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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사는 세상을 향한 아름다운 꿈 - 송은일 대하소설, 『반야 10』
사도세자의 아들인 세손이 영조의 맏아들인 효장세자의 양아들로 입양된다. 세손이 죄인의 자식이 아니라는 것을 천명하기 위함이다. 죄인의 아들이 되면 왕위를 잇기 힘들다. 대조는 세손을 효장세자의 양자로 들임으로써 세손으로 왕위를 계승할 명분을 세운다. 사신계를 관장하는 수앙은 세손을 계원으로 영입하려고 한다. 세손을 지키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하다. 사신계는 계원이 어려운 상황에 처하면 어떤 경우에도 도움을 주어야 한다(사도세자는 사신계원이 아니었다). 세손이 계원이 되면 당연히 사신계의 도움을 받게 될 것이다. 문제는 세손을 어떻게 사신계로 맞아들일까 하는 점이다. 사신계는 조선이라는 나라와는 다른 길을 걷는다. 조선이 신분제에 기반하고 있다면, 사신계는 이 신분제를 원칙적으로 거부한다. 또 사신계는 내부에 엄격한 품계 구조를 지니고 있다. 아무리 세손이라고 해도 이 품계를 무시할 수는 없다. 이래저래 세손 문제는 사신계가 지향해야 할 바와 맞물려 골치 아픈 일이 되어버린 셈이다.
세손을 입계시키는 일에 세손의 배동이자 이극로의 동생인 이성로가 나선다. 두 사람은 열고관에 들어가 책을 읽는 척 궁인들을 따돌리고는 수앙을 만나기 위해 비연재로 간다. 세손을 입계시키려면 우선 세손이 문답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문답 시험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만인을 동등하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세손이 어찌 대답하느냐에 있다. 세손은 대조를 이어 왕위에 오를 사람이다. 왕이 될 이가 과연 만인이 동등하다는 사신계 내규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세손은 “누구나 한 번 살고 한 번 죽는 것이야말로 만인 동등의 기본이 아닐는지요. 단 한 번의 생인데 어떤 목숨은 귀하고 어떤 목숨을 천하다고 못하지요. 때문에 서로의 목숨과 삶을 똑같이 아끼며 살아야 한다는 소소 무녀의 말씀에 동감합니다.”(159쪽)라고 대답한다. 목숨은 똑같다는 말로 신분제라는 차별 논리를 벗어난 셈이다. 지존(至尊)과 지천(至賤)에 대한 질문에는 “지천이 지존과 애초에 다르다면 지존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160쪽)라고 이야기한다. 할아버지 대조가 지천 출신의 후궁 몸에서 탄생한 사실을 예로 든다.
사십구일 동안 해야 할 묵언 기간을 세손은 홍역을 앓는다는 핑계로 궁궐에서 수행한다. 세손이 사신계원이 됨으로써 사신계는 강력한 동반자를 얻는다. 한 나라를 이끌 왕손이 아닌가? 사신계가 지향하는 바가 나라 전체에 퍼질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 셈이다. 하지만 이렇다 해도 세상이 쉽게 바뀔 리는 없다. 세손 한 사람으로 바뀔 세상이라면 역사를 수놓은 그 많은 영웅들이 속절없이 스러진 까닭이 없지 않겠는가? 사신계와는 다른 길을 걷는 이들 또한 호시탐탐 권력을 잡기 위해 온갖 힘을 기울이고 있다. 세상은 여러 개의 힘이 부딪치며 형성되는 것이다. 세손은 세손의 길을 걷고, 곤전은 곤전의 길을 걸을 뿐이다. 지금 이 세상을 사는 사람들은 당연히 사신계가 지향하는 바를 옹호하겠지만, 당시 사람들에게 평등 세상은 실현되기 힘든 꿈과도 같은 것이다.
수앙은 곤전파를 처단하기 위해 반야원 굿판에서 사도세자를 위한 진혼굿을 연다. 곤전은 대조를 설득하여 세손으로 하여금 이 굿판에 참석하게 한다. 세손을 죽인 후 그 책임을 반야원에 묻기 위해서이다. 곤전의 계획이 이루어지면 사신계는 심각한 타격을 입을 것이다. 조상굿 본거리를 시작하는 순간 총소리가 울린다. 금위대 복색을 한 군졸들이 쏜 총이다. 사람들을 겨냥한 게 아니라 혼령이 탄 배인 영선을 향해 쏘고 있다. 사도세자의 천도를 방해하는 세력이 쏜 총인 셈이다. 난장판 속에서 굿이 속개된다. 세손으로 변장한 성로가 반야원에 도착해 세손 노릇을 한다. 세손이 반야원에 온 것으로 착각한 곤전파와 사신계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진다. 전략이고 전술이고 없다. 죽고 죽이는 지옥도가 반야원 구석구석에서 펼쳐진다. 이것이 마지막 전투일까? 이 싸움에서 사신계가 이기면 세상은 사신계가 원하는 그 세계로 바뀌는 것일까? 그럴 리가 없다. 유토피아는 이 세상에서는 실현될 수 없다. 실현될 수 없기에 사람들은 끊임없이 유토피아를 갈망한다. 사신계를 만든 근본 강령인 평등사상이 신분제가 철저한 조선 사회에서 어떻게 실현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작가는 여전히 꿈을 꾸고, 그 작가를 따라 독자들 또한 여전히 꿈을 꾼다. 유토피아를 향한 꿈을 꾸며 이 고통스런 현실이 좀 더 나아지길 기대한다. 사신계라는 집단 자체가 그렇지 않은가? 자기 신분을 버리고 사신계원으로 살아가는 일에는 이미 질서 밖으로 나아가려는 저항의식이 담겨 있다. 천 년이 넘는 시간을 이어온 사신계의 역사를 생각한다면, 인간은 언제나 이상을 품은 채 현실과 마주하기 마련이다. 도대체 이상도 없이 어떻게 이런 숨 막히는 세상을 살 수 있을까? 실제 역사는 정조가 위대한 임금 가운데 하나였다고 기록한다. 그러나 정조 사후 곤전파(정순왕후)가 권력을 잡음으로써 조선은 외척이 세도를 부리는 극심한 혼란 상태에 빠지게 된다. 이때 사신계는 과연 어떤 행동을 취했을까? 현실과 허구 사이에 소설이 있다. 작가는 정조라는 역사적 인물에서 어떤 희망을 보고 있지만, 그 희망이 철저히 허물어졌음을 우리는 지나간 역사를 통해 이미 알고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반야는 더불어 함께 아름다이 사는 세상을 꿈꾸었다. 말 그대로 유토피아다. 그녀는 사신계를 통해 그 세계로 가는 길을 조금이나마 열었지만, 그것이 역사 자체를 바꾸는 힘이 되지는 못했다. 사신계라는 조직은 어찌 보면 일반 사람들이 꿈꾸는 나라와 같은 이상향인지도 모른다. 한 사람 한 사람은 한없이 약하지만 그들이 모여 이룩하는 세상은 한없이 강하다. 우리는 그 힘을 ‘민중’이라는 말로 뭉뚱그리지만, 사실 민중만큼 추상적인 개념도 없다고 볼 수 있다. 반야는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세상에서 사람들을 살릴 길을 찾았다. 자신을 죽이려고 달려드는 사람들에게 그녀는 사랑하는 마음을 베풀었다.
작가는 이 소설에서 반야가 실천한 이 사랑을 무엇보다 강조하고 있다. 사신계를 이끄는 힘은 계원들이 내보이는 절대적인 힘(폭력)이 아니다. 반야는 그 힘을 사랑으로 다스려 온갖 사람들을 포용하는 데 이용했다. 더불어 사는 아름다운 세상은 사랑으로만 실현될 수 있다는 걸 그녀는 온몸으로 보여주었다. ‘반야’는 그리 보면 사랑의 다른 이름이라고 볼 수 있다. 유토피아로 가는 길 위에는 어디에서나 사랑이 넘쳐난다. 사랑이 없는 유토피아는 상상 속에서라도 불가능한 세계라는 얘기다. 그것을 실천하는지 여부는 사람들에게 달려 있다. 사랑이 아무리 고귀해도 실천하지 않으면 무의미하다. 사랑은 그렇게 우리 앞에 오래된 희망으로 놓여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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