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티칸의 교황께서 인간이 추구하는 진리, 다른 종교의 진리를 인정하신다고 들은 바가 있다. 그 말의 뜻을 개신교 신자인 나로서 알기는 힘들지만 수행이 깊은 스님들과 같이 신앙이 깊으신 자에게는 종교를 벗어나서 인간적으로 수행의 값을 해내시는 분들로 보아서는 그럴만도 하다. 타고르는 분명 기독교 신자는 아니지만 내가 이 책을 읽게된 데에는 내가 스님들을 좋아하는 바와 비슷하다. 다만 타고르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신 분으로, 그분이 쓰셨다는 신에 대한 찬가를 보고 싶었다. 언어라는 것이 오묘한 것이어서 그 문화의 정서가 아니면 알아듣기에 어색한 부분이 많은데도 신에 대한 경외심은 나도 조금 알만했다. 비록 내가 기독교 신자이긴 하지만 나는 다른 종교의 신앙심을 부정하지 않는다. 내가 보아온 스님들이 계시니까. 타고르님 또한 나와 다른 종교를 지니셨지만 그 신앙에서 나오는 글은 나의 신앙에도 자그마한 흔적을 남기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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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고르의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힌두 사상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인도인들의 생각이 녹아들어가 있는 시가 기탄잘리다. '범아일여'가 힌두사상의 핵심이다. 인도의 우주관. 전체는 '브라마'이다. 개인은 '아트만'이다. '브라만'는 인도의 세 중요한 신, 브라마, 비슈누, 시바신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 브라만과 아트만이 연결되는 때는 오직 개체인 아트만이 순수하게, 지극히 본질적인 상황일 때이다. 조금이라도 때가 끼면 연결은 깨지고 만다. 그러므로 '나'의 삶의 궁극적 목표는 본질적인 순수함을 찾아 아트만이 되고, 곧 브라만과 연결되어 우주와 하나가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주위의 모든 것이 브라만이므로, 내가 그와 하나가 되는, 즉 '범아일여'가 되는 것이다. 범은 브라만의 음역이요, 아는 아트만의 음역이다. 기탄잘리는 신에게 바치는 노래라는 뜻으로 알고 있다. 내용 모두가 신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고 있다. 첫번째 시부터 그것을 잘 표현하고 있다. '당신께서 나를 무한하게 만드셨습니다'의 '당신'은 물론 브라만이다. '연약한 그릇'은 개체인 나를 뜻한다. '비우시고, 또 비우셨습니다'는 비본질은 없애는, 즉 욕망을 없애는 과정을 말한다. 탐욕스러우면 아트만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새 생명'은 본질을 가리킨다. 비본질과 상반되는 개념이다. '당신의 성스러운 손이 닿자'가 중요한 부분이다. 이것이 범아일여의 순간인 것이다. 브라만과 연결된 순간을 말한다. 그러므로 이 시는 범아일여의 기쁨과 희열을 노래한다고 볼 수 있다. '내 노래에 당신이 즐거움을 느끼실 것을 알고 있습니다' 또한 범아일여의 상황을 말하는 것이다. '당신의 발에 부딪칠 것입니다' 또한 마찬가지다. 내가 브라만이 되는것, 삶의 최고 목표, 지구의 상태. 기탄잘리는 온마음으로 그것을 바라며,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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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탄잘리는 신에게 바치는 송가라는 뜻이다. 타고르의 기탄잘리는 자연, 삶과 죽음, 신의 이야기를 다룬 종교시이다. 이 시집은 1913년 노벨문학상을 탄 시집으로 유명하며 수천 년에 걸친 인도 문화의 문학적 결정체라는 위대한 찬사를 받기도 했다.
이 시집을 읽어보면 금방 알겠지만 대부분 신에 호소하는, 신의 은총을 기다리는, 신을 맞아 들이는 내용이 많다.
본회퍼가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는데 신이 없어보이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신 앞에서 살아가는지를 문학적인 성찰로 보여주는 아름다운 책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을 해석하시는 결코 쉽지 않다. 다만 우리가 읽고 느끼고 명상하면 타고르의 정신을 조금이나마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인상깊은구절] 기탄잘리1 당신은 나를 무한케 하셨으니 그것은 당신의 기쁨입니다. 이 연약한 그릇을 당신은 비우고 또 비우시고 끊임없이 이 그릇을 싱싱한 생명으로 채우십니다. 이 가냘픈 갈대 피리를 당신은 언덕과 골짜기 넘어 지니고 다니셨고 이 피리로 영원히 새로운 노래를 부르십니다. 당신 손길의 끝없는 토닥거림에 내 가냘픈 가슴은 한없는 즐거움에 젖고 형언할 수 없는 소리를 발합니다. 당신의 무궁한 선물은 이처럼 작은 내 손으로만 옵니다. 세월은 흐르고 당신은 여전히 채우시고 그러나 여전히 채울 자리는 남아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