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일지의 "경마장 가는 길"은 무려 500페이지가 넘는 아주 긴 소설이다. 보기에도 괴로운 활자와 분량에 우선 질려버리는데, 내용이 재밌기를 하나 사건이 다채롭기를 하나...... 길가다 하품하는 모습까지 자세하게 묘사하며 의미 없는 대화를 반복하는 구조로 되어있는 이 작품은 꽤나 독자의 인내심을 요구한다. 주인공의 이름조차 익명으로 처리하고 마치 3류 연애소설에서나 봄직한 저속한 성의 표현들이 등장한다.
무의미 할 정도로 지나친 상황 및 행동묘사를 우리는 분명 쉽게 이해할 수 없다. 대체로 이 소설을 이해하고 분석하기 위한 도구로 많이 언론매체나 평론가들은 포스트 모더니즘을 들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 자체가 어떤 확실한 사상이나 고정형식이 아니기에 이 소설 역시 극명하게 분해조립할 수는 없다. 작품속에서 R을 통해 보여지는 현실은 단순하지만 골치 아프고 피곤하게 하는 것들이며 또한 모순덩어리이다.
그리고 자신 역시 그곳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며 나름대로의 지식을 피력해보지만 그의 행동은 그의 말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그런 모든 일련의 행동 등이 작가의 묘사와 서술 - 즉 아주 세세한 관찰에서 비롯되고 있다. 과연 작가 하일지가 내면과 외면의 세계를 관찰하고 또 관찰하며 받아들이고 싶었던 현실은 어떤 것일까?
분명히 [경마장 가는 길]은 매우 지루하다. 인물의 행동이나 대사만으로 작가가 추구하는 사상이나 메세지를 파악하기에는 난해한 면이 없지 않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은근히 끌어들이는 맛이 있다. 허무한 대사들이 난무하고 반복되고 있는데 그 활자를 쫓아가는 시선이 느껴진다. 그것은 인물과 사건과 문체가 만들어내는 흡입력일 것이다.
모더니즘 시대라면 작품은 기승전결이 분명하고 독자를 배려한 많은 상황파악, 감정파악을 돕는 문구들로 채워져 있을 것이다. 또는 어떤 극명한 사고를 보여주거나 갈등의 고조가 흥미진지한 양상을 띠고 있을 것이다. 주인공은 익명이 아닌 실명을 쓰고 있겠고 좀더 매력적인 인물로 만들어졌을 지도 모른다. 포스트모더니즘을 통해 이 작품을 해석하게 된 데에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보다 넓은 의미를 지녔고 보다 비정상적일 수도 있고 이해할 수 없는 요소들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야 말로 이 작품의 구석구석을 해부하고도 후에 재조립할 수 있는 특색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 내에는 형식상으론 불확실한 또 하나의 액자소설이 담겨져 있다. 그것은 그가 가끔씩 펜을 들고 극적거리던 '경마장'에 관한 짧은 메모와 자신의 삶을 한 편의 소설로 비유하는 대사 등이다. 처음에 작가는 의도한 대로 자신의 감정은 하나도 개입시키지 않으며 R과 J를 이끌고 나갔다. 그러다 보니 작품의 형식은 매우 일관성이 넘치고 있었지만 정작 자신이 꼭 하고 싶었던 말을 할 기회를 박탈당했다. 그래서 그는 R의 손을 빌려 우리에게 암시했고 R의 입을 빌려 시원하게 배설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인상깊은구절] 이 서울에서는 내가 길을 걸어가거나, 너와 만나 대화를 나누거나, 이렇게 식당에 앉아 식사를 하거나,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 변소로 가 대변을 보거나, 길가에서 우줌을 누거나, 나의 일거수 일투족은 모두 허구의 세계에서 기획되어 있는 행동들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 나, R이라는 존재 자체가 어느 소설가에 의해 허구적으로 만들어진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나, R이 지금 너, J에게 말하고 있다는 것마저도 현실적인 것이 아니라 어느 소설가에 의해 씌어지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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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따금 내가 날마다 보고 듣고 느끼고 하는 것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낱낱이 기록해 두면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하나의 소설이 되리리는 생각이 들어. 그걸 있는 그대로 기록해 두면 대단히 신비한 느낌을 자아내게 하는 하나의 거대한 예술 작품이 되리라고 생각해. 물론 그런 유형의 소설이 나오면 무식한 독자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지. 어느 시대든지 참된 소설의 독자는 언제나 무식하기 마련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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