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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남작가의 큰아들이 어느날 아침식사 때의 말다툼으로 나무 위에 올라간 뒤부터 그 뒤 평생동안 나무에서 내려오지 않고 산다. 그는 원하는 모든 것을 나무 위에서 구하고, 나무 위에서 사람들을 돕고, 고향의 배신자와 해적들을 소탕하고, 나무 위에서 스스로 독학하여 당대 철학자들과 서신왕래를 하고, 나무를 타고 스페인까지 갔다오는가 하면, 심지어는 나무 위에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만나기도 한다. 죽을 때조차 하늘에서 다가온 기구에 매달려 어디론가 가버린다는 것이다.
코지모가 나무 위에다 천막을 만들고, 작은 폭포를 끌어다 나무 위에다 세면장을 만들고, 개를 길들여 부리고 하는 이야기들은 신난다. 이런 류의 이야기는 <15소년 표류기>나 <로빈슨크루소의 모험=""> 따위를 읽을 때부터 언제나 나를 매료시켰다. 無에서 생활을 구축해나가는 이야기.
사람들의 세계와 격리되어 스스로 나무 위로 올라가 사는 인간이 오히려 더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게 되었다는 아이러니도,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면서 스스로 만든 규율 - 땅을 밟지 않겠다 - 을 가혹하게 지켜나가는 한 인간의 완전성에 대한 도전도 사실상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있을 법한 한 외로운 인간에 대한 기록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쌉쌀하다. [인상깊은구절] 그런데 당신 형은 왜 하늘 가까이, 그 위에서 사는 건가요? 우리 형은 땅을 제대로 보고 싶은 사람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만 한다고 주장합니다. 내가 대답하자 볼테르는 그 대답을 아주 높게 평가했다. 옛날에는 자연이 살아있는 형상들을 창조했는데, 지금은 이성이 그 일을 대신하지요. 로빈슨크루소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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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7년 6월 15일, 옴브로사의 저택에서 식사를 하고 있던 나의 형, 몇 달 전 열두 살이 된 코지모 피오바스코 디 론도는 달팽이 요리를 거부하며 식탁을 박차고 정원으로 나가더니, 거기서 멈추지 않고 정원의 나무 위로 올라간다. 그리고 이를 비웃는 아버지와 식구들을 향해 다시는 아래로 내려가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한다. 나의 형 코지모가 ‘나무 위의 남작’이 되는 그 시작은 이처럼 아주 사소한 저녁 식탁에서 비롯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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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반쪼가리 자작', '존재하지 않는 기사'에 이어, 별러왔던 '이탈로 칼비노 선집'의 나머지 한 작품, '나무 위의 남작'을 2년여만에 읽었다. 작가 스스로는 이 3부작을 '우리의 선조들'로 명명하고 있는데, 근래 읽었던 발자크나, 이번의 칼비노나 스스로의 어떠한 체계를 세우고 작품을 생산하는 모습이 새삼 부러워진다. 인상깊다고 할까, 정리되는 느낌이라고 할까, 여하튼 그 작가로써의 구상력 혹은 알레고리를 만들어내는 능력에 감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 코지모 피오바스코 디 론도. 달팽이 요리를 거부하고 나무 위로 올라간 남작 가문의 이 고집불통 계승자는 아마도 작가의 대변인일 터,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에서 볼테르가 말하는 분위기와 흡사한 계몽콩트의 분위기가 작품 전반에 흐르고있다. 계몽주의와 프랑스 대혁명, 나폴레옹 시대, 왕정복고로 이어지는 격동의 역사가 빠짐없이 작품 속에 등장하고 있는데, 개인의 삶과 역사의 흐름을 자연스레 접목시키는 작가의 글쓰기 덕에 부담없이 편안하게 읽어내려갈 수 있었던 듯하다. '반쪼가리 자작'-'나무 위의 남작'-'존재하지 않는 기사'. 3부작의 제목들에서도 은유되거니와, 작가가 일관되게 말하는 것은 反권위, 反부패를 수렴하는 귀족계급 혹은 기득권 계층에의 반대이다. 냉철한 이성과 계몽주의에 기반한 -현재 양자가 그 치부를 드러냄으로써, 환영받지 못하는 사상임에 틀림없으나, 이 작품이 1957년에 발표된 것이니만큼, 당대 사상의 첨단이었을 것이라는 맥락적 고려가 필요하다- 민중주의적 공화주의, 그것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의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칼비노를 그러한, 다소 진부한 주제의 틀거리로 이해하기에는 많은 공백이 존재한다. 무엇보다도 문학이란 형식-내용의 예술이기 때문이다. 하여 칼비노를 이해하는 또다른 주된 경로를 형식적 측면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인데, 역시 칼비노의 매력은 그 '환상성'의 알레고리즘에 있다 할 것이다. 이 작품의 흡입력 또한 동화와 같은 작가의 상상력에서 많은 부분 비롯되는데, 그 의의는 'post-modern'의 한 가능성 혹은 방향성을 발견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즉 'modern'을 넘어설 수 있는 keyword로써의 동화적 상상력과 환상문학은 인간 본질을 꿰뚫을 수 있는 한가닥 희망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머리로는 환상문학의 가능성을 이해하기 시작했지만 아직도 작품 하나하나를 읽어내며 그것에 흠뻑 빠져본 기억은 거의 없다. 온전한 몰입 또는 순진한 감탄을 해본 적이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러한 관심을 보다 많이 불러일으켜준 이 작품이 흥미롭다. 또한 앞으로 보르헤스와 마르케스의 작품들도 폭넓게 접해볼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