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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존재
페르시아 만에서 전쟁이 터지자마자 TV들은 모조리 전쟁생방송 체제로 돌입하였다. 올림픽보다도 세계 권투 헤비급 타이틀 매치보다도 더 많은 시청률을 올려주며 시청자들은 사막 위 폭풍을 바라보았다.
한밤중에 이루어진 다국적군의 바그다드 시가 공습에 대해 한 기자는 <미국 독립기념일의 불꽃놀이를 일백 배 확대한 것 같다> 고 말했고, 미 ABC TV의 앵커맨 피터 제닝스는 <이것은 멋대로 진행하는 쇼>라고 토를 달았다. 한국의 한 증권사 객장에서는 <막상 전쟁이 터지고나니 후련합니다. 전쟁이 단기간에 끝날 것이라는 확신 때문인지 주가가 폭등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어요> 라면서 투자자들은 오히려 전쟁을 즐기는 것 같았다. (1991년 1월 19일자 동아일보 중에서)
엄청난 인명의 살상이라는 대학살의 느낌은 없고 불꽃놀이 생방송과 주가의 폭등과 앵커맨이 영웅이 되는 찬란한 쇼가 있을 뿐이었다.
나는 인간의 모습을 딱 두 번 보았다. 방독 마스크를 쓴 엄마가 우주인 같은 모습으로 병원의 비밀보호막 속에 누워 있는 환자 아기를 들여다보는 장면이었다. 슬퍼하는 여인과 아픈 아기의 눈동자는 서로 부딪치며 이런 최후의 암호를 주고받는 듯했다. ― 인간은 이제 이 세계의 중심명제가 아니지요, 그렇지요? 호모 사피엔스 여러분
그리고 쇼핑을 하려고 세계 각국의 백화점마다 슈퍼마켓마다 벼룩시장마다 현찰을 든 손들이 달려가고 있었다. 비싸게 팔리고자 하는 욕망과 값싸게 사들이고자 하는 욕망 사이에서 헐리우드 쇼보다 더 재미있는 쇼는 시시각각 진행되고 비닐 위에 사진 실크스크린 된 것 같은 인간의 형체 비슷한 뭉그러진 모습들이 이리저리 나는 쇼핑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욕망의 질주로 부윰하게 떠오르고 있는 몽중보행이여. - 김승희, 「나는 쇼핑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전쟁도 쇼핑이 되는 시절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쇼핑을 권장한다.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가 기조인 자본주의는 많이 생산하고 많이 소비하지 않으면 유지되기 힘든 구조로 움직인다. 자본주의의 꽃을 왜 광고라고 하겠는가? 광고는 물건에 대한 사람들의 욕망을 부추긴다. 화장품 광고를 생각하면 쉽다. 사람들은 광고 속에 나오는 배우들의 이미지를 소비한다. 광고가 선전하는 화장품을 쓴다고 일반 사람들이 배우와 같은 얼굴을 지닐 수는 없다. 배우들은 매끄러운 얼굴로 광고를 보는 소비자들을 ‘유혹’한다. 문제는 이러한 유혹이 전쟁을 소비하는 과정에도 그대로 통용된다는 점이다. 칠흑 같은 어둠을 가르고 미사일 불꽃이 일어난다. 누군가 미사일이 발사되는 스위치를 누르면 잠시 후 TV 화면 속에서는 불꽃놀이가 시작된다. 전쟁은 게임처럼 생중계된다. 사람들은 거실 소파에 편안히 앉아 불꽃놀이를 즐기듯이 전쟁을 ‘즐긴다.’
미사일이 떨어진 자리에는 불꽃만 인다. 미사일이 떨어진 곳에서 어떤 생명들이 어떻게 죽어나가는지 미디어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불꽃놀이가 시작되는 바로 그 시점에 사람들이 TV를 얼마나 시청했는지가 그들에게는 중요하다. 1991년 페르시아 만에서 전쟁이 터졌을 때도 그랬다. 사람들은 불꽃놀이에 열광했고, 미디어는 열광하는 사람들을 내세워 돈을 챙겼다. 다국적군의 바그다드 시가 공습에 대해 한 기자는 “미국 독립 기념일의 불꽃놀이를 일백 배 확대한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그는 지금 동물원 철창에 갇힌 동물들을 바라보듯 전쟁을 바라본다. 철창 안에 있는 동물들의 마음은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철장 안에 갇힌 동물은 동물원을 쇼핑하는 인간을 위해 존재할 뿐이다. 사람들이 더 이상 동물원을 쇼핑하지 않으면 동물들은 폐기 처분된다. 자본은 자비심이 없다. 자본은 오로지 이익이 되는가, 이익이 되지 않는가만 본다.
자본을 움직이는 사람들은 전쟁을 통해 수많은 이익을 얻는다. 전쟁에서 이기려면 자본이 필요하다. 도시 전체를 파괴할 무기를 생산해야 하기 때문이다. 전쟁이 끝나도 자본은 필요하다. 파괴된 도시를 재건해야 하기 때문이다. 전쟁만큼 자본을 미소 짓게 하는 대상이 어디에 있을까. 자본은 어떻게든 전쟁을 일으키려고 한다. 자본은 결코 평화를 원하지 않는다. 평화가 오면 자본이 움직일 공간은 그만큼 좁아진다. 시인은 한국의 한 증권사 객장의 분위기를 전하며, “투자자들은 오히려 전쟁을/ 즐기는 것 같았다.”라고 쓰고 있다. 전쟁이 곧 끝날 거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주가가 급등한 게 그 이유이다. 전쟁이라는 “찬란한 쇼”를 보면서 돈까지 벌 수 있다니, 이처럼 행복한(?) 일이 어디에 있는가. 엄청난 인명이 살상되었지만, 미디어가 보여주는 찬란한 쇼에는 이러한 대학살의 느낌이 애초부터 배제되어 있다. 이미지는 미디어를 움직이는 사람들이 생산한다. 그리고 미디어는 철저히 자본의 논리를 따른다.
시인은 극명하게 대비되는 두 가지 “인간의 모습”을 제시하고 있다. 방독 마스크를 쓴 엄마가 병원의 비닐보호막 속에 누워 있는 아기를 바라보고 있다. 여인의 슬픈 눈과 아픈 아기의 눈동자가 마주치는 장면을 시인은 애틋한 마음으로 들여다본다. 여인과 아기는 죽음 앞에 서 있다. ‘호모 사피엔스’는 세계의 중심을 자처하고 있지만, 죽음에 직면하면 여타 생명과 다르지 않은 존재가 되어버린다. 여기에는 전쟁의 불꽃놀이에 광분하는 인간이 보이지 않는다. 한없이 나약하고, 한없이 겸손한 인간이 보일 뿐이다. 불꽃놀이에 미친 사람들은 지금 쇼핑을 하려고 백화점으로, 쇼핑몰로 돈을 들고 달려간다. “비싸게 팔리고자 하는 욕망과/ 값싸게 사들이고자 하는 욕망 사이에서” 그들은 주체할 수 없이 온몸을 떤다. 쇼핑에 몰입하면 죽음을 잊을 수 있기라도 한 것일까? 허리우드 쇼보다 더 재미있는 쇼를 보기 위해 쇼핑에 빠져드는 이 사람들을 시인은 이미지가 지배하는 사회의 중심에 배치하고 있는 셈이다.
무한 욕망에 빠진 사람들은 죽어가는 존재들에게는 관심이 없다. 죽으면 화려한 이미지가 난무하는 이 아름다운 세계를 즐길 수 없다는 걸 그들은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이미지를 영원히 즐기기 위해 기꺼이 무한 경쟁 속으로 뛰어든다. 오로지 쇼핑만이 그들이 존재하는 이유가 된다. 자본은 더 많은 것을 생산하고, 이들은 더 많은 것을 소비한다. 자본이 자본을 낳고, 자본이 또 자본을 낳는 사회에서 쇼핑은 자본주의를 움직이게 하는 핵심 기제이다. 쇼핑하는 물건 하나하나가 그들의 욕망을 부추긴다. 어떤 옷을 입고, 어떤 차를 타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계급이 결정된다. 아름답고 값 비싼 물건 앞에서 어떻게 겸손할 수 있겠는가. 위선과 위악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쇼핑을 즐기며 기꺼이 제 욕망을 소비한다. 물론 쇼핑할 수 있는 돈을 가진 사람들만이 이런 상황에 빠져들 수 있다. 쇼핑 사회의 이면에서 누군가는 속절없이 자본이 만든 광장의 바깥으로 내쫓기고 있다.
쇼핑할 수 있는 사람들만이 자기 존재를 외칠 수 있다. 이성을 지닌 인간이 자연을 파괴하는 방식 그대로 쇼핑하는 사람들은 쇼핑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서슴없이 파괴한다. 전쟁터에 있는 사람들은 전쟁을 소비하지 못한다. 그들은 쇼핑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쇼핑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이다. 전쟁을 쇼핑하는 주체들은 전쟁터에 있는 수많은 생명들을 쇼핑할 대상으로 환원한다. 인간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말은 이제 세계의 중심은 자본이라는 말로 바뀌었다. 자본의 논리로 보면, 인간은 그저 쇼핑할 목록에 있는 대상일 뿐이다. 자본은 쇼핑하는 인간을 좋아한다. 달리 말하면 자본은 쇼핑할 수 없는 인간을 싫어한다. 자본이 중심이 되는 세계일수록 인간은 쇼핑하는 인간과 쇼핑할 수 없는 인간으로 나뉠 수밖에 없다. 당신은 쇼핑할 수 있는 인간이 되고 싶은가? 희미하게 미소 짓는 자본의 맨얼굴이 보인다.
2. 토끼
이 시대엔 아무리 멀리 꿈을 꾼다 해도 주민등록증 안에서 꿈꾸는 것 같아. 검은 먹으로 뭉개진 지문들, 왼손가락과 오른손가락들이 토끼장만한 금 안에 생과 사처럼 나란히 누워서 언제나 좌우로 서로 검사하고 감시하고 있지.
도란도란 하는 말이 아무리 멀리 도망치려고 해도 돈키호테는 꼭 산초 판자와 같이 다녀야 한다고, 아무리 높이 도망치려고 해도 날으려고 할 때는 꼭 미리 낙하산을 준비해야 한다고. 언제나 중얼중얼, 연역법으로 면역이 되어가는 인생.
외출할 때면 꼭 주민등록증을 수첩 속에 수첩은 가방 속에 가방은 모가지에 쇠목걸이처럼 걸고 달려라 토끼! 달려라 토끼! 존 업다이크가 아무리 외친다 해도 토끼는 토끼장 근처에서 얼씬대며 달그락거릴 뿐.
난 이 도시에 토끼장이 이렇게 많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주민등록증이 든 가방을 식권처럼 목에 걸고 하루 종일 총총 돌아다니다 집으로 돌아오면 아, 인생이란 얼마나 긴 제자리걸음의 장거리 여행인가 입맛 없는 토끼풀을 입에 대다가 입을 막고 달려가 수돗물을 틀어놓고 남몰래 목욕탕에서 우는 토끼들. - 김승희, 「토끼와 주민등록증」
김승희에게 토끼는 좁은 우리에 갇혀 사는 존재이다. 토끼는 사람들이 주는 풀을 뜯어먹으며 좁은 우리에 적응한다. ‘적응’을 하면 다른 공간을 상상하지 않는다. 토끼는 원래부터 좁은 우리에 살고 있는 것으로 판단한다. 좁은 우리에 적응된 토끼를 풀어줘도 토끼는 때가 되면 어김없이 우리로 돌아온다. 배가 고파서이다. 인간은 먹이로 토끼를 길들인다. 자본주의 사회를 사는 토끼들은 어떨까? 시인은 이 시대에 우리가 꾸는 꿈은 ‘주민등록증’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선언한다. 주민등록증에는 “검은 먹으로 뭉개진 지문들”이 새겨져 있다. 토끼장만한 금 안에 나란히 누운 그 지문으로 지배 권력은 늘 우리를 검사하고 감시한다. 불심검문에 걸린 상황을 생각해 보라. 지문만으로 우리가 누구인지 밝혀진다. 범죄인을 선별하기 위해 만들어진 지문 제도가 모든 국민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진다. 모든 국민의 범죄자화라고나 할까?
권력은 사회질서를 이유로 주민등록증을 만드는 거라고 선전한다. 사회질서를 강조하는 권력일수록 통제사회를 지향한다. 권력은 언제나 돈키호테 옆에 산초 판자를 두려고 한다. 돈키호테는 그냥 놔두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존재이다. 산초 판자가 길을 인도하지 않으면 돈키호테는 어김없이 사회질서의 바깥으로 튀어나갈 것이다. 그러면서 권력은 높이 날려면 꼭 낙하산을 준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언뜻 높이 날려는 사람을 위한 이야기 같다. 하지만, 낙하산을 지닌 사람은 더 높이 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낙하산은 땅으로 내려올 생각을 갖고 있는 존재에게 필요한 도구이기 때문이다. 높이 날아 사회질서의 바깥으로 나가려는 이에게 낙하산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시인은 지배 권력이 세우려는 이 질서를 “연역법으로 면역이/ 되어가는 인생.”으로 표현한다. 권력은 무엇보다 연역법을 좋아한다. 연역법은 예외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외출할 때면 우리는 수첩 속에 꼭 주민등록증을 넣는다. “수첩은 가방 속에/ 가방은 모가지에 쇠목걸이처럼 걸고” 우리는 토끼장 근처를 떠나지 못하는 토끼처럼 집 주변을 맴돈다. 존 업다이크(??달려라 토끼??를 지은 미국 작가)가 “달려라 토끼! 달려라 토끼!”라고 아무리 외쳐도 토끼장이 익숙한 사람들은 결코 달릴 생각을 하지 않는다. 남들은 뛰지 않는데 자기만 달리면 어떻게 되는가? 남들보다 빨리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천만에. 달리는 토끼는 사회질서의 바깥으로 내달리는 존재이다. 빠르면 빠를수록 토끼는 권력이 여기저기에 심은 감시의 눈에 걸릴 수밖에 없다. 그러고 보면 지금 우리는 무한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달리는 토끼들이다. 무한 경쟁은 권력이 만든 트랙 위에서 펼쳐진다. 트랙은 사회의 바깥을 인정하지 않는다. 빠르게 트랙을 돈 토끼들은 밤이 되면 어김없이 좁은 우리로 들어간다.
시인은 “난 이 도시에 토끼장이 이렇게 많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라고 쓰고 있다. 우리가 사는 도시는 온통 토끼장으로 둘러싸여 있다. 아침이 되면 우리는 아파트라는 토끼장에서 나와 직장이라는 토끼장으로 들어간다. 점심때가 되면 음식점이라는 토끼장을 맴돌다가 다시 직장으로 간다. 저녁이 되면 어떨까? 술을 마시기 위해 또 다른 토끼장을 떠돌다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좁은 토끼장 속으로 들어간다. 집안과 집밖이 구분되어 있지만, 사실 우리는 안과 밖이 구분되지 않는 감시사회를 살고 있을 뿐이다. ‘국가’라는 거대한 감시 체계 아래서 우리는 “주민등록증이 든 가방을/ 식권처럼 목에 걸고” 하루 종일 돌아다니다 집에 돌아오는 일을 반복한다. 주민등록증은 식권을 얻기 위해 반드시 지녀야 할 상징이다.
주민등록증이 없으면 어떻게 될까? 사회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주민등록증은 우리를 이 땅에 살도록 만드는 증명서와 같다. 집과 직장을 오가는 반복적인 삶을 살면서도 우리는 엄청난 피곤함을 느낀다. 시인의 말마따나 우리는 “제자리걸음의 장거리 여행”에 한없이 지쳐 있다. 장거리 여행을 떠났는데도 우리는 왜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것일까? 아무리 멀리 가도 우리는 주민등록증에 새겨진 지문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지문을 아예 지우면 되지 않느냐고? 지문을 지우면 우리는 사회 바깥으로 내쫓긴다. 지문을 지우는 일은 그러므로 사회 바깥으로 기어이 나아가겠다는 의지가 있어야 가능하다. 아니, 의지만으로는 안 된다. 그 의지를 실천하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지문을 지울 수 없다.
주민등록증을 가슴에 품고 집으로 돌아온 토끼들은 입맛 없는 토끼풀을 입에 댄다. 맛이 없어도 먹어야 한다. 그래야 내일의 해를 맞이할 수 있다. 풀을 먹던 토끼가 갑자기 입을 막고 목욕탕으로 달려간다. 물을 틀어놓고 토끼는 남몰래 운다. 가슴 한쪽에 자리한 서러움이 물밀 듯이 몰려온다. 어쩌면 좋은가? 체제 밖으로 뛰쳐나갈 것이 아니라면, 내일을 위해 잠을 자야 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신세가 서글프다고. 그러면 바깥으로 뛰쳐나가면 된다. 토끼 우리로 들어가는 걸 단호히 거부하면 한다. 어떻게? 주민등록증을 똑바로 보는 일부터 시작해보면 어떨까. 그 속에 찍힌 지문들이 우리를 얼마나 옥죄고 있는지 깨닫는 데서부터 시작하면 어떨까. 체제와 맞서야 하는 어려운 일이다. 그나마 살고 있는 우리에서 쫓겨나는 위험한 일이기도 하다. 남몰래 목욕탕에서 우는 토끼들의 모습이 남의 일이 아니라는 걸 우리는 이 지점에서 뚜렷이 인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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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승희 시인의 시는 대체적으로 자기 고백적인 느낌이 많이 들었다. '붙들린 여자'도 그렇거니와 바로 뒷 페이지에 있는'꿈과 상처'도 그렇다. '꿈과 상처'를 참 좋게 읽었는데 ‘나대로 살 수밖에 없다/나대로 살 수밖에 없다/나이 드니 그것은 절망이구나’라는 구절에서 시인의 마음에 공감이 갔다. 시인은 이렇게 자신의 생활을 그대로 내뱉기도 하고 자신의 심정을 그대로 내뱉기도 하면서 그 시의 진실성을 높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작을 위한 난생설화'도 그런 시인의 일상이 반영된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말을 거칠게 내뱉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 거칠게 내뱉고 있다는 것은 욕설을 내뱉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거침없이 툭툭 내뱉고 있다는 점에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시인의 시에서는 꾸밈이나 어떠한 표현에 신경을 쓴 부분이 보이지 않고 그래서 거칠게 내뱉고 있다고 한 것이다. 물론, 잘 갈고 닦은 구슬처럼 좋을때도 있지만 김승희 시인의 시에서는 그런 잘 다듬은 보다는 이 거침이 더 효과적이고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대 사회를 비판하는 시들도 몇몇 보였는데 '나는 쇼핑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가 그러한 시의 대표적이라고 꼽고 싶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구절을 교묘하게 바꾼 이 시에서 시인은 인간성의 상실을 꼬집고 있다. ‘페르시아 만에서 전쟁이 터지자마자/TV들은 모조리 전쟁생방송 체제로/돌입하였다 올림픽보다도 세계 권투 헤비급 타이틀/매치보다도/더 많은 시청률을 올려주며/시청자들은 사막 위 폭풍을 바라보았다’라는 부분도 그렇고 ‘엄청난 인명의 살상이라는/대학살의 느낌은 없고/불꽃놀이 생방송과 주가의 폭등과/ 앵커맨이 영웅이 되는/찬란한 쇼가 있을 뿐이었다’는 구절을 보면서 씁쓸함이 삼켜질 정도이다. 또 마지막 연에서 ‘그리고 쇼핑을 하려고 세계각국의/백화점마다 슈퍼마켓마다 벼룩시장마다’라는 구절에서는 자본주의에 폐해를 읽을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좋았던 시는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었는데 연민이 잘 묻어나서 좋았고 '탕 탕 -몽타주시대'는 마지막 연 ‘빨랫줄도 없이/허공에 널려 있는/빨래들처럼/우리 하고 있음이여.’에서 연민과 읽던 사람의 예상을 뒤집는 것이 좋았다. 김승희의 시는 언어가 진실되고 기교를 부리지 않아 오히려 그것이 시를 살린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
| 김승희, 그는 내가 만나본 시인 중 가장 밖으로 나가고 싶어하는 시인이다. 황지우의 「세떼들에게로의 망명」보다 말이다. 그가 속해있는 사회는 새로운 '파시즘'의 세계이다. 이미 실패한 사회체제가 물질과 성이라는 새로운 구획으로 '질주'를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한 질주 속에 있는 자화상은 괄호 속에 들어있는 이상의 「오감도」를 통해서 나타나고 있는데 그들은 끊임없이 달려가지만 서로 벗어날 수 없는 위협적인 관계에 놓여있다. '고객 감시 카메라'와 같이 파인더라는 좁은 공간을 통해 개인을 침해하는 사회인 것이다. 무너지기 쉬운 외줄타기와도 같은 삶. 그의 사회에는 '사유재산'과 같은 목적성 있는 것들이 존재하고 있지만 시인에게 그것은 매우 부패된 현상으로 다가오며 실제적으로는 그것 또한 세계를 지배하는 집단적이고 폭력적인 무의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로는 아무 것도 충족시켜주지 못하고 나비가 돌아오지 않는 '껍데기가 텅 비어버린 누에고치처럼' 허무하고 '생의 졸리움'만으로 가득 차있다. 그가 가고자 하는 공간은 '껍데기 밖', '담 밖'이며 '지붕 위' 그보다 더 넓은 어떤 모호한 세계이다. 이렇게 정당한 이유가 존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그의 밖으로 가고자는 열망은 맹목적으로 느껴진다. 아직 확인하지 않은 세계로 가고자하는 이유가 더 큰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간절한 바람이기보다는 실질적으로 도피주의적 색채가 짙다. 그의 시는 최승자나 고정희에 비해 여성의 피해의식은 적게 드러난다. 그러나 잠재된 의식 속에 있는 한정된 존재(여성_라는 사실이 그를 계속해서 밖으로 나가고 싶게 하는 것은 아닌가. 해설 중에 있는 '자신의 보리수 나무 아래 길로 가라'라는 말이 우습거나 무의미하게 들리지 않는 이유가 있다. 그의 시를 사회적 도피의식이 아닌 개인적 정체성의 탐구로 한정했을 경우 그는 그 자신을 스스로 가두고 규정화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울타리를 치울 수 있는 것은 시인 자신뿐이다. 그의 시에는 깨달음이 필요하다. 시인의 아무것도 모르는 밖에 대한 도피의식은 시인이 밖의 모습을 직관적으로나마 깨달을 수 있을 때 그 경계가 사라지고 그는 더 자유로운 세계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밖을 보기 위해서는 벽과 대면해야 한다. 그의 비판정신은 지붕 위에 앉아 달리는 군중을 바라보는 형태다. 그는 이제 군중 속에서 함께 달리며 진정 벽과 마주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용감해질 수 있을 때 근본적 공포를 부수고 나올 수 있는 강한 힘이 생기지 않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