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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읽어도 세월은 가고, 시를 읽지 않아도 세월은 간다." 책의 서문에서 안도현 시인이 한 말이다. 이런 멋진 말을 할 줄 아는 시인을 몇년전에 실제로 만난 일이 있었다. 시에서 문화행사로 초빙한 강사가 안도현 시인이었던 것이다. ‘연어’는 다 알다시피 알래스카에서 성장한 연어들이 모천을 찾아 돌아오는 과정을 동화처럼 맑게 펴낸 시인의 소설이다. 이 소설에 관한 강좌를 시에서 열었는데 늦게 참석한 탓에 그 내용은 듣지 못하고 ‘저자와의 대화시간’에 가까스로 시인을 볼 수 있었다. 시인의 모습은 책에 나온 표지사진 그대로였다. 약간 동그란 얼굴에 안경을 쓰고 표정은 밝았다. 시민들과의 대화중에 기억에 남는 답변이 있다. “제가 쓴 시를 보고 사람들이 저에게 시를 참 쉽게 쓴다고 얘기할 땐 정말 섭섭합니다. 아무리 짧은 시라도 시를 쓸 때는 막막하고 힘이 듭니다. 그런데 제가 발표한 시들을 보고 독자들이 쉽게 쓴다고 부러워하니 서운하죠. 시 쓰기는 저한테도 언제나 큰 어려움이랍니다.” 이 말을 듣고 내심 위안이 되었다. 시인이 천재처럼 영감을 얻어 하룻저녁에 수편의 시를 쓴다고 했다면 나처럼 평범한 사람은 시를 쓸 작정도, 시를 읽고 싶지도 않을 것이다. 그런데 시인의 이런 말을 들으니 시 쓰기도 재능보다는 노력이 먼저라는 답을 얻는 기분이었다. 오랫동안 시를 매만져온 시인조차도 시 쓰기를 어려워하는데 이제 겨우 시에 재미를 붙인 초보들이 시 쓰기를 막막해하고 힘들어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닌가. 이 책은 안도현 시인이 가려 뽑아놓은 시선집이다. ‘안도현의 내가 사랑하는 시’라는 부제가 달려있다. 서문에 시를 읽으며 세월을 보낸 사람은 시를 읽지 않고 세월을 보낸 사람보다 행복하다고 적혀있다. 그리고 이 시집을 읽으며 시 읽는 즐거움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하며 자신만의 “명시” 71편을 골라 실었다. 너무나 유명한 시도 있고 얼핏 들었던 시도 있고 또 낯선 시들도 있다. 자고나면 쏟아져 나오는 많은 시들을 일일이 챙겨 읽지 못할 바에야 이렇게 시인이 골라주는 시를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동규의 ‘즐거운 편지’ 에 대해서 시인은 짧게 한마디를 적었다. -박신양과 최진실이 주연한 영화<편지>가 아니었다면, 이 시를 내 마음 더 깊은 곳에 숨겨 둘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그 영화가 아니더라도 이 시는 이미 너무나 유명하지 않은가. 오규원의 “한 잎의 여자” 역시 눈으로, 귀로 익숙한 시다. 시인은 이 시로 직유법 연습 한 번 해보지 않았으면 시인 될 생각을 말라고 한다. 얼른 여자에 대한 생각을 이어본다. 눈 같은 여자, 태양 같은 여자, 소나기 같은 여자, 구름 같은 여자......서정주 시인의 ‘늙은 사내의 시’는 아주 편안하게 읽혀진다. ‘시를 못 쓰는 날은 늙은 내 할망구의 손톱이나 깎어주자’라며 옆에서 시인이 조근 조근 들려주는 이야기 한 토막을 듣는듯한데 다 읽고 나면 마음이 따듯해진다. 좋은 시는 누구나에게 쉽게 전달되는 것인가 싶었다. 최승자의 “개 같은 가을이”라는 시를 놓고 안도현 시인은 -‘개 같은 가을이 쳐들어온다/ 매독 같은 가을’, 이 도발적 직유 하나로도 최승자는 시인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곱게만 수식할 줄 알았던 가을을 이렇게도 표현할 수 있다니 나도 순간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시를 쓰는 일이야말로 새로운 발견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머릿속으로 우르르 “쳐들어 온다.” 고은 시인의 ‘사치’라는 시는 병으로 죽은 누님을 생각하며 살아있다는 일 자체가 사치라는 내용을 내포하고 있는 시다. 시집 중반쯤 넘어서면 아주 발랄한 시 한편이 나온다. 김현식 시인의 “유월의 살구나무”라는 시는 1990년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작품이다. 무겁고 칙칙하고 엄숙한 세계에서 한 걸음도 빠져나오지 못하는 시인들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안도현 시인의 소개말과 함께. 이 시를 읽으면 나도 모르게 어딘가로 통통 뛰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시란 이렇게 읽는 사람의 마음을 행동으로 옮기게 하는 힘이 있다. “양산을 거꾸로 걸어놓고 나무를 흔들면/ 웃음처럼 토드득 살구가 쏟아져 내렸지/-중략- 하얀 천에 떨어져 뛰어다니던 살구처럼, 추억은 마룻바닥을 뛰어다니고 창밖엔 비가 내린다/” 그저 쓰윽 읽어봐도 느낌이 확 다가오는 시가 있는 반면, 아무리 읽어도 무슨 뜻인지조차 알 수 없는 어려운 시도 많았다. 시가 무엇인지 아직 잘 모르지만 시 한편에는 시인의 경험이 그대로 스며들어있으므로 시를 읽으면 읽는 만큼 새로운 세계에 대한 경험을 쌓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시집을 읽고 또 읽게 된다. 시집은 함민복 시인의 ‘긍정적인 밥’을 마지막에 실었다. 시처럼 ‘시 한편에 삼만 원이면’ 시를 써서 부자 되기는 어렵겠지만 시인의 마음만큼은 누구도 부럽지 않을 부자라는 걸 느꼈다. 남을 생각하는 따뜻한 마음, 작은 것을 귀하게 볼 줄 아는 안목과 하찮은 것들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살아가는 시인들의 귀한 마음을 읽을 수 있어 즐겁고 행복한 시 여행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