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식인 추천도서목록에 이 책이 있었기 때문에 읽게 된 것 뿐, 애초부터 이런 타이틀의 모든 사물들과는 거리가 있는 타입이다. 한 때의 분위기와 특유의 냄비근성, 대중심리에 편승하여 한 시기를 휩쓰는 '느림'이나 '웰빙', '요가' 같은 것들. 그 것이 비록 '좋은 것'이라 해도, 갑자기 너나 나나 읊고 다니면, 내 관심은 정반대로 사그라들고 말았다. 그러나 나는 '제대로 한번 접해본 적도 없으면서 비판하는 것'이 얼마나 웃긴 일인지 알고 있고, 이런 타이틀 중 단 한권의 책마저 거부할 만큼 선입견에 가득 찬 사람은 아니기에 이 책을 펼쳤다. '밀란 쿤데라'의 '느림'은 상당히 묘한 내용이다. 한 남자와 그의 아내 '베라'가 과거에는 성이었던 호텔에서 하룻밤을 묵으면서 생긴 일, 그 남자가 머리속으로 상상하는 몇 가지 이야기가 뒤얽혀서 전개된다. 한 가지 어이없는 것은, 그 남자와 아내의 이야기, 혹은 그가 상상하는 몇개의 이야기 모두가 '느림'과는 전혀 상관없는 우스꽝스러운 에피소드라는 것이다. (나는 정말 작가의 의도를 이해할 수 없다!) '느림','속도','망각'과 관련된(0.1%라도 결부된!) 이야기는 단지 처음과 끝 부분에 몇 장 서술되어있을 뿐이다. 그래, 그 앞장과 맨 뒷장의 내용은 정말 좋았다. 그러나 작가가 나름대로 독자들에게 스페셜한 결말(?)을 선사하려고, 상상 속의 인물이 마지막 부분에서 현실 속에 겹쳐지기도 하는데, 이 것은 나에게 어떤 감동이나 짜릿함도 주지 못했다. 중간의(내가 보기에는) 쓸데없는 에피소드들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모르게 난잡한 성(姓) 묘사와 시시껄렁한 이야기 뿐이다. 혹자는 나를 '책 이해도 제대로 못한 얼간이'라고 나무랄지도 모르지만, 모두가 쓴 리뷰들을 읽어보라! 제 아무리, '많은 것을 느꼈다!'고 쓴 사람도 '인상깊은 구절'에는 99% 앞 부분, 혹은 뒷부분의 내용만을 발췌했다. '느림'을 읽고, 저자의 작은 견해(앞부분+뒷부분의!)를 반갑게 수용한 나로서는, 나의 이 태도 자체가 '느림'에서 벗어난 행동이라는 생각에 공연히 씁쓸해질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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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스킨트가 그의 단편집 <깊이에의 강요="">에서 말했듯이, 나에게도 일종의 '문학적 건망증'이라는 것이 있나보다. 사실, 쿤데라의 <느림>은 이번이 세번째로 읽는 것이지만, 읽을 때마다 꼭 처음 읽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 내용과 그 줄거리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 같은 느낌. 하지만 이 말은 정말 밑줄쳐 두고 싶은 문구는 어김없이 이미 밑줄이 쳐져 있지 않은가! 이 정도면 나도 충분히 '문학적 건망증'의 심각한 상태에 들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느림>은 몇가지 에피소드가 얽혀있다. 중세의 T부인과 젊은 기사의 일화, 정치인 베르트와 여자 방송인의 이야기, 체코 동물학자의 이야기, 그리고 어떤 젊은 학자와 쥘리의 이야기... 이 이야기들이 옛날 성을 개조한 호텔을 배경으로 작가인 베네의 상상 속에 하나의 소설로 꾸며진다. 우선 이들 인물의 공통된 특징은 모두 우스꽝스러운 사건 속에 빠져든다. 그것은 자신들이 스스로 초래한 상황이라는 것도 공통적이다. 기사는 T부인과 후작과의 밀회의 희생자로, 여자방송인은 베르트의 정치적 쇼맨십의 희생자와 그녀는 쫓는 남자친구인 카메라맨은 여자방송인의 변덕의 희생잘고, 젊은 학자는 자신이 경멸하는 춤꾼 정치인들과 같은 춤꾼으로 타락하는 과정의 희생자로, 체코 곤충학자는 체제와 정치와 자기 기만의 희생자로, 이들 모두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이다. 진지한 사람들은 오직 이 이야기 속에 나오는 인물들 뿐이다.
그러나 작가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속도에 관한 공식은 중세의 기사와 현대의 희극배우들이 얼마나 차이가 있는가를 보여준다. 중세의 기사는 자신의 우스꽝스러운 사건을 느린 행동을 통해 기억하려고 하지만, 현대의 인간들은 모두 자신의 그 우스꽝스러운 행동을 속도를 통해 잊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속도는 망각에 비례하고, 기억에 반비례한다...
현대의 인간들이 속도를 통해 망각하고자 하는 것은 곧 자신의 결점이 되는 것이고, 그러한 결점들은 또 다른 각색과 자기기만을 통해 재생산될 것이다. 그것이 인간의 역사가 될 것이고, 우리의 미래의 삶이 될 것이다. [인상깊은구절] 속도는 망각에 비례하고, 기억에 반비례한다...느림>느림>깊이에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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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림]이라는 단어는 내게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버터빵의 냄새처럼 눅눅하고 나긋나긋하고 나른한... 약간은 관능적인 느낌을 준다.
나는 느림보다. 밥먹는 것도 느리고 걷는 속도도 느리다. 게다가 말도 천천히 한다. 사실 느린것은 내가 아니라 내 몸일 것이다. 머리속은 미친듯이 돌아가는 탈수기처럼 온갖 생각들을 바쁘게 짜내고 있지만, 정작 내 몸이 나 몰라라~인걸 어쩌겠는가. 때문에 누군가에게 내 속내를 말할때면 '말'은 '생각'을 좇다가 결국 입에서 엉겨붙는다. 어쩌면 내 몸은 그런 나를 위해서 느려졌을지도 모를일이다. 나의 생각을 하나씩 쪼개어 천천히 길게 늘어놓음으로써 순간의 생각을 표현해 버리고 난 이후의 허망함과 경솔함을 막을 수 있을테니까 말이다.
아주 천천히 무슨 일에 열중하다보면 문득 내가 이 일을 즐기고 있구나라고 느낄 때가 종종 있다.
가령 건강을 잃기 전에 나는 등산을 무척 좋아했었는데 그때는 그저 정신없이 오르기에만 바빴다. 그리고 정상에서의 짜릿한 성취감 이후에는 늘 지루하고 피곤한 곤욕스런 하산길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였다.
아직 몸이 채 회복되지 않은 지금도 가끔씩 운동삼아 산을 찾기는 하지만 이전처럼 경쟁하듯 탐욕스럽게 정상을 공격하지는 않는다. 정상은 커녕 천천히 계단을 오르는 심장의 고동마저도 내겐 버겁다. 다행히 아직 내게 주어진 시간은 많고 난 굳이 서둔 걸음으로 심장의 고동을 빨리할 이유가 없다. 발걸음은 점차 느려지고 나는 눈을 살짝 감고 천천히 발밑의 흙을 느끼며 한발한발을 꾹꾹 눌러 밟는다.
머리속 복잡한 생각들은 어느덧 천천히 머리로부터 발끝으로 내려와 발바닥을 통해 전해지는 부드러운 흙과 낙엽의 부서지는 소리 속으로 흩어지고, 나는 어느순간 수건을 목에 두르고 약수통을 든 손을 이리저리 바꿔가며 내려오는 대머리 아저씨의 귀에 꼽은 라디오 소리도, 화려하게 차려입은 아줌마들의 수다소리도, 누군가의 강아지와 아이들의 쨍쨍거림도 의식하지 못한 채,마치 난장이와도 같이 작아져 땅바닥에 찰싹 달라붙은 듯 대지의 고동소리와 나의 심장소리를 일치시키게 된다.(아~ 목적은 사라지고 행위만이 남는 이 순간을 나는 얼마나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고 또 사랑하는지...)
내가 느려지는 바로 그 순간 주변의 모든 사물들이 하나씩 나의 의식 속으로 뛰어들기 시작한다. 어느 계곡 바위틈엔가 얼음장이 깨지는 소리, 메마른 나뭇가지를 스치는 바람소리, 이름 모를 새의 울음소리 등등... 이제야 비로소 산은 숨을 쉬기 시작하고 나는 그 숨소리에 귀기울인다.
밀란쿤데라는 이 책에서 [느림]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 느림과 기억 사이, 빠름과 망각 사이에는 어떤 내밀한 관계가 있다. 지극히 평범한 상황 하나를 상기해 보자. 웬 사내가 거리를 걸어가고 있다. 문득, 그가 뭔가를 회상하고자 하는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순간, 기계적으로, 그는 자신의 발걸음을 늦춘다. 반면, 자신이 방금 겪은 어떤 끔찍한 사고를 잊어버리고자 하는 자는, 시간상, 아직도 자기와 너무나 가까운, 자신의 현재 위치로부터 어서 빨리 멀어지고 싶다는 듯이 자기도 모르게 걸음을 빨리한다. 실존 수학에서 이 체험은 두개의 기본 방적식의 형태를 갖는다. 느림의 정도는 기억의 강도에 정비례하고, 빠름의 정도는 망각의 강도에 정비례한다. -
우리네 사람들은 왜 그리도 서두르는지. 과연 그의 말대로 무언가를 빨리 잊고 싶어서일까? 참으로 사람들은 '과정'속에 있음을 못 견뎌 하며 하루빨리 결과에 도달하기를 채근한다. 한 '결과'와 다음 '결과'사이에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과정'은 성가신 존재일 뿐이다. 결국 '과정'은 어떤 '목표'를 이루기 위해 뛰어넘어야 할 하나의 장애로 쫄아들고 만다.
나 역시도 나의 깨달음의 [느림]에 대해 초조함을 종종 느낀다. 하지만 결코 서두르고 싶지는 않다. 밥을 천천히 씹어 삼키듯 난 나의 인생을, 나의 시간을 나름대로 천천히 소화하고 있는 것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느림]이지만 그 속에 잠겨 허우적대다 보면 어느새 나는 먼 거리를 가게 된다.
다른이의 빠름은 날 슬프게 한다. 난 도무지 그 빠름에 익숙해 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어쩌다 상대방에 이끌려 속도를 내다가도 불현듯 두려운 마음이 들어 중도에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야 만다.
저마다 [빛의 속도]를 외치며 내어닫는 오늘이지만 나는 나의 [느림]을 고수하련다. 그것이 비록 시대를 역행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의 [느림]을 비단 '세계내 존재'로서의 '나'를 확실히 인식하기 위한 자의식의 수단으로서 뿐 아니라 그 속에 녹아있는 아찔한 황홀경 때문에라도 계속 간직하고 싶다. 앞으로의 내 인생에 있어서도 또 사랑에 있어서도. [인상깊은구절] 뛰고 있을 때 그는 자신의 체중, 자신의 나이를 느끼며,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자신과 자기 인생의 시간을 의식한다. 인간이 기계에 속도의 능력을 위임하고 나자 모든 게 변한다. 이때부터, 그의 고유한 육체는 관심 밖에 있게 되고 그는 비신체적, 비물질적 속도, 순수한 속도, 속도 그 자체, 속도 엑스터시에 몰입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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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 쿤데라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지금부터 약간은 마음 아픈 이야기를 하게 될 것이다. 아예 작정하고 비판을 하기로 했지만 마음이 아픈 것은 사실이다. '느림'에서는 느림에 대한 성찰이 있는가.
피에르 쌍소의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와 같은 수필적 성향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는 느림에 대한 생각하나와 이야기 전체가 따로 논다. 쿤데라가 잘 쓰는 복수의 주인공 시점에서 하나의 사건으로 뭉쳐지는 결말부분에서도 무엇하나 느껴지는 것이 없다.
이는 너무 산만하고 의미가 없다. 물론 '느림', '속도'에 대한 주제는 있다. 비교적 책의 앞부분과 끝부분에서 느낄 수 있는 오토바이와 속도감에 대한 부분이 그렇다. 그러나 이런 생각 하나가 소설 전체를 지탱해 주기에는 무리가 있다. 걷는것과 타는 것에 대한 생각. 심지어 어린아이들의 여러가지 걸음마(인라인 스케이트, 킥보드, 자전거등) 에서도 우리는 점점 느려지지 못하는 속도를 본다. 이건 성찰 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얇다.
성(性)에 대한 대담성은 오기라고밖에 보여지지 않는다. 이미 무라까미 류식의 표현에서 심한 충격을 받아온 터라 그런 류의 대담함은 충격조차 되지 못한다. 도대체 이 짧은 분량의 소설에서 무엇을 읽어낼 수 있는가. 이 책을 읽으며 시간을 잠시나 느려뜨리는 것이 오히려 속도에 충실한 것이 아닌지. 쿤데라의 소설에서 자주 느껴지는 체코인들에 대한 긍지, 또는 비판, 특수 상황에 대한 글들은 이제 지겹다.
프랑스와 근접 유럽 속에서 체코이야기를 슬며시 감추고 있는 듯하나 소설 내용과는 상관없이 튀는 그런 내용은 쿤데라의 예술성을 의심케 한다. 조국을 생각하는 맘이 지나친 건지 소위 뜨고 나서의 그의 소설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오히려 심해지는 그의 조국에 대한 이야기들이 이제 지겨워 지고 있다. 특히 '느림'에 나오는 체코인의 설정은 혼자 주인공들 속에서 튀는 그런 모양이다.
쿤데라의 다른 소설과는 달리 읽고 나서 짜증이 났다. 그나마 속도에 관한 세심한 짧은 글(이 소설은 장편이 될 까닭이 없다)로 위로를 삼는다. [인상깊은구절] 속도는 기술 혁명이 인간에게 선사한 엑스터시의 형태이다. 오토바이 운전자와는 달리, 뛰어가는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의 육체 속에 있으며, 끊임없이 자신의 물집들, 가쁜 호흡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뛰고 있을 때 그는 자신의 체중, 자신의 나이를 느끼며,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자신과 자기 인생의 시간을 의식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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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림과 기억사이, 빠름과 망각 사이에는 어떤 내밀한 관계가 있다. 지극히 평범한 상황 하나를 상기해보자. 웬 사내가 거리를 걸어가고 있다. 문득 그가 뭔가를 회상하고자 하는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순간 기계적으로 그는 자신의 발걸음을 늦춘다. 반면 자신이 방금 겪은 어떤 끔찍한 사고를 잊어버리고자 하는 자는 시간상 아직도 자기와 너무나 가까운 자신의 현재 위치로부터 어서 빨리 멀어지고 싶다는 듯 자기도 모르게 걸음을 빨리한다. 실존 수학에서 이 체험은 두 개의 기본 방정식 형태를 갖는다. 느림의 정도는 기억의 강도에 정비례하고, 빠름의 정도는 망각의 정도에 정비례한다...
본문에 나오는 내용의 일부다. 이 글의 첫부분에 이미 작가는 주제를 내비치고 있다. 몇개의 다른 이야기들을 그 이야기의 인물들을 실제의 인물이 아닌, 작품의 실제적 화자로 등장하는 작가(주인공)의 소설 속의 상상의 인물이라는 독특한 이중적 구조로 이루어진 소위 액자소설의 형태를 갖춘 소설이다. 인물 속의 인물, 이야기 속의 이야기, 구조 안의 또 다른 구조, 단락 단락의 맺고 끊김... 읽는데 주의를 필요로 하는 구성을 가진 작품이지만 독자의 흥미를 유발시키는데는 좋은 효과를 가진 것 같다. |
| "우리 시대는 망각의 욕망에 사로잡혀 있으며, 이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속도의 악마에 탐닉하는 것이다." 쿤데라의 책에는 그 흔한(?) 평론이 없다. 쿤데라 자신이 그것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독자와 자신의 직접적인 소통만을 원하는 까닭이다. 어떻게 해석해도 좋으니 제발 자기 자신의 글만을 통해 이야기하자는 것이다. 나같은 얼치기들은 당황하게 된다. 아, 내가 이걸 제대로 읽기나 한 건가. 항상 모범 답안(?)에만 기대어 왔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런 기회를 통해서라도 내 나름의 글을 읽는 방법을 배워가는 것도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싶어 과감히 책을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느림...어떻게 보면 참 몽환적인 글이다.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고, 그 부분들이 이리 저리 엮여 있다. 18세기 "성(城)"이었던 20세기의 "호텔"에서 일어나는 일들인데, 쿤데라는 한때의 "성"이 "호텔"로 전락해버린 이 시대를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이 호텔 안에서는 18세기와 20세기 말이 공존한다. 물론, 주인공의 상상에 의해서 가능한 것이지만 말이다. 여러 시점이 사용되면서 처음엔 혼란스러웠는데, 나중엔 충분히 흥미로웠다. 18세기의 T 부인과 기사의 기품있던 (어쩌면, 풍류가 있었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겠지만) 사랑놀음은, 20세기 말에 이러 "호텔" 안에서의 천박하고 우스꽝스러운 사랑놀음으로 변질되고 만다. 그리고, 사람들은 Being이 아닌 Appearance에만 천착하게 된다. 카메라만을 의식하며 많은 이들로 하여금 자신에게 관심을 갖게끔 하고 싶어 안달이 난 '춤꾼'들의 모습들이라니... (이 책을 읽어보면 '춤꾼'에 대한 쿤데라의 개념 정의와 그 적용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는데, 생각할 거리가 많았다.) 무엇인가 중요한 것들은 자꾸만 잊혀져 가고, 그 껍데기들만 번지르하게 남겨진 시대. 망각의 욕망에 사로잡혀 속도의 악마에 탐닉하고, 종국엔 자기 자신마저 망각해버리는 시대. 모든 것은 단순히 스타일로만 남은 시대... 이 책의 처음 부분에 이런 말이 있었다. "두려움의 원천은 미래에 있고, 미래로부터 해방된 자는 아무 것도 겁날 게 없다."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미래 자체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미래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단지 지금 이 순간에만 집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조금 더 여유를 갖고서, 세상을 관조하며 신의 창(窓)을 바라보면서 살아갈 수도 있을텐데 그저 옆사람의 빠른 발걸음에 치여서 그것만 따라 아둥바둥 살아가는 건 아닐까. 무엇을 바라며 이렇게 빠르게 살아가는 것일까. 자신의 시간과 자신만의 계절도 잊은 채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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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로움과 게으름과 느림과의 관계는? 혹간 모두 동일시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아마도 산업이 발달하면서 우리 주위에 널려있던 그 자연들과 함께 느림도 없어져버린듯 하다... 환경을 공부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오염과 그 속도에만 치중하다보니 이런 문학적 소양을 넓힐 기회가 없었는데, 환경철학 쪽에 관심이 있다면..이 책은 한 번 읽어볼 만한 책이라고 하고 싶다. 이 책에서 쿤데라가 말하는 느림이라는 것을 생각해보고, 그 뜻을 이해했다면... 이젠 우리가 취해야할 행동이 어떤 것인가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느림의 미학을 내가 보기 쉽게 책으로서 알려준 쿤데라에게 감사한다. [인상깊은구절] 오토바이 위에 몸을 구부리고 있는 사람은 오직 제 현재순간에만 집중할 수 있을 뿐이다. 그는 과거나 미래로부터 단절된 한 조각 시간에 매달린다. 그는 시간의 연속에서 빠져나와 있다. 그는 시간의 바깥에 있다. 달리 말해서, 그는 엑스터시 상태에 있다. 그런 상태에서는 자신의 나이, 자신의 아내, 자신의 아이들, 자신의 근심거리 따윌 전혀 알지 못하며, 따라서 그는 두려울 게 없다, 두려움의 원천은 미래에 있고, 미래로부터 해방된 자는 아무것도 겁날 게 없는 까닭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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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으로 만난 밀란 쿤데라의 작품은 상당히 난해했다.하지만 그 난해함에 반해서 그의 또 다른 작품<느림>을 찾게 되었다.이 작품 역시 난해하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가벼움과 무거움에 관한 이야기가 소설 전반에 흐르고 있었던 것처럼 <느림>에서는 빠름과 느림에 관한 기억이 소설에 전체적으로 흐르고 있다.밀란 쿤데라의 소설이 어려운 것은 한 가지의 대상이 어떤 기억을 떠오르게 하고,그 기억이 또 다른 기억을 이야기하는 이야기 방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그래서 소설을 읽으면서 쉽게 빠져들지 못하고 자꾸 이야기의 흐름이 단절된다.각 장마다 내용 또한 철학적인 사유를 요구하고 있어서 이 작품은 느리게 읽지 않으면 절대 이해할 수가 없다. 저자가 느림을 말하기 위해서 일부러 이야기의 흐름을 끊어 놓는 것처럼 보인다.
화자(밀란쿠)와 아내 베라는 운전 중 빠르게 지나가는 오토바이를 보고 느림과 빠름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눈다.속도의 즐김은 오직 제 현재 순간에만 집중 할 수 있을 뿐이다.그는 과거나 미래로부터 단절된 한 조각 시간에 매달린다.그는 시간의 연속에서 빠져나와 있다.그는 시간의 바깥에 있다.(P6) 속도는 기술 혁명이 인간에게 선사한 엑스터시의 형태이다.어찌하여 느림의 즐거움은 사라져버렸는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한가로움이 빈둥거림으로 변질 되었다.(P7)
느림에 대한 그의 기억은 18세기의 정신과 예술을 가장 잘 드러낸 문학 작품 가운데 하나인 지금으로부터 200년전 비방의 단편소설 속 T부인의 이야기로 이어진다.T부인은 기사를 정부로 둔 백작부인의 여자친구다.T부인은 후작이 남편에게 의심받지 않도록 어떤 방패막이 역할이 필요해서 기사를 가짜 정부라는 임무를 수행하게 한다.화자는 이 소설이 18세기의 정신과 예술을 가장 잘 드러낸 문학 작품으로 평한다.18세기의 에피쿠로스는 신중하고 절제된 쾌락만을 가치 있게 평한다.하지만 18세기는 예술을 통해서 쾌락을 도덕적 금기의 안개에서 빠져나오게 했다.T부인은 쾌락주의의 아킬레스건이다.T부인의 이야기가 관능적인 이유는 바로 템포의 느림에서 생겨난다.느림과 기억사이,빠름과 망각사이에는 어떤 내밀한 관계가 있다..느림의 정도는 기억의 강도에 정비례하고,빠름의 정도는 망각의 강도에 정비례한다.(P48)
그들이 묵고 있는 호텔(성)은 T부인의 이야기를 기억나게 하는 곳이다.성은 200년전 T부인의 쾌락의 장소였다.또한 그곳은 세미나,강연,수영장,텔레비젼의 아프리카 국가의 아이들을 떠올리게 하는 곳이다.그의 기억은 다시 지식인 베르크의 행동으로 연결된다.베르크에 대한 기억은 아프리카의 소녀가 20년후 여류 연출가로 성장한 임마쿨라타의 기억을 떠오르게 한다.그는 베르크와 같은 정치인들을 춤꾼이라고 풍자한다.오늘날의 모든 정치가들이 어느 정도는 다 춤꾼들이요,모든 춤꾼들이 또 정치에 관여하고 있는데,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들을 서로 혼동해서는 안 된다.춤꾼이 여느 정치가와 다른 것은 권력이 아니라 명예를 갈구한다는 점이다.(P25) 그들이 유혹하고 싶은 대중은 얼굴이 없는 보이지 않는 다수의 군중이다.춤꾼이 된다는 것은 하나의 단순한 열정만은 아니며,그것은 또한 한번 들어서면 다시는 벗어날 수 없는 도로이기도 하다.오직 TV만이 그의 유일한 주인이요,정부요,첩일 뿐..(P98)
사랑의 방식을 이야기하면서 화자는 선택되었다는 것의 신학적개념과 사랑을 연결시킨다.임마쿨라타와 같은 사랑인 되쫒겨남은 전락이라 한다.화자는 곤충학자의 우울한 긍지를 1968년 프라하의 봄에 빗대어 이야기한다.반항하는 인간 시지푸스의 개념,소설 속에서 난교파티와 현실의 수영장의 장면,여행길에서 만났던 오토바이는 다시 현실의 벵상으로 연결되고,18세기 기사와 현재의 사내의 만남,이야기의 흐름이 너무 복잡해서 어떤 면에서는 정치풍자처럼 보이고,또 어떤 면에서는 현실과 환상의 조합처럼 보인다.그가 앞으로 나아갈수록,그의 걸음걸이들은 느려진다.저 느림 안에서,나는 행복의 어떤 징표를 알아보는 듯하다.(P181) 어쨋든 그는 느림이 행복이라고 말하고 있다.너무 빠르게 잊혀져가는 것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다. 이해되지 않는 부분은 다른 이의 리뷰를 읽어봐야겠다. |
| 쿤데라의 글은 나무와 같다. 이 가지 저 가지에서 글을 시작한다. 서로 상관없는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그러다가 어 느순간, 그 가지들이 겹쳐서 하나의 줄기가 만들어지고.. 그 아래 뿌리까지 훝어 보게 되는 순간이 나타난다. 하나씩 베일을 벗기는 기분이다. 사람의 마음이란 이런 것이구나.. 이 책은 느리다는 것과 빠르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기억과 망각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기억과 망각이라..이것은 그의 첫번째 책인 <농담>에서부터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거쳐 <불멸>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나타나는 그의 주제이다. 그는 망각의 편도 기억의 편도 들지 않는다. 그는 다만 기술할 뿐이다. 어느 쪽이 좋은지 묻지 마시오.. 다만 알아두시오... 짧고 가벼운 느낌의 글이다. 몇개의 에피소드의 모음집 같은.. 왜 이런 글을 썼을까? 궁금해 했지만, 스스로 변명을 하고 있다. 농담을 해보고 싶었다고.. 그렇다면 같이 웃어주지. 쿤데라의 농담은 진지하면서도 유쾌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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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마지막페이지를 읽자마자 리뷰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느림].
밀란 쿤데라 저서 [정체성]을 읽고 무작정 집어들게 된 책..[느림].
솔직히 이 책을 읽는 내내 이 책이 [느림]이라는 단어와 무슨
연관성이 있는건지 도무지 감을잡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문득드는 생각은 [빠름]이라는 단어보다 [느림]이라는
단어를 찾기위해 이 책을 집어들게되었다는것을,
느림과 관계된 책을 읽기위해서가 아니라 내 스스로가
책을읽는동안 [느림]을 경험하기위해서였다는것이다.
나에게 느림이란 그저 지금의 속도보다 조금 천천히,그러나
늦장이 아닌 그런 어중간한 상태로 생각되어졌었는데
앞만보고 달리기보단 남들보다 한발자국 뒤에서서 전체를
볼 줄 아는 눈을 가지는것이 [느림]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 책이었다.
책속의 또 다른 나와 그의 부인의 꿈으로 연결되는 이 책의
이야기가 어느덧 내게 많은걸 일깨워준 것 같다... [인상깊은구절] 우리는 쾌락 안에서 쾌락을 위해 살 수 있으며 행복할 수 있는가? 쾌락주의의 이상은 실현 가능한가? 그 희망은 존재하고 있는가? 적어도, 그 희망의 여린 빛이나마 존재하고 있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