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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문명의 창조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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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은 일종의 음모다……현대 생활은 그 거짓을 유지하기 위한, 순종적 대중들의 말없는 계약이다. (존 버컨)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현대문명에서 일찍이 음모와 사기의 기미를 간파했던 사람들은 헨리 데이빗 소로우나 스콧 니어링 말고도 의외로 많다. 영국의 모험소설가이자 정치가였던 존 버컨(John Buchan : 1875~1940)이 어떤 맥락에서 위와 같이 말했는지는 잘 모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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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은 일종의 음모다……현대 생활은 그 거짓을 유지하기 위한, 순종적 대중들의 말없는 계약이다. (존 버컨)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현대문명에서 일찍이 음모와 사기의 기미를 간파했던 사람들은 헨리 데이빗 소로우나 스콧 니어링 말고도 의외로 많다. 영국의 모험소설가이자 정치가였던 존 버컨(John Buchan : 1875~1940)이 어떤 맥락에서 위와 같이 말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역시 현대문명이 은밀하게 감추고 있는 위험한 음모와 그 사기극에 말없이 가담하기로 동의한 현대인들의 비겁한 위선에 주목한 것임은 틀림없어 보인다.

 

현대문명이 음모이며 사기인 까닭은 명백하다. 지난 2~3세기 동안 과학기술혁명을 주요 동력으로 삼아 눈부신 발전을 이룩한 현대문명이지만, 우리가 지구라는 이 작은 행성을 그 터전으로 삼을 수밖에 없는 한, 유한한 자연 자원의 한계 때문에 그러한 발전을 영원히 지속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점점 가속화되고 있는 현대문명의 발전 속도를 계속 고집한다면, 그건 미래 세대가 누려야 할 자연 자원을 빼앗아 미리 써버리는 지극히 파렴치한 짓이 될 것이다.

 

문제는 파렴치한 행위가 대개 그렇듯이, 유한한 자연 자원과 우리의 후손들이 누려야 할 미래를 한없이 약탈함으로써만 겨우 유지되는 이 위태로운 사기극도 언젠가는 그 비극적인 최후를 보게 마련이라는 사실이다. 현대문명이 지구가 재생할 수 있는 속도보다도 더 빠른 속도로 자연을 약탈함으로써 우리 삶의 터전마저도 파괴하는 지경에까지 이른다면, 결국 우리들 자신이 패자가 되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아니 단순히 패자가 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어쩌면 인류라는 종 자체의 절멸로 이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희망이 있는가?

지금부터 이십 년이나 삼십 년쯤 후에 이 세상에 살아남아 있기를 바라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 것인가? (13)

 

1991 11, 영남대 영문학과 교수였던 문학평론가 김종철 선생이 우리나라 최초의 격월간 생태 전문지녹색평론을 창간하는 글의 첫머리에서 이렇게 암울한 질문들을 먼저 던졌던 것은 바로 그런 절박한 마음에서였을 것이다. 당시 낙동강 페놀 오염사건 등 인간생존의 생물학적, 사회적 기초가 심각하게 위협받는 상황을 몸소 겪으면서, 뛰어난 지성을 지니고 있다는 인간이 만들어 놓은 산업기술문명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집단자살체제가 그 통제력을 잃어버리고 마침내 작동하게 될 순간이 머지않아 곧 닥칠지도 모른다고 그는 크게 우려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20년 가까이 흐른 지금, 다행스럽게도 그가 염려했던 파국은 벌어지지 않았고 여전히 우리는 현대문명이 가져다 주는 편리함과 안락함을 누리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의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도 편치 못하다. 정보통신기술의 놀라운 발전에 힘입어 이제는 누구나 쉽게 실시간으로 접하게 되는 우울한 소식들은 우리의 마음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기에 충분하다. 지구온난화, 해수면 상승, 오존층 파괴, 이상기후, 열대우림 파괴 등 심각한 생태계 위기뿐만 아니라 911 테러, 미국의 아프간 침공, 이라크 전쟁,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끝없는 분쟁, 대도시들에서 벌어지는 유혈 폭동과 전투적 시위, 기아로 죽어가는 아프리카 난민 등 세계 곳곳에서 매일 벌어지고 있는 폭력적이고도 비인간적인 상황을 생생하게 전하는 뉴스로부터 우리는 한시라도 자유로울 수 없는 세상에 살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거의 동시에 발생하고 있는 이러한 전지구적 생태계 위기와 인간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폭력적이고도 비인간적인 상황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이 책 『간디의 물레』에서 김종철 선생이 놀라운 통찰력으로 들려주고 있는 진단에 따르면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 둘은 따로 각자 서 있는 나무 두 그루가 아니라 한 나무에서 뻗어나간 두 개의 가지인 것이다. 그 나무의 뿌리는 하나일 수밖에 없다. 자연세계와 인간을 절연된 것으로 파악하는 이분법적이며 기계론적인 세계관에 기초한 현대문명, 그래서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는 자연에 대한 끊임없는 공격과 약탈과 착취가 정당하다고 여기고 있는 서구 산업기술 문명이 바로 그 뿌리다.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전대미문의 이 생태학적 재난은 결국 인간이 진보와 발전의 이름 밑에서 이룩해온 이른바 문명, 그 중에서도 특히 서구적 산업문명에 내재한 논리의 필연적인 결과로서의 사회적, 인간적, 자연적 위기라는 사실을 명확히 인식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사람이 이 세상에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 지구상에서 사람이 삶을 영위하는 올바른 방식은 과연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근본적으로 성찰할 것을 요구하는 진실로 심오한 철학적 종교적 문제에 직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15)

 

따라서 그는 오늘날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생태계 위기를, 앞으로 경제성장이 제약될 수밖에 없다는 의미에서의 경제적 측면뿐만 아니라 사회적ㆍ도덕적ㆍ철학적 측면에 모두 관련되는 삶의 총체적인 위기로 받아들일 것을 제안한다. 이처럼 자연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 더 나아가 각 개인의 자기자신에 대한 관계와 근본적으로 일치하는 문제로 본다는 점에서 『간디의 물레』는 생태계 위기에 대한 우리의 안이하고 협소한 인식을 전환할 것을 강력하게 촉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생태계 위기에 맞서 몸소 실천할 수 있는 윤리적 대안까지도 생각해보도록 자극한다.

 

우선 경제적 측면에서 보자면, 그는 자본주의 체제는 말할 것도 없고 사회주의 체제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사회주의 역시 물질적 생산력을 계속적으로 높이는 것을 진보의 전제로 보고 있다는 점에서 자본주의의 관점과 다를 바 없으며, 그런 세계관이 지배적인 경제체제에서는 정도를 넘어서는 자연에 대한 약탈과 착취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에 있어서 최대의 프롤레타리아는 농민도, 노동자도, 사회적 약자도 아닌 바로 자연이라고 그는 단언한다.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그건 농업이다. 날로 악화되어 가는 생태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농업만이 살 길이라는 것이 그의 분명하고도 단호한 대답이다. 미국의 유명한 문명비평가 루이스 멈포드의 말처럼, 인구의 70~80퍼센트가 농업에 종사하는 경제구조를 가진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지금도 우리에게 끊임없이 지혜를 제공해주는 인류 최선의 문화전통이 신석기시대에 시작된 농업문화에서 나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농업이 중심이 되는 삶에서만 인간은 사계절의 리듬에 순응하면서 자연과 더불어 건강한 삶을 꾸려나갈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는 것이 그 이유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지난 시절, 농업보다는 공업을 더 중시하는 개발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개발독재권력에 의해서 우리의 농촌은 너무나 황폐해져서 이젠 거의 붕괴 직전이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촌의 황폐화와 붕괴라는 심각한 사회ㆍ경제적 위기에 대해서 많은 이들이, 심지어는 제법 양심적이라는 지식인들조차도 별다른 관심과 비판을 제기하지 않고 있음을 그는 몹시 아쉬워하고 있다. 그가 그런 아쉬움을 표명한 때로부터 거의 20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사정은 그리 많이 나아진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대운하 개발, 4대강 개발 사업 등을 무리하게 추진하고 있는 현정권의 작태를 보건대, 개발 이데올로기는 아직도 많은 이들의 머리 속에 너무나 뿌리 깊이 박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개발이라는 개념은 본래 2차 세계대전 후에 미국이 세계에 대한 지배권을 본격적으로 행사하기 시작하면서 생겨난 것인데, 해리 트루만의 대통령 취임연설 속에서 세계의 대부분의 지역이 저개발 지역으로 규정되었던 것이다. 이제부터는 세계의 모든 민족, 모든 지역이 단 한가지 목표, 즉 구미식의 산업적 생활방식이라는 단일한 문화를 추구해야 한다는 새로운 세계관이 국제정치를 규정하게 되었다. 그것을 위해서 비서구사회는 제각기 다른 문화전통과 토양과 자연조건에 상관없이 무차별적으로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체제를 받아들일 것을 강요당했다. 이른바 문명의 척도는 산업적 생활수준에 따라 측정되는 것이 일반적으로 되는 세계가 된 것이다. 이러한 추세는 물론 과거 식민주의의 지배 밑에서 광범위하게 준비되어왔던 것이지만, 이제는 단순한 군사적 힘의 지배가 아니라 산업경제의 규모라는 새로운 척도를 가지고 각 민족사회를 평가하는 관행이 시작됨으로써 외부로부터의 압력보다도 사회 내부로부터 저개발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상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강한 욕망이 사회발전의 추진력으로 작용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서구식 교육을 남들보다 앞서서 받을 기회가 제공된 것에 의해서 자기 사회의 지배층에 용이하게 편입될 수 있었던 엘리트들은 그들 자신의 사회적 성공을 유지하게 해주는 개발 이데올로기에 강하게 집착해왔고, 어느새 그것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그들의 사고와 행동을 원천적으로 규정하는 거의 움직일 수 없는 신앙이 되었다. (72~73)

 

이것이 바로 개발 이데올로기의 숨겨진 진실이다. 모든 이데올로기들이 대개 그렇듯이, 개발이라는 잘 포장된 이데올로기 역시 남보다 앞서고 남 위에 군림하고자 하는 권력지향적인 욕망의 소산인 것이다. 요즘 흔히들 말하는 지속가능한 개발이라는 구호 역시 자연 위에 군림하는 인간이라는 인간 중심주의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생태계 위기를 극복하는 대안이 되지 못한다. 자연을 인간의 편리를 위하여 개발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인간도 그 자연의 일부로서 함께 살아가야 하는 공존의 대상으로 여길 때 비로소 참다운 대안이 탄생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권력지향적인 욕망이 인간 사회에서 작용하게 될 때, 그건 경쟁 이데올로기가 된다. 오늘날 우리가 우리의 에너지를 온통 소득과 소비의 경쟁 속에 쏟아 붓는 지극히 소모적이고도 낭비적인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러한 경쟁 이데올로기가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로 인해서 이제 대세가 되어 버린 자본주의적 시장경제 체제의 핵심 이데올로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쟁 이데올로기가 위험한 정도는 개발 이데올로기 못지 않다. 비록 정정당당한 경쟁을 통하여 성취한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누리는 풍요로운 생활의 뒤에는 다른 이들의 굶주림과 고통이 있다는 사실이 감춰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종철 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이 세상에서 합법화될 수 있는 유일한 경쟁은 진리를 위한 경쟁이다. 물질적 권력의 확대를 위한 모든 경쟁은 인간과 자연과 세계의 황폐화를 가져오는 데 기여할 뿐이다. 이것은 인간 역사와 오늘날의 생태적 위기가 증명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지금 인간생존의 지속가능성 자체를 불투명하게 만드는 이 기막힌 생태적 위기에 관해 말한다면, 이것은 끊임없이 배타적인 권력을 경쟁적으로 추구해온 정복인간에 근원적인 뿌리가 닿아있다고 할 수 있다. 배타적인 권력의 확대를 통해서 인간은 행복해지고 자유로워질 수 있는가? 이런 근원적인 물음과 함께, 그러면 경쟁에서 패배하는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라고 우리는 물어야 한다. 이것은 인간의 존엄성에 아직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회피할 수 없는 질문일 것이다. (259)

 

이처럼 생태적 위기는 우리의 일상적 삶의 방식 및 자세와도 긴밀히 연관되어 있는 윤리적이면서도 도덕적인 차원의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이러한 차원까지도 올바르게 인식하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개인적인 수준에서도 전지구적 생태적 위기를 극복해 나갈 수 있는 실천적 역량을 도모할 수 있게 될 것이다. , 자기중심적인 고립 속에서 무한 경쟁을 통하여 자신만의 물질적 풍요를 달성하려는 살벌한 도시적 생존방식에서 벗어나 서로 협동과 연대를 통하여 더불어 함께 누리는 공존의 삶을 도모하는 농촌 공동체적 생존방식으로 전환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김종철 선생은 여기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 오늘날의 생태계 위기를 철학적인 차원으로까지 확대해서 사색하고 있는데, 그건 바로 생태적 세계관의 확립과 확산을 통한 진정한 해결책의 모색이다. “풍요로운 삶이란 새 한 마리까지 함께 이웃하며 살아가는 것이지 인간들끼리만 먹고 마시고 즐기는 건 더럽고 부끄러운 삶이라는 아동문학가 권정생 선생의 말처럼, 그가 말하고 있는 생태적 세계관이란 이 지구상의 뭇 생명들과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삶을 지향하는 철학이다.

 

그런 삶을 살아가려면, 우리가 누리는 물질적 부는 다른 생명체들과의 공생의 질서를 어지럽히지 않는 한도 내에서만, 즉 자연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그건 지금 우리가 일상적으로 누리고 있는 부의 기준으로 보자면 너무나 초라한 가난한 수준이 되겠지만, 그것이 옳다고 믿는 사람이라면 그러한 가난을 기꺼이 선택할 것이다. 그때 그 가난은 강요된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선택된 가난이기에 우리는 더없이 기쁘고 행복할 수 있다. 모두와 더불어, 그리고 다른 생명들과 더불어서 말이다. 일찍이 간디는 지구는 인간의 기본필요를 위해서는 풍족한 곳이지만, 인간의 탐욕 앞에서는 지극히 척박한 곳이라고 말하였는데, 이것은 바로 생태적 세계관이 지향하는 자발적 가난이 불가능한 꿈이 아님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자연에 대한 끝없는 약탈과 사회 구성원들 간의 무한 경쟁에 의해서 비로소 유지되고 있는 오늘날의 현대문명, 즉 서구 산업기술 문명은 그 시효가 얼마 남지 않았다. 이제 우리는 인류의 절멸이냐 아니면 새로운 문명의 창조냐 하는 갈림길 앞에 서 있다. 한국 사회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몇 안 되는 근본주의자 김종철 선생이 쓰고 말한 기록들을 모아 놓은 『간디의 물레』는, 그 갈림길 앞에서 우리가 올바른 선택을 하기 위해서 읽어야 할 몇 권의 책들 중 하나가 되기에 충분하다. 뜻있는 자라면 누구나 새로운 문명의 창조로 이어지는 길을 선택하고자 하겠지만, 그게 그렇게 쉽지가 않은 일이라는 사실도 이 책을 읽는 동안 깨닫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새로운 문명의 창조로 향하는 길을 가리키는 표지판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적혀 있기 때문이다.

 

참다운 문명이란 자발적 포기의 기술이다. (마하트마 간디)

c*****t 2010.05.12. 신고 공감 2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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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가난해지며 깊어지는 삶...
"스스로 가난해지며 깊어지는 삶..." 내용보기
'우리에게 희망이 있는가?' 다소 당혹스럽고 암울함을 가슴속에 던져준 화두였다. 스스로도 물질문명에 영합하지 않고 느리게 그리고 무소유의 삶을 하나의 미덕처럼 여기고 있어왔던 터이지만 말문이 터억 막힘은 어찌할 수 없음에서 연유한 것일테다. 더이상 멍하니 손을 놓고 두고만 볼 수 없는 심각한 상황속에서도, 그저 편리하다는 맹목적 욕구 하나만으로 근시안적인 변명만을 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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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희망이 있는가?' 다소 당혹스럽고 암울함을 가슴속에 던져준 화두였다. 스스로도 물질문명에 영합하지 않고 느리게 그리고 무소유의 삶을 하나의 미덕처럼 여기고 있어왔던 터이지만 말문이 터억 막힘은 어찌할 수 없음에서 연유한 것일테다. 더이상 멍하니 손을 놓고 두고만 볼 수 없는 심각한 상황속에서도, 그저 편리하다는 맹목적 욕구 하나만으로 근시안적인 변명만을 늘어놓았던 것은 아닌지, 그동안 누려왔던 물질적 풍요속에서 얼만큼의 행복을 느껴왔던가 하고 자문케된다. 성장과 발전의 논리 속에 철저히 편리와 부귀를 쫓는 일에 혈안이 되어 한순간 까마득히 잊어버렸던, 그렇지만 아직도 우리들 가슴 깊숙이 어딘가에 묻혀있는 순수함과 인간애, 우주만물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고이 펼쳐보이는 일이야말로 진실로 아름다움과 풍요로움 그 자체임을 깨닫는 작고 소중한 계제가 되었다. 모두가 함께 살아가기위해, 허물어졌던 삶의 틀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만물이 하나임을 인식하는 감수성이 절실하다. 스스로 가난해 지기를 선뜻 택할 수 있는 마음만 있다면... 환경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단순한 과학기술의 논리로서가 아닌 작은 것 하나하나에도 온 생명과 우주가 깃들여 있음과 나 또, 나 스스로를 돌아보고 남을 배려하며 모두가 하나라는 작은 인식과 실천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이토록 단순한 논리속에 진리가 번뜩이고 있음에 다시금 미소를 머금어 본다. 不敢爲天下先

[인상깊은구절]
오늘날 우리 시대의 근본적 비극은 모든 존재가 타자에 대하여 필수적인 존재라는 것, 상호간의 의존과 희생없이는 처음부터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점에 대한 인식이 거의 철저히 죽어버린 문화속에서 우리의 삶이 영위되고 있다는 사실에 있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밥이 얼마나 큰 사랑과 희생의 선물인지를 기억하는 것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드는 병든 문명을 인류진화의 높은 성과인 양 착각하고 있는 어리석음속에 매몰되어 있다.
m*****r 2002.08.14.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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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이 없는 세상을 꿈꾸며...
"폭력이 없는 세상을 꿈꾸며..." 내용보기
저자를 알게 된 것은 녹색평론을 소개하는 글에서 알게되었다. 이 책은 그 동안 저자가 여러 곳에 기고 했거나 발표했던 글을 모아 놓은 것이다. 다소 겹치는 부분이 있지만 저자는 일관되게 생태학과 정치,경제 등 사회와의 문제를 주장해나간다. 솔직히 관심이 별로 없던 내게는 그의 주장이 꿈 같은 이야기이지만 결국에는 그렇게 되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환경문제를 다루는 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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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를 알게 된 것은 녹색평론을 소개하는 글에서 알게되었다. 이 책은 그 동안 저자가 여러 곳에 기고 했거나 발표했던 글을 모아 놓은 것이다. 다소 겹치는 부분이 있지만 저자는 일관되게 생태학과 정치,경제 등 사회와의 문제를 주장해나간다. 솔직히 관심이 별로 없던 내게는 그의 주장이 꿈 같은 이야기이지만 결국에는 그렇게 되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환경문제를 다루는 언론이나 정부 기관에 대한 잘못된 접근을 지적하는 부분이나 그가 주장하는, 언제가는 그렇게 되어야 마땅할 생태학적 세상은 기억에 오래 남게 되었다. 산업사회의 피 말리는 경쟁과 생산은 폭력을 동반하지 않고는 나아갈 수 없는 것이다. 그 동안 자연은 이 폭력을 견디고 있지만 언제가는 한계가 올 것이다. 자연과의 대결구도가 아닌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말은 얼핏 당연한 소리 같지만 산업사회에서 속한 우리들은 시나브로 이런 당연한 진리를 잊고 정복해야 할 대상으로만 보고 그것에 폭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자동차의 증가를 아무 꺼리낌없이 바라보고, 골프에 열광하는 모습등의 심각함을 언론은 전혀 다른 관점으로 보여주는 것을 우리는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책읽기의 즐거움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전혀 관심이 없던 분야가 실은 나의 삶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는 것을 느끼고 내 자신이 조금씩 변해야 된다는 것을 알게 해 주는 그런것 말이다.

[인상깊은구절]
간디에게 있어서, 물레는 그러한 공동체의 건설에 필요한 인간심성의 교육에 알맞은 수단이기도 했다. 물레질과 같은 단순하지만 생산적인 작업의 경험은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분리 위에 기초하는 모든 불평등사상의 문화적, 심리적 토대의 소멸에 기여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자기 먹을 빵을 손수 마련해 먹는 창조적 노동'에의 참여와 거기서 얻는 기쁨은 소박한 삶의 가치를 진정으로 긍정할 수 있게 하는 토대를 제공해 줄 것이다라고 간디는 생각하였다.
k*****g 2001.08.15.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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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우리의 어여쁜 누이에게 무슨 짓을 저질렀는가?
"그들이 우리의 어여쁜 누이에게 무슨 짓을 저질렀는가?" 내용보기
간디의 물레 그들이 지구에게 무슨 짓을 하였는가? 그들이 우리의 어여쁜 누이에게 무슨 짓을 저질렀는가? 약탈과 파괴, 그리고 그녀를 찢고 재갈을 물려 동이 틀 무렵 그녀를 칼로 찔렀다. 그리고 울타리에 그녀를 묶고 질질 끌었다. The Doors, Strange Days (1) 苦•潗: What Happened to the Human Race? [간디의 물레]는 서구문명의 근본을 파헤침과 동시에, 저자 자
"그들이 우리의 어여쁜 누이에게 무슨 짓을 저질렀는가?" 내용보기
간디의 물레 그들이 지구에게 무슨 짓을 하였는가? 그들이 우리의 어여쁜 누이에게 무슨 짓을 저질렀는가? 약탈과 파괴, 그리고 그녀를 찢고 재갈을 물려 동이 틀 무렵 그녀를 칼로 찔렀다. 그리고 울타리에 그녀를 묶고 질질 끌었다. The Doors, Strange Days (1) 苦•潗: What Happened to the Human Race? [간디의 물레]는 서구문명의 근본을 파헤침과 동시에, 저자 자신의 표현대로, 우리에게 단순한 지적 차원의 동의가 아닌 ‘전면적 개종’(holistic conversion)을 요구한다. [간디의 물레]에 의하면, 생태학적 재난의 사상적, 철학적 원인은 바로 서구적 자연관이다. 데카르트와 뉴턴의 철학은 자연을 기계론적으로 파악했으며, 프란시스 베이컨은 자연을 ‘조작과 착취와 고문’의 대상으로 보았다. 마틴 부버의 표현을 빌자면, 인간과 자연의 관계는 ‘나와 너(I-You)’라는 인격적 관계가 아닌 ‘나와 너’(I-It)의 관계가 되었다. 나와 그것의 세계에서는 내가 주관한다. 내가 분석하고 해부한다. 내가 자연으로 하여금 내가 내는 질문에 대답하도록 강요한다. 내가 최고의 자리에 있다. 과학에서의 실험이 바로 이런 종류의 것으로서, 하이데거가 말한 바 계량적 사고(calculative thinking)가 지배하는 영역이다. 인간과 자연을 이분법적으로 보고 자연을 대상화, 수단화 시키는 과정 속에서 인간은 자연의 주인이 되어 자연의 순수성을 추출해 내어 그곳에 인간의 인위성을 집어넣기 시작하였다. 오늘날 우리가 추종해 마지않는 테크놀로지는 바로 이러한 착취적 자연관에서 나온 것이며, 그것은 당연하게도 자연과 양립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18세기 후반 산업혁명 이후 지수함수적으로 증가한 테크놀로지의 발전속도는 자연의 훼손속도와 정비례하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러나 이미 이 시대의 우상이 된 테크놀로지는 마치 자기치유적인 것처럼 떠받들여져, 자신이 만든 상처를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것으로 격상되었다. 더욱 발전된 테크놀로지가 현재의 생태학적 재난을 해결해 줄 수 있다는 기술주의적 치유론이 최상의 방법론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기술주의적 사고방식에는 산업문명에 안주하고픈 심리와 테크놀로지에 대한 맹신이 깔려 있다. 이미 테크놀로지의 결정체들은 인간과 일부가 되어 버렸고(셀룰라 폰과 당신은 이미 하나가 아닌가!), 인간은 이미 그것들로부터 떨어질 수 없을 정도로 밀착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테크놀로지가 우리을 더욱 편안한 삶으로 인도할 것으로 생각하며, 궁극적으로는 단어 그대로 테크노피아가 다가올 것으로 꿈꾸고 있다. 사실 모든 미래영화들은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그리고 있지만, 현실에서는 ‘당신의 손 끝에 정보를’이라는 마이크로 소프트의 슬로건이 훨씬 설득력을 지닌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는 어떤 문제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 다만 발등의 불을 겨우 끌 수 있을 뿐이다. 인간이 거대한 집단자살체제인 산업문명을 계속 고수하려 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김종철님의 심정에 동감한다. 테렐비전과 온갖 광고는 모든 상상력을 동원하여 장미빛 미래를 제시하지만, 가장 상상력이 풍부한 영화감독들은 암울한 미래의 모습만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에게는 근본적인 태도의 변화가 필요하다. 서두에도 말했듯이, 그것은 부분적 변화가 아니라 전면적 개종이다. (2) 滅•道: How Should We Then Live? 나는 성경이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볼 것을 가르쳤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린 화이트(Lynn White) 2세가 그의 논문 [생태계 위기의 역사적 뿌리들](The Historical Roots of Our Ecologic Crisis)에서 지적한 중세 이래 계속된 기독교인들의 자연에 대한 오만한 발상에 대해서 한 사람의 기독교인으로서 마음 깊이 숙고하고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갖고 있는 과학과 테크놀로지는 자연을 오만하게 대하는 정통기독교에 너무나 물들어 있기 때문에, 그런 과학과 테크놀로지만으로는 우리의 생태계의 위기를 전혀 해결할 수 없다. 우리가 겪고 있는 문제의 뿌리는 너무나 종교적인 것이므로, 그 치료책 역시 본질적으로 종교적인 것이어야 한다. 우리가 그것을 무엇이라고 부르든지간에 말이다. 우리는 자연과 운명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고 신중히 고찰해보아야 한다.” 린 화이트 또한 우리에게 전면적 개종을 요구하고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것들을 포함하고 있을 것이다. 전면적 개종은 우선 자연관의 변화에서부터 출발한다. 이를 위해서는 인디언의 지혜가 필요하다. 인디언들은 땅을 개발이나 투기의 대상이 아니라 삶의 터전이요 생명의 어머니로 보았고, 인간과 자연이 근본적으로 하나인 유기체적 존재로 보았다. 인간이 자신과 자연을 하나로 볼 때 우리는 더 이상 자연을 수단화시키는 정복자적 교만함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토착사회-문명사회의 이분법적 구분에 따른 가치판단을 버려야 한다. 서양철학에 경도되어 있는 사람은 인간과 자연을 유기체적 관점에서 보는 것 자체를 미성숙한 분간력을 지닌 열등한 사고로 취급할 것이다. 하지만 레비 브륄이나 레비스트로스 같은 인류학자들의 저작에서 나타나는 주장처럼 토착사회적 사고와 문명사회적 사고의 우열을 나누는 것은 불가능할 뿐더러, 우리가 토착사회의 자연관에 귀 기울여야 하는 더 큰 이유는 현재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이 문제들은 우리의 지배이데올로기와는 다른 차원의 사고 즉 인간과 자연을 하나의 존재로 보는 사고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또한 농업문화의 창조적 복구가 필요하다. 농업문화는 곧 흙의 문화이자 비폭력의 문화이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인류가 농업, 공업, 정보화의 순서로 진보한다고 배웠기 때문에 당연히 농업은 가장 비천하고 열등한 문화로 여겨왔다. 그래서 우리의 농담에는 ‘농대생’이니 ‘농부의 아들’이니 하는 지극히 도시중심적인 농업문화 폄하적인 말들이 존재한다. 말할 필요도 없이 이러한 지식과 문화는 서구의 순진한 진보사관에 의해 형성된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땅을 가까이 하는 농업문화의 재건을 통해 자연과 하나되는 일상을 경험해야 한다. 자연과의 일체감은 땅을 가까이함을 통해서 가능하기 때문이다. 생태학적 재난을 극복하기 위한 이 모든 변화의 근본에는 공생적, 생태학적 감수성이 존재한다. 이것은 시인의 마음이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나와 그것’의 관계로 보는 것이 계량적 사고로 무장한 과학자의 태도라면, 그것을 ‘나와 너’라는 인격적 관계로 보는 것은 바로 명상적 사유(meditative thinking)로 옷 입은 시인의 마음이다. 누군가를 때리지 않기 위해서 거창한 윤리학을 생각할 필요는 없다. 맞는 사람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여기는 내면의 감수성으로 충분하다. 프레온가스가 자연에 유해하다는 사실은 이미 그것이 상용화된 다음에 밝혀진 일이지만, 문제는 우리가 호흡하는 공기 속에 분해불가능한 가스를 집어넣을 수 있다는 사실에 아무런 반감도 느끼진 않았던 그 감수성이다. 자연의 죽어감을 나의 죽어감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무뎌진 감수성, 그것이 우리의 태도를 결정짓는다. 바퀴벌레와 쓰레기에 대한 명상 요즘 바퀴벌레가 부화하는 시기인지 매일 저녁에 아주 작은 바퀴벌레를 두 세 마리씩 보게 된다. 물론 가끔은 새끼를 따라 나온 어미도 보게 된다. 작은 것들은 휴지로 누를 때 아무런 느낌이 없기 때문에 무참히 죽이곤 하지만, 큰 것들은 그 촉감을 참을 수 없어 도저히 죽일 엄두를 내지 못하고 멀찌감치 떨어져 그 놈의 거동을 바라보기만 한다. 그럴 때마다 드는 생각은 ‘저 놈도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일 텐데, 내가 꼭 저 놈을 죽여야 하는 것일까? 나의 이런 행동도 결국 인간중심적인 자연관에서 나온 것은 아닐까?’하는 것이다. 솔직히 나는 결론을 내리지 못하겠다. 인도의 자이나교도들은 한여름에 혹 입 속으로 들어가 죽는 벌레가 없게 하기위해 마스크를 쓰고 다니고 밟혀 죽는 벌레를 최소화 하기 위해 외출도 삼간다고 하는데 나에겐 아직 그럴 만한 용기는 없는 듯 하다. 하지만 쓰레기에 대한 생각은 충분히 실천으로 옮길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개인의 영역에서의 생태학적 실천은 결국 쓰레기의 감소로 귀결되는 것 같다. 여기서의 쓰레기는 일상적 의미의 쓰레기 뿐만 아니라 인간의 배설물, 교통수단의 매연 등을 모두 포함한다. 나는 물병에 물을 담아 먹음으로써 음료수의 소비를 통한 캔의 쓰레기화를 줄일 수 있으며, 필요한 만큼만 먹음으로써 적게 배설할 수 있고, 가까운 거리는 걸어다니거나 자전거를 이용하고 먼 거리는 되도록 대중교통을 이용함으로써 연료의 쓰레기화를 막을 수 있다. 김종철님은 결국 개개인의 자기쇄신이 중요하다고 말했고, 마더 테레사는 자신은 항상 대중이 아닌 한 사람을 구원코자 한다는 시를 지었다. 나 또한 이들처럼 개인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내가 처한 삶의 현장에서 생태학적 감수성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작은 것부터 실천하려한다.
s******r 2005.03.23.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너무나 훌륭한 책, 너무나 초라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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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1999년에 발행되었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그 이전에 저자가 발행하는 이란 잡지에 실렸던 글들이다. 잡지에 실려서 잠깐잠깐 편하게 읽을 수 있는 글 34개로 구성되어 있다. 분량은 짧게짧게 되어있지만 담긴 내용은 너무나 거대하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하는가를 아주 구체적으로 설득하고 있다. 이 책은 환경 서적이다. 벌써 뻔한 내용일 것같은 생각이 든다. 그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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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1999년에 발행되었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그 이전에 저자가 발행하는 <녹색평론>이란 잡지에 실렸던 글들이다. 잡지에 실려서 잠깐잠깐 편하게 읽을 수 있는 글 34개로 구성되어 있다. 분량은 짧게짧게 되어있지만 담긴 내용은 너무나 거대하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하는가를 아주 구체적으로 설득하고 있다. 이 책은 환경 서적이다. 벌써 뻔한 내용일 것같은 생각이 든다. 그러나 하나씩 읽어가면 너무나 재미있고 놀랍다. 대략적으로 알았거나 어렴풋이 알았던 환경에 대한 내용을 정확하고, 쉽고, 재미있게 이야기한다. 이렇게 살지 않으면 우리 인류가 생존할 수 없다고 경고한다. 이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은 거대 담론이다. 현재 우리 인류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 분배, 평등, 산업, 세계화, 문화, 종교, 환경, 철학, 교육 거의 모든 분야를 거론하고 아주 구체적으로 바람직한 방향을 제시한다. 어떤 글은 10여년 전에 씌여졌는데도 조금도 시간이 흘렀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아니 앞으로 10년이 더 흘러도 이 책의 내용은 결코 퇴색되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은 국민 교과서로 채택되어야 한다. 물론 이 책의 <간디의 물레="">라는 단편이 현재 고등학교 학생들이 배우고 있는 7차 교육과정 고등학교 1학년 국어 (하) 교과서에 실려 있다. 정말 우리 나라 청소년들이면 반드시 읽어야할 내용이다. 장래에 어떠한 일을 하며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가장 훌륭하게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국민 모두가 다 알아야야만 할 내용이다. 그래서일까? 종이는 재생지이고 가장 질이 안좋은 갱지다. 너무나 초라하다. 왜 이렇게 만들었는가를 이 책을 읽고 나면 이해하게 된다. 수 십 년 전에 발행한 책을 다시 재판을 찍으며 양장본으로 고가로 팔고 있는 책들을 부끄럽게 한다. 학술 서적이면 성격상 견고해야 하고 종이 질도 좋아야 하겠지만 대중적인 내용을 담고 있으면서 그래야할 필요는 없다. 책마저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가를 보여준다. 아니 이 책처럼 우리도 모두 초라하게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다. 실제로 저자는 이 책에서 모두가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보잘 것 없이 살아가는 삶. 일찍이 슈마허가 <작은 것이="" 아름답다="">고 했지만 유럽적 사고로 피부에 와 닿지 않던 내용도 조금씩 있었다. 그런데 이 책은 우리 이야기를 한다. 아니 보잘 것 없이 살아가지만 위대한 삶을 살아갔던 노자, 간디, 인도 사람들, 그리고 인디언들의 삶을 이야기 한다. 그리고 우리 조상들이 왜 그토록 과학 문명이 발달했는데도 농사일을 장려했는지 그 이유를 제시한다. 어쩌면 우리 조상들은 기계 문명의 해를 미리 내다 본 것은 아닐까? 더운 열기를 뿜어내는 것을 화기라하여 가장 조심하게 취급한 점만 보더라도 그렇다. 엄청난 살상 무기를 가지고 있었지만 오직 적이 침략해 올 때인 전쟁 중에만 사용하지 않았는가? 어쩌면 모든 사물에 신(神, God)적 지위를 부여하여 사물 하나에도 저어하고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에 경외감을 가졌던 우리 조상들의 전통 종교는 그래서 더 위대한 게 아닐까? 위기의 인류에게 해법은 있는가? 이 책은 바로 그 해법을 제시한다. 저자는 우리 전통 문화 속에서도 그러한 해법은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일제 강점에 의해 끊기고 사라져가는 우리의 소중한 전통 문화를 되살려야하는 당위성도 제시된다. 놀랍고 소중한 책이다.

[인상깊은구절]
우리에게 희망이 있는가? 지금부터 이십년이나 삼십년쯤 후에 이 세상에 살아남아 있기를 바라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 것인가?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인간성과 이웃과 자연세계에 폭력을 가하지 않고는 하루도 살아가기 어려운 체제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재작년에 어느 도교육위원회가 발표한 문제교사 식별법 10가지에는 "남들보다 열심히 가르치는 교사", "돈봉투를 거부하는 교사", "애정을 갖고 학생들과 대화를 유난히 많이 하는 교사"들이 끼어 있었으니...... 산업화를 통해서 가장 뼈아픈 경험은 토착문화의 상실일 것이다. 어느 지역, 어느 민족에 있어서도 토착문화는 공생과 조화의 예지에 충만한 문화였다.
s******n 2004.05.20.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