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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성에 도전한 한 인간의 일대기-그러나 칼비노 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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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남작가의 큰아들이 어느날 아침식사 때의 말다툼으로 나무 위에 올라간 뒤부터 그 뒤 평생동안 나무에서 내려오지 않고 산다. 그는 원하는 모든 것을 나무 위에서 구하고, 나무 위에서 사람들을 돕고, 고향의 배신자와 해적들을 소탕하고, 나무 위에서 스스로 독학하여 당대 철학자들과 서신왕래를 하고, 나무를 타고 스페인까지 갔다오는가 하면, 심지어는 나무 위에서 나폴레옹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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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남작가의 큰아들이 어느날 아침식사 때의 말다툼으로 나무 위에 올라간 뒤부터 그 뒤 평생동안 나무에서 내려오지 않고 산다. 그는 원하는 모든 것을 나무 위에서 구하고, 나무 위에서 사람들을 돕고, 고향의 배신자와 해적들을 소탕하고, 나무 위에서 스스로 독학하여 당대 철학자들과 서신왕래를 하고, 나무를 타고 스페인까지 갔다오는가 하면, 심지어는 나무 위에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만나기도 한다. 죽을 때조차 하늘에서 다가온 기구에 매달려 어디론가 가버린다는 것이다. 코지모가 나무 위에다 천막을 만들고, 작은 폭포를 끌어다 나무 위에다 세면장을 만들고, 개를 길들여 부리고 하는 이야기들은 신난다. 이런 류의 이야기는 <15소년 표류기>나 <로빈슨크루소의 모험=""> 따위를 읽을 때부터 언제나 나를 매료시켰다. 無에서 생활을 구축해나가는 이야기. 사람들의 세계와 격리되어 스스로 나무 위로 올라가 사는 인간이 오히려 더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게 되었다는 아이러니도,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면서 스스로 만든 규율 - 땅을 밟지 않겠다 - 을 가혹하게 지켜나가는 한 인간의 완전성에 대한 도전도 사실상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있을 법한 한 외로운 인간에 대한 기록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쌉쌀하다.

[인상깊은구절]
그런데 당신 형은 왜 하늘 가까이, 그 위에서 사는 건가요? 우리 형은 땅을 제대로 보고 싶은 사람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만 한다고 주장합니다. 내가 대답하자 볼테르는 그 대답을 아주 높게 평가했다. 옛날에는 자연이 살아있는 형상들을 창조했는데, 지금은 이성이 그 일을 대신하지요.
q****y 2000.03.02.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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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지모 디 론도 남작은 '나무 위에서 살았고, 땅을 사랑했으며, 하늘로 올라갔다'... 나무 위의 남작
"코지모 디 론도 남작은 '나무 위에서 살았고, 땅을 사랑했으며, 하늘로 올라갔다'... 나무 위의 남작" 내용보기
1767년 6월 15일, 옴브로사의 저택에서 식사를 하고 있던 나의 형, 몇 달 전 열두 살이 된 코지모 피오바스코 디 론도는 달팽이 요리를 거부하며 식탁을 박차고 정원으로 나가더니, 거기서 멈추지 않고 정원의 나무 위로 올라간다. 그리고 이를 비웃는 아버지와 식구들을 향해 다시는 아래로 내려가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한다. 나의 형 코지모가 ‘나무 위의 남작’이 되는 그 시작은 이
"코지모 디 론도 남작은 '나무 위에서 살았고, 땅을 사랑했으며, 하늘로 올라갔다'... 나무 위의 남작" 내용보기
1767년 6월 15일, 옴브로사의 저택에서 식사를 하고 있던 나의 형, 몇 달 전 열두 살이 된 코지모 피오바스코 디 론도는 달팽이 요리를 거부하며 식탁을 박차고 정원으로 나가더니, 거기서 멈추지 않고 정원의 나무 위로 올라간다. 그리고 이를 비웃는 아버지와 식구들을 향해 다시는 아래로 내려가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한다. 나의 형 코지모가 ‘나무 위의 남작’이 되는 그 시작은 이처럼 아주 사소한 저녁 식탁에서 비롯된 것이다.


“... 형은 나무들이 그렇게 울창하기 때문에 절대 나무에서 내려가지 않고도 이 나뭇가지에서 저 나뭇가지로 옮겨가면서 몇 마일이고 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p.52)


나무 위 생활은 달팽이 요리의 거부로 시작되었지만 공작이 되기만을 바라며 세상의 눈치를 보는 남작인 아버지, 그런 아버지와 정략적으로 결혼을 하였지만 군대에 흠뻑 빠져있는 여장부인 엄마, 집 안에 은둔하며 수녀처럼 생활하지만 여러모로 꼬여 있는 누나를 향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던 코지모는 이미 자신을 둘러싼 비이성적인 환경으로부터 벗어날 것을 스스로 다짐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코지모의 모든 것을 지켜보는 것이 바로 화자인 ‘나’이다.


그렇게 소설은 열두 살에 나무 위로 올라간 코지모의 여덟 살 난 동생 ‘나’에 의해 서술되고 있다. 나무 위에 올라간 코지모에게 필요한 물건들을 조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 가족과 코지모 사이의 의사소통 통로 역할을 하기도 하고, 직접 코지모에게서 듣게 되는 이야기나 다른 사람을 통하여 듣는 코지모의 이야기 등이 ‘나’의 글을 통하여 독자들에게 전달되는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요컨대 형은 광적인 이야기꾼이 되었고 이제는 형에게 정말 일어났던 일들로, 그것을 회상하면 지나간 시간, 섬세한 감정들, 권태, 행복, 불확실, 자만심, 자신에 대한 구토, 이 모든 것이 되살아나는 사건들과, 꾸며낼 수 있고 예리하게 잘라낼 수 있으며 꾸며낸 이야기가 여러 가지 모양으로 변할수록 실제로 우리가 살면서 경험했던 것, 혹은 이해했던 것을 다시이야기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는 그런 종류의 사건들 중 어떤 게 더 좋은 것인지 구별할 수가 없었다.” (p.204)


숲이 우거져 있는 옴브로사에 살고 있었던 덕택에 이미 나무 타기에는 일가견이 있었고, 또한 나무 위로 올라간 뒤에도 옴브로사의 대부분 지역은 나무에서 내려 오지 않고도 돌아다닐 수 있었던 탓에 코지모의 나무 위 생활은 점차 탄력을 받는다. 나무를 타고 남작의 저택과 담이 맞닿아 있는 옆집으로 넘어가 코지모 최초의 연인이라고 할 수 있는 비올라와 연을 맺을 수도 있었고, 옴브로사 사람들과의 교류 또한 끊이지 않고 수행할 수 있었다.


닥스훈트 종 사냥개인 오티모 마시모와 함께 하면서 코지모는 터키 해적의 동태를 파악하기도 하고, 유명한 도둑인 잔 데이 브루기에게 책을 소개하며, 누나의 결혼에 영향을 끼치기도 하고, 심지어 나무에서 배로 다시 배에서 다른 고장의 나무로 옮겨가서 그곳의 나무 위에 머물던 귀족의 무리와 교류를 하기도 한다. 코지모는 땅에 발을 디디지 않았을 뿐 끊임없이 땅의 사람들을 바라보았고, 그들을 이해하고자 하였으며, 그러한 이해를 위하여 책을 읽는 일을 멈추지 않았고, 이를 통해 당시의 계몽주의 철학자들과 편지를 나눌 정도가 되었다. 심지어 내가 볼테르에게 ‘우리 형은 땅을 제대로 보고 싶은 사람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고 하자 이런 대답을 듣기도 한다.


“쟈디, 세 테 쇨르망 라 나튀르 키 크레 데 페노멘느 비방, 멩트낭 세 라 레죵. (옛날에는 자연이 살아 있는 현상을 창조했는데 지금은 이성이 그 일을 대신하지요.” (p.239)


사실 소설은 카톨릭과 왕정이라는 구체제에 대항하는 계몽주의 철학이 기세를 올리고 있던 18세기에서 19세기 사이의 시대상에 대한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코지모는 자신의 가족들로 대변되는 구체제를 버리고 나무 위로 올라가며, 그곳에서도 귀족이 아닌 서민들을 돕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소설 속에서 예수회의 인물들이 우스꽝스럽거나 답답하거나 교활하게 그려지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일 것이다.


대신 (나무 위에 올라가 있다는 비현실적인 상황에도 불구하고) 코지모는 끊임없이 책을 탐독하며 (심지어 디도르의 백과전서까지 읽는다. 소설에 나오는 볼테르, 루소 등은 이 최초의 백과사전 편찬에 참여하였고, 당시 이 책은 몇 차례 금서로 지정되기까지 하였다.) 코지모 디 론도 남작이 되고, 세상과 한 걸음 떨어져 있지만 그래서 더욱 세상을 잘 이해하는 한 인물이 되었다.


“코지모 피오바스코 디 론도 - 나무 위에서 살았고 - 땅을 사랑했으며 - 하늘로 올라갔다.” (p.360)


열두 살에 나무 위로 올라간 코지모도 결국 늙었다. 그리고 병을 앓는 코지모는 마을 광장에 있는 떡갈나무로 옮겨졌고, 그곳에서 잠시 불시착을 하였던 영국 기구를 붙잡고 하늘로 올라간다. 이 기이한 인물은 그 마지막 순간까지도 사람들로 하여금 경탄을 자아내게 만든 것이다. 그리고 그의 비석에는 위와 같은 문구가 새겨졌다. 하늘과 땅, 그 사이의 나무에서 존재하였던 코지모는 그곳에서 평생을 살았고, 그의 이야기는 이렇게 멋진 환상으로 갈무리 되어 있음에도 빛나는 이성이 되어 우리에게 전달되고 있다.



ps. 진지하면서도 유머러스한 이탈로 칼비노는 때로 서정적이기까지 하다. 나무 위에서 살면서도 가족들과의 이런저런 관계를 유지하였던 코지모가 자신의 어머니가 돌아가시던 날, 나무 아래로 내려 갈 수 없으니 그저 저택의 창문에서 이를 지켜보기만 하며, 침대에 누워 있는 엄마에게 비누 방울을 날리는 장면은, 그것만으로도 너무 아름다운 그림이 되고 있다. 잊고 싶지 않아 옮겨 본다.


“우리가 어린애들이었고, 엄마가 언제나 너무 쓸데없고 유치한 우리의 놀이를 금지하던 그 옛날 같았다. 하지만 이제 어머니도 아마 처음으로 우리들의 놀이가 즐거우셨을 것이다. 비누 방울이 엄마의 얼굴에까지 내려앉자 엄마는 후 하고 불어 방울들을 터뜨렸고 웃으셨다. 방울 하나가 엄마의 입술 위까지 날아갔는데 터지지 않고 그냥 그대로 있었다. 우리는 엄마에게로 몸을 숙였다. 코지모 형은 그릇을 떨어뜨렸다.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p.242)

 

YES마니아 : 플래티넘 k******i 2013.03.07.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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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성'의 알레고리즘.
"'환상성'의 알레고리즘." 내용보기
' 반쪼가리 자작', '존재하지 않는 기사'에 이어, 별러왔던 '이탈로 칼비노 선집'의 나머지 한 작품, '나무 위의 남작'을 2년여만에 읽었다. 작가 스스로는 이 3부작을 '우리의 선조들'로 명명하고 있는데, 근래 읽었던 발자크나, 이번의 칼비노나 스스로의 어떠한 체계를 세우고 작품을 생산하는 모습이 새삼 부러워진다. 인상깊다고 할까, 정리되는 느낌이라고 할까, 여하튼 그 작가로
"'환상성'의 알레고리즘." 내용보기
' 반쪼가리 자작', '존재하지 않는 기사'에 이어, 별러왔던 '이탈로 칼비노 선집'의 나머지 한 작품, '나무 위의 남작'을 2년여만에 읽었다. 작가 스스로는 이 3부작을 '우리의 선조들'로 명명하고 있는데, 근래 읽었던 발자크나, 이번의 칼비노나 스스로의 어떠한 체계를 세우고 작품을 생산하는 모습이 새삼 부러워진다. 인상깊다고 할까, 정리되는 느낌이라고 할까, 여하튼 그 작가로써의 구상력 혹은 알레고리를 만들어내는 능력에 감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 코지모 피오바스코 디 론도. 달팽이 요리를 거부하고 나무 위로 올라간 남작 가문의 이 고집불통 계승자는 아마도 작가의 대변인일 터,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에서 볼테르가 말하는 분위기와 흡사한 계몽콩트의 분위기가 작품 전반에 흐르고있다. 계몽주의와 프랑스 대혁명, 나폴레옹 시대, 왕정복고로 이어지는 격동의 역사가 빠짐없이 작품 속에 등장하고 있는데, 개인의 삶과 역사의 흐름을 자연스레 접목시키는 작가의 글쓰기 덕에 부담없이 편안하게 읽어내려갈 수 있었던 듯하다. '반쪼가리 자작'-'나무 위의 남작'-'존재하지 않는 기사'. 3부작의 제목들에서도 은유되거니와, 작가가 일관되게 말하는 것은 反권위, 反부패를 수렴하는 귀족계급 혹은 기득권 계층에의 반대이다. 냉철한 이성과 계몽주의에 기반한 -현재 양자가 그 치부를 드러냄으로써, 환영받지 못하는 사상임에 틀림없으나, 이 작품이 1957년에 발표된 것이니만큼, 당대 사상의 첨단이었을 것이라는 맥락적 고려가 필요하다- 민중주의적 공화주의, 그것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의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칼비노를 그러한, 다소 진부한 주제의 틀거리로 이해하기에는 많은 공백이 존재한다. 무엇보다도 문학이란 형식-내용의 예술이기 때문이다. 하여 칼비노를 이해하는 또다른 주된 경로를 형식적 측면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인데, 역시 칼비노의 매력은 그 '환상성'의 알레고리즘에 있다 할 것이다. 이 작품의 흡입력 또한 동화와 같은 작가의 상상력에서 많은 부분 비롯되는데, 그 의의는 'post-modern'의 한 가능성 혹은 방향성을 발견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즉 'modern'을 넘어설 수 있는 keyword로써의 동화적 상상력과 환상문학은 인간 본질을 꿰뚫을 수 있는 한가닥 희망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머리로는 환상문학의 가능성을 이해하기 시작했지만 아직도 작품 하나하나를 읽어내며 그것에 흠뻑 빠져본 기억은 거의 없다. 온전한 몰입 또는 순진한 감탄을 해본 적이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러한 관심을 보다 많이 불러일으켜준 이 작품이 흥미롭다. 또한 앞으로 보르헤스와 마르케스의 작품들도 폭넓게 접해볼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다.
b********g 2003.07.21.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