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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사는 세상을 향한 아름다운 꿈 - 송은일 대하소설, 『반야 5』
5권 이야기를 시작하기 앞서 작가는 백거이가 지은 「학鶴」을 인용한다. “사람은 저마다 좋아하는 바가 있고/ 사물에는 애당초 꼭 그래야만 하는 법도 없어/ 누가 너를 일러 춤을 잘 춘다 하는가/ 한가롭게 서 있을 때만 못한 것을”이 그 내용이다. 사람마다 얼굴 생김이 다르다. 당연히 좋아하는 바도 다르다. 내가 좋아하는 걸 남이 반드시 좋아할 리 없고, 남이 좋아하는 걸 내가 반드시 좋아할 리 없다. 사물도 마찬가지다. 사물이 꼭 그래야만 하는 이유는 없다. 꽃은 그렇게 생기고 싶어 꽃이 된 게 아니다. 새는 그렇게 울고 싶어 새가 된 게 아니다. 백거이는 너울너울 춤추는 학을 보며 이야기한다. 한가롭게 서 있는 모습이 더 좋다고. 또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너울너울 춤추는 학을 따라 살고 싶다고. 누가 옳고 누가 그른 것인가? 애당초 꼭 그래야만 하는 법이 없으니 옳고 그름을 여기서 가릴 필요는 없다.
5권에서 작가는 만단사의 암살 집단인 비휴(豼貅)를 이야기 중심으로 끌어들인다. 정확히 말하면 이야기는 비휴들을 적(敵)이면서 적이 아닌 존재로 대하는 사신계에 집중되고 있다. 반야의 지아비인 만단사 거북부령 황환을 제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는 점에서 비휴들은 분명 반야의 적이다. 하지만 반야는 그들과 맞서 싸우지 않는다. 비휴들이 무서워서가 아니다. 그네들을 물리칠 힘이 사신계에는 넘쳐난다. 중요한 것은 비휴를 적으로 생각하고 죽이는 게 아니라, 그들을 사신계로 이끌어 새롭게 살 도리를 마련하는 데 있다. 반야는 만단사에서 살수(殺手)로 길러진 젊은이들을 너른 품안으로 받아들인다. 만단사령 이록은 왕위에 오르기 위해 만단사를 살인집단으로 만든다. 그에게 비휴들은 사람 몸을 한 살인도구일 뿐이다. 자기 목적을 이루려고 그는 젊은이들을 사지로 내몬다. 사람은 저마다 좋아하는 바가 있다고 노래하는 백거이가 이 모습을 보면 어찌 생각하게 될까 “그래! 선유 말대로 이미 죽은 마당에 솔직히 말하자. 우리가 받은 명은 처음부터, 아니 근본적으로 명분이 없었어. 전날에 우리 사부께서 형옥에 계실 때 우리가 파옥이라도 하여 그 분을 구명할 명분이 없었던 것과 다르지 않아. 그 분이 한 일은 그 자신만을 위한 것이었어. 자신만의 삶을 위해 남의 집에 들어가 목숨을 위협하여 남이 수 년, 수십 년에 걸쳐 모은 것들을 강탈했어. 그렇게 강탈한 돈이 부정하게 쌓인 것들이었다고 해도, 우리 사부의 잘못이 덜하지는 않아. 그 행위에 어떤 대의명분도 없었기 때문이지. 그런 사부의 제자들이 우리였어. 그런 것도 모르고 우리는 아름다운 세상을 살기 위해, 우리가 원하는 삶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 사는 거라 여기며 컸고, 그걸 위해 우리 세상에 충성하는 걸 당연히 여겼어. 당연을 넘어 뼛골마다, 핏줄기마다 새겨져 있지. 헌데 우리 속에 새겨진 그 당연함이 과연 응당했던 것일까? 또 우리는, 우리가 아름답게 살기 위해서 출발선에서부터 남의 목숨을 밟고 시작했지. 죽여 마땅한 자들을 골라 죽여라? 그 명이 응당한 거였어? 왜 우리는 지금까지 그런 질문을 하지 않았지? 이번에 받은 명은 명분이 있는지, 아름다운 세상을 향하는 대의에 합당한지, 아름다운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 왜 우리는 질문하지 않는 걸 당연하게 여겼을까? 어째서 합당과 부당에 대해, 정도와 사도邪道에 대해 물을 줄 모르는 멍청이들로 자랐지?” (164~165쪽) 사신계 포로가 된 비휴 가운데 둘째인 자선은 ‘명분’을 이야기한다. 이들은 살수로 길러지긴 했지만, 스승에게 글을 배워 세상 돌아가는 이치나 사람으로서 살아가야 할 도리 정도는 안다. 스승 정효맹이 죽을 때는 눈 하나 깜짝 않던 이록이 같은 조직에 있는 부령을 암살하라고 명령했다. 그림자 도둑이 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정효맹은 이미 명분을 잃었다. 스승이 잃은 명분을 제자들이 어찌 붙잡을 수 있을까? 거기다가 한 조직의 우두머리인 사령은 개인의 사욕을 채우기 위해 끊임없이 젊은이들을 죽음터로 내몰고 있다. 반야는 비휴들이 느끼는 이 마음에 불을 지른다. 그녀는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답게 사는 일이 무엇인지 비휴들에게 자꾸만 이야기한다. 말로만 그러는 게 아니다. 반야는 그들에게 사람끼리 맺는 관계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보여준다. 몸이 묶여 혼자서는 식사를 할 수 없는 비휴들 앞에 그녀는 여인들과 아이들을 내세운다. 그들이 밥을 떠서 비휴들을 먹인다. 자기들을 죽이러 온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이 광경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온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를 창졸간에 잃은 윤홍집(윤선일) 앞에는 제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들 것 같은 꼬마 아이가 서 있다. 발등에 점 3개를 지니고 태어난 아이(미연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이 하나 지키지 못하는 아비를 아비라고 할 수 있는가? 꼬마가 숟가락으로 시래기 국을 떠서 홍집에게 내민다. 국물의 반이 아래로 흘러 꼬마 옷을 적신다. 둘 다 무릎을 꿇고 있으니 키가 맞지 않는 것이다. 반야에게 말을 들은 꼬마가 이제는 일어나 국을 뜬다. 국물이 비로소 홍집의 입 속으로 제대로 들어온다. 자신감이 생긴 건가? 아이가 숟가락에 밥을 뜬 후 서툰 젓가락 솜씨로 김치 한 조각, 멸치 두 점, 볶은 버섯 조각을 얹는다. 제 입맛을 다시며 탑을 쌓듯 공들인 숟가락을 드는 찰나 쌓은 것들이 스르르 무너져 상 위로 흩어진다. 홍집은 기가 막힌다. 웃음이 절로 나온다. 곁에 있던 수앙이 와서 돕는다. 수앙이 밥을 먹이자 성아(꼬마)가 국을 떠먹인다. 홍집이 웃는다. 홍집만 그런 게 아니라 다른 비휴들도 웃으며 여인들이 주는 밥을 먹는다.
반야는 비휴들에게 사람 사는 모습을 보여준다. 사람 사는 모습이란 무엇일까? 같이 밥을 먹고 웃으며 이야기하는 것이다. 식구(食口)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밥을 같이 먹으면 식구다. 만단사든 사신계든 밥을 같이 먹으면 식구가 될 수 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게 만단사 강령에도 있고 사신계 강령에도 있지 않은가? 양반과 상민, 천민이 엄격히 구분되는 사회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세상이 과연 가능할까? 비휴들은 대부분 부모에게 버림받은 아이들이다. 부모인들 아이들을 버리고 싶어 버렸을까? 제 한 입 풀칠하기도 힘든 판에 병든 아이들을 돌볼 틈이 어디 있겠는가? 부모 정을 받지 못하고 자란 아이들은 살수가 되어 다시 이 세상으로 나온다. 사람을 죽이고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있을까? 반야는 비휴들을 만단사에서 빼내 새로운 길을 열어주려고 한다. 사람 사는 길로 이끌려고 한다. 비휴 입장에서 그것은 만단사를 배신하는 일이므로 결코 쉽게 결단할 수 없는 문제이다. 그런 비휴들에게 반야는 그저 묵묵히 밥을 먹인다. 식구가 된다.
5권에서는 김강하와 수앙(심경)의 사랑 이야기가 그려진다. 어릴 때부터 오누이 사이로 큰 두 사람은 운명처럼 맺어진다. 큰 누이(김강하)에게 시집 갈 거라는 얘기를 장난처럼 내뱉던 수앙이 강하와 이온 사이에 혼담 얘기가 오간다는 소문을 듣고 마음이 상해 죽을 지경에 이른 것이다. 이록이 강하 집안인 유릉원에 청첩 글을 보냈지만 유릉원은 고심 끝에 거절한다. 수앙 사건까지 겹쳐 두 사람은 급작스레 혼인을 하게 된다. 그렇다고 강하가 수앙에게 마음이 없는 건 아니다. 다만 오누이로 살아온 세월이 있어 수앙을 여인으로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뿐이다. 이온이 강하에 대한 마음을 접지 못하고, 임금의 딸인 화완 옹주도 호시탐탐 강하를 노리는 상황에서 두 사람은 어떻게 사랑을 키우게 될까? 사람은 밥만 먹고 사는 게 아니다. 사랑만 먹고 살 수도 없다. 인생이란 밥과 사랑이 뒤얽혀 이루어지는 한바탕 놀이라고 표현하면 어떨까? “설화와 신화적 상상력으로 구성한 우리 민족의 대서사시!”라는 뒷표지 문구는 이리 보면 ‘밥과 사랑’이라는 두 마디로 뭉뚱그려도 될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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