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근래에 들어 김곰치의 글을 자주 읽습니다. 작가가 활발하게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는 뜻도 되거니와 작가에 대해 무제한의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작가에 대한 믿음은 오래된 것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두터워집니다. 깊고 넓어지는 아름다운 영혼을 보고 있는 느낌입니다. 최근에는 ‘집’에 대한 글을 읽었는데 역시나 몇 번 울컥, 하는 느낌을 경험했습니다. 거기에는 마당에 무려 600여 개의 화분을 키우며 나무에게 애정을 쏟는 할아버지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피부병을 고치기 위해 2000만 원을 들인데다 매달 양수기를 사용하는 전기 요금으로 17만 원을 들이지만 마을 사람들에게 우물물을 공짜로 나누어주는 아줌마 이야기가 있습니다. 작가는 한 마을을 취재하며 그렇게 아름다운 사람들을 찾아내어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작가는 도대체 어떻게 해서 그리 진실하고 아름다운 눈을 가진 것일까요. 문득 그의 뿌리를 보고 싶어졌습니다. 그리하여 작가의 첫 책을 들었는데 비로소 실마리를 찾은 것 같습니다. 지금 식구들 중 정확히 판단하고, 제대로 실천할, 사람은 나뿐이야! 그 외침은 그를 한 차원 새로운 삶의 지점으로 이동시키는 결심이었다. 그 외침은 그를 둘러싼 모든 것의 엄연한 사실이었다. 그에게 어머니가 맡겨져 있는 것이다. 그의 결심과 판단, 실천에 어머니의 운명이 달라지는 것이다. 그가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에 따라 어머니뿐 아니라 식구 전체의 운명도 달라지는 것이다. 그 무서운 사실 앞에 그도 흥분했다. 자신이 내려야 할 결심, 식구뿐 아니라 바로 그 자신의 삶도 전혀 새로운 시간으로 이월시킬 결심, 무서운 것은 그 결심의 시작이 바로 지금 이 순간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오래 끌어온, 아무리 중차대한 문제의 막다른 결심이랄지라도 순간과 순간이 쌓여 이루어지는 것이고 막다름이란 것 자체가 또 순간이듯이 그가 열차시간표 아래 선 그 순간이 바로 그런 순간이었다. 그는 어머니를 선택했다. 동시에 다른 어떤 것들을 선택했다. (199 - 200쪽) 개인적 체험이 많이 스며든 작품 속 주인공, 오현직은 잡지사 기자입니다. 인물 기사 배테랑이 되고 싶은 꿈을 갖고 있습니다. 정치인이나 유명인이 아닌, 전국 방방곡곡의 민초들 삶의 곡절과 그 진흙 속 진주 같은 사람됨을, 저마다 간직하고 있을 소중한 가치관과 삶의 결의를 비장하고도 소중하게 다루고 싶어 했습니다. 오지를 찾아다니며 삶은 아직 이렇게 존재한다고, 도시 생활과 문명이 다는 아니라고 자연 풍정과 인물이 버무려진 실감나는 르포를 쓰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뇌종양 판정을 받자 서울로 가는 열차시간표 아래서 어머니를 선택합니다. 대학을 다니고 잡지사를 다니며 키우던 꿈 대신 어머니에게 헌신하기로 한 것입니다. 펜 대신 온몸으로 먼저 기사를 살기로 한 셈입니다. 이 선택이야말로 작가가 지금의 작가로 되게 한 근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가 선택한 어머니는 단지 오현직만의 어머니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한 여인이었고 한 사람이었고 한 생명이었으며 그 이상이었습니다. 그리고 분명 그의 아름다운 ‘엄마’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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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꼼꼼한 필체가 돋보이는 소설입니다. 가장 가깝고도 가장 먼 관계라 할 수 있는 가족의 문제를 아주 꼼꼼하게 적어내려간, 일기와도 같은 소설입니다. 어머니에 대한 뒤늦은 인식, 아버지에 대한 감정, 가족간의 차분한 일상 등이 조용한 다큐멘터리처럼 전개되고 있지요. 가장 개인적이고 그러기에 오히려 가장 일반적인 그래서 결국 가장 인간적인 이야기. 그 흐름을 따라가다보면 결국 이 시대의 평범한 아들을 만나게 됩니다. |
| <엄마와 함께="" 칼국수를="">. 이 소설은 병원에서 벌어지는 여러가지 사건과 한평생 희생을 일관하며 살아온 평범한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다. '사'자를 경외하는 우리 민족답게 대학 병원은 사람으로 들끓는다. 10초도 안 되는 짧은 면담을 위해 몇주, 심하면 몇 년전에 예약을 해야 하고 당일날 몇 시간 전에 와서 대기하며 진료 시간까지 기다려야 하며, 성에 안 차는 얘기에도 고개 끄덕일 수 밖에 없는, 아직도 의료 사각 지대에 살고 있는 작금의 현실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특히 점집도 아닌 현대 과학의 선봉에 서 있는 의료계 종사자끼리도 서로를 믿지 못하고 수익 사업에만 열을 올리고, 감기 치료에 의료 보험비의 대부분을 지출하는 등 부조리하면 면들이 너무나 많지만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는 인간적인 진료와 더불어 이기적으로 흐르기 쉬운 가족애, 또 가장 서민적인 음식으로 각광받는 칼국수와의 접목으로 평범한 가정에 대해 쓰려고 한 것 같다. 평생을 희생이라는 이름으로 일관하며 시력을 잃어가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더 이상 자식을 위해 살지 않겠다는 요즘 젊은 엄마들의 모습이 오버랩된다.엄마와> |
| 나는 소설을 거의 읽지 않는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소설에서 보이는 전형적 인물설정과 인위적 서사의 전개 때문이다. 촘촘하게 짜여진 서사구조를 따라가도 보면 주인공은 장가의 의도대로 영웅이 되기도 하고 악당이 되기도 한다. 소설가의 창조적 특권에 시비를 걸자는게 아니다. 아무튼 대다수의 소설에서 보이는 뻔한 스토리에 식상했고, 그러다보니 너무도 당연한 소설의속성(fiction) 자체가 맘에 들지 않는다는 말이다. 더군다나 무슨 문학상을 받았다고 하는 소설들은 너무나 어렵기 그지없다. 그래서인지 최근 3년간 읽은 소설도 [태백산맥]과 이 소설 [엄마와 함께 칼국수를]밖에 없다. 태백산맥의 경우, 분단시대의 문학적 성과를 집대성했다는 거창한 수사학적 찬사 외에도 언급할 수 있는 부분이 수없이 많겠지만 일단 [엄마와 함께 칼국수를]과 공통접이 있다면 둘다 나같은 '문학적 상놈'을 위해 씌여졌다는 점이다. 나처럼 소설의 문외한이 읽어도 재미있다는 뜻이다. 이 소설이 재미있는 이유는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현실, 헤겔의 명제처럼 이성적인 것, 질서있는 것, 조화로운 것만이 현실은 아니다. 논문을 쓰듯 우리의 사고가 질서정연하지만은 않은 것이다. 이 소설의 이얼리티는 바로 이러한 점에 있다. 누구나 당연하게 받아들이던 직선적 시간과 3차원의 공간, 즉 근대적 시,공간으로부터의 탈주가 엿보이는 것이다. 이 소설을 읽다보면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혼재되어있고 그 배치의 계열성도 찾기 힘들다. 일반적인 서사보다는 상상속에 작가의 의도와 감상이 더 잘 드러난다. 그러한 상상조차 현실과 잘 구별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러한 혼돈이 이 소설의 재미다. 혼재된 이미지와 기호속에서 인위적인 질서를 부여한다는 것이 오히려 부자연스럽고 비현실적이지 않을까? 이러한 작가의 의식의 흐름은 자기자신과 어머니라는 존재에 대한 몽상으로 귀결된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어머니는 너무도 평범한 전근대적인 어머니이고 소설의 줄거리도 단순하기 짝이없다. 뇌종양 때문에 시력을 잃어가는 어머니가 수술을 받게되고 주인공 '현직'이 어머니 수술때문에 직장을 관두고 고향에 몇번 내려간다는게 전부다. 한때 '명퇴'라는 사회현상에 힘입어 엄청난 판매고와 함께 영화까지 제작되었던 소설 [아버지]가 통속적 줄거리와 시대상이 잘 맞아떨어진(영화는 잘 맞아떨어지지 않은 듯 싶다) '시대소설'이라고 한다면, [엄마와 함께 칼국수를]은 그다지 긴박한 스토리 전개도, 가족소설의 양념으로 항상 등장하는 '울고불고'하는 신파극적인 장면도 없지만 주인공 현직의 내면의 흐름은 읽는이로 하여금 이상하리만치 흥분시키는 '내면소설'이라고 할만하다. 현직의 내면에는 '정치적인것과 성적인것'(학생운동에 대한 환멸, 섹스에 대한 환희, 그러면서도 무엇인가 새로운 대안을 바라는...), '어머니에 대한 외디푸스적 몽상'(소설 본문에 너무나도 많이 등장한다. 이것들을 찾아내는 것도 이 소설의 재미..), '전통적인 것과 근대적인 것'(노트북 컴퓨터와 인터넷, 그리고 스프링쿨러처럼 쏟아지는 햇살, 그러나 사투리에 녹아있는 편안함의 희구) 등 여러 갈래의 흐름이 녹아있다. 이처럼 갈피를 잡기 힘든 혼돈속에서 단연 이 소설의 중심이 되는 흐름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고 어머니를 통한 자기자신의 발견이다. 앞에서 '외디푸스적 몽상' 이라고 했듯이 주인공 현직의 의식은 단순히 어머니가 '고마우신 분'식이나 '효도해야 한다'는 도덕률과는 차이가 있다. 인류학자들이 인간과 동물의 경계로 제시하는 근친상간 내지는 외디푸스 콤플렉스적인 상상력이 어떻게 극복, 오히려 장기지속적으로 내재하면서도(프로이트가 제시하듯 '남근기'를 통해 극복되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20대 중후반 까지도 변함없는..) 단순한 욕망이 '사랑'으로 승화되는지, 그 경계는 모호하지만, 아무튼 이 소설은 이 문제에 과감히 도전하고 그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런데 그러한 발견의 과정 중 가장 중요한 인식은 소설 중 등장하는 어린 창녀와의 경험 내지는 몽상(현실과 상상의 경계가 모호하기 때문에 '경험 내지는 몽상'이다)에서 이루어지고 해소된다. 특히 외디푸스 컴플랙스의 반대급부인 '부친살해' 비슷한 반감까지도 말이다. 더 이상의 설명은 이 소설의 재미와 흥분을 반감시킬 것 같다. 왜냐하면 작가의 집필의도 자체가 모든 구조화와 정형적인 것, 합리적인 것에대한 거부라 느껴지기 때문이다. 작가와 같은 '유사386세대'(89학번, 30세, 그러나 70년생, 그래서 '유사')라면 주저없이 읽어보시라. '유사386세대'가 아니라도 '가족'이나 '욕망'에 관심이 있다면 읽어보시라. 7500원이 절대 아깝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5년 뒤쯤' 다시 선보일 작가 김곰치의 소설이 진정 기다려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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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려고 벼른 지는 꽤 되었을 것이다. 작년에 출간되면서 부터 노렸으니. 한겨레 문학상이라는 보기 좋은 꼬리표도 좋았고, 내가 몸 담고 있었던 대학신문에서 문학상을 탄 사람이라는 것도 좋았지만 아마 가장 끌렸던 것은 외치는 듯한 그 제목이 아니었을까 아니 어쩌면 어머니라는 이름이 나를 끈 것일지도...
생일선물로 친구에게 받은 뒤 머리맡에서 구르다 정작 읽게 된 것은 며칠 전 부산에서 서울로 가던 무궁화호 기차 안에서 였다. 5시간이 넘는 긴 장정동안 내게 필요했던 것은 시간이 가는 것을 잊을 수 있는 놀이거리였고 그렇게 택한 것이 바로 이 책이었다. 별 생각없이 첫 페이지를 펼쳤다.
먼저 나오는 조치원이라는 기형도의 시, 그와 맞물린 기묘한 꿈...거기서부터 책과 나와의 공감은 시작되었다. 쉴 새 없이 오르락 내리락 하며 지나친 기차역들. 주인공과 같이 부산에 살며 서울에 대학을 다니는 나. 게다가 주인공이 주간지의 사진 기자이듯 대학신문에서 사진 기자였던 나...
그래, 아마도 공감은 그것으로도 충분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더한 공감은 그것이 아니었다. 아니, 그것에 머무르지 않았다.
누구에게나, 어떤 형태로든 있는 '어머니'라는 존재, 그 존재에 대한 그의 인식과, 그의 안타까움과 그의 미안함, 그의 억눌린 그러나 벅찬 감정... 그런 사소한 감정 쪼가리들이 나를 깊은 공감으로 이끌었다. 4명이나 되는 자식들 뒷바라지 하느라 당신의 손에서는 물이 마를 날 없는 나의 어머니. 방학 때 과외비로 보약 한 첩 지어드리겠다고 그렇게 때를 써도 "나는 괜찮다"하시면서, 일때문에 팔에 생긴 물집을 가리시는 어머니...내게 있어서 어머니는 책 속 그의 그 벅찬 느낌 이상의 존재가 아니던가...
그렇기에 그의 어머니의 뇌종양이 결코 다른 사람의 문제로 다가오지 않았던 것이리라. 그래서 서울로 향하는 기차안에서 그가 더운 환기통 위에서 어머니에 대한 연민으로 부끄러움을 모르고 울었던 것처럼 나도 환한 대낮에 기차 안에서 울 수 있었던 것이리라.... 이제 다시 집으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나는 그 책을 다시 끄집어 내어 볼 것이다. 그의 버릇대로 책의 멋진 문구에 줄을 치며
이번에는 꼭 어머니와 한약방에 가야겠다고 다시 한 번 다짐을 할 것이다.... 어머니...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나의 어머니, 아니 우리 모두의 어머니...그 존재를 이제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인상깊은구절] 그는 어머니란 이름의 여자를 전혀 알지 못한다는 것을 통절히 인식했기 때문이엇다. 어머니가 자신을 낳았고, 그 갓난아기가 어느덧 27살 청년으로 자랐지만 그는 이 세상에서 처음 만난 여자, 가장 오래 알고 지낸 여자를 알지 못했다. 그녀는 그에게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여자였고, 그가 '어무이'하면 자신을 부르는 줄 알고 '왜애?'하는 여자였다. 그러나 그는 '어머니'를 알지 못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