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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의 작중인물들은 대개 알 수 없는 미스터리와 함께 혼란과 고독에 유폐된다. 인생에서 상실의 경험을 겪은 채 외톨이로 남겨져 어둠의 가장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다가, 이윽고 고독과 상실을 넘어서는 모험에 나선다. ‘하루키 월드’는 고독과 상실의 세계이고, 그런 세계 속에서 구원을 모색하는 모험의 세계다. 그런 ‘하루키 월드’라는 게 정말 있다면 나는 그런 세계의 입장권을 받을 만한 자격쯤은 갖추었다고 생각한다. (81p) (...) 장석주 작가의 하루키 론, <외롭지만 힘껏 인생을 건너자, 하루키 월드>. 출간되자 마자 망설임 없이 사서 읽었다. 장석주 작가가 하루키의 책들을 섭렵했고 누구보다도 하루키의 소설을 통해 위안을 얻은 사람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역시 실망하지 않았다. 하루키 월드의 본질을 드러내는 다양한 작품들(하루키의 작품들 외에도 많은 하루키 해설서들까지)을 발췌하여 설명하는 장석주 작가의 사유력과 필력에 감탄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내가 왜 하루키의 소설을 읽으며 매료되는지, 공감하며 배울 수 있어 좋았다. 장석주 작가는 고독했기 때문에 하루키의 책을 읽었다고 고백한다. 내가 하루키 소설을 읽은 건 고독했던 탓이라고 해두자. 하지만 고독은 실존의 근원 조건이 아닌가. 치매 환자나 식물인간은 고독의 명석함에 빠질 수가 없다. 그들에겐 실존의 디테일이라는 게 아예 소멸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고독이 없는 자에게는 삶의 오롯함도 있을 수 없다. 마찬가지 이유로 동물에겐 고독이 없다. 나는 우연과 고독 속에서 하루키 소설을 찾아 읽었다.
장석주 작가는 고독의 아픔 때문에 책을 읽는 일이 나쁜 일이 아니라고 가르쳐 준다. 고독은 인간의 실존이다. 그리고 그 실존을 직시하는 행위로서 책을 읽는 일은 삶을 오롯이 살아가는 일이다. 사람들은 모두 저마다 나름의 고독 속에서 현실을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그들 나름대로 그것을 직시하고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나는 내 나름대로 삶에 충실하고자 하루키의 소설을 읽는다.
장석주 작가는 고독 속에서 하루키의 소설을 읽는 일이 어떤 긍정적인 힘을 주는지도 이야기해준다.
하루키 소설은 상실과 붕괴를 겪은 사람들조차 세상은 살 만한 것이다, 라고 말하며 격려의 의미로 어깨를 툭, 두드려준다. 어디선가 난민들은 떠돌고 테러로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지만 아직 세상은 살 만하고, 내가 품은 근심들이야말로 가장 하찮아 보인다. 돈을 떼먹고 달아난 동창생 녀석이 뻔뻔한 얼굴로 나타나더라도 껄껄 웃으며, 사람이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지, 라고 관용을 베풀 수 있을 것 같다. 하루키 소설 어딘가에는 ‘행복 DNA’가 숨어 있는 듯하다. 그러니 의기소침하고 우울한 날 오후에 홍차 한 잔을 마시며 하루키 소설을 읽으면 그 효과는 만점이다.
추운 겨울 우중충한 날씨의 주말 오후, <외롭지만 힘껏 인생을 건너자, 하루키 월드>를 읽으며 힘을 얻는다.
* 이 책 뒷편에는 하루키의 이력과 수상 소감 등 인터뷰에서 한 말이 정리되어 있다.
2009년 2월, 예루살렘 상 수상 연설에서, 40년 차 작가 하루키는 말했다.
“내가 소설을 쓰는 이유를 요약하자면 단 한 가지입니다. 개인이 지닌 영혼의 존엄을 부각시키고 거기에 빛을 비추기 위함입니다. 우리 영혼이 시스템에 얽매여 멸시당하지 않도록 늘 빛을 비추고 경종을 울리자, 이것이 바로 이야기의 역할입니다.”
2017년, 일본 매체에서 “그야말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베스트 앨범”이라는 평을 받은 신작 장편 <기사단장 죽이기> 1, 2권을 내놓은 68세의 하루키는, 문학동네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말을 돌멩이처럼 다루며 상대에게 던져댄다. 매우 슬프고 위험천만한 일이다. 소설은 그런 단편적인 사고에 대항하기 위해 존재한다. 그러려면 소설이 일종의 전투력을 갖춰야 한다. 말을 소생시켜야 한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양식decency’과 ‘상식common sense’이 요구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