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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말의 영토를 빼앗긴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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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동주인데 윤동주가 주인공이 아니다. 현재와 과거, 두 시점의 화자가 교차로 서술하고,  현재의 화자는 함께 갑자기 사라진 친구 시게하루의 행방을 쫒는 야마가와 겐타로다. 과거의 화자는 시인 윤동주가 일본 유학 시절 하숙을 하던 집에서 허드렛일을 하던 요코다. 겐타로는 함께 만주와 관련된 검색어를 찾아 정리하는 이상한 아르바이트를 함께 하다가 감쪽같이 사라진 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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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동주인데 윤동주가 주인공이 아니다. 현재와 과거, 두 시점의 화자가 교차로 서술하고,  현재의 화자는 함께 갑자기 사라진 친구 시게하루의 행방을 쫒는 야마가와 겐타로다. 과거의 화자는 시인 윤동주가 일본 유학 시절 하숙을 하던 집에서 허드렛일을 하던 요코다. 겐타로는 함께 만주와 관련된 검색어를 찾아 정리하는 이상한 아르바이트를 함께 하다가 감쪽같이 사라진 시게하루의 행방을 찾는다. 시게하루를 찾는 과정에서 만나는 것이 요코가 쓴 글로,  앞서 말한 두 명의 화자 중 하나인데, 요코의 글은 다시 두 개의 시점으로 나뉘어져 있다. 하나는 어린 시절 글을 배우면서 쓴 글이고, 나머지 하나는 인생을 정리하면서 쓴 글이다. 오코의 첫번째 글은 양아버지의 지속적인 성폭력에 노출된 어린 시절과 15세의 위악속에서 윤동주를 관찰한 모습, 그리고 윤동주가 잡혀간 이후 그를 통해 비춘 자신의 모습과 성장 등을 이야기한다. 겐타로는 시게하루를 찾는 단서를 발견하기 위해 그 글을 찾은건데, 거기에는 간도 항일 운동의 폭력적 양면성과 역사의 일면이 숨어 있고, 나라를 잃은 사람이 말을 함께 잃는 것에 대한 의미를 찾는 내용이 있다. 이야기를 전달하는 두 사람은 궁극적으로는 다른 사람의 삶 속에 자신을 비추어 변화하고 성장한다. 

양아버지의 지속적인 성폭력으로 위악만 남은 16세의 어린 요코는 조선 학생인 윤동주가 자신을 인간적으로 대하는 사실을 이용해 오히려 무례하게 굴지만 그는 아랑곳없이 요코에게 친절하게 대하는데, 그가 조선말로 시를 쓰는 것을 알게 된다. 이후 요코는 윤동주의 연행과 죽음을 통해 영토를 빼앗긴 자에게 모국어의 의미를 반추하며 자신이 멸망한 종족 아이누족임을 인식하게 되고 그 뿌리를 찾는 삶을 산다. 이러한 내용은 그가 남긴 뭉치에 서술되어 있는데 그 글뭉치는 자신이 집을 나와 윤동주가 사는 하숙집에서 처음으러 가타카나를 배우면서 쓴 버전과 그가 아이누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찾아 말과 글을 배워 아이누어로 쓴 내용 두 버전으로 되어 있다. 일본어로 된 버전은 막 말을 배운 아이가 쓴 것처럼 문법적인 형식을 갖추지 못했고 아이누어 버전은 그 첫번째 버전의 글을 상세히 글의 형태로 설명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일본 열도에는 다수 민족 말고도 완전히 다른 말과 전통,별개의 민족적 정체성을 가진 소수민족이 공존하는 모양인데, 아이누족은 17세기 이전까지는 일본인들과 무역을 하며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며 살었지만 점점 힘을 잃어 19세기말 20세기 초에는 일본인의 아이누족 말살 정책으로그 뿌리가 근간부터 흔들리게 된듯 싶다. 자신의 출생에 대해 알지 못하단 요코는 이름늘 아이누족 이름으로 바꾸고 아이누족의 언어와 민속학을 공부하여 이미 사어가 되어가고 있는 아이누족의 언어를 지키고자 노력하여 그 전의상처받고 위악적인 자신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

"아이누에 서럽게 빠져 있었다. 원통하고 슬플수록 묘한 에너지가 차올랐다. 세상에서 몇 안 되는 아이누어 전문가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현재의 화자가 그녀를 찾았을 때는 이미 죽은 후이며 결국 그녀가 평생을 찾고자 했던 것은 윤동주가 경찰에 잡혀가서 강압작으로 일본어로 번역해야 했던 그의 시이다.

요코가 찾은 윤동주의 시를 찾는 이유는 그 시들을 버리기 위해서다. 그가 쓴 시는 원본이 조선말로 쓰여졌지만 그를 수사하기 위해 원본이 조선말을 읽을 수 없는 경찰이 총뿌리를 겨누며 강압적으로 번역시킨 그 시가 한글 원본이없는 상태에서 일본어로 세상에 나가는 일을 필사적으로 막기 위해서다.

현재의 나는 요코와 윤동주에 대한 이러한 사실을 우연히 발견한다. 처음, 이 소설은 화자인 겐타로와 그의 단짝 친구가 만주라는 검색어를 도서관에서 검색하고 정리하는 수상한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면서 전개되는데 처음엔 뭔가 수상쩍어거절했던 겐타로를 홀로 두고 시게하루가 감쪽같이 사라지면서 미궁속으로 빠지고, 그것이 둘이 하던 만주에 대한 검색 알바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검색과정에서 그가 남긴 자취를 통해 시게하루가 무엇을 보았으며 무엇을 추적하고 있었는지를 추적하기 위해 일본 얼도를 횡단하다시피 하여 결국 요코의 자취를 만나게 되고 또한 그를 통해 일본인이라 믿고 있던 자신의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찾아 한국어를 배우고 이 책을 한국어로 쓴다는 내용인데. 이렇게 미스테리 형식으로 진행되다보니 장르 소설은 아닌데 장르 소설 식으로 진행되고 여러 명의 화자가 나로 이야기 되고 그게 헷갈릴까봐 작품내에서 다시 설명하곤 하니 구성적으로 필요 이상으로 산만하고 복잡한 모양새다.

결국 자신이 하던 일은 , 제국시절 부정과 속임수로 돈을모아 현재 일본 최고의 대기업을 이끌고 있는 그룹 대표가 그의 과거를 지우려던 일이었으며 그 과정에서 자신의 조부가 연루되어 있음을 알아낸 시게하루가 그들과 타협하여자신의 현재를 바꾸려는 의도로 무언가를 했음을 후에 알게 된다. 역사 소설같은 부분도 있고 미스터리 같기도 하다. 잘 알려지지 간도의 공산주의자들의 에서의 항일운동과 그 속에서의 혈투 등을 담고 있으며, 작가가 전달하고자 했던 게 무엇인지는 알겠지만 너무 많은 걸 의도적으로 담아내려 한거 아닌가 싶기도 하다. 주옥같은 문장에도 불구허고, 개인적으로는 읽는 과정 자체가 불편하고 지루하게 느껴져 아주 오래전부터 읽다가 말다가 읽다가 말다가 이제야 끝냈다. 처음부터 굉장히 미스터리 한 부분이 강해서 어떻게 풀릴지 궁금했는데 또 그게 술술 풀리지 않고 자꾸 얘기가 엉키기만 해서 짜증나 덮었었는데 미스터리가 풀리는 과정에 필요한 문학적 장치가 아니었나 싶다.

"말과 말의 영토가 잊히고 소멸된 시간만큼이나 오랜 소급과 회귀의 여정이 필요했다."






g******1 2017.09.23. 신고 공감 10 댓글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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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저항 시인이 아닌 자기 성찰의 시인『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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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복거일의 영어공용화 주장이 제기되어 사회적 논란이 되었던 적이 있다. 복거일의 주장은 세계화 시대에 영어공용화는 여러 모로 경제적 이득을 가져다주고 편협한 민족주의적 시각으로 인한 폐단을 막을 수는 수단이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당연히 한국어의 쇠퇴로 이어질 것이지만 경제적 효율성과 실효성을 생각한다면 그것까지 감수해야한다는 주장이었다. 이 상황을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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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복거일의 영어공용화 주장이 제기되어 사회적 논란이 되었던 적이 있다. 복거일의 주장은 세계화 시대에 영어공용화는 여러 모로 경제적 이득을 가져다주고 편협한 민족주의적 시각으로 인한 폐단을 막을 수는 수단이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당연히 한국어의 쇠퇴로 이어질 것이지만 경제적 효율성과 실효성을 생각한다면 그것까지 감수해야한다는 주장이었다. 이 상황을 보며 도대체 복거일이란 사람은 뭐하는 사람이기에 이런 주장을 할까, 싶어 알아보니 세상에, ‘소설가’란다. 우리말로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응축된 언어와 운율로 시를 쓴다는 사람이 우리말보다 영어를 우선시 한다는 사실에 너무도 황당하고 아이러니하여 기가 찼다. 단지 영어공용화의 찬성에 그치지 않고 영어공용화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폐쇄적 민족주의자로 몰아가던 그 분위기를 떠올리면 아직도 화가 날 정도다. 누군가의 식민지로 우리말과 글을 빼앗긴 역사를 가지고 있는 한국 사람의 입에서 그것도 아름다운 우리말을 살려 밥을 먹고 사는 사람의 주장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일본이 조선의 말과 글을 없애려고 노력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 만한 사람인데도, 만약 그의 주장처럼 영어공용화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가장 큰 우려로 내뱉는 우리 민족의 정체성 관련된 주장으로 반박하면 세계화 시대의 흐름에 맞지 않는 자문화중심주의로 몰아갔는데 이 두 가지는 같은 선(線)상에 놓고 이야기 할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다. 『동주』를 읽다보니 저절로 자국의 말과 글을 스스로 낮추었던 복거일의 영어공용화 주장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동주』는 시인 윤동주의 자서전이나 평론서가 아니다. 처음엔 윤동주의 삶과 시에 대해 더 알고 싶다는 욕심에 고른 책이었다. 그렇다고 윤동주의 삶과 시에 대한 이야기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적어도 윤동주 시인이 이렇게 저렇게 살아서 이런 시를 쓰게 되었는데 이런 의미를 내포하고 이런 상황에서 이렇게 해석하면 된다는 내용으로 초점을 맞춘 책이라 기대했다는 의미다. 윤동주에 대한 이야기에 어떻게 그의 일생이 빠질 수 있겠냐만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윤동주의 삶에 대한 저술이 아니었다. 독특한 화법와 시점으로 마치 화자 두 사람이 바통을 주고받으며 이야기를 이어가는 식이라 초반부에 적응하는 것이 좀 힘들었다. 추리물 성격도 지니고 있었는데 그러한 장르적 성격은 이 소설이 끝까지 힘내어 이야기를 이끌어갈 수 있게 해주는 장치이기도 하다. 두 사람의 화자 중 재일동포 3세인 겐타로의 시점으로 이 소설의 큰 맥을 끌어간다. 가장 절친한 친구인 시게하루가 의문의 행방불명이 되자 겐타로가 시게하루를 찾아나서는 여정이 결국은 ‘동주’를 만나는 여정으로 연결된다. 시게하루의 추적 결말을 소설의 끄트머리까지 가지고 가기에 의문의 사건이 명확해질 때까지 독자의 호기심을 지팡이 삼아 지루하지 않게 마지막 장까지 속도감 있게 읽게 만든다. 또 다른 화자인 텐도 요코의 삶과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여정을 묘하게 겹쳐놓아 두 화자의 접점에서 독자들에게 공통점을 발견하게 만드는 작가의 솜씨가 훌륭하다. 사건과 서사 중심의 작품이 아니라 언어를 가지고 은유와 비유를 통한 인간의 성찰로 이어지게 만드는 다소 철학적인 주제를 품고 있는 작품이다.


작가 구효서 본인이 밝힌다. 소설『동주』의 주인공이 동주가 아니라고. 윤동주를 통해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분화된 언어가 세계를 형성하는 것이라면 개인에게서 언어를 빼앗는 행위는 세계를 말살하는 폭력이며 결국 존재를 죽음으로 내모는 일”(425p)라는 결론으로 끌어가는 수단이다. 윤동주의 삶의 일부분을 통해 언어가 가지는 힘, 그 힘의 궁극은 자아의 발견이며 정체성의 발로임을 깨닫고자 함이다.


소설 『동주』는 인간의 기본적 소통 수단인 ‘언어’를 통해 문학의 힘을 빌려 철학적인 이야기를 했다. 어떤 작품이든 철학과 사상을 내포하지 않을 수는 없으나 작가의 부연 설명이 있지 않았더라면 조금은 더 가볍게 접근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시인 윤동주의 삶의 어느 부분을 통해 언어와 인간의 정체성을 이야기로 풀어냈을까?


우리가 떠올리는 윤동주는 「서시」라는 대중적 시를 통해 대부분 만나서 그의 시에 매료되어 그의 또다른 시를 만나거나 더 나아가 윤동주 시인의 삶 전체로 접근하기도 했을 것이다. 흔히 ‘민족 저항 시인’으로 알려지기도 했지만 이 소설의 작가 구효서는 그렇게 접근하지 않는다. 이미 발표된 윤동주의 평론 등에도 그렇게 평가되고 있지 않은 듯 하다.(이는 작가가 인용한 각 책들의 발췌 부분을 보며 느꼈던 것) 오히려 윤동주는 민족독립에 맞서고 항거하는 모습보다 “세계를 바라보고 자신을 응시하며 존재를 통찰하는 언어”(424p)로 시를 썼다는 것이 작가의 생각이다.


작가는 윤동주의 삶의 근거지인 ‘간도’를 매우 중요한 소재로 활용한다. 주인공이자 소설의 화자인 겐타로(김경식)와 요코(이타츠 푸리 카)의 민족적 정체성을 찾아가는 여정에서 일본과 각자의 모국에서의 ‘사이’에 놓여있는 운명의 위치를 윤동주의 삶에 투영시켜 중국과 조선과 일본과 만주와 러시아와 미국의 사이에 놓은 ‘간도’로 치환해 반복적으로 불안을 가중시키는 장치로 설정해놓는다. 그렇게 ‘사이의 장소’인 간도처럼, 운명 사이에서 헤매는 윤동주의 시선이 시로 탄생한다. 윤동주의 시와 산문은 두 주인공이 찾아나서는 목적 지점이다. 각기 이유는 다르나 서로 다른 시대에 서로 다른 출발지점에서 시작한 추적의 결말은 결국 같은 것으로 귀결된다. 요코가 모국어와 모어의 차이를 인지하고 나니, 성찰과 상념과 가치들을 시적 언어로 풀어낸 시가,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순간 그 시는 죽은 시가 될 것이라는 요코의 집념이 윤동주의 유고작품을 찾아 나서게 만들었던 것이다. 윤동주 시인의 손으로 자신의 시를 낭자(강제적 일어 번역)하는 순간, 이미 윤동주는 죽어갔으며 ‘시인’ 윤동주는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었다고 생각한 요코. 일제 식민지 하의 아프고 복잡한 역사를 절묘하게 ‘언어의 힘’에 비추어 풀어가는 작가의 노력이 예사로 보이지 않는다. 세계화라는 미명아래 자행되는 다양성의 실종들을 보며 비단 생물과 자연의 문제로 치부해서는 될 것이 아니라는 메시지를 전달받는다. 언어에 대한 다양성이 훨씬 인류의 삶의 풍족하고 평화롭게 만든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유린당했던 요코의 유년시절을 되돌려 놓은 것도 자신이 ‘아이누족’이란 것을 알게 되고 아이누어를 공부하면서부터 였으니까. 겐타로(김경식)가 친구 시게하루를 찾아 나섰던 여정이 모국어인 한국어를 배우고 일본과 한국 사이에 놓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고 깊어지게 한 계기였으니까.


소설의 끝부분이 특이하다. 작가가 하고픈 말을 실제 기사에 달린 댓글로 마무리한다. 전 세계 6,000여개 안팎의 언어 중 2,500개의 언어가 소멸 위기에 처해있다는 기사를 마지막에 배치하며 오늘날 우리 현실로 돌아가 자신이 의도한 바를 더욱 명확히 드러낸다. 세계 패권을 쥔 나라의 언어로 자의적 또는 강제적으로 통합되는 과정에서 우리가 과연 얼마나 ‘나’의 존재성을 제대로 인식하고 살아갈 수 있을까? 우리의 말과 글이 경제성과 효율성에 밀려 다른 언어로 교체될 때 우리의 감성과 역사와 정체성을 그네들 언어로 풀어내고 살아가는 것이 옳은 것일까? 또다시 복거일 같은 사람들이 한국의 영어공용화 주장을 들고 나오면 나는 어떻게 그를 설득해야하는 것일까? 별 생각 없이 편하게 써오고 말해왔건만 언어의 본질에 대해서 너무 간과하고 살아왔구나 하는 생각에 새삼 우리말과 글에 대해 넙죽 절을 하게 된다. 우리의 생각이 공고해지고 깊어질 수 있는 것은 우리식에 맞는 우리의 언어가 있기 때문이며 우리의 삶과 문화를 풍성하고 윤택하게 하는 보이지 않는 도구이다. 언어가 가지는 힘을 알기에 일본도 우리의 말과 글을 못쓰게 하지 않았던가? 그런 치욕의 역사를 어느 개인의 주장이긴 하여도 자의적으로 다른 말과 글을 쓰려고 하는 시도는 어불성설이며 끝까지 막아내야 할 우리의 임무라고 생각한다.




★오타로 의심되는 부분★

402p 응너리 -> 응터리

426p 괴뇌   -> 고뇌


-회억 : 돌이켜 추억함

-묘문(妙文) : 매우 뛰어난 문장

-상선약수(上善若水) :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는 뜻으로, 노자의 사상에서, 물을 이 세상에서으뜸가는 선의 표본으로 여기어 이르던 말.

-수꿀스럽다 -> 수꿀하다 : 무서워서 몸이 으쓱하다.

-관격 : 먹은 음식이 갑자기 체하여 가슴 속이 막히고 위로는 계속 토하며 아래로는 대소변이 통하지 않는 위급한 증상.

-억조창생(億兆蒼生) : 수많은 백성

-강퍅한 -> 강퍅(剛愎)하다 : 성격이 까다롭고 고집이 세다.

-참람(僭濫) : 분수에 넘쳐 너무 지나치다.



YES마니아 : 로얄 g********s 2011.10.31. 신고 공감 9 댓글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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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 구효서 - 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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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에는 혼이 담겨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것은 화자의 혼이 될 수도 있고 그 화자가 속한 민족의 혼이 될 수도 있으며 화자가 속한 국가의 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말을 빼앗는 것은 혼을 빼앗는 것이며 이는 화자를, 그 화자가 속한 민족을, 더 나아가 그 화자가 속한 국가를 멸하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닐까요? 동주는 고향과 나라를 모두 일본에 잃고 말까지 앗겼다. 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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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어에는 혼이 담겨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것은 화자의 혼이 될 수도 있고 그 화자가 속한 민족의 혼이 될 수도 있으며 화자가 속한 국가의 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말을 빼앗는 것은 혼을 빼앗는 것이며 이는 화자를, 그 화자가 속한 민족을, 더 나아가 그 화자가 속한 국가를 멸하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닐까요?

 동주는 고향과 나라를 모두 일본에 잃고 말까지 앗겼다. 어디에 있든 그의 땅이 아니었다. 교토든 간도든 시인의 영토가 아니었다. 언어의 영토를 잃은 시인의 슬픔이 느껴졌다.
 동주와 내가 다른 점이 그거였다. 나는 고향을 버렸고, 동주는 잃었다. 버린 사람은 교만하고 버릇없고 사나워졌다. 잃은 사람은 망설이고 머뭇거리고 부끄러워했다. -94~95p

 소설 '동주'는 시인 윤동주를 책의 타이틀로 설정하였으나 중심 소재는'말(언어)'입니다. 부끄러움을 감추지 않고 시에 드러냈던 윤동주. 그는 왜 그렇게 치열할 만큼 부끄러움을 강조하였던 걸까. 학자마다 윤동주의 부끄러움을 해석하는 설이 다양하지만 이 '동주'라는 책에서는 윤동주의 환경에서 그 해석을 찾고자 합니다. 

 윤동주는 간도 출신입니다. 간도는 당시 조선, 일본, 중국, 러시아, 미국 등의 영향력 아래에서 치열한 투쟁이 매일 반복되던 곳이었습니다. 조선인, 일본인, 중국인 등 다양한 종족이 섞여 있었고 조선어, 일본어, 중국어 등 다양한 언어가 있었습니다. 실제로 윤동주는 조선어, 일본어, 중국어를 교육법에 의거하여 정식으로 배웠으며 이외에도 서양의 언어를 구사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 윤동주였기에, 그는 시를 쓸 때마다 부끄러웠던 것이 아닐까 하고 이 책은 조심스럽게 추측을 내놓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는 '사이'에 있었던 것입니다. 간도에서 태어나 조선인이지만 일본에서 공부를 하였던 윤동주. 그가 거주했던 공간은 크게 '간도'와 '조선', '일본'이며 그는 이 세 개의 공간 사이에서 오고 가고를 반복했습니다. 그가 사용했던 언어는 크게 '조선어'와 '일본어', '중국어'였고 이 세 개의 언어 사이에서 오고 가고를 반복했습니다. 삶을 살아갈 때, 시를 쓸 때, 말을 할 때… 그는 늘 사이에서 고민했던 것이 아닐까요? 무엇이 가장 옳은 것이며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를 확신할 수 없어 윤동주는 부끄러워했던 거라고 생각합니다.

 사상을 캔답시고 조선어 시를 강압적으로 번역시키다니. 그건 시도 뭣도 아니고…….
 잠시 숨을 고른 뒤 말을 이었다.
 사람을 죽이는 일이다. 시를 능지처참하는데 어찌 시인이 참멸을 면하겠느냐. 감히 시인의 손으로 제 시를 훼손케 하다니, 극악하고 무도하기 이를 데 없는 육살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295p

 윤동주는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짧은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현재는 바닷물을 주입하는 생체 실험으로 사망한 것이라는 설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윤동주의 육체적 죽음은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생체 실험을 당했을 때였지만 정신적 죽음은 시모가모 경찰서에서 일본어로 자신의 시를 강압적으로 번역해야 할 때였다고 주장합니다. 사상 검사라는 이름 아래 자신의 시를 해체해야만 했던 윤동주는 그 순간 사살당한 거였습니다.

 아주 잠깐, 책을 읽는 것을 중단하고서 그때 윤동주의 심정이 어떠했을지를 상상해보았습니다. 바로 앞에 있는 형사의 얼굴도 제대로 확인할 수 없을 만큼 어두운 방 안에서, 사상 검사를 해야 하니 적혀 있는 것을 그대로 일본어로 옮기라고 명령하는 일본인 형사. 그리고 의자에 앉아 영혼이 죽어버린 눈으로 자신의 시를 내려다보고 있는 윤동주. 바짝 마른 그의 입술이 내뱉은 것은 분명 윤동주의 온전한 시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분명 잘게 갈라지고 찢어지고 일그러져 본래의 형태와 의미와 뜻을 상실한 것이었을 겁니다.
 
 조선의 말과 글이 특별히 우월하여 동주가 그것을 지키고자 했던 것은 아닐 게야.
 교진이 말했다.
 우월하고 열등하고를 떠나, 누구에게나 무엇에게나 고유한 자기라는 게 있기 마련이니까. 일본과 다른 조선, 일본말과는 다른 조선의 고유한 말을 지키고자 한 거겠지.
 …중략… 동주는 동주의 꽃을 피우려 했을 뿐이야. 시인이라면 백화가 만발한 꽃동산의 아름다움을 잊지 못하니까. 꽃은 서로 다르되 향기의 숨결로 생명을 나누며 함께 숲을 이루지. 다르면서 서로 의지하고 교통하는 생존의 이치를 아는 시인이라면 남을 치거나 미워하지 않는단다. 다만 자기를 지키다 꽃처럼 조용히 죽어갈 뿐이지. 이런 시인은 어쩌면 험악한 세상을 바꾸지 못할지도 몰라. 하지만 아무리 험악한 세상도 이런 시인을 결코 바꾸진 못한단다. 앞으로 미친 세상은 마땅히 이래저래 바귀겠지만 동주와 같은 시인은 시인으로 영원하다. -298p

 수험생 시절, 윤동주의 수많은 시를 읽고 해석하고 암기하였지만 정작 시인의 삶에 대해선 뚜렷하게 알고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제가 알고 있었던 것이라면 그저 '부끄러움을 강조하는 시인', '민족 저항 시인', '일본인의 생체 실험으로 사망한 시인'이라는 것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동주'를 읽고 나서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윤동주가 느꼈을 부끄러움과는 또 다른 의미에서의 부끄러움이었습니다. 좀 더 그를 일찍 알고자 하지 않은 것에 대한 부끄러움, 충분히 알 수 있었음에도 이를 외면해왔던 부끄러움이었습니다.

 어쩌면 윤동주는 작가의 말처럼 너무 오랜 시간을 '민족 저항 시인'으로서 살아온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민족 저항이라는 무거운 수식어에 시인으로서의 삶이 가려졌던 것은 아니었나, 하고 생각해봅니다. 그가 눈을 감은 지 벌써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바랐던 그의 바람은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별이 바람에 스치우는 것처럼 우리들의 가슴을 스치울 것입니다.


* 본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증정 받은 책을 읽고서 작성된 것임을 밝힙니다.

k*******3 2011.11.12. 신고 공감 6 댓글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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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맑은 5월이의 아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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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 2560년 봉축의 아침이다싱그럽게 영글은 햇살 앞에해맑은 5월이 보인다.이렇게 싱그러운 아침을 보는것은 마음의 평화가 왔기때문인가? 사람이 시름을 앞에두고 한숨짓는 것은 人之常情이고 조금씩이나마 해결의 기미가 보이는 것은 희망을 얘기하는 듯하다. 그럼으로 우린 좌절치 않고 살아가며 어디론지 유동으로 흐르는 것으로 만족한다. 밤하늘의 유성처럼 빠르게 떨어지는것이
"해맑은 5월이의 아침에..." 내용보기

불기 2560년 봉축의 아침이다

싱그럽게 영글은 햇살 앞에

해맑은 5월이 보인다.

이렇게 싱그러운 아침을 보는것은

마음의 평화가 왔기때문인가?

 

사람이 시름을 앞에두고 한숨짓는 것은 人之常情이고

조금씩이나마 해결의 기미가 보이는 것은 희망을 얘기하는 듯하다.

그럼으로 우린 좌절치 않고 살아가며

어디론지 유동으로 흐르는 것으로 만족한다.

밤하늘의 유성처럼 빠르게 떨어지는것이 아니라면 우린 감내할수있다.

 

그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오늘 비로소 완공을 봤다.

처음으로 나의 조바심을 일신시키는 작업에 안도하곤 한다.

처음엔 두려웠던 기억들,

그리고 시름과 고심으로 일관하는 일들이 생각난다.

 

그래 세상은 흐르기 마련이고 세월은 우리를 무디게 만든다.

지나가는 것은 옛것이 아니라 우리내 영원속에 머무르며

자신의 삶의 의미를 부여 하기도 하기때문이다.

그리고 지향하며 또다시 길을 떠나는 나그네처럼 훌쩍 떠나곤 하지......

도전이랍시고 고행을 딛고 막다른 수렁에 빠지기도 하지만 우린 멈출수는 없다.

 

그것은 살아있음이기에 우린 끝없이 생동하기 마련이다.

무엇이 우릴 만족으로 충족할까?

그것은 행하는 위치에  있을뿐 무엇을 얻음으로서의 만족은 아닌듯하다.

무엇을 생각하고 생동하며 행하는 행위가 아름답다.

곧 세상을 살아가는 자그맣한 의미로 표현을 한듯 작은표현은 아니다.

 

힘이 들었지만  행위에 감사하며 나름의 만족에 생동을 보는 우리는

작은위치에 내려앉은 굴레의 힘을 갖은 인간임이 자명하다.

오늘 싱그런 아침을 본다.

남산의 푸르름이 보인다.

남산을 품에안은 푸르른 한강도 보인다.

 

그래 오늘은 볼수 있는 영광도 있구나,

살아있음으로 그들과 어울리며 사랑하며 사고한다.

어디로 가는 길의 모습이 아름답도록 우린 살아가고 있다

불기2560년 봉축의 아침이다

싱그럽게 영글은 햇살 앞에 해맑은 5월이 보인다.

 

h*****k 2016.05.14. 신고 공감 3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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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의 유고 추적 미스터리
"윤동주의 유고 추적 미스터리" 내용보기
윤동주의 <서시>, <별헤는 밤>은 우리들이 좋아하는 대표적인 시들이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외다. " (별헤는 밤 중에서)    <동주>의 작가 '구효서'는 시인 윤동주앞에 붙는 '민족', '저항'이라는 관형사를 조심스럽게 벗기고, 그가 반한 윤동주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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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의 <서시>, <별헤는 밤>은 우리들이 좋아하는 대표적인 시들이다.

"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외다. " (별헤는 밤 중에서)

  


<동주>의 작가 '구효서'는 시인 윤동주앞에 붙는 '민족', '저항'이라는 관형사를 조심스럽게 벗기고, 그가 반한 윤동주의 얼굴, 눈빛, 미소 등 사진에 박힌 그 모습 그대로를 재발견하고 싶었던 것인가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반한 윤동주의 죽음을 그리고 싶어서 <동주>를 쓰게 되었다.



그런데, 작가의 <작가의 말>에서도 밝히듯이, 이 소설은 윤동주가 화자도 주인공도 아니다.
화자이자 주인공은  동주가 죽기 전에 살았던 타케다 아파트의 사동 '텐도 요코'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화자이자 주인공은 재일교보 3세 김경식이다.

요코는 자신의 출생을 알지 못하는 일본인이 주워와서 키운 아이이다.
그녀는 이붓아버지를 피해 나가사키에서 교토로 오게된 15살 소녀인데, 그가 일하는 아파트에서 동주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소녀는 자신의 행동이 동주를 경찰서로 연행하게 되었으며, 사형을 당하게 하였음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소녀는 글자를 배우게 되고, 나중에는 자신이일본인이 아닌 아이누인임을 알고  아이누 언어와 문자를 배우게 되는 것이다.
후에 그녀는 동주의 유고를 추적하게 되는데, 그 과정을 두 개의 언어로 기록하게 되는 것이다.
15살 텐도 요코의 눈에 비친 그당시의 이야기는 일본어로.
그리고, 성장하여 학문을 배운 후에 깨닫게 된 자신의 15살 동주와의 인연에 관한 이야기와 동주의 유고를 추적하는 이야기는 아이누어로 기록하게 되는 것이다.
15살 텐도 요코의 기록은 너무도 유아적인 글들인데 반하여
훗날 이타츠 푸리 카의 기록은 초반의 기록에서 후반의 기록으로 갈수록 좀더 섬세하고 성숙한 기록이다.




여기에 야마가와 겐타로의 이야기가 교차된다.
그는 어느날 어머니로부터 자신이 일본인이 아닌 한국인임을 알게 된다. 그러나, 그에게는 아무런 반응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일본인이건 한국인이건 그에게는 커다란 차이점을 느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아르바이트일을 하게 되면서  그의 친구인 시게하루의 갑작스러운 증발로 인하여 친구를 찾는 과정에서 동주의 산문을 발견하게 되고, 그것이 어떤 실마리가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 동주의 산문을 추적하게 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사라진 윤동주의 유고를 숨기려는 세력을 감지하게 되는 것이다.
친구 찾기에서 비롯된 윤동주의 산문 유고를 추적하는 과정이 전개된다.


이처럼 <동주>는 윤동주의 유고를 둘러싼 미스터리 형식의 소설로 구성되어 있다.
텐도 요코, 그녀는 나중에 이타츠 푸리 카라는 이름으로 살아 간 여인이고, 그녀는 동주의 유고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동주가 한글로 그의 작품을 쓴 것에 대한 이해를 하게 되는 것이다.
일본 경찰에 의해서 동주의 시가 한글에서 일본어로 번역이 되었다는 것은 동주의 시가 아님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동주의 죽음은 사형당한 후쿠오카 형무소에서의 죽음은 저항시인의 죽음이요, 그 이전에 이미 시모가모 경찰서에서 시인으로서의 죽음을 맞이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야마가와 겐타로는 나중에 한국어를 공부하게 되고 김경식으로 개명을 하게 되는데, 이것은 이 소설의 두 화자이자 주인공의 공통점이기도 하다.
야코가 일본인이 아닌 아이누인이기에 그의 언어가 일본어가 아닌 아이누어가 되듯이, 겐타로도 일본인이 아닌 한국인이기에 한국어를 배우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동주도 한국인이자 간도에서 출생하고 일본 유학을 하지만, 그의 언어는 한국어인 것이다.
일본어로 번역된 동주의 시는 이미 윤동주의 시가 아닌 것이다.

" 우월하고 열등하고를 떠나, 누구에게나 무엇에게나 고유한 자기라는 게 있기 마련이니까. 일본과 다른 조선, 일본말고 다른 조선의 고유한 말을 지키고자 한 거겠지. 우열을 매겨서 저마다 우등하다 칭하는 것을 취하고 열등하다 칭하는 것을 버리면 하나로 같아져 개별과 단독의 고유성은 없어지는 거란다. (..) 실제로 우월하고 열등한 것이 아닌데도 우월하고 열등하다 속여 이르면서 침략과 동화를 정당화하려는 거지. 미개하고 야만적인 세계를 문명화한다는 명분. 그러나 우월병에 걸린 것은 지금의 미친 일본이고 그게 외려 야만이란다. 동주가 조선 시인으로 살고자 했던 것은 그것이 더 좋고 더 나아서가 아니라 고유성을 지키려  했던 거고, 그것을 잃으면 실상 모든 것을 잃는다는 신념때문이었을게야. (...) 이런 시인은 어쩌면 험악한 세상을 바꾸지 못할지도 몰라. 하지만 아무리 험악한 세상도 이런 시인을 결코 바꾸진 못한단다. " (p 297~298)

<동주>는 미스터리 형식을 빌리기는 했지만 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언어, 말에 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윤동주의 죽음을 통해서, 그의 유고의 추적을 통해서 언어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시인에게서 시인의 언어인 한국어를 번역하게 하는 것은 그의 시의 가치가 없어지는 것이기에.
또한, 소설의 내용 중에 '간도'의 의미도 큰 비중을 차지한다.
동주가 태어난 곳이 간도이지만, 이것은 언어의 이중성으로 풀어야 하는 것이다.
간도(間島)는 사이의 섬, 무엇과 무엇의 사이를 의미하는 것이다.
텐도 유코와 이타츠 푸리 카.
그리고 야마가와 갠타로와 김경식.
거기에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윤동주.
그들의 내면의 목소리를 찾아 내는 것이 이 소설을 이해하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 시가 꽃이라면 각각의 언어가 그대로 꽃이요, 시인은 꽃잎을 받치고 선 꽃대일진대 언어를 앗아 시를 유린함에 어찌 꽃대인들 저 홀로 생명이라며 하늘을 우러를 수 있을까. 꽃나무는 그렇게 하늘 아래 홀연히 꽃 피우고 서 있는 것으로 존재의사명을 할 것일 터, 그걸 일컬어 감히 누가 미미하고 유약하다 할 것인가. 말을 앗기고 잃는 순간 저절로 생명이 소멸해버리는 시인의 운명이 어찌 가엽고 안타깝기만 할까. 가엽고 안타까운 것은 말을앗기고도 살아 있는 유사 시인일 뿐, 본분에 살고 본분에 죽어 갔던 것을. (...) " (397)




이달의 사락 n******5 2011.10.31. 신고 공감 2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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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의 고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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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를 좋아한다. 윤동주의 시를 좋아한다. 그는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랐던 시인이기에, 나도 그를 좇아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삶을 사는 평범한 사람이 되고 싶었고, 그러기에 참으로 좋아한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 벌벌 떠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모습은 또 어떤가. 추위에 떠는 것이야 무엇이 부끄러웠을까마는 추위가 아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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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동주를 좋아한다. 윤동주의 시를 좋아한다. 그는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랐던 시인이기에, 나도 그를 좇아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삶을 사는 평범한 사람이 되고 싶었고, 그러기에 참으로 좋아한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 벌벌 떠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모습은 또 어떤가. 추위에 떠는 것이야 무엇이 부끄러웠을까마는 추위가 아닌 다른 무엇 때문에 벌벌 떨고 있는 자신이 한없이 부끄럽다고 하는 윤동주에게 부끄러운 것은 다름 아니라 <어떤 상황에도 당당하고 진실함>을 지켜내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 했음이다. 참으로 부끄러움이 무엇인줄 안 참된 시인이었다.

  우리는 이런 윤동주를 '민족저항시인'이라 칭송하길 망설이지 않는다. 일제의 경찰에 붙잡혀 사상이 불순하고 조선독립을 꿈꿨다는 죄목으로 결국 죽음을 맞이한 사실만 알려졌으나 뒤늦게나마 그의 <유고집>이 발간되었고, 비로소 우리 민족에게 널리 읽히며 많은 사랑을 받게 되었다. 수많은 동포들이 윤동주의 <당당함과 진실함>에 반했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그런 그의 유고집이 조선말, 다시 말해, 모국어인 한국어가 아니라 일본어로 뒤쳐진 것(번역된 것)을 다시 한국어로 뒤쳐져서 발간된 것이라면 어찌 보아야 할까? 정리하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유고집> 외에 다른 '유고집'이 있어 한국어로 시 쓰기를 고집했던 윤동주이기에 당연히 한국어 원본이 있었으나 일본경찰의 고문과 강압에 못 이겨 시인 스스로 일본어로 뒤쳐냈고, 이런 와중에 한국어 원본은 사라지고, 시인 스스로 뒤쳐놓은 시만이 남아 전해지게 되었다면...또 이것을 열다섯 살 어린 소녀가 간직하고 있었으나, 누구보다 모국어를 사랑했던 시인이 모국어가 아닌 다른 말로 강제로 뒤쳐진 채 남게 된 것을 '온전한 원본'으로 볼 수 있을까? 라는 물음이다.

  그렇다. 이 책은 <말>에 대한 소설이다. 윤동주가 고집스럽게 한국어로 시를 썼기에 우리는 아주 쉽게 윤동주를 '민족저항시인'으로 부른다. 그런 민족저항시인이 비록 고문에 견기기 힘들었다고는 하나 제 손으로 손수 일본어로 뒤쳐낸 시를 '시'라고 할 수 있을까? 김소월의 '엄마야 누나야'를 프랑스어로 뒤쳐서 프랑스인들에게 널리 알릴 때 시가 함축하고 있는 뜻을 모두 뒤쳐낼 수 없을 것이다. 쉽게 말해, '맛이 달라진다'는 말이다. 스스로 바라서 뒤쳐내어도 이럴진대 하물며 고문을 받고서 강요에 의해 뒤쳐진 원본이 고스란히 원본취급 받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을까? 또 시인은 그런 원본을 세상에 남기길 바랄까? 아마도 세상에 없는 편이 더 나은 원본이기에 '없애야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을 또 '없애버리기도 곤란'한 것도 사실이다.

  이렇게 이 책은 윤동주가 남긴 강압에 의해 뒤쳐진 원본 유고집을 등장시켜 <말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그리고 이 유고집을 남몰래 지니고 있던 <열다섯 살 아이누족 소녀>와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인으로 살다가 어머니의 뒤늦은 고백 한 마디에 <조선인이 되어 버린 청년>을 등장시키며 <말과 말의 영토, 그리고 '사이섬(간도)'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한마디로 좀 복잡하다.

  정리하면, <조선인이 되어 버린 청년>이 '윤동주의 유고집'을 찾아나서게 되고, 그 와중에 그 윤동주의 마지막 모습과 그 유고집을 간직했던 <열다섯 살 아이누족 소녀>의 행적을 뒤쫓게 된다. 더 자세히 말하면, 절친하게 지내던 일본인 친구가 느닷없이 사라지자 청년은 친구를 찾아나서게 되고, 그 과정중에 '윤동주의 유고집'을 발견하게 되며, 유고집을 발견하는 과정중에 <아이누족 소녀>를 알게 된다. 그런데 이 아이누족 소녀는 자신이 아이누족 소녀인 줄도 모르고 갓난아이 때 버려졌고, 어느 일본인 부부에 의해 키워지게 된다. 그러나 소녀의 어린시절은 불우하기만 했다. 소녀가 내뱉은 첫 말이 "엄마"가 아니라 '싫어"였다는 것이 소녀의 삶이 참으로 굴곡지어졌다는 것을 알게 한다.

  유난히 피부가 하얀 소녀는 열다섯 살에 가출해서 유곽으로 들어갔고, 그 곳에서 윤동주를 만났다. 조센징. 일본에게 말의 영토를 빼앗겼지만 말까지 빼앗길 수는 없다는 동주는 그닥 말을 많이 하지 않는 조용한 사람이었다고 소녀는 기록으로 남겼다. 일본인 부부에게 키워졌기에 일본어를 할 줄은 알지만 글은 쓸 줄 모른다. 그 기록이란 것도 나중에 서툴게나마 글(일본어)을 배우고 나서 겨우 기록할 수 있었고, 나중에 정식으로 '아이누어'를 배우고 나서는 아이누어로 동주에 대한 기록을 남길 수 있었다.

  아이누. 메이지이신(명치유신) 이후 북해도로 쫓겨난 민족이고, 결국 자신들의 말까지 잃어버려 현재는 겨우 15명 만이 말할 줄 아는 '죽어버린 말(사어)'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아이누족은 남아 있으나 일본어에 밀려 아이누말은 거의 사라진 상태이고, 고대 야마토(일본인)에게 떠밀려 제 땅마저 내어주고 만 일본 속의 식민지라고 불리는 곳이다. 야마토인과 아이누인은 먼 조상부터 서로 다른 사람들이기도 하다. 아이누인들의 조상은 '아리아인'으로 백인혈통이다. 그래서 겉모습은 비록 동양인과 다를 바 없지만, 유달리 피부색만은 하얀...그래서 <열다섯 살 아이누족 소녀>가 하얗다고 묘사된 까닭이다.

  아무튼 윤동주가 조선인이지만 나라를 빼앗겼기에 일본어를 쓰는 것처럼 소녀도 아이누인이지만 일본어를 쓰며 지냈던 것. 그러나 낯선 이국땅에서 한국어로 시를 쓴 고집스런 윤동주처럼 비록 처음에는 몰랐지만 자신이 아이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서 평생을 북해도로, 즉, 자신의 고향으로 가기 위해 고향말을, 고향의 문화를 배우게 된다.

  여기에 또 한 사람이 등장한다. 바로 앞에서 말한 청년말이다. 청년은 친구의 꼬임으로 아르바이트를 시작한다. 수당이 다른 곳보다 두 배라는 까닭만으로 친구의 집요한 꼬임에 빠졌다. 그러나 일에 비해 엄청나게 많은 돈벌이였지만 일을 시작한 지 얼마되지 않아 느닷없이 친구가 실종되었다. 청년은 친구를 찾아 사방에 수소문 하지만 좀처럼 행방을 알 수 없고, 왠지 지금 하는 아르바이트를 하면 친구를 찾을 수도 있을 거라는 막연한 감으로 일을 계속하게 된다. 그러다 발견하게 된 것이 <어제의 만주를 말하다>라는 제목의 '윤동주의 유고집'을 찾을 수 있는 단서를 발견하게 된다. 이때부터 시작되는 '추리게임' 청년은 조선인이라는 동질감에 단서 속에서 등장하는 '히라누마 토쥬' 조선이름으로는 '윤동주'에 관심을 갖게 되고, 또 그 '윤동주의 모습'을 서술하는 아이누족 소녀 텐도 요코, 아이누식 이름으로는 '이타츠 푸리 카 ('언어의 비단'이란 뜻)'를 추적하게 된다.

  열다섯이 되도록 글도 제대로 쓰지 못하던 요코가 동주의 영향을 받아 서서히 글을 배우게 되고, 자신이 야마토인과는 다른 아이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뒤에 몇 사람 쓰지도 않는 아이누어를 배우게 된다. 윤동주가 한국어로만 시를 쓰는 고집처럼 요코도 고집스럽게 아이누말과 문화를, 어쩌면 제 나라이기 때문에 당연히 배워야 한다는 듯이 마흔 살이 되어서야 배우기 시작한다. 그런 내용의 단서를 추적하기 때문일까. 청년도 '겐타로'라는 일본식 이름 대신에 신라황실을 조상으로 두었다는 '김경식'이란 이름으로 바꿔 부르고, 지금 이 책(책 속의 책)도 일본어 대신 한국어로 쓰길 고집한다.

  말이란 무엇일까? 비록 '말', '어', '언어'를 마구 섞어서 쓰고 있긴 하지만 모두 같은 뜻으로 '말'이라 가리킨 것 뿐이다. 윤동주는 '말의 영토'는 빼앗겼을지라도 '말'을 지키면 언제든 다시 조국해방과 독립을 이룰 수 있다고 말했단다. 그런 뜻에서 '말'은 '얼'이자 '혼'이고 '정신'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말의 영토'가 사람으로 치면 육신에 해당하고, 일제에 무단히 빼앗기고 말았으나 '얼'과 '혼', 그리고 '정신'인 '말'만 지키고 가꾸면 언제도 다시 육신을 되찾을 수 있다는 논리인 게다. 그 때문에 고집스럽게 이국땅에 와서 공부하는 처지이지만 '한국어'를 고집하여 시를 쓴 것이다. 그런 시인이기에 강압적으로 일본어로 뒤쳐서 쓴 시를 '윤동주의 시'라고 할 수 없다고 하였던 것이다. 또 아이누족 소녀도 그런 원본이라면 차라리 '없어져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고 말이다. 또 그것을 재발견한 '김경식'도 없어져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어디까지나 시인 본인의 생각이 아니기에 차마 없앨 수도 없는 것 아닐까? 라는 고민에 빠진다.

  여하튼 지금까지는 '추리게임'에 대한 정리였고, 다시 <말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서 윤동주의 고향인 '사이섬(간도)'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비록 '도'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아시다시피 '간도'는 섬이 아니다. 그런데도 '섬'과 같은 곳이 바로 '간도'다. 조선인이 많이 살지만 조선땅이라고도 할 수 없고, 중국영토에 속하지만 조선인이 훨씬 더 많이 살고 있는 땅이 바로 '간도의 현실'이다. 윤동주는 바로 이곳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윤동주는 조선인이면서 조선인이 아니고, 조선말을 쓰고 있으니 조선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윤동주는 더욱 고집스럽게 '말'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점에서 '아이누족'도 일본본토에 살던 민족이었고, 엄연히 말도 있었다. 그러나 아마토인에게 밀리고 쫓겨 북해도라는 변방으로 밀려났고, 야마토인들의 동화정책에 결국 '말'을 잃어버리고 점점 일본인이 되어 간다. '사이섬'에 살며 서로의 말과 문화를 엿보는 처지에 있다는 말이다. 윤동주처럼 말이다. 여기에 <재일교포>의 문제가 살며시 오버랩이 된다. 이들 역시 일본인이면서 일본인이 아닌 재일교포들. 그들도 역시 '사이섬'에 사는 주민들인 셈이다.

  이들의 '정체성'을 지켜주는 것은 다름 아니라 '말'인 셈이다. 아이누인이 '아이누말'을 하고, 조선인이 '한국말'을 하는 것이 정체성을 지켜주는 것은 당연한 말이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일본에 살면서 '아이누말'과 '한국말'을 하며 살 수 있을까? 쉽지 않은 선택이다. 또 지키기도 어렵다. 그런데 여기에 윤동주가 바라던 대로 '조선말'을 지키다가 해방을 맞이하고 독립한 <대한민국>이 있다. '사이섬'에 살고 있는 아이누인과 재일교포도 독립할 수 있을까? 물론 일본에서 정치경제사회면에서 따로 독립하는 것을 말한 것이 아니다. 단지 그들의 '정체성'을 지키면서 일본사람으로 존중받으로 살 수 있느냐 하는 이야기다.

  실제로 이 책의 뒤에 나와 있는 <아사히 신문기사>를 보면 심각하게 고민해볼 법하다. 전세계 2500개의 언어가 사라지고 있고, 그 가운데 일본에만 8개의 언어가 사라질 것으로 전망한다는 기사 내용이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아이누어'다. 심각한 것은 이 기사글에 달린 댓글들. 대부분 <일본어> 하나만 쓰면 다 좋은 것 아니냐는 내용이다. 사라지는 언어보다 사라지는 생물에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일본인들. 말이 사라지면 <사회> 하나가 사라지고, <인류의 문화양식> 하나가 줄어드는 것인데도 그 심각성에 대한 고민조차 찾아볼 수 없는 댓글들이었다. 비단 일본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말'이 사라진데도 경제가 나빠지는 것도 아니고, 사람이 죽는 것도 아닌데 무슨 걱정이냐고 반문하는 그들을 통해 오직 <일본의 문화>만 지켜진다면 다른 어떤 문화가 다 사라진대도 걱정할 것이 없다는 투로 들린다.

  일본제국주의 시절 <대동아공영권>이란 허울 좋은 이름도 아시아 모든 국가들이 '일본의 것'으로 모두 동질화하여 '귀축미영'과 서양세력을 맞서야 한다는 논리에서 나왔다고 한다. 제국주의가 끝난 현재에도 이와 같은 일본인들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우리는 빈틈없이 경계해야 하지 않을까? 물론 일본인 모두의 생각이 다 이런 것도 아니지만 말이다. 글쓴이의 말처럼 <윤동주>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책이다. 그러나 <윤동주의 고집>과는 아주 큰 관련이 있는 책임에 틀림없다. '말'을 지켜라...라고 말이다.



YES마니아 : 로얄 이달의 사락 z******8 2011.11.14. 신고 공감 2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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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시적죽음 [동주]
"시인의 시적죽음 [동주]" 내용보기
창(窓)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詩人)이란 슬픈 천명(天命)*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詩)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 봉투(學費封套)를 받어 대학(大學)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敎授)의 강의(講義)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시인의 시적죽음 [동주]" 내용보기



창(窓)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詩人)이란 슬픈 천명(天命)*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詩)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 봉투(學費封套)를 받어

대학(大學)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敎授)의 강의(講義)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沈澱)하는 것일까?

인생(人生)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詩)가 이렇게 쉽게 씌여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창(窓)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時代)처럼 올 아츰*을 기다리는 최후(最後)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慰安)으로 잡는 최초(最初)의 악수(握手).


윤동주님의 <쉽게 쓰여진 시>를 찾아 읊조려본다.

절망적인 현실, 그리고 그 현실에 능동적인 저항치 못한 자신에 대해 반성하고 고뇌하는 시인의 모습이 엿보입니다. 하지만 마지막 싯구에서 느껴지는 어둠을 몰아내는 등불, 아침을 기다리는 그의 모습은 희망을 바라는 그의 마음이었으리라... 하지만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저항시인이 된 윤동주의 유고 미스터리,,

구효서 작가의 <동주>


일제 생체 실험 결과 옥사한 것으로 알려진 윤동주 시인의 죽음을,,, 소설 속에선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교토의 15살 소녀 요코이자 이타츠 푸리 카인 그녀의 기록 속 윤동주와 그녀의 기록 속에 존재하는 윤동주의 글을 쫓는 재일 한국인 3세 야마가와 겐타로(=김경식)의 시선으로 두 갈래의 이야기로 갈라진다. 하지만,, 분명,, 이 두 시선의 끝은 동주에게로,, 그리고 모국어에 대한 이야기로 귀결된다. 서로 다른 두 사람(요코와 김경식)이 시차를 두고 서로 다른 이유로 윤동주의 유고 시와 산문을 추적한다. 윤동주와 교토의 같은 아파트에 살았던 요코, 나가사키에서 의붓아비로부터 성폭행을 당하며 살다 교토로 도망 와 동주를 알게 됐고, 그가 시를 쓰는 한국인이며, 또한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지만 어렴풋하게 그가 남들과는 다름을 느낀다. 하지만 요코는 자신도 모르게 일본경찰에게 동주의 일상을 낱낱이 제공하는 일을 하게 됐고, 경찰에 연행된 동주가 자신이 사랑하는 시를 일본어로 번역했단 사실을 알고, 그의 유고 시 원본을 찾게 된다. 그리고 동주 때문에 글을 익히고, 자신이 일본 내 소수민족인 아이누인이란 사실을 알게 되고,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시를 강제에 의해 일본어로 번역한 시인의 죽음에 아파한다. 말과 말의 영토를 앗긴 자만이 느낄 수 있는 그 아픔을,,,
그리고 자신이 한국인임을 뒤늦게 알게 된 김경식(야마가와 겐타로),

친구와 함께 수상쩍은 도서검색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 갑작스럽게 친구가 행방불명되고, 그의 행방을 찾다 윤동주 유고집과 관련됨을 알고 그의 유고집을 찾던 중 요코이자 이타츠 푸리 카의 존재를 알게 되고, 그녀의 동주에 대한 기록을 바탕으로 친구를 찾아 나선다. 윤동주의 유고집을 찾아 떠나게 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대륙낭인이라는 일본 세력의 존재를 알게 되고, 행방불명됐던 친구의 사연 역시 드러난다. 그리고,,, 김경식은 자신의 기록을 일본어가 한국어로 집필하겠단 마음을 먹게 된다.


두 사람에 의한 추적 과정,,,

소설 속 윤동주는 민족저항시인일 정도의 거창한 나라사랑을 드러내진 않았지만,,, 그저 조선어로 된 시를 쓰고, 그 아름다움을 지킴으로서 민족에 대한 사랑을 여실히 드러낸다. 늘 불안하고 위태로울 수밖에 없는 섬 같은 그 곳, 그 시간 속에서,, 시인의 저항은 늘 외로워하고 망설이고, 부끄러워하고 그리워하며,,, 그저 아름다운 조선어로 그의 시로 저항하였다. 그러하였기에 동주는 육신의 죽음을 맞이한 후쿠오카 형무소가 아닌 그의 시를 일본어로 번역했던 시모가모 경찰서에서 죽음을 맞이했던 것이다. 육신은 살아있으나,, 시인의 마음을 빼앗긴 그곳에서 말이다.


"동주가 조선 시인으로 살고자 했던 것은 그것이 더 좋고 더 나아서가 아니라 고유성을 지키려 했던 거고, 그것을 잃으면 실상 모든 것을 잃는다는 신념 때문이었을 게야. 들판의 모든 꽃이 사쿠라가 돼버리면 세상에는 꽃이란 것 자체가 없어지는 거란다. 사쿠라는 다른 꽃이 있어야 사쿠라인 게지. 일본은 그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 문명을 사칭하여 남의 나라를 강압적으로 침략하고 지배하고 있어. 망하는 길이지. 동주는 동주의 꽃을 피우려 했을 뿐이야. 시인이라면 백화가 만발한 꽃동산의 아름다움을 잊지 못하니까. 꽃은 서로 다르되 향기의 숨결로 생명을 나누며 함께 숲을 이루지. 다르면서 서로 의지하고 교통하는 생존의 이치를 아는 시인이라면 남을 치거나 미워하지 않는단다. 다만 자기를 지키다 꽃처럼 고요히 죽어갈 뿐이지."


조금 복잡한 구성이라,,, 초반부엔 난해하다 생각수도 있겠지만,,, 복잡한 인물 구성과 사건들을 지나면 보이는 윤동주의 조선어에 대한, 조국에 대한, 그리움을 깨닫게 되는 순간,,, 전율과 함께 눈시울이 뜨거워질지도 모르겠다.


"저에게는 흔들림 없이 문학에 매진하는 일이 그것입니다. 부디 제 앞길을 열어주세요. 가족과 교회와 간도와 조국을 결코 한순간도 잊지 않겠습니다. 조선이 없으면 조선의 시인도 없습니다. 저는 조선의 시인이겠습니다."




n****5 2011.11.17.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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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시인을 다시 만나게 해준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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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 되었습니다>   이 책은 우선 표지의 그림이 너무 아름다웠고, 궁금했다. 물속에서 가라앉는 듯하게 동동 떠있는 흰 옷의 남자. 발아래 열려있는 문넘어는 매우 어둡다. 떠있는 남자는 분명 우리가 아는 동주일거다. 그러나, 그가 왜 그리 창백한 모습으로 물속에 있는지 궁금했다. 또한 그의 오른팔만이 창백하지 않는 이유도 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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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 되었습니다>

 


이 책은 우선 표지의 그림이 너무 아름다웠고, 궁금했다.
물속에서 가라앉는 듯하게 동동 떠있는 흰 옷의 남자.
발아래 열려있는 문넘어는 매우 어둡다.
떠있는 남자는 분명 우리가 아는 동주일거다.
그러나, 그가 왜 그리 창백한 모습으로 물속에 있는지 궁금했다.
또한 그의 오른팔만이 창백하지 않는 이유도 궁금했다.
그렇게 나는 이 책을 표지의 그림만으로 궁금함을 가지고 시작하게 되었다.

표지그림에 대한 내 견해는 나중으로 미루고, 이 소설의 독특함을 먼저 소개하고자 한다.
이 책은 마치 다큐멘터리와 소설을 절묘하게 조합시켜 놓은 분위기를 띈다.
그것은 윤동주를 쫓는 두개의 시선과 두개의 시점 때문이다.
주인공은 요코라는 일제시대를 보낸 한 여성과 현대시대를 사는 켄타로이다.
둘이 주인공이지만, 둘은 또 다른 한명의 주인공인 윤동주를 뒤쫓는다.
요코는 일본인이며, 일본유학시절의 윤동주시인을 만났다.
켄타로는 일본에 사는 한국인으로 한국에 대한 특별한 애착이 없다.
그런 켄타로가 윤동주 시인의 행적을 뒤쫓게 된 이유는 사라진 친구 시게하루 때문이다.
그렇게 시작된 켄타로의 여행을 결국 이 소설의 탄생이었다고 소설에서 밝힌다.
켄타로의 윤동주 뒤쫓기는 결국 요코가 남긴 글들에 향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켄타로의 이야기는 소설처럼, 요코가 남긴 글은  다큐멘터리처럼 다가온다.
이 독특함은 꽤나 소설이 진짜 일수도 있겠다는 믿음을 주게하였다.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작가의 말이 나온다.
정말로 작가의 말이 해설이 되어버렸지만, 그의 의도는 작가의 말 전에 이미 이해할수 있었다.
"말과 글"의 중요성을 작가는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다.
또한 시인 윤동주를 '민족 저항 시인'의 틀에서 벗어내고 싶어했다는 것또한 동의할수 있었다.
그래서, 표지의 그림이 어느정도 다 이해가 되었다.

몇년전 EBS에서 한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오지를 돌아다니면서 언어를 녹음하고 연구하는 언어학자들을 소개하는 다큐멘터리였다.
작가의 견해와 동일한 목적으로 그들은 언어를 카메라 테이프와 녹음기에서만이라도 보전하고 싶어했다.
역사는 말과 글로 인해 전해진다.
그러므로 말과 글의 멸종은 결국 문화와 역사를 사라지게 한다.
인디언 문화의 실종도 이와 맥락을 함께 한다고 한다.
한글과 지방 사투리들과 방언의 소중함을 다시한번 더 생각하게 하였다.

중고등학교 시절 나는 윤동주의 시린 시들이 좋았다.
그런데 교과서에서 윤동주의 시들을 접하면서 그 매력이 감해지기 시작했다.
시의 구절구절애 밑줄을 치면서 담겨진 숨은 의미를 적어가면서 더이상 시는 아름답지 않게 해체되었다.
그 이후 내 가방에서 윤동주 시집은 사라졌다.
소설을 읽고나니, 그 시리게 아름다웠던 시들이 다시 읽고 싶어졌다.
윤동주 시인의 이름에 그 어떤 수식어도 붙이지 않고, 순수하게 윤동주의 시를 읽고 싶어졌다.

이 소설로 나는 많은 것을 얻었다.
새로이 윤동주 시인을 만나고 싶어졌고, "말과 글" 에 대해 다시한번 더 생각하게 되었다.
구효서 작가의 독특한 이 소설은 윤동주 시를 읽을 때마다 떠오를것 같다.

 

m*******i 2011.11.13.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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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구효서 장편소설) - 윤동주 유고와 자아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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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아마도 처음 읽는 구효서 소설. 「문학이 사랑한 꽃들」에 소개된 구효서 작가가 궁금해져, 출간작들을 검색하다 보니 마침 영화 「동주」 개봉 시기였던 참이라, 작품들 중 「동주」가 특히 눈에 띠었다. 이야기는 주인공 김경식이 글을 쓰게 된 계기를 밝히는 것 부터 시작한다. 김경식은 자기가 일본인인 줄 알고 살다가 어머니로부터 "너희 아버진 한국인이다."라는 말을 듣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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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아마도 처음 읽는 구효서 소설. 「문학이 사랑한 꽃들」에 소개된 구효서 작가가 궁금해져, 출간작들을 검색하다 보니 마침 영화 「동주」 개봉 시기였던 참이라, 작품들 중 「동주」가 특히 눈에 띠었다. 

이야기는 주인공 김경식이 글을 쓰게 된 계기를 밝히는 것 부터 시작한다. 김경식은 자기가 일본인인 줄 알고 살다가 어머니로부터 "너희 아버진 한국인이다."라는 말을 듣는다. 그러나 그렇다는 사실도 겐타로로서 살아가는 그의 생활 태도나 사고방식을 바꾸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김경식은 23 살에 한국을 알고 싶단 열망이 일어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하고, 지접 한국말로 이 글을 쓰고 있다고 전한다. 이제 이야기는 김경식이 절친한 친구 나츠메 시게하루가 권한 여름 방학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윤동주의 유고를 세상에서 없애려는 세력과 그것을 지키려는 세력이 있음 알게 된 것으로 이어진다. 친구 나츠메 시게하루가 돌연 행방불명 되자 겐타로는 윤동주 유고가 관련이 있을 거라 짐작하고 친구의 행방을 추적하면서 유고도 추적하게 된다. 

겐타로가 유고를 찾아 도쿄부터 후쿠오카, 홋카이도까지 이동하는 여정 사이사이, 한 여자의 수필이 나열된다. 그녀는 텐도 요코. 다른 이름은 이타츠 푸리 카. 윤동주가 일본에 살 때 같은 건물 이웃이었다. 가까이서 동주를 지켜본 요코의 입을 통해 동주의 모습이 전해져 온다. 

소설의 마지막으로 가면서 겐타로는 동주와 연관된 텐도 요코의 존재에도 다다르게 된다. 서로 다른 세 겹의 시간대를 사는 존재들이 동주로 인해 엮이고 감화되어 간다. 요코는 자신이 일본인이 아니라 아이누 라는 걸 알게 되곤 양분된 정체성을 겪어야만 했고, 점차 자아가 확립되어 가면서 동주가 살았던 '사이의 간도'의 필요성을 느낀다. 동주의 마음과 혼을 그려내는 이타츠 푸리 카의 글이 요코의 성장을 한껏 느끼게 한다. 겐타로는 그 여름에 요코, 즉 이타프 푸리 카에 의해 한국인이면서 일본말을 쓰고 일본에 살고 있는 이질적인 숙명을 깨닫고 한국에 대한 열망을 키우게 된다. 

윤동주 평전을 보는 것 보다 이 소설 「동주」가 더 인상 깊은 건, 등장인물 김경식과 이타츠가 동주로 인해 만물의 다양성과 주체성의 필요를 깨달아가는 과정이 잘 그려져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간도에 있는 한국 사람들 사이의 불화에 낙담하고 일본의 억압을 받으면서 동주는 저항 정신을 태우기 보다는 시인의 신분으로 '한국말'을 통해 자주성을 추구하고자 했다. 그래서 그는 부끄러웠다. 그런 애달픈 감정들이 요코에 의해 반복적으로 상기된다. 내가 학창시절에 이 책을 읽을 수 있었으면 좋았을 거라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스물한살 청년 동주보다 더 나이를 먹고서야 그의 부끄러움에 한껏 동화되어 있다는 사실이 이중으로 부끄럽다. 

겐타로가 나츠메를 찾아 돌아다니는 것이나 텐도 요코에게 다다르게 되는 과정등의 서사가 유기적으로 이어지지 않는 것이 아쉽다. 겐타로와 요코의 글이 번갈아 등장하는 편집 방식에 문제가 있는 건지. 이야기 진행 과정에 있어서 중요한 사건이 어디에 배치되어 있었는지 잘 인지 되지 않아, 결국 동주에 대한 회고록 부분만이 단일 소설같이 느껴질 정도였다. 이 소설의 평점이 내 생각보다 낮은 이유는, 대개 이런 단점 때문인 것 같다. 

"일본 민족이 순수혈통이라고 우긴 것도 그렇고, 대만과 조선의 병탄을 합리화 하기 위해 나중에 혼혈론을 옹색하게 내세운 것도 그래. 이랬다저랬다 맘대로 피를 바꾸는 것이 너와 일본의 과학이라는 거야. (중략) 하나인 것처럼 말해 저항을 무력화하고 결국은 영속적인 차별과 지배를 완성하자는 것일 테지." (198쪽)

"동주와 나는, 잃었든 버렸든 고향을 떠나왔고, 교토의 한 아파트에 살았으며, 무엇보다 가모오하시 교진을 친구며 스승으로 여겼다. (중략) 어쨌거나 내 기억은 서른이 되고 마흔이 넘으면서 정리되고 견고해진 것일 뿐. 열다섯의 못난 요코는 여전히 종작없기만 했다." (209쪽) 

"특정한 조직이나 사건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 안의 나약함을 말하는 겁니다. 그러 인해 본의 아니게, 자신도 모르는 사이 완강해져 해방의 이름으로 강권하고 서로를 무자비하게 해치는 지경에 이르지 않았습니까." (264쪽)

"아이누적인 것, 조선적인 것으로 차별(차이)되는 것이 하나도 없는 땅은 이미 그들의 영토도 뭣도 아니다. 그것이 없어지는 순간 존재는 상실된다. 차별되는 것, 그 중 으뜸 되는 것을 동주는 말이라 여겼음에 틀림없다." (269쪽) 

"들판의 모든 꽃이 사쿠라가 돼버리면 세상에 꽃이란 것 자체가 없어지는 거란다. 일본은 그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 문명을 사칭하여 남의 나라를 강압적으로 침략하고 지배하고 있어. 망하는 길이지. 동주는 동주의 꽃을 피우려 했을 뿐이야. 다르면서 서로 의지하고 교통하는 생존의 이치를 아는 시인이라면 남을 치거나 미워하지 않는다. 다만 자기를 지키다 꽃처럼 고요히 죽어갈 뿐이지. 앞으로 미친 세상은 마땅히 이래저래 바뀌겠지만 동주와 같은 시인은 시인으로 영원하다." (298쪽)

"동주는 백석의 필사본이 반가웠고 명준이 존경스러웠다. 그런 마음 한편으로 자괴감이 쌓여가고 있었다. 언제든 시를 찾아 읽을 수 있는 풍요로운 환경 속에서 오히려 자신의 시가 나태하고 빈곤해진 건 아닐까. 서굴러 학교로 가 이틀 만에 두 권의 시잡을 필사한 이유도 그래서였다. 참회하듯 벼리듯 한 자 한 자 눌러 적었다." (349쪽) 

"시인의 죽음을 몰고 온 그 번역이라는 것은, 일반적 의미의 번역이 아니었다. 시인의 생명을 빼앗는 선고였고 무자비한 집행이었다."(393쪽) 

"동쥐 죽음은 저항인의 저항적 죽음이 아니라, 시인의 시적 죽음이었다. 그의 망설임과 부끄러움은 연약한 이의 성정이 아니라, 세상의 온갖 가차 없는 것들에 대한 반성이었으며 고요한 자기 응시였다. 굳이 저항이었다고 한다도 그것은 국가나 민족 차원의 것이었다기보다는 더 근본적으로, 모든 여자없는 것들에 대한 의도적 머뭇거림이었으며 성찰적 저항이었다." (397쪽)

“그는 시와 함께 죽었다. 그랬으므로 죽음 이후의 시, 강제 번역된 시는 시가 아니며 더구나 그의 시일 수 없다. 그가 영원한 시인으로 우리 곁에 살아남으려면 시와 함께 죽기 이전으로 돌아가야 한다. 원본 없는 강제 번역 원고는 마땅히 사라져야 한다.”(398쪽)

"나는 줄곧 이타츠 푸리 카를 떠올렸다. 그럴 때마다 울컥울컥 맹렬했다. 한국어에 대한 말할 수 없는 궁금증이 일었다. 나는 또 내내 윤동주를 떠올렸다. 그럴 때마다 혹독한 갈증에 시달렸다. '사이의 섬'에 닿고자 하는 열망이 나를 충동했다.(중략) 온전한 나란, 내가 ㅋ개달아 알게 된 나여야 했다. 일본과 한국, 일본어와 한국어 사이에 놓여 있는 나. 내 영토란 '사이의 섬'일 수밖에 없다고 자각하는 나. 비단 일본과 한국 사이뿐아니라 모든 세계의 경계에서 균형감을 유지하려는 나여야 했다." (409쪽)

a******0 2016.05.31.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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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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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동주'이되, 주인공은 '동주'가 아니었던 책.. <별을 스치는 바람>을 읽은 후, 윤동주에 관한 읽기가 아플까.. 두려워 망설이고, 또 망설였었는데.. 이 책은.. '동주'로 인해 '간도'를 찾은 '동주'가 아닌 '동주'들의 이야기였다.   15세 요코 또는 40대의 이타츠 푸리 카. 20대 초반의 야마가와 겐타로 또는 후반의 김경식.   시인에게 모어는 조선어였고, 조선어로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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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동주'이되, 주인공은 '동주'가 아니었던 책..

<별을 스치는 바람>을 읽은 후, 윤동주에 관한 읽기가 아플까.. 두려워 망설이고, 또 망설였었는데.. 이 책은.. '동주'로 인해 '간도'를 찾은 '동주'가 아닌 '동주'들의 이야기였다.

 

15세 요코 또는 40대의 이타츠 푸리 카.

20대 초반의 야마가와 겐타로 또는 후반의 김경식.

 

시인에게 모어는 조선어였고, 조선어로 시를 써 조선의 시인으로 남았다.

요코에게 모어는 나가사키 말, 일본어였지만, 모국어는 아이누어.. 그리고 아이누어로 글을 스며, 일본과 아이누 사이의 균형을 지키며 살아내고자 했다. 그리고 그녀의 영향으로 겐타로 역시 모어인 '일본어'와 모국어 '한국어'사이의 섬에서 균형을 이루고자 한다.

 

제목은 <동주>이되, 동주가 아닌 이타츠 푸리 카와 김경식의 이야기였던 책.. 아픔보다는 애잔함, 결연함이 더 많이 느껴졌다.

 

 

 

p.26

생긴 건 뭐랄까. 수려했다? 그렇게밖에 말 못 하겠다. 내가 본 일본 사람 중엔 그토록 수려하게 생긴 사람이 없었다. 고요한 아침이었다고 해두자, 느낌이. 그는 아침마다 산책을 했다. 그가 아파트를 나서면 그 앞에 펼쳐지는 아침이 고요해졌다.

 

p.88

말은 젖 같은 거야. 그게 육신이 되고 영혼이 됐을 테니까. 젖과 같은 어머니의 조선말을 나는 먹고 자랐어. 그래서 내가 조선인인 거라고 생각해.

 

p.158

과연, 나가사키와는 가장 먼 곳이었다. 어떤 사연이었는지는 모르나, 북쪽 끝 아바시리의 홀씨가 남쪽 끝 나가사키에 떨어진 거였다. 제대로 자라지 못했거나, 자랐더라도 본래의 제 모습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가끔 알고 놀란다. 내가 만든 음식 속에 에비라 어머니의 서러운 맛이 들어 있다는 것을. 시간이 흘러도 그것은 오래된 때처럼 빠지지 않는다. 맛있기까지 하다.

 

p.225

추위와 외로움을 밤새 견디다 시게하루가 걸었던 길. 어느 날 저녁 문득 그가 궁금해져 내가 걸었던 길. 같은 길이었다. 길 양쪽 끝에는 내가 있었고 시게하루가 있었다. 길은 그와 나를 잇는 선이었다.

어찌하여 그 선이 나타났으며, 그 선은 무엇이었을까. 양쪽 끝에서 조금씩 더듬어 끌어당기면 서로가 만나게 되는선. 어둡고 길고 외롭되 쉽게 사라지지 않는 흔적, 혹은 기억.

 

p.305

동주의 원고를 서둘러 추적하게 된 당초의 이유가, 시인의 유고가 세상에 공개되는 걸 막기 위함이었으니까.

지금도 그 마음은 변함이 없다. 그렇다고 당장 어찌할 수도 없다. 가지고 있다가 내가 죽게 되면 원고는 어떻게 되는 걸까. 내 바람과는 다르게 세상에 알려질지도 모른다. 그것만은 막고 싶다.

원고原稿라고 했지만 실은 원래原來의 고본稿本이 아니기 때문이다. 원고는 없고 번역본만 남았던 것이다. 내가 갖고 있는 유고는 동주가 형사의 강압에 못 이겨 스스로 번역했던 자신의 시였다. 유고 정보를 입수했을 때부터 나는 그것이 조선어 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동주의 시가 아니며 동주의 시여서도 안 된다는 것. 내 변함없는 생각이긴 하나, 전적으로 나 혼자만의 판단이기에 망설일 수밖에 없다.

 

p.339

시란…… 말이 있어야 하고 말은 말의 영토가 있어야 하지. 조선과 조선의 말이 있어야 시도 있는 거잖아. 지금 조선도 말도 다 빼앗기고 있어. 시를 지킨다는 게 말을 지키는 거라면, 말의 영토부터 지켜야겠지. 되찾아야겠지. 꼭.

 

p.341

시란?

그곳이 어디든, 언제든, 무엇을 하든, 시인의 가슴에 거하는 거니까.

 

p.346

죽음을 두려워했다면 내가 유격구에 들어가지 않았을 거라는 거, 동주 너도 잘 알잖아. 나에게 중요한 건,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느냐 있느냐는 거야. 육신의 있고 없음은 나에게 하등 중요치 않아. 그 육신이 무엇을 품고 있느냐가 요긴한 것이지. 나로 인해 네가 위험하질 않길 바랄 뿐이야.

 

 

YES마니아 : 로얄 j*******7 2012.07.16. 신고 공감 1 댓글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