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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의 풍차, 내일이 오면, 천사의 분노, 깊은 밤 깊은 곳에, 거울 속의 이방인, 게임의 여왕, 화려한 혈통, 텔미 유어 드림 등을 연이어 히트시키면서 베스트셀러 작가, 대중 소설의 기린아, 이야기꾼의 최고봉으로 여겨졌던 시드니 셀던. 그 시드니 셀던이 젊은 시절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인해 자살을 시도했었다고 합니다. 수면제와 위스키를 준비해놓고 짧은 생을 끊으려고 했던 시드니 셀던에게 그의 아버지가 다가와선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잖니. 인생이란 원래 소설 같은 거란다. 페이지를 넘기기 전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르는 거야'라고 얘기해줬다고 해요. 그렇게 젊은 시절 좌절의 순간을 넘긴 시드니 셀던은 글쓰기에 매진했고 우리가 아는 바로 그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지요. 위스키와 수면제를 내려놓고 펜과 종이를 움켜쥔 시드니 셀던은 놀랍게도 아흔 살까지 장수(1917~2007)하며 수많은 작품을 써냈답니다. 그렇고 보면 '스릴 만점의 내 인생을 소중히 여기게 해준 아버지에게 가장 감사한다'는 시드니 셀던의 인삿말은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죠.
시드니 셀던은, 에드가 앨런 포우도 스캇 피츠제랄드도 아닙니다. 허먼 멜빌이나 헨리 밀러는 더더욱 아니구요. 그는 통속 작가에요. 영어 원서를 찾아보신 분들은 느낄 수 있겠지만 시드니 셀던 작품의 문장은 위의 작가들의 그것과는 확연히 다릅니다. 더욱 더 많은 독자가 자신의 작품을 읽어줬으면 하는 마음이 전해져올 정도로 쉬운 문장, 평범한 단어들로 이야기를 진행시킵니다. 젊은 날 큰 좌절을 겪었던 시드니 셀던은 천재 작가들이 즐겨쓰는 현학적인 문장 대신 쉬운 문장과 빠른 전개로 독자들을 몰입시킵니다. Rage or Angels란 제목의 이 책 역시 그런 시드니 셀던의 특징이 돋보이는 작품이죠.
사실 8,90년대를 살았던 한국 사람들에겐 천사의 분노란 이 작품과, 비슷한 시기에 인기를 끈 내일이 오면이란 작품은 유난히 좀 더 친근하게 다가올지도 모릅니다. 다름 아닌, 그 시절 드라마 왕국이란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던 MBC에서 이 두 작품을 극화했었기 때문이에요. 1988년에 시드니 셀던 원작 내일이 오면(If Tomorrow Comes)이 '내일이 오면'이란 제목으로 방영되었고 1990년에 천사의 분노(Rage or Angels)가 '사랑의 종말'이란 제목으로 극화되었습니다. 특이한 점은 두 작품의 주인공 트레이스 휘트니와 제니퍼 파커 역을 원미경씨가 맡았다는 것이에요. 김효천 감독의 영화 인간시장에서 장총찬의 여자친구 다혜역을, 변강쇠에선 옹녀 역을 맡기도 했었던 원미경씨는 당차고 활달한 면과 섹시한 면이 동시에 공존하는 배우였었고 그 점이 시드니 셀던 작품 속의 여주인공을 맡기에 딱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사실 원미경씨 하면 1990년, 즉 천사의 분노을 원작으로 하는 드라마 사랑의 종말이 방영되었던 그해 가을에 개봉한,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라는 영화를 필모그래피에서 빼놓을 수 없습니다. 성폭행 위기에 처한 주부가 자신을 덮친 청년의 혀를 깨물어 상해를 입혔고 그로 인해 구속까지 당하게 되는 전후의 과정을 그린 영화였었죠. 법정 장면이 중요하게 나왔던 그 영화처럼 천사의 분노 역시 법정 장면이 작품의 많은 부분을 차지합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천사의 분노 얘길 해볼까요. 풋내기 법조인 제니퍼 파커는 첫 법정 출근의 기쁨에 들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 조직 보스 마이클 모레티의 음모에 빠져 나락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야심만만한 조직 보스 마이클 모레티를 법정에 세운 로버트 디 실바 검사. 실바 검사 역시 만만찮은 야심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라서 마이클 모레티를 구속시킴으로써 정치적인 입지를 다지려고 했었지요. 일촉즉발의 법적 공방이 오갔으나 로버트 디 실바 검사가 내세운 증인 카밀로 스텔라에 의해 무게추가 한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잠시 동안의 휴정 동안 한 남자가 제니퍼 파커에게 다가갑니다. 증인인 카밀로 스텔라에게 전해달라는 검사님의 물건이라면서 봉투 하나를 내민 남자의 말에 어수룩한 제니퍼 파커는 그대로 넘어가고 맙니다. 검사 측의 심부름인줄로만 알고 문제의 봉투를 증인 카밀로 스텔라에게 전한 제니퍼 파커, 하지만 그 봉투 속에는 마이클 모레티의 죄를 입증할 증거 자료가 아닌, 죽은 카나리아가 들어 있었고 카나리아의 시체를 본 카밀로 스텔라는 공포 속에 입을 다물고 맙니다.
그때 그녀가 좀 더 의심을 했더라면, 한 번만 더 따져봤다면, 봉투를 건내준 남자의 신원을 확인했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마이클 모레티는 재판에서 승리했고 유유히 법정을 빠져나갔습니다. 주지사를 노렸던 실바 검사는 정치인으로서의 꿈을 뒤로 미뤘어야만 했었구요. 사실 마이클 모레티 측에서 풋내기 티를 드러낸 여성 법조인 제니퍼 파커를 꼭 집어서 봉투를 전달하게 한 것이었죠. 검사도 남자, 판사도 남자, 변호인도 남자, 피고인도 남자, 증인도 남자, 간수도 남자인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여성인, 그리고 결정적인 실수를 한 제니퍼 파커는 쫒겨나고 맙니다.
변호사였던 아버지, 어머니의 외도로 인해 폐인이 되어버린 그 아버지와 함께 변호사 업무를 보기 원했던 제니퍼 파커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 법조인으로서의 성공을 꿈꾸며 홀로 뉴욕에서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노란 카나리아 사건으로 인해 마피아 연루설이 생겨나게 되었고 이후 법조계에서 일자리를 찾기는커녕 구속을 염려해야 되는 상황에 처하고 말았지요. 허름한 법률 사무소에서 케네스 베일리란 사람과 함께 업무를 보게 된 제니퍼 파커, 하지만 이 케네스 베일리란 변호사도 주류 법조인에서 벗어난 사람이었습니다. 절망과 불안에 떨고 있는 제니퍼 파커에게 손을 내밀어준 케네스 베일리, 친절한 이 남자에겐 큰 상처가 있었습니다. 결혼은 했었지만 남자를 사랑했던 케네스 베일리, 남편과 외간 남자의 동침 장면을 목격한 아내가 그 충격으로 목숨을 끊으면서 케네스 베일리 역시도 주류가 아닌 비주류의 세상에 자신을 가두게 되었더랬습니다.
뉴욕 변두리 가난한 3류 변호사로 전전하며 방세조차 제대로 내기 어려운 상황에 처한 제니퍼 파커에게 자신의 정치적 야심이 가로막힌 것에 앙심을 품은 로버트 드 실바 일행의 마수가 뻗쳐집니다. 마이클 모레티를 감옥에 처넣고 정계 진출을 하려고 했으나 제니퍼 파커의 어이없는 행동으로 인해 제동이 걸려버린 실바 일행은 제니퍼 파커가 마피아 조직이랑 연계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조사를 하게 만들죠. 제니퍼 파커의 변호사 자격증이 유지되느냐 마느냐 하는 중요한 순간, 양심적인 법조인 애덤 워너의 소신 때문에 그녀는 변호사로 계속 활동할 수 있게 됩니다.
자신을 조사하려고 온 애덤 워너에게 무척이나 까칠하게 대했던 제니퍼 파커. 절망과 고독, 그리고 불안감에 사로잡힌 상태에서 굶주리기까지 했던 그녀는 자신에게 카나리아가 든 봉투 사건을 캐묻는 애덤 워너 역시 그녀를 법조인의 세계 변두리로 아니 그 바깥으로 내몰려는 수많은 남자 중의 하나로 보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애덤 워너는 내몰릴 대로 내몰려 히스테릭해져 있는 그녀를 이해하고 물심양면으로 도움까지 줬지요. 출세를 위해선 실바 일행의 편에 서서 제니퍼 파커를 밑바닥으로 내던졌어야 했건만 애덤 워너는 그녀의 손을 붙잡아 다시 일으킵니다. 그리곤 조용히 그녀 곁을 떠나가지요.
변호사 자격증을 유지하게 된 제니퍼 파커는 다른 변호사들이 기피하는 어려운 사건들을 맡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극적인 법정 승리가 이어집니다. 거대 자동차 회사와의 소송에서 승리하고, 헤픈 여자라는 이유로 양육비를 안주려는 남자를 망신주고, 사형이 당연시되는 죄수의 정당방위를 입증하는등 한 편의 법정 소설로도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이어집니다. 때론 가슴뭉클하게 때론 얄밉게 제니퍼 파커는 소송에서 연이어 승리하며 자신이 맡은 의뢰인의 법적 권리를 지켜냅니다. 노란 카나리아 사건으로 인해 법정에 발도 붙이지 못할 정도로 낙인 찍혀버린 풋내기 법조인에서 이젠 뉴욕에서 가장 인기있는 변호사가 되었다고나 할까요. 남성 중심의 법조 사회에서 여성적인 감각과 헌신을 바탕으로 제니퍼 파커가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상전벽해의 인간승리가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시드니 셀던이 대단한 것은 바로 이 부분이에요. 일반적인 통속 소설의 작가들이 남성 중심의 욕망과 남성의 성공신화를 다루면서 여성을 남성 욕망의 대상, 욕정의 도구 정도로만 보고 있다면 시드니 셀던은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여성의 성공과 욕망을 이야기합니다. 그의 소설은 여성 주인공이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출세와 사랑을 위해 한계를 뛰어넘어 질주하는 이야기가 대부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섹시하면서도 당당한 여성, 그런 매력적인 여자 주인공이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시련을 겪고 극복해나가는 과정이 흥미진진하게 그려집니다. 그렇긴 하지만 시드니 셀던은 남성 작가이며 페미니즘에 경도된 사람은 아닙니다. 그의 소설 속 여주인공은 결정적인 순간 남자와의 사랑에 빠져 허우적대기도 하고 기존의 가치관에 휘말려 무너져내리기도 하니까요.
자신이 가장 힘들던 시기에 손을 내밀어줬던 애덤 워너에게 사랑을 느낀 제니퍼 파커. 두 사람은 급격히 사랑에 빠지게 되어 밀어를 나누지만 유부남이자 전도양양한 정치인으로서의 길을 걷는 애덤과, 마피아 연루설까지 있었던 제니퍼 파커와의 인연은 감춰야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애덤의 아이를 낳게 되지만 애덤 워너의 정치적 출세를 위해서 아이의 존재를 숨깁니다. 애덤은 상원의원에 당선되었고 대통령 후보로 언급되기 시작합니다. 애덤이 승승장구할수록 제니퍼 파커는 애덤과 멀어져야만 했습니다.
설상가상 또 한가지 사건이 벌어집니다. 무척이나 끔찍한 사건이었죠. 제니퍼 파커의 아들이자 애덤 워너의 핏줄인 죠수아가 납치된 것입니다. 앙심을 품은 의뢰인 프랭크 잭슨이 그녀의 아들을 납치했습니다. 굉장히 잔인한 인물에 의해 납치가 되었기에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이란 것이 자명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잃은듯한 절망감을 느낀 제니퍼 파커는 자신에게 큰 시련을 줬던, 마피아 조직의 보스인 마이클 모레티에게 전화를 걸어 아들을 찾아줄 것을 부탁합니다. "마이클 모레티씨와 통화하고 싶어요." 그리고 그것은 운명의 전화가 되었습니다.
카나리아 사건 직후부터 제니퍼 파커에게 동정과 호감의 마음을 갖고 있었던 마이클 모레티는 제니퍼 파커의 전화를 받자 냉철하고 잔인한 방법으로 아이를 찾아냅니다. 전력을 다해 납치당한 죠수아를 찾던 마이클 모레티는 자신이 직접 방아쇠를 당겨 납치범 프랭크 잭슨을 사살하고 맙니다. 그리고 이 사건으로 인해 제니퍼 파커와 마이클 모레티는 연인 관계가 되고 말았습니다. 노란 카나리아 사건으로 인해 마피아 보스 마이클 모레티의 끄나풀이 아니냐 의심을 받아 법조계에서 쫒겨날 뻔 했던 그녀가 바로 그 마이클 모레티의 애인이 되어버렸으니 이 얼마나 통속적이면서도 기묘한 운명의 장난입니까.
시드니 셀던의 베스트셀러 천사의 분노를 드라마로 만든 사랑의 종말에선 제니퍼 파커 역은 원미경, 마이클 모레티 역은 이덕화가, 애덤 워너 역은 임채무씨가 맡았습니다. 원작 소설에선 동성애자로 설정되어 있는 케네스 베일리 변호사 캐릭터는 전원일기 일용이로 유명한 박은수씨가 맡았는데 8.90년대의 한국 공중파 드라마 상황에선 동성애 설정은 낯설어서인지 동성애자로서의 성정체성보다는 여자에 무심한 남자 정도로 설명됩니다. 애덤 워너의 아내 역으로는 허윤정씨가, 로버트 드 실바 판사 역은 김병기씨가 맡았는데 김병기씨는 예의 그 날카롭고 매서운 연기력으로 이야기의 한쪽 축을 견고히 지탱합니다.
한 순간의 실수로 인해 모든 것을 잃어버릴 뻔 했던 한 여인의 시련 극복기, 남성 중심의 법조 사회에서 감동적인 법정 드라마를 만들어낸 한 여성 변호사의 이야기가 이어지다가 죠수아의 납치를 기점으로 두 남자와 한 여자 사이의 묘한 삼각관계가 만들어집니다. 흑과 백, 명과 암으로 나눠진 세계의 두 남자를 동시에 사랑하게 된 제니퍼 파커였지요. 아이의 아버지 애덤 워너는 멋진 남자이지만 유부남이면서 정치인입니다. 사랑하기에 애덤 워너와 헤어져야만 하는 그녀 앞에 나타난 또 한 명의 남자 마이클 모레티, 그는 암흑가의 보스이며 잔인한 남자입니다. 게다가 자신의 첫 법정 출근을 엉망으로 만들었던 남자였죠. 평생 저주하면서 살 것만 같았던 남자를 사랑하게 된 제니퍼 파커... 애덤 워너의 천국은 그녀가 다가가기엔 너무 멀고 마이클 모레티의 지옥은 멀리하기엔 너무 달콤합니다.
어쩌면 사랑의 종말이라고 개명(改名)한 드라마 제목이 좀 더 직접적으로 이 이야기의 끝을 축약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영어 원서의 한 부분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For an Instant, Jennifer's mind cleared. Joshua was gone. Adam was gone. Michael was gone. She was alone. In the end, everyone was alone.
법정극과 치정극을 숨가쁘게 오간 시드니 셀던의 이 작품 천사의 분노는 출판 당시 공전의 히트를 치며 세계적인 인기를 모았습니다. 열대야로 지친 이 여름의 당신, 무더위를 잊을만큼 흥미진진한 소설을 원하신다면 그 목록 속에 꼭 넣어야할 작품 중의 하나가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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