 3주 앞두고 남편 박유산이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는데, 그녀는 망부의 슬픔을 뒤로 하고 조선으로 돌아왔다. 평생을 함께 할 동반자를 잃은 상심이 얼마나 컸을지, 아마도 그녀는 이런 시련을 신앙심과 환자를 돌보는 일로 이겨낼 수 있지 않았을까. 미국에서 의사로 취업해 그곳에서 뿌리내릴 수 있었지만, 그녀는 조국 조선의 가난한 백성들 곁으로 돌아와 배움을 펼쳤던 것이다. 배운 지식을 남에게 베풀라는 아버지의 뜻을 잃지 않았던 것인지,
그러고 보면 그녀에게 아버지와 남편은 든든한 울타리였다. 아버지나 남편의 몰이해로 혹은 횡포로 불행해진 개화기 여성들이 많았던 것에 비하면, 김점동은 이런 끔찍한 불행에서 비켜갔다. 그것은 대단한 축복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사람은 김점동이 부와 명예를 추구하는 의사가 아닌, 더 많은 사람들을 진료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기꺼이 다가가는 의사가 될 수 있었던 밑받침이 돼주었던 것이다.
6년만에 귀국한 그녀는 예전의 보구여관으로 출근하게 됐고, 진료활동에 매진하는 한편 신앙생활에도 열심이었다. 콜레라가 창궐하자 치료와 예방을 위해 나섰고, 또 평안도와 황해도 지역에서 무료 진료, 간호학교와 맹아학교를 설립하고 학생들을 가르치기까지.. 진료와 선교, 그리고 교육까지, 그야말로 눈코 뜰새 없이 활동했을 그녀가 눈에 선하게 보이는 듯했다.
그녀의 활동 기간은 길지 못했다. 바쁜 생활로 인한 무리와 혹사가 병을 부른 것인지, 폐결핵이 발병했고, 결국 병마를 이겨내지 못했다. 우리 나이로 서른 다섯이라는 그 젊음을 뒤로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까운 인재였다. 그녀에게도 단명은 불행이었지만, 당시 환자들을 생각해보더라도 그녀같이 헌신적인 의사의 부재는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녀가 세상을 떠난 해가 공교롭게도 1910년, 조선인이 나라를 잃은 해였다. 조선은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졌는데, 김점동이라는 조선 여성이 남긴 유산은 적지 않았을 것이다. 서구 문명이 들어오는 개화기 그리고 여성이 나아갈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제시해준 것이다. 또 교육의 필요성과 그 배움을 타인을 위해 나누어 가면서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사용하고,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있다는 사례를 몸소 보여주었다. 그런 세상을 위해서 반상의 구별, 남녀의 차별은 없어져야 하는 것이고. 또 한가지, 그녀가 폐결핵으로 사망하면서 우리나라에 폐결핵 퇴치 운동과 연구활동, 크리스마스 실이 처음으로 발행됐다고 하는 걸 보면, 그녀의 죽음은 여러 면에서 긍정적인 각성을 일깨우고 안타까움을 불러일으킨 것은 분명하다.
김점동처럼 이렇게 어렵고 힘들게 최초의 길을 닦아 놓은 선구자들 덕에, 그 최초의 길들은 이제 무난한 길이 될 수 있었다. 이 책 처럼, 어린이들, 청소년들이 보는 책으로 조선 최초의 여의사 김점동을 담아낸 것이 마음에 들었다. 나 어렸을 때만 해도 김점동이 누구인지도 몰랐던 것에 비하면 격세지감마저 느낀다. 직업을 갖고 그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여성이라고 해야 퀴리 부인이 고작이었는데, 요즘 책을 통해 여러 분야에서 길을 닦아 놓은 여성들의 맹활약상을 접하게 돼서 뿌듯했다. 조선 최초의 여의사 김점동을 통해서도 이런 뿌듯함을 맛볼 수 있었다. 앞길이 구만리같은 어린 친구들은 이렇게 자신의 꿈을 이룬 최초의 인물들을 통해,자신이 앞으로 선택하고 성취할 수 있는 많은 가능성과 기회, 꿈을 발견하는 눈을 키웠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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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도 안타까운 것은 너무나도 빨리 이 세상을 떠나셨다는 것...
이 김정동 여의사의 죽음으로 우리나라에서 결핵 퇴치 운동과 연구활 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크리스마스실도 처음으로 발행했다니 돌아가셔도 이 세상에 도움을 주시네요.
1886년 5월. "학교에만 보내 주세요. 공부는 물론이고 먹여 주고 입혀 주겠습니다...." 이렇게 좋은 학교가 지금 존재한다면... 저도 가고 싶을 것 같아요.
가장 먼저 아버지의 깨우친 생각으로 그 시절에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는 점, 그런데 문득 생각나는 것은 세번째 딸인데 다른 세 분은 안 다니셨는지 궁금해지네요. 두번째 결혼을 하여 남편의 각별한 내조. 그 시절에... 지금도 말이 많은데. 아내가 공부를 하는 동안 밥을 지어 상을 차리고 청소와 바느질을 도와주는 배려심 깊고 자상하신 분! 묵묵히 지켜주시는 그 모습이 떠오릅니다. 대학 졸업시험 3주를 앞두고 그만 멀리 미국 땅에서 눈을 감으신 ... 그 힘든 시련에서도 이겨내신 분. 일에만 전념하고 싶으셨지만 부모님의 뜻에도 따른 김정동 선생님! 사진 한점을 보게 되어 너무나 기뻐요. p107
"나는 공부하는 게 쉬는 거야. 새로운 걸 알아가는 게 노는 것보다 더 신나고 즐거워." 이것이 바로 모든 부모가 바라는 공부의 동기. 이런 마음이 든다면 옆에서 조금 서포트만 해 주면 더할 나위가 없겠죠.
최초가 된다는 것은 수 많은 개척을 해 나가면서 하셨다는 것이겠죠.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간다는 것은 힘들지만 즐거운 마음으로 간다는 것은 행복이 아닐런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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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는 박에스더로 더 잘 알려진 조선 최초의 여의사 김점동에 관한 책이랍니다. 100년도 전에 조선에서 태어나고 자란 어린 소녀가 최초의 여의사로 조선의 어려운 국민에게 힘이 되어주는 의사가 되기까지의 일대기를 만나 볼 수 있었답니다. 어린 소녀지만 스크랜턴부부가 만든 이화학당의 네번째 학생이 된답니다. 선교사 스크랜턴 부부는 무엇하나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 하지 않는 조선의 여인들에게 배움에 대한 즐거움과 자신의 꿈을 찾을 수 있도록 배움의 터인 이화학당을 만들었답니다. 그 곳에서 김점동은 기독교의 믿음을 배우고 선생님으로부터 성실함을 배우고 더불어 여자이지만 자신을 발전시키고자 하는 자주적인 사고를 하면서 조선에 꼭 필요하다고 느꼈던 여의사가 되기 위해 노력합니다. 자신의 남편인 박유산의 도움으로 미국에 건너가 의사가 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조선으로 돌아와 조선의 많은 아픈 사람을 위해 고생을 마다하지 않은 모습을 떠올리게 되었답니다. 미국에서 불리웠던 이름인 박에스더. 우리에게 더 많이 불리워고 알려진 이름이 아닐까요. 그녀를 통해 진정한 봉사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답니다. 이화학당은 지금의 이화중고등, 대학교로 이어지는 전통있는 학교로 자리잡았고 김점동이 일했던 조선의 보구여관은 지금의 이화여대 부속병원으로 남아있다니 그 곳들 또한 역사의 한부분이라는 점을 다시 느끼게 되었답니다. 김점동을 통해 하나님의 믿음과 타인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들을 아이들이 느끼고 배웠으면 좋겠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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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점동 조선의 별이 된 최초의 여의사>라는 제목을 보면서 이름이 낯설었다. 그런데 김점동은 바로 박에스더 선생님이었다. 원래 이름은 김점동이고 세례명이 에스더인데, 미국으로 건너가 공부할 때 미국식으로 남편 박유산의 성을 붙여서 박에스더라고 부르던 것이 조선에 돌아와서도 그대로 불려지게 된 것이다. 딸과 함께 이 책을 읽으면서 깊이 감동했다. 우리나라에 이렇게 훌륭한 분이 계셨다는 사실이 자랑스럽고 또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다. 김점동, 박에스더는 어떤 분이었나? 미국 선교사 스크랜턴 부인에 의해 세워진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 여학교 '이화학당'의 네 번째 학생이었고 미국으로 건너가 서양의학을 공부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여의사가 된 분이다. 여자 의사가 없던 시절에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해 고통받는 수많은 여성들을 치료해주고, 더 나아가 간호학교와 맹아학교를 설립하여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까지 하셨다. 가난하고 어렵던 시절에 우리나라를 위해 평생 의료와 교육에 힘쓰다가 서른다섯이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셨다. '에스더'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별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정말 그 이름처럼 어두운 하늘에 반짝이는 별이 되어 많은 이들에게 힘과 사랑을 주고 가셨다. 요즘 아이들은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단순히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거나 아니면 잘 살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어른들이 공부 안 하는 아이들에게 "공부해서 남 주냐?"라는 말을 한다. 그런데 정말 훌륭한 사람들에게 공부란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돕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박에스더 선생님처럼 의사가 되어 아픈 사람들을 치료할 수도 있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울 수도 있다. 이 책을 읽다보니 아이를 키우는 부모로서 올바른 교육을 해야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아이가 왜 공부를 해야할까? 그냥 공부 잘 하라는 잔소리보다는 부모 먼저 자문해 볼 일이다. 학교 성적을 올리는 공부가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공부를 하는 큰 사람으로 키워야 하지 않을까. 여자는 교육을 받지 못했던 조선 시대에 태어나서 조선을 위해 공부하고 평생을 바친 박에스더 선생님의 이야기는 정말 값진 교훈을 줬다. 젊은 나이에 생을 떠났지만 오래도록 많은 이들에게 별이 되어 기억에 남을 것이다. 이 책은 마지막에 위인과 인터뷰한 내용이 있다. 물론 가상이지만 아이들에게는 훌륭한 분을 직접 만난 것처럼 친근하면서도 궁금한 내용들을 알 수 있어서 참 좋은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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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되었습니다"
시대를 앞서간다는 것 만큼 어렵고 힘든 일이 있을까? 요즘 세상에서도 앞서가는 행동은 사람들의 질책을 받기 마련인데 하물며 남녀 구분이 엄격하고 여자로 태어난 죄(?)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기회조차 없었던 조선시대에는 더할나위 없이 힘든 일이 아닐었을까 생각해본다. '최초'라는 말은 언제 들어도 신선함을 주는 단어이지만 그 당사자는 아마도 피를 쏟는 고통과 고난의 삶을 살았을리라 짐작된다. 김점동이란 이름은 생소해도 박에스더란 이름은 많이 알려져 있어 울 딸도 알고 있었다. 얼마 전 우연히 보았던 '제중원'이란 드라마와 흡사한 이야기. 같이 드라마를 몇 번 봐서인지 딸아이도 보구여관이나, 의료선교사 이야기에 관심을 많이 보였다. 김점동은 그 시대에는 거의 불가능했을 미국유학까지 가서 서양의학을 공부하고 미국에서의 편안한 생활을 뒤로 하고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받는 조선을 위해 귀국하여 헌신한 대단한 여자가 아닌가 생각한다. 그녀의 큰 뜻을 지지해준 부모도,남편이었던 박유산도 그 당시에는 볼 수 없었던 대단한 분들인 것 같고, 공부하는 아내를 위해 부엌일도 서슴치 않는 남편 박유산의 사랑에 감동도 받았다. 울 딸 조선시대 사람인데도 아빠보다 더 집안 일을 잘 도와준다고 신기해했다.ㅠㅠ 미국에서 폐결핵으로 죽은 남편을 묻고 갈등 끝에 조선으로 돌아와 최초의 여의사가 되어 많은 병마에 고통스러워하는 이들을 치료해주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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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초의 여의사 김점동 김점동이라 하면 몰라도 박에스더라고 더 잘 알려져 있는 분이십니다. 아이도 박에스더라고 하니까 금방 알더라고요.
여성이 공부를 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던 조선 시대에 미국 유학까지 다녀와 최초의 여의사가 되어 조선을 위해 조선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바친 분이십니다. 안타깝게도 너무 본인 스스로를 돌보지 못해 폐결핵으로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지만 김점동의 죽음으로 인해 우리나라에서 결핵 퇴치 운동도하고 연구도 하고 크리스마스실도 처음으로 발행되었다고 해요.
딸내미만 키우다 보니 이렇게 여자들의 이야기에는 눈과 마음이 더 가는건 어쩔수가 없나 봅니다. 그렇다고 김점동같은 삶을 산다면 과연 기쁠까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좋아하고 행복한 길이라면 말릴 수는 없겠지요. 김점동 본인도 본인이지만 그녀의 부모님도 보통분들은 아니시라는 생각이 듭니다.
책을 읽는데 아이가 그럽니다. "엄마 재밌어" 제가 그랬죠."책이 꼭 재밌어서 읽는 건 아니잖아" 아이가 또 "근데 엄마 이분은 너무 힘들고 불쌍해.그리고 유명하고 큰일을 하신분들은 왜 일찍 돌아가셔" 제가 할 말이 없더군요. 위대한 일인건 아는데 본인들의 삶은 힘들지 않았냐는 이야기임을 아이들도 이젠 아는거죠. "그래도 이런 분들이 있었기에 먼 훗날 사는 우리가 조금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것이 아닐까? 그래서 후손들은 이 분을 존경하는 거고" 그래도 아이보고 이렇게 살라고는 못하겠더라고요.
김점동의 부모님처럼 대담하지 못한 제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길은 아니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위해 묵묵히 한 길을 걸은 사람들이 있죠. 좋아하는 일을 통해 행복을 찾고 그 행복을 주변 사람들에게 나눠 준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김점동을 읽고 아이도 그런 모습을 배웠으면 알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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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위인전의 추세가 근대, 현대 인물을 .많이 다루는 것이 특징인 것 같아요. 그 추세에 따라서 자연스럽게 우리 아이도 많이 들어보지 못했던 인물 읽는 것을 무척 좋아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어요. 우리 아이와 제가 같이 접해보았던 김점동 이야기도 근대인물이어서 아이가 무척 흥미로워 하네요. 요즘 우리아이의 초등학교 도서관에 WH* 시리즈의 인물 만화책을 새로 들여놔서 아이가 그 책만 읽느라고 1학년 아이가 놀지도 않고, 집이나 학교에서 만화책만 읽고 있어서 심각한 고민이 있었는데요. 만화책이 아닌 인물책으로 김점동 이 책을 읽고 있는 아이를 보면서 잠시 안도하는 시간을 갖기도 했었네요. 김점동은 구한말 우리나라가 일제침략기의 인물로, 우리나라가 서양문물에 개방하기 시작되던 시점의 시대적 배경을 아주 잘 설명해주고 있어요. 최초의 이화학당 이야기부터 전개되고 있는데요. 미국인 선교사 스크랜턴 부인과의 만남부터 시작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서양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학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서양귀신이 미국으로 데려가 사람들 팔 것이라는 오해를 하는 것까지 재미있게 들려주고 있어요. 스크랜턴 부인이 정동교회 목사인 아펜젤러를 만나러 왔다가 아펜젤러를 돕고 있는 아버지의 부탁으로 이화학당의 네 번째 학생이 됩니다. 이화학당에 입학한 점동은 기도하고 성경을 보는 기독교 신자가 되어있고 에스더라는 세례명까지 받습니다. 열다섯이 된 점동은 졸업을 하고 보구여관이라는 최초의 여성전문병원에서 통역을 합니다. 입술갈림증의 환자를 수술하는 장면을 보게된 점동은 커다란 충격과 감동을 받고 의사가 될 것을 결심합니다. 점동은 박유산을 소개받고 부부의 연을 맺게 됩니다. 점동은 홀부인과 선교회의 도움으로 남편과 함께 미국유학길에 오릅니다. 유학중에 남편을 폐결핵으로 잃게 됩니다. 6년동안 미국생활을 접고 조선으로 돌아온 점동, 박에스더는 멋진 의사가 되어 보구여관에서 진료를 시작합니다. 최선을 다해 봉사하는 삶을 실천한 에스더의 모습에 사람들은 감동을 받습니다. 고종황제에게 큰상을 받기도 한 박에스더는 남편과 같은 병인 폐결핵으로 눈을 감습니다. 서른다섯이라는 너무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개화기의 급변하는 세상을 살아간 에스더, 그녀가 살던 세상에서 감히 도전하기 어려웠던 의학을 공부하고 조선과 조선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고 봉사하는 삶을 살았던 에스더를 통해 깊은 감동을 받았어요. 나 자신만을 위하고 자신만의 이익을 위해 살아가는 우리의 현실앞에서 큰 도전과 감동이 밀려오기도 합니다. 이런 뭉클한 감동을 우리 아이가 또, 우리의 아이들이 흠뻑 젖어보기를 바라며 각자의 꿈을 미래의 계획을 가져보는 기회를 가져보기를 바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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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가 유별했고, 또 남존여비사상이 팽배했던 조선시대에 여성이 학교를 다니고, 급기야는 의사가 되었다는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도 놀라운 일이다. 그런데 유복한 집안의 딸도 아니었건만, 오로지 나라를 위하고 내 민족에게 도움을 주겠다는 일념하에 힘든 공부를 해낸 김점동을 알게 되어 참 기분이 좋았다. 조금 됐지만, SBS에서 방영했던 <제중원>이라는 드라마가 생각났다. 물론 그 드라마도 주위의 핍박과 편견어린 시선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의술을 펼쳐나갔던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조선시대에 미국유학까지 다녀왔으니 이 김점동은 확실히 용감한 사람임에는 분명한 것 같다. 변화 자체를 두려워하지 않았고, 그 변화를 자신에게 알맞게 개척해나갈줄 알았다는 소리이니 말이다. 지식인들이 대단하다고 생각되는 경우는 자신이 배우고 익힌 모든 기술과 지식을 자신의 부귀영화에 쏟지 않고 남을 위해 배려하고, 사용한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흔히들 공부해서 남주냐, 니 공부다~ 라는 말을 하곤 하지만, 죽어라 하는 공부가 단순히 어떤 목표치를 달성하기 위함이던지 자신의 성공발전을 위해서라면 그건 정말 편협한 사고이고, 그런 생각을 하고 덤벼들었다면 목표를 달성한 후 더 이상의 발전은 없을것이 분명하다. 이화학당의 4번째 학생인 김점동은 언청이수술의 성공을 보고 난 후 의사가 되겠다 결심을 한다. 만약 그 수술을 와~! 대단하다! 수준에서 끝나버렸다면 굳이 힘든 공부를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녀는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받는 조선인들에게 도움을 주겠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고, 그 목표를 위해 최선을 다했던 것이다. 자신이 얻은 지식을 사회에 돌려주겠다 노력했고, 사랑과 봉사로 헌신한 삶을 살았다. 폐결핵으로 너무나도 이른 나이인 35세에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이 못내 아쉬웠다. 그녀가 건강했더라면 더많은 의술을 펼쳤을것이고 그로 인해 밝음과 희망을 선물받았을 사람들이 많았을텐데 말이다. 그녀의 열정이 가득한 삶 이야기를 만나 흐뭇했다. 아이들에게는 이런 귀감이 되는 동화를 자주 읽게 하는 것이 좋다는 생각도 해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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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꾼 작은 씨앗 8번째 이야기입니다. 1886년 5월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 여학교 '이화학당'이 세워졌지만 학교에는 공부할 학생이 없었습니다. 우리 아이도 김점동선생님처럼 좋아하는 일을 통해 행복을 찾고, 그 행복을 주변 사람들에게도 나눠주는 이 세상의 작은 씨앗과 같은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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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면서 예전에 TV에서 본 <제중원>이 오버랩되어 제 머리속에 들어오더군요. 물론 그 이야기가 전부는 아니지만, 그 시대적 상황이 비슷하기도 해서인가 봅니다. 세상을 바꾼 작은씨앗 시리즈가 제 마음을 많이 감동시키네요. 아이도 이 시리즈를 참으로 좋아하구요.
김점동.. 이름이 참으로 조선시대스럽네요.. 예전엔 정말 이런 이름들이 참으로 많았죠.. 또 이런 이름들이 세상에 많이 알려지는 유명인들도 많았죠.. 우리 어렸을 때에도 이름이 2개정도 갖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집에서 부르는 이름, 밖에서 부르는 이름...
조선시대에 여성이 공부를 해서 의사가 된다니... 참으로 상상할 수도 없는 일들이었겠지요. 하지만, 그 뒤에서 버팀목이 되어준 부모님과 선생님.. 또 남편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선교사의 도움으로 미국에 가서 의사가 되지만, 남편이 폐결핵으로 목숨을 잃었죠. 편한 미국생활을 마다하고 조선으로 돌아와 조선사람을 위해 의술을 펼친 분이시죠. 바쁘게 병원생활을 하면서도 간호학교와 맹아학교를 설립하고 조선의 소외된 자들을 위해 많이 힘쓰신 분입니다. 하지만, 폐결핵으로 저세상으로 떠납니다. 너무도 젊은 나이였지만, 폐결핵의 담을 넘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분의 노력으로 우리나라의 의술이 발전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남을 위해 일한다는 것은 참으로 위대해 보입니다. 그런분들에게는 자신의 삶보다는 타인의 삶이 먼저 보이나 봅니다. 자신이 아파도 환자들에게 온통 신경이 가 있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그런 성인의 모습을 닮아가는 우리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