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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에 정의는 있는가?' 국제 사회를 예로 든다면 대답은 '아니오.' 일 것이다. 우선 우리나라부터 외교관계를 돌아보면 정의보다는 실리를 선택한 경우가 많다. 대만과의 관계도 실리외교란 것 때문에 틀어졌어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경우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 사람이 un의 사무총장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정의보다는 실리를 택했다. 미국과 이스라엘은 계속해서 팔레스타인을 옥죄고 있으며 이에 국제 사회의 도움은 없다. 기껏있는 도움이라고는 시민단체의 생필품지원과 강대국들의 금전적인 지원일 뿐인데 이 금전적인 지원은 더 빨리 나라를 몰락하게 만든다. 지도부에 금전적인 지원을 하고 책임없이 빠져버리면 지도부는 자신의 배를 불리는 데 쓰게 되고 이것은 비리가 되며 이 지도부가 쓴 것은 결국 사치품들로서 다시 강대국으로 돌아간다. 결국 사회는 점점 더 가난해지고 분열이 더 가속화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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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땅 없는 민족에게 민족 없는 땅을>이란 구호가 널리 퍼지게 되었다. '땅 없는 민족'이란 두 말 할 것도 없이 '이스라엘인'을 가리키는 말이고, '민족 없는 땅'이란 '팔레스타인인이 살던 영토'를 일컫는 말일 게다. 로마제국 시절 '디아스포라'를 겪어야만 했던 유대인들은 로마 황제의 명으로 강제로 고향땅인 예루살렘을 떠나야만 했다. 그리고 그 땅에 팔레스타인인들이 모여들어 살게 되었다. 그로부터 2000년 뒤 그 땅을 떠났던 '유대인'들이 다시 돌아와 살아야만 하는 <약속의 땅>은 예루살렘이었고, 예루살렘에서 2000여 년 동안 살던 '팔레스타인인'들은 순순히 떠나야만 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어느 누구의 편을 들고 말고 할 것 없이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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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국내외의 언론 보도에 따르면, 뉴욕에서 개막되는 제66차 유엔총회에서 팔레스타인이 독립국 승인 결의안을 제출하겠다는 방침을 공식화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번 팔레스타인 독립국 승인 표결 문제에 대해 과연 어떤 결론이 날지를 두고 지금 세계는 그 이목에 집중하고 있는듯하다. 그도 그럴 것이 만약에 팔레스타인이 유엔에서 승인을 얻어 그동안 국가가 아닌 조직이라는 형태에서, 국가 자격으로 유엔에 참여하게 된다면 그들의 지위와 권리에 상당한 변화를 가져온다는 데 있기 때문이며, 그런 이유로 팔레스타인이 오랜 기간에 걸쳐 자신들의 터전을 강제로 빼앗고 수많은 자국의 국민을 핍박해왔던 이스라엘에 대해, 국제법 위반 행위로 국제 형사 재판소에 제소하게 되는 경우, 그 결과를 놓고 앞으로 국제 정세에 대한 작지 않은 파장이 예상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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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저자 홍미정의 말대로 한반도의 현재와 세계에서 한반도를 보는 시선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그들은 정확하게 알고 있는가. 그 안에 있는 우리도 진실을 알기 힘든데 천안함, 연평도, 그리고 여러 정치비리와 시위와 탄압의 광경들은 얼마만큼 진실에 가깝게 세계에 전해지고 있을까. 정부의 성향에 따라 국제사회의 이슈 또한 미디어에서는 검열되고 있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우리는 이미 검열된, 삭제된 국제사회를 바늘구멍만큼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팔레스타인의 자살폭탄테러라는 뉴스에 진실은 묻혀 있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다. 영화 ‘늑대들의 계곡’에 이어 테드 코노버의 책 ‘로드’ , 애니메이션 ‘바시르와 왈츠를’, 그리고 책 ‘울지마 팔레스타인’을 거치며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에 대한 허구와 진실이 내 머릿속에서는 연속 교차중이다. 자살폭탄 테러라는 극단적인 저항이 어떻게 등장하게 되었는지, 이스라엘은 자치적인 국가인 것인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라는 국가를 이루고 있는 주체는 누구인지, 여러 생각을 하게 된다. 국제사회에서 자살폭탄 테러 위험은 팔레스타인을 타파하면 될 것처럼 하더니 이 책을 읽다보면 사실은 더한 폭력을 가하고 있었던 이스라엘이 있었고(이 책에서는 아주 구체적으로 살상과 감금의 수치적 차이를 볼 수 있다. 최근 이스라엘 군 인질 1명과 팔레스타인의 수감대원 1027명의 맞교환이 있었던 것은 이 수치들을 보면 오히려 부당했다는 생각마저 들것이다.) 이들의 싸움은 절대 종교분쟁이 아니며 순수한 영토 분쟁 그 이상이 아니고 그 이스라엘의 배후에는 처음에는 영국이 지금은 미국이 있다는 것이 명확해지는 순간이 온다. 모든 사실은 포장이 되고 왜곡된다. 우리는 어떻게 진실을 구분할 수 있으며 무지로 인한 오판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될까. 세계를 잇는다는 IT 도 그 진실에 대한 접근성마저 어딘가에서 차단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갑자기 의심스러워진다. 저자 홍미정은 사실 위주의 객관성에 가장 중점을 두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둘러싼 중동사에 대해 설명하고 서정환은 직접 몸으로 체험하고 그들의 입을 통해 팔레스타인 내부의 여러 의견을 전달한다. 저자 서정환의 글들은 겉으로는 꽤 감정적으로 보이지만 사실 팔레스타인 내부에서도 여러 의견이 있으며 각각 자신의 생계와 안전을 둘러싼 입장들을 다양하게 언급하려 애쓰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감정이 애정과 우려 그 선을 넘지 않으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니 나는 오히려 그가 선동적으로 이 사실들을 더욱 적나라하게 비판하길 바랬다. 어느 정도의 자극만으로는 그 심각성에 대한 전달력이 약화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조금 더 다양한 뉴스를 들으려는 마음을 가지고 저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홀로코스트 이전에 어떤 국제분쟁이 그러한 비극에 일조했는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영토 점령 이후 그 못지 않은 인권탄압과 학살이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가 귀 기울여야 할 진실이 무엇인지 조금은 판단력이 키워질 것이라 믿는다. 이스라엘의 영토침입은 표면적으로 일본의 한반도 침략과 비슷한 구석이 있다. 일본은 식민지가 아닌 일본의 영토로 한반도를 명명하고 이 땅의 민족들을 황국신민으로 만들었다.(참고:‘벌레와 제국’(황호덕)) 이스라엘은 원래 자기 땅이었다고 주장한 시오니스트들에 의해 건국된 것으로 보인다. 종교적 성지, 고향으로 돌아왔다고 주장하지만 이 종교적 이유와는 아주 거리가 먼, 그리고 정작 원주민인 팔레스타인의 의견을 무시한 채 그 땅을 점령하게끔 만든 국제적 힘의 논리의 진실이 이 책의 전반부에 펼쳐진다. (이 책이 왜 책 ‘로드’에서처럼 이주자들의 거주지는 ‘정착촌’이라 부르지 않고 ‘점령촌’이라고 말하는 지에 대해 명백해지는 부분일 것이다. ) ‘서방 강대국들의 침묵 혹은 공모’라는 저자 서정환의 표현이 와 닿는다. 이 서방 강대국에 협조하는 국가들 역시 그 침묵 혹은 공모에 일조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여기에는 우리나라 또한 포함된다는 사실에 이것이 국민의 의견인지, 정부의 판단인지, 국민이 정부를 세웠으니 국민의 의견이라 해도 뭐라 할 말이 없다는 생각에 다리에 힘이 풀린다.
최근 아랍권 국가들의 민주화 운동이 세계를 잇는 SNS가 진실을 알리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하더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경우에도 혹시 앞으로 있을 팔레스타인의 인티파다가 있은 후에야 국제적인 지지가 일어날까. 그러나 지금의 팔레스타인은 저자 서정환의 말대로 인티파다가 불가능 할만큼 제약 하에 놓여 있다. 수입과 소통, 그리고 이동은 제약 받는다. 고용의 불이익은 물론이고 검문소라는 이유만으로 모욕을 당해도 홀로코스트와 과거의 노예에 다름 없이 굴복하여야 한다. 폭력에 대한 두려움은 사람을 무력하게 한다. 이스라엘의 탄압에 PLO와 같은 저항단체가 있긴 하지만 어느새 검문의 권력은 당연시된 듯 하다. 일자리를 위한 이동과 자격을 억압하고 자급자족마저 영토와 이동을 제한함으로써 위협한다. 자신의 집을 빼앗기고 불법 주거침입과 가택수색을 당하고 애써 농사지은 올리브밭은 잃은 팔레스타인들은 이스라엘과 그 배후의 국가들이 원하는 어떤 것을 가지고 있을까. 이들이 위협하는 것이 무엇이길래 그들은 이런 압박을 가하고 있는 것일까. 이스라엘은 무조건적인 착취를 정당화하기 위해 저항을 무력화시키려는 탄압을 가함으로써 자신들의 영토를 확장시키려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이것은 그 전선에 있는 이스라엘군의 이데올로기에 부합하는가 생각해볼 일이다. 테드 코노버의 책, ‘로드’에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증오의 길(로드)이 등장한다. 그는 정착민 혹은 이스라엘 군인과 인격적인 폭력의 검문소를 지나야 하는 팔레스타인들의 삶을 오가며 길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테드 코노버는 그 어느 쪽에도 낄 수는 없다. 팔레스타인 지구에서는 자신이 미국인이라는 이유로, 미국이 이스라엘을 지지한다는 이유로 테러의 대상이 되지 않을까 불안해 해야 했다. 군인들과 함께 있을 때는 팔레스타인들에게서 작은 위협의 엔진오일 세례를 받기도 했다. 반대로 팔레스타인들과 함께 검문소를 통과할 때는 무심코 한 행동이 이스라엘 군인에게서 굴욕적이고 비합리적인 강압을 버텨야 했고 친구들이 두들겨 맞거나 끌려가지는 않는지 불안해 하며 지켜봐야 했다. 결국 테드 코노버는 온건주의자인 아우니와의 대화에서 가장 편안함을 느꼈지만 이는 대체적으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싸움은 서로 극단적 태도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을 반증했다. 이는 ‘울지마 팔레스타인’에서도 여실히 느낄 수 있다. 합의와 제안이 통하지 않기 때문에 이제 팔레스타인은 시위와 구호도 없이 이스라엘을 향해 돌을 던지고, 이스라엘은 아무런 증거 없이 다가오기만 해도 테러의 위협으로 간주하고 이들을 향해 선제 공격의 총알을 날리는 데 익숙해졌다. 이스라엘 군은 검문소와 불시 주거지역 수색과 검거와 정권의 교육으로 팔레스타인인의 인격을 잊고 말았다. 이제 테러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무감각한 사냥꾼이 되어간다. 나는 테드 코노버의 이야기 중, 이스라엘 군인 오메르가 말한 ‘매일 벌어지는 진짜 싸움은 영혼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죠.’라는 말을 되새겨본다. 자신이 적이라고 믿는 이들과 싸우고 있다는 것을 맹신하는 편이 자신의 영혼을 지키기에 적합한 이스라엘 군인의 정신은 아닐까. 누가 이들에게 끊임없이 자신의 영혼을 상처입지 않기 위해 싸우게 만드는가. 자책감에 스스로 무너지지 않기 위해, 정당하지 않은 행동을 했다는 자괴감에 빠지지 않기 위해 어쩌면 이스라엘 군인들은 이미 스스로의 영혼을 포기해 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울지마, 팔레스타인’에서도 종종 보여지는 이스라엘 군의 잔혹성은 이미 영혼이 상처입다 못해 상실된 이들의 자기방어이다. 이것은 용서할 수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다. 그들을 전선에 내세우는 정치와 경제의 이데올로기를 타파하는 방법 밖에는 시민의 영혼을 지킬 방법이 없다. 영화(애니메이션) ‘바시르와 왈츠를’이 떠오른다. 이스라엘의 가해자로서의 트라우마는 오메르가 총을 휘두르다 지친 표정으로 영혼을 지키기 위한 자신만의 싸움과 같은 맥락이다. 또한 영화 ‘늑대들의 계곡’이 일방적으로 팔레스타인의 PLO와 폭력을 옹호하는 입장을 가진 영화라고 잠시 생각했었는데 ‘울지마, 팔레스타인’을 읽고 나니 그것이 꼭 일방적이진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가 현실이고 현실이 영화였음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서로 무기를 겨누고 폭력으로 대화하는 것 밖에는 할 수 없는 이스라엘 군과 팔레스타인의 대치는 아무런 목적이 없다. 전쟁이란 그런 것 인가보다. 북의 연평도 기습포격과 대응사격이 있었을 때를 생각해 보아도 폭력을, 공격을 주고 받는 사이가 되면 서로 무엇을 원하는지는 중요하지 않게 된다. 책 ‘직설’ 중에 한홍구의 말이었던 ‘전쟁이 이성을 마비시킨다’라는 말이 절절하게 공감된다. 무엇을 의논해서 무엇이 나아질지에 대한 희망은 없어진다. 무엇이든 개선점에 대한 연구보다는 보복 혹은 선제공격에서 어떤 무기를 사용하는 것이 나의 신변을 보호하고 상대에게 보다 많은 피해를 입힐 수 있는가에 집중하게 된다. 더 이상 서로는 인간 대 인간이라기보다는 국가라는 추상적 개념 1, 2, 3 번들이 된다. 개념 1 번이 적 1번과 2번을 죽이거나 굴복시키면 된다. 싸움에서 이기면 된다. 미국의 말대로 다음에도 북한의 도발이 있다면 미국에서도 가만있지 않겠다고 한다. 만약 미국이 군사력을 이용해 우리나라에 합세해서 북한을 공격하고 있다면, 그래서 우리는 미국에게 감사할까? 어느 퇴역한 군인이 미디어에서 했던 말이 떠오른다. ‘평화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다.’라는 말은 내가 들은 그 미디어가 아니더라도 전쟁에 참여한 군인이 아니더라도 쉽게 하고 우리가 들을 수 있는 말이다. 평화를 위해 군복무를 하였다는 군인들의 사유는 어떤 이데올로기에서 오는가. 그 어느 전투가 세계의 평화를 위해서일까. 누군가의 공격이 있을지 모르는 세계가 맞으니 보호를 받는 것이 감사하다. 하지만 이대로 계속 폭력적인 전쟁이 되풀이 되는 한 영화 ‘터미네이터’에서나 보던 디스토피아적 미래상 외에는 상상되는 것이 없다. 서로의 공격에서 지키느라 무기를 끊임없이 연구하고 어딘가를 전쟁터로 만드는 것을 피할 수는 없을까. 그런 게 평화라면 평화의 사전적인 의미가 변화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전쟁은 살인을 누가 더 많이 해서 국가원수의 도덕심을 자극하는가에 따른 게임이다. 누가 먼저 항복하는가. 누구의 군인이 먼저 죽음의 공포에 익숙해지거나 굴복하는가 하는 게임이다. 영화 ‘고지전’은 한국전의 중심에 있던 국군과 인민군들의 일상을 상상한다. ‘아는 사람’이 되어도 보복의 칼 끝에 죽고, 적들도 우리를 죽였으니 우리도 적을 많이 죽여야 한다. 우리는 살인에 대해 엄청난 도덕심을 교육받고 범죄를 저지르지 않으려 하지만 전쟁이 존재하는 한은 이 도덕심은 끊임없이 분열을 일으킨다. 그 사이에 일상 속에서 살인과 범죄가 일어나기도 하고 영화와 게임의 폭력을 통해 분열을 해소시켜야만 한다. 어떤 살인은 옳고 어떤 살인은 그르다고 가르치고 배워야 하는 세계에서 이러한 분열은 당연한 결과가 아닌가. 그 분열에서 벗어나려는 일관된 관심과 의식수준을 가진 시민만이 팔레스타인을 비롯한 이후 제2의, 제3의 팔레스타인을 보는 눈을 갖게 될 것이고 세계를 보는 데 있어 옳은 판단과 언행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렇게 고양된 의식이 진정한 평화를 위한 미래를 고민하지 않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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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아 리바넨시스 혹은 마운트 레바논이라 불리는 지중해 동부 해안은 천년이 넘도록 12개 이상의 종파와 인종과 신조의 온실 노릇을 해왔다. 마치 마법이 지해하는 듯한 완벽한 온상이엇다. 레반트의 도시들은 기본적으로 상업에 중심을 두고 잇었다. 거래는 명료한 계약서에 기초하여 이루어졋고 상업을 가능하게 해주는 평화를 숭상했다. 서로 다른 사회집단들 사이에도 긴밀한 소통이 유지되었다. 온갖 종파의 기독교도들, 모슬렘, 드루즈교도, 소수의 유대교도 등이 이 지방이 품고 잇는 종파들이다. 이곳에서는 서로 관용적 태도를 베푸는 것이 극히 당연하게 여겨졌다. 발칸 지방 사람들은 목욕하길 꺼리며 툭하면 싸움질이니 우리는 얼마나 개명한 사람들이냐고 나도 학창시절에 교실에서 배운 기억이 있다. 이 평평상태는 언제까지나 계속될 듯햇고 역사는 개선과 관용의 세계로 나아가는 듯이 여겨졌다. 이 지역은 세계 모든 곳을 향해 열려 있었고 극히 세련된 생활양식과 활발한 경제, 오늘날의 캘리포니아처럼 온화한 기후를 자랑했으며 지중해 저 멀리 높은 곳의 눈 쌓인 풍경도 볼만했다. 스파이, (금발) 창부, 작각, 시인, 마약상, 모험가, 도박 중독자, 테니스 선수, 아프레 스키 애호가, 상인 등등 온갖 인간들이 모여들어 이곳의 문화를 형성햇다. 이 지역은 ‘낙원’일 뿐 아니라 흔히 하는 말로 동양과 서양이 만나는 기적의 교차점이기도 햇다.”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 ‘블랙 스완’) 유대인들이 몰려오기 전 이웃인 팔레스타인 사람들 역시 그런 문화에서 살았고 아직도 그들은 그런 문화를 지키며 산다.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이슬람이란 이성과 갈등하는 신화도 아니엇고 욕망과 갈등하는 도덕도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권해야 할 선도 아니고 스스로를 옭아매야 할 규범도 아니었다. 하루 다섯번 꼬박꼬박 기도하고 금식하는 이가 있었는가 하면 이런 것을 거부하고 자유롭게 사는 사람도 있다. 사마라 아버지가 전자의 경우라면 사마라는 후자다. 사마라는 무신론자다. 라마단 기간에도 집에서 요리를 해 먹는가 하면 술과 여자를 두루 좋아했다. 그러나 종교 문제로 아버지와 약간이라도 불편했던 적은 없었다.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햇고 아들과 맞담배를 피우면서 밤 늦도록 아들의 결혼에 관해 얘기를 나누곤 했다. (레바논에서처럼) 팔레스타인에서는 이슬람교와 기독교도 공존한다. 종교가 문제시되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 관용의 문화는 레바논처럼 높은 교양수준을 만들었다. 모든 것이 파괴되고 모든 것을 잃어버린 지금도 그런 전통은 높은 교육수준으로 나타난다. “팔레스타인의 교육수준은 주변 아랍국보다 훨씬 높다. 세계문맹률 순위에서 시리아, 이집트 등은 모두 100위권 밖으로 밀려나 있지만 팔레스타인은 문맹률 8.9%로 79위를 차지한다. 팔레스타인에는 비르제이트, 알쿠즈, 알나자, 베들레헴, 헤브론 대학 등 여러 대학이 있는데 이중 비르제이트와 알쿠즈 대학은 각종 순위조사에서 중동지역 10대 대학에 들 정도로 학술적 성과가 높은 곳이다.” 0%에 가까운 문맹률을 자랑하는 한국사람들에겐 그리 대수롭지 않게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경제를 생각하면 이는 위업이다. “헤브론 공업지대를 지나면서 그곳에서 가장 큰 공장이 어디인지 수소문한 끝에 노동자 47명을 고용하는 알샤르크 전기회사 공장을 찾아간 적이 있다. 전선과 철사, 용접봉 따위를 제조하는 이 소박한 공장의 관계자는 ‘우리 공장이 2008년에 무려 800만 셰켈(약 24억원)의 매출을 올렸다’며 자랑했다. 이 정도면 팔레스타인에서는 대기업에 속한다. 2009년 현재 국내총생산이 128억 달러, 1인당 GDP는 2,900달러 정도다. 공장도 없고 중동에서는 흔한 석유도 나지 않는 팔레스타인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먹고살까. 가장 정확한 표현은 딱히 먹고살게 없다는 것이다.” 팔레스타인 경제가 이 모양인 것은 이스라엘 때문이다. “1993년 오슬로 협정이 체결된 이후 서안과 가자지구의 경제적 통제권은 이스라엘이 쥐게 되었다. 즉 팔레스타인에서 공장 하나를 짖는다든지 원료와 완성품을 수입, 추술하는 데 일일이 이스라엘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자국의 안보를 이유로 거의 허가를 해주지 않았고 이 때문에 팔레스타인 경제가 악화되었다. 오슬로 협정이 체결된 후 3년 동안 팔레스타인 자치지구에서 실업률이 2배 가까이 늘었고 1인당 소득도 20%나 줄었다. 지금 팔레스타인 경제는 더 나빠졌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의 농지를 강제로 수용하여 점령촌을 확장하는가 하면 수원지마저 독차지했다. 팔레스타인과 외국, 가자-서안, 서안-동예루살렘 간의 사람과 물자 이동도 철저히 통제하고 있다.” 저자들은 말하지 않지만 이스라엘의 경제파괴는 오슬로 협정 이전으로 올라간다. 1948년 이스라엘의 건국은 공식적으로 팔레스타인들을 추방하고 그들의 땅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모든 것을 빼앗기고 어떤 자원도 인프라도 없는 가자의 좁은 땅으로 쫓겨간 팔레스타인 난민들에게 미래는 밝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그들을 쫓아낸 것으로도 부족한지 그들이 쫓겨간 곳까지 쫓아가 그들의 어두운 미래를 더 어둡게 만들었다. “그동안 이스라엘은 ‘점령촌 보호’를 명분으로 팔레스타인 전 지역에 분리장벽을 세우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땅을 강제로 빼앗았다. ‘Settlement’를 정착촌으로 옮겨 싣는 언론도 있는데 그보다는 정령촌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 듯하다. “점렴촌에 사는 유대인들은 쉽게 말해 극우주의자들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서 0.1%나 될까 말까 한 이들은 팔레스타인 전체를 자신들의 땅으로 믿습니다. 이 때문에 이들은 옛날부터 서안지구의 아무 곳에서나 막무가내로 컨테이너 같은 것을 가져다 놓고 먹고 자기 시작했어요. 이스라엘 정부에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신변을 보호해달라’고 요청하고요. 이스라엘 정부가 군대를 보내 경비를 서 줍니다. 점점 사람들이 모여들어 진짜 집과 기반시서을 건설하게 되죠. 기왕에 군대가 있으니 군사시실도 만들고요. 그러다보면 팔레스타인인들은 접근이 금지되는 겁니다. 혹시 그쪽을 취재하실거라면 점령촌 사람들을 아주 조심하셔야 합니다. 외국인들도 안중에 없는 사람들이니까요.” 경제의 목을 죈 이스라엘의 지배 덕분에 “팔레스타인 역제는 원조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잇다. 팔레스타인 난민구호시구, 유엔개발계획 같은 유엔 산하원조기구와 세계은행, 적신월사 등 각종 경제, 인도주의기관에서 팔레스타인에 지원하는 돈은 매해 10억달러를 넘는다. 예르ㅜㄹ 들어 팔레스타인의 교사와 의사들은 난민구호사업기구가 아니면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설립한 학교나 의료원에 출근한다.유엔기구와 유엔산하기관 외에도 라말라 시에만 약 1700개의 정치, 사회, 교육, 여성, 문화 등 각 분야 NGO들이 설립되어 있어 일자리를 만들어내는데 크게 기여한다. 팔레스타인에서 NGO는 한국의 시민사회단체와는 전혀 성격이 다르다. 대기업만큼 사람들이 선망하는 직장이다.” 그러나 원조는 팔레스타인의 자립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원조는 “기간산업 대신 식량, 의료, 교육 부분에만 직접적으로 편중되게 지원함으로써 그 자원의 배분을 놓고 팔레스타인 내부가 분열되게 조장했다. 또한 원조 이후 그 돈이 어디에 쓰이는지 책임감있게 감시하지 않았고 그 과정에서 발생한 자치정부의 부패를 눈감아줌으로써 하마스 정권이 등장하는데 일조햇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경제를 인공호흡기를 떼어내면 바로 사망하는 원조경제체제로 묶어두었고 정치 군사 외교적으로 팔레스타인을 고립시켰다. 이 때문에 학생들은 이런 현실에서 ‘교육은 받아서 무엇 하나’하는 뿌리 깊은 회의와 무기력감에 젖어 있다. 팔레스타인 교육에 관한 자료를 찾다가 한 팔레스타인 교사가 쓴 글을 발견하고는 먹먹했던 일이 떠오른다. ‘학생들에게 꿈을 이룰 수 잇다는 ‘희망’을 말해야 할 때 교사로서 가장 힘들다.’” 이런 현실에서 저항은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최소한의 몸부림이며 종교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생존권의 문제이다. 그들은 이스라엘을 부정하지 않는다. 단지최소한의 생존을 말할 뿐이다. 여전히 그들에겐 레반트의 전통인 관용은 살아있다. “나는 팔레스타인이 이슬람 근본주의가 성장할 수 잇는 폐쇄적인 곳이 아님을 확신하게 되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신을 존경하고 사랑하듯이 그 신이 창조한 모든 다른 사람, 다른 종교도 종중하고 열린 마음으로 대했다. 자신들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유대인이라고 예외로 두지 않았다. 내가 만난 대다수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유대인들을 쫓아낸 뒤 자신들만의 국가를 세우는데는 관심이 없었다. 이슬람교도든 기독교인이든 ‘형제처럼 같이 살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팔레스타인 땅을 주었노라 계속 우기고 있다. 네타냐후 총리는 공공연하게 ‘이스라엘은 유대국가’라고 선언하고 다닌다. 이처럼 오히려 자신들의 종교가 정통이고 우월하다는 쪽, 다른 종교를 인정할 수 없다는 쪽, 자신의 국민들이 타인을 핍박하는 데 마약과 같은 종교적 동기를 활용하는 쪽 국가 전체가 종교적 근본주의에 기운 쪽은 이스라엘이 아닐까.” 구약에서 말하는 신이 약속한 땅이란 주장 자체도 문헌비평학적으로 보면 의심스런 주장이다 (신의 역사 1 리뷰를 참조) 그러나 그 주장을 인정하더라도 시온주의는 성립하지 않는다. ‘이 유대인이 그 유대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온주의는 그야말로 신화에 불과하다. 현재 유대인 대다수는 바빌론 시대나 로마제국 기대에 예루살렘에서 추방당했다고 전해지는 유대인과는 혈통적으로 관련이 없다. 현대 유대인들은 중세시대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들, 즉 기원후 6세기에 아라비아 반도 남부에서 유대교로 개종한 힘야르 제국의 힘야르족과 8세기 중반 흑해와 카스피해 연안에서 유대교로 개종한 카자르제국의 카자르족의 후손이 대부분이다. 특히 카자르 후손인 유대인들은 현재 세계 유대인들의 약 80% 이상을 구성하는 아슈케나짐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더군다나 “현대 이스라엘의 히브리어는 이디시어의 파생어이며 성서 히브리어의 어휘 일부만 사용한다. 이디시어는 독일어가 혼합되기는 했지만 문장과 음운체계에서 슬라브어족에 속한다. 더 나아가 기원후 1세기에 로마가 점령하던 팔레스타인에서 유럽으로 건너간 대규모 이민자가 없었다.” 시온주의 자체가 근거없는 신화에 불과할 뿐이다. 그것이 신화가 아니더라도 1000년 이상 그땅에서 살아온 사람들을 쫓아낼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시온주의는 독선일 뿐이다. 그것도 억지의 독선일 뿐이다. 그리고 그 독선의 실체는 미국의 전략이라 저자들은 말한다. “’이스라엘 없는 중동’을 가정해보자. 2차대전 이후 세계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로 양분되었다.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곳에 자리한 나라들은 어떻게든 이 질서에 편입되었고 이집트, 이라크, 시리아, 요르단 등 근대적 국가로 거듭나던 중동 각국에서도 변화는 있었다. 영국의 지배를 받던 중동에서는 민족주의나 이슬람주의가 점점 더 힘을 얻었는데 이런 중동이 서장세계가 주도하는 자본주의 질서에 호의적으로 재편되리라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의 중도 교두보가 된 것이 이스라엘이다.” 바로 이스라엘의 이런 성격이 팔레스타인의 운명을 결정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 저자들은 말한다. “평화란 본질적으로 힘의 균형이다. 이스라엘은 건국 이후 폭력적인 방법으로 팔레스타인을 지배했다. 그 이유는 미국이 받쳐주는 한 미국에서 수입한 성능이 뛰어난 무기로 무장하는 한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할 수 잇다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의 패권이 약해지고 있다. 중동을 “더는 힘으로 제압할 수없다면 미국과 이스라엘은 군사적인 것보다는 정치적 해법을 찾지 않을 수 없다. 2011년 이후 중동의 변화는 미국과 이스라엘을 정치, 외교적으로 불리하게 만들고 있다. 지금으로서는 그것이 어떤 형태를 띠게 될지 섣불리 판단할 수 없다. 그러나 상상력을 가능한 넓힌다면 ‘더 먼 미래에 과연 이스라엘은 생존할 수 있을까’라는 짋문에 이전처럼 쉽게 예라고 대답할 수는 없다. 반면 ‘팔레스타인인들은 마침내 평화롭게 살 수있을까’라는 물음에는 이전보다 더 쉽게 예라고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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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이야기를 책으로 만난 것은 작가 발레리 제나티의 '가자에 띄운 편지'라는 작품을 통해서였다. 프랑스인 이었던 저자가 실제 이스라엘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경험을 토대로 쓰여진 이야기라 이번에 읽은 울지 마, 팔레스타인과는 사뭇 다른 이야기였다. 그 책 속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의 원인은 종교적이며 서로 양보가 없는 이기적인 지도층과 어른들의 폭력사태로만 그려졌기에 제3자인 입장에서 볼 때 그저 답답하기만 했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동안 알고있던 분쟁의 원인이 종교적인 부분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극단적인 이기주의에 의한 것이고 이를 도와준 유엔과 미국 및 유럽 강대국들이라는 사실에 맥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비윤리적이고 말도 되지 않는 상황이 지금 21세기에 벌어지고 있는것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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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20세기까지만 하더라도 팔레스타인은 많은 국가들의 관심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소비에트 연방이 무너지고 중국이 자본주의 길을 가고 중동 지역에는 오랜 왕조들이 민중들의 자유화 요구로 자국내 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동안 팔레스타인은 점점 국제적인 관심의 밖으로 밀려나고 있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도 팔레스타인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은 그다지 많지 않다. 역사책을 통해서 읽은 내용이나 아니면 TV나 신문 등에서 보도된 기사를 통해서 앍고 있는 것이 전부다. 세계2차 대전 이후 영국과 미국 등 강대국에 의해 자신의 땅에서 쫒겨난 신세가 되었고 지금까지도 그 땅을 찾기 위해 이스라엘과의 사이에서 영토분쟁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는 정도다. 지금 이 시점에서 팔레스타인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뭘까? 팔레스타인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지금 세계는 무한경쟁의 시대로 접어 들었다. 이념분쟁은 지나간 과거의 일이 되어버렸다. 저마다 자국의 이익을 위해 경주하고 있다. 국제공조는 힘, 경제력의 우위에 의해 결정되고 있다. 최근 중국과 일본의 영토분쟁 과정에서 중국이 자국의 희토류를 일본에 수출하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자 일본이 사실상 백기를 든 일은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과연 팔레스타인 문제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을지는 의문이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먼 나라의 일처럼 들린다. 같은 나라 안에 살면서도 국내의 경제 불안과 정치 불안으로 인해 완전히 다른 나라에 사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팔레스타인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를 곰곰이 생각해보게 된다. 책은 4부로 이루어져 있다. 1부 ‘빨간 거짓말’에서는 먼저 분쟁의 내막에 대해서 밝히고 유엔에서 국제관리구역으로 정한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이 독점한 과정과 함께 예루살렘을 공유해야 하는 이유와 정치적 계산에 의해서 탄생한 시온주의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2부 ‘우는 심장의 풍경’에서는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땅을 무력으로 강점하는 과정과 그 속에서 삶을 이어가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힘겨운 생활을 보여준다. 지은이들이 직접 팔레스타인 현장에서 보고 듣고 체혐한 것을 그대로 전해주고 있어 마치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하다. 가슴 아린 이야기들도 많다. 3부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에서는 당장 먹고 살 길이 없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고단한 일상을 보여주고, 그래도 그 속에서 꿋꿋하게 살아가는 이들을 통해 팔레스타인의 희망을 보려고 한다. 4부 ‘누가 팔레스타인을 미워하는가’에서는 하마스에 관한 오해와 진실, 중동평화를 부르짖는 미국의 속내 등을 통해서 팔레스타인의 독립을 가로막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종국에는 국제 사회의 협력과 대화를 통해 평화적인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는 것으로 결론이 귀결된다. 하지만 너무 추상적인 이야기다. 앞서 국제 사회의 현주소를 언급한 이유가 바로 이런 해결책이 과연 가능한 것인지에 대한 의문때문이었다. 국제사회는 힘이 지배하는 사회다. 이는 역사가 증명해주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계속 우리나라의 아픈 현실이 오버랩되는 이유는 뭘까? 팔레스타인에 평화가 오기를 기대하며 20세기 강대국의 논리에 따라 양분된 우리나라에도 평화가 오기를 기대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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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분쟁. 많은 사람들이 신문지상에서 한 번쯤은 들어는 봤고, 알고는 있지만 정작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대해서 아는 것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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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영향을 많이 받는 나라이기 때문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이스라엘에서 벌어지고 있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대한 뉴스가 방송과 신문에 등장을 하는 경우를 거의 본기억이 없는것 같은데 등장을 하여도 자살테러등의 않좋은 뉴스들이 대다수를 차지를 하고 있었는데 그러한 감추어진 민족인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현실과 그들이 생각을 하고 있는 문제들에 대하여서 알려주고 있다. 1. 팔레스타인 사람들 이란 ? 현재의 이스라엘 영토에 고대로 부터 거주를 하고 있던 사람들로 현재는 자신들의 나라를 만들지 못하고 반난민으로 생활을 하고 있는데 그러한 일들은 영국이라는 강대국이 자신들의 전쟁에서 유태인들의 강력한 자본을 원하여서 나라를 만들어 준다는 약속을 하고 그러한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서 그곳에 살고있던 사람들에게 양보를 요구하고 유대인의 나라를 만들면서 문제가 발생을 하였다. 초기의 문제는 적은수의 유대인들로 인하여서 별문제가 없었지만 유럽을 점령을 하고 있던 독일의 히틀러가 유대인을 몰살을 하려고 하면서 위기가 닥친 유대인들을 받아주는 나라가 없자 자신들의 조국을 만들기 위하여서 노력을 하였고 그런 분위기에 휩쓸린 사람들이 현재의 이스라엘로 이주들을 시작을 하면서 그곳에 살고있는 사람들을 몰아내고 오로지 자신들만의 나라를 만들기 위한 방법을 세우고 압박을 하면서 문제가 발생을 하였다. 이스라엘의 주변에 위치한 아랍국에서도 그러한 상황을 파악을 하고 같은 민족인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돕기 위하여서 전쟁을 하였지만 무기의 수준의 차이로 인하여서 패전을 하고 난민촌을 만들어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받아들였지만 그곳에 팽배를 하고있는 부족주의 때문에 나라가 없고 다른 나라에 들어와서 살고있는 사람들인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난민촌을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다. 2. 난민촌에서만 살아가는 이유는 ? 국가가 없기 때문에 자신들을 보호를 할수가 있는 곳이 없다는 사실도 있고 유일한 강대국인 미국이 이스라엘의 편을 들면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부를 축척을 하면 나중에 유대인과 같은 행동을 할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주변국에 압력을 넣어서 취업을 막고 정착을 방해를 하는 거도 있을것 같다. 부족간의 갈등도 많은 요소로 작용을 하는데 이웃국인 요르단의 국민구성을 보면 많은 국민들이 팔레스타인 계열로 분류가 되는데 원래 그곳에 살고있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의 눈에는 같은 사람으로 보이지만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눈에는 다른모습으로 보이기 때문에 주변국에서도 억압을 받는 경우가 많다. 3. 자살폭탄 테러 책에서는 자살폭탄 테러에 대하여서는 언급이 없는데 일반적으로 뉴스를 보면 가장 많이 등장을 하는 팔레스타인 뉴스가 테러일것으로 보이는데 그러한 가장 잔혹한 행위를 하는 경우는 그들이 믿고있는 종교적인 범위는 일부가 있고 거의 대부분이 자신을 희생을 하여서 가족을 살리려는 대가족주의를 유지를 하고 있는 그곳의 분위기가 그런 일들을 만들고 있는것 같다. 자신의 목숨이 중요한 것은 누구나 같은 생각이지만 일을 할수도 없고 이스라엘군인들에게 모든것을 읽어버린 사람들이 자신의 가족을 구하기 위하여서 생각을 할수가 있는 일중에 하나가 자살테러를 지원을 하는 곳에서 지급을 하는 돈이 생명줄로 작용을 할수도 있다고 생각을 하는데 그러한 행위를 막기 위하여서는 이스라엘의 정치인들도 강경한 방법만이 아닌 저자가 말을 하는 것처럼 유화적인 모습을 만들어서 그곳에 살고있는 사람들의 생활고를 만족을 시키는 일이 가장 중요할것 같다. 4. 교 육 주변국의 문맹율과는 다르게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문맹율이 낮다고 하는데 그러한 이유가 지원을 하는 단체들에서 교육을 최우선으로 생각을 하는 방향이기 때문에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많고 문맹율은 적지만 교육을 받은 내용들을 활용을 할수가 있는 사회적인 여건이 안되기 때문에 더욱 문제가 발생을 한다고 볼수가 있다. 5. 환 경 이스라엘의 불법적인 행위로 인하여서 주민들이 살고있는 곳이 갈수록 좁아지고 그들의 행동반경이 줄어들면서 생활고가 심각해지고 일종의 섬으로 만들어서 자연스럽게 말살을 시키려고 하는 행동을 하고 있는데 그런 일에 대하여서 반응을 보이는 행동도 시간이 지나면서 약화가 되고 있다고 한다. 오랜 시간을 억압을 받고 살고있고 주변국들의 반응도 미지근한 상태이기 때문에 문제를 일으켜도 돌아오는 것은 탄압과 죽음이라는 사실이 그곳에 살고있는 사람들의 의욕을 상실하게 만들고 있다고 볼수가 있다. 6. 결 론 책을 읽으면서 느끼는 부분은 그곳에서 살아가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최소한의 자유이고 많은 것을 바라지도 않는데 그 최소한의 바램도 들어주는 사람이 없고 갈수록 강화가 되는 주변의 정세가 사람들을 힘들게 만들고 있지만 주변국의 변화들로 인하여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감싸고 있는 환경도 변화가 될것을 기원을 하고 있는것 같다. 모르고 있었던 많은 부분들에 대하여서 새로운 정보를 알게되는 계기가 되었는데 일상적인 부분만이 아닌 다른 부분들도 책에 수록을 하였다면 더욱 좋았을것 같다. 1,2,3번 문항은 책이 아닌 글쓴이의 생각 입니다. ※ 이벤트 당첨도서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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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이스라엘로 대표되는 근본주의 종교의 폐해, 그로 말미암아 세계 여러 곳에서 끊임없이 벌어지는 종교를 빙자한 정치/경제적 원인에 의한 전쟁, 인권의 탄압, 유린.. 뭐 새삼스러운 이야기도 아니고...
대표적인 이슬람 문명중의 하나인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는 이 천인공노할 행태에 이미 많은 사람들은 탄식하고 있다. 하지만, 이번 대선에서 드러난 것처럼 대한민국의 51%가 아직 깨닫지 못하듯이 아직도 미국이 주도하는 자신의 신과 돈만을 숭배하는 무자비한 헤게모니에 대해서 깨닫지 못하는 사람도 부지기수다.
이 책은 그런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 역할을 해주리라 생각한다. - 뭐, 널리 읽히진 않겠지만 만약 읽는다면.. 하지만, 이 책의 의미는 거기까지만으로 하자. 솔직히 깊이를 기대하기는 어렵고(그러기에 무척 짧고), 편집이나 구성에서도 낙제점을 겨우 면한 정도라고만 해두련다(한마디로 짜집기의 실패). 실재로 현지에서 발로 뛰며 느낀 저자의 노력과 책으로까지 펴낸 의지는 존경받아 충분하다고 생각하지만(이 부분에서는 감히 내가 어떤 말도 할 수 없다.).
이 책이 나에게 던져준 가장 큰 의미는 '부끄러운 대한민국'이다. 왜, 저 멀리 팔레스타인인들에게 닥친 이 지옥 같은 현실에 이 머나먼 땅의 내가 부끄러워 고개가 숙여지는지? 내 조국에 대한 나 자신의 역할은 제대로 하지도 못하면서도 나의 조국은 떳떳하기를 바라는 것은 이기심일까? 책 말미에도 팔레스타인의 미래에 긍정적인 바람을 드러내지만, 그들이 이 세계의 구성원으로서 떳떳한 위치를 회복하게 되는 그 언젠가에 대한민국도 함께 떳떳하고 진심으로 그들을 축복해줄 수 있기를 바란다.
또 한가지,.. 박**정부가 구상중인 '미창과부(미래창조과학부)' 신설에 대해서 생각해본다.(웬 또 뜬금없는..) 물망에는 창조과학을 한다는 교수도 포함되어 있었다는데… 현 이 나라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지않은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