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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인은 인륜지대사이다. 지금이야 시대상황이 결혼이란 개인의 선택에 해당되지만 예전에는 어른이 되는 과정이기도 했다. 또한 혼인은 당사자의 일이기도 했지만 가족 더 나아가 가문의 큰 행사이기도 했다. 혼인이란 개인대 개인의 결합을 넘어 그들이 속한 가문과 가문의 결합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모두에게 그런 것은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일반 서민들에게
있어 혼인이란 새로운 가정을 이루는 개인의 일이었지만, 지켜야 할 것이 많은 사람들에게는 정략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전통시대 사대부가의 혼인은 당사자의 의견은 전혀 고려되지 않은 채 가문과 부모의
뜻에 따라 행해졌다. 일반 사대부도 그럴진 데 왕족, 아니
국왕의 혼인이라면 어떠했을까?
이 책은 조선시대 국왕의 혼인이 어떤
과정을 거쳐 결정되고 또 어떤 의식을 통해 이루어졌는지를 숙종과 인현왕후의 국혼을 통해 살펴본다. 조선시대
국왕의 혼인은 드문 일이었다. 대부분 왕세자의 직위에 있을 때 혼인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저자가 숙종과 인현왕후의 혼인을 살펴본 이유는 그런 까닭 이외 숙종이 자신의 국혼 전 과정을 정리하고 기록한
의궤편찬을 명하여 기록으로 남아있어 그 전모를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국왕과 왕비의 혼례는 사사로이는
남녀가 만나 부부의 연을 맺는 일이지만, 국왕이 새왕비를 맞이하는 국가적 행사이기도 했다. 그래서 국혼, 대혼 대례, 가례
등으로 불리었다. 숙종은 모두 세 차례의 국혼을 치렀다고 한다. 그
중 1681년 당시 병조판서 민유중의 열다섯살 난 딸과의 국혼은 인조의 가례 이후 40여년만에 치러진 국왕의 가례로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인조의 가례를
참고하여 시행된 숙종과 인현왕후의 국혼은 17세기 국왕가례의 대표적인 모습으로 조선후기 가례의 전형이
되었다고도 한다.
1680년 10월 숙종의 왕비 인경왕후가 마마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조선에서 국상이 나면 5개월에 걸쳐
국장이 진행되고 이후 신주를 종묘에 모실 때까지 3년간은 경사스러운 행사를 삼갔다고 한다. 그런데 국상중인 1681년 새해가 되자 대왕대비 장렬왕후와 왕대비
명성왕후가 후사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국혼을 추진하였다. 대신들은 국장기간 중 국혼은 예에 어긋난다고
반발하였으나 명성왕후의 뜻에 따라 인경왕후의 졸곡제를 치른 직후인 3월에 국혼을 시작하기로 했다.
국혼은 먼저 전국에 결혼적령기에 있는
처자들의 혼인을 금지하는 금혼령을 내리고 처자단자를 거두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왕비후보자의 나이는
당시 21세인 숙종의 나이에 상관없이 15세에서 19세에 해당하는 처자, 즉 혼인적령기에 있는 명문가 출신의 딸로 제한되었다. 가례규정에는 국혼을 할 수 없는 왕실의 친척범위와 출생집안의 제한이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나 마감일까지 한성부에서 올라온 단자는 11장에 불과했다. 해당관원들이 파직되고 옥에 갇히는 곡절 속에서 마감 다음날 15장이
더 들어왔으나 반 이상이 자격이 안 되는 집안의 단자였다고 한다. 이는 사대부들이 가능하면 국혼대상에서
빠지려 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딸이 왕비가 되면 더없는 권력과 부를 가질 수도 있지만 정치적 소용돌이에
빠져들기 싫거나 혹은 들러리가 되기 싫은 까닭에 많은 사대부들이 꺼려했던 것 같다. 인현왕후가 되는
민유중의 딸도 전처소생인지라 어미가 없는 고아로 분류되어 단자대상에서 제외되었으나, 숙종은 전처소생이라도
아버지가 재혼을 했으면 부모가 모두 있는 것으로 간주토록 하여 단자를 작성하게 한 것을 보면, 왕비는
이미 정치적인 이유로 결정되어 있었을 것이다.
3월12일 왕비후보자 17명에 대한 초간택을 실시하여 3명을 간택하고 나머지 처자들에 대해서는
혼인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이후 3월18일 재간택에는 초간택에서 간택된 3명의 처자와 나중에 단자가 첨부된
처자를 포함 5명이 간택에 참여하였고, 3월26일 삼간택에서 15세인 민유중의 딸이 숙종의 왕비로 결정되었다. 딸이 왕비로 간택되면 그의 아버지는 즉시 현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그러나
왕대비인 명성왕후와 숙종은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민유중을 그대로 병조판서에 머물도록 했다. 결국
이 사건은 민유중이 스스로 물러나면서 일단락 되었다고 한다.
한성부에서 단자납부를 마감할 즈음
가례도감에서는 별궁을 물색했다. 별궁은 삼간택 직후 새 왕비가 왕비책봉을 받고 친영의식을 거행하기까지
머무르는 곳이었다. 새 왕비는 그곳에서 왕실의 법도와 예절을 익히고 국왕의 배우자이자 국모로써 지녀야
할 교양 등을 배웠다고 한다. 가례육례의 날짜는 친영하는 길일이 확정되면 그 날짜에 맞추어 조정했다. 친영이 5월13일로 정해지자
가례육례 즉 납비의 거행일정이 결정되었다. 각 의식의 거행날짜가 정해지면 그에 따라 습의라고 하는 예행연습의
날짜들도 정해진다. 이 모든 날짜들은 길일, 길시를 택해
정해지며 습의는 각각 세 차례씩 실시되었다고 한다.
국왕의 가례는 국가가례 중 납비의를
수행하는 과정으로 이루어지며, 납비의의 의식절차에 따라 종묘와 사직에 고하는 제사를 지낸 다음 순서에
따라 행한다. 이 모든 일은 국혼을 위해 설치된 가례도감에서 총괄했다.
순서에 따라 국왕이 왕비 댁에 정혼의 교서와 혼인예물을 보내는 의식인 납채, 왕비 댁에
혼인의 징표를 보내는 의식인 납징, 왕비 댁에 친영 날짜를 알리는 의식인 고기가 궁궐에서 엄숙하게 치뤄졌다. 각각의 의식이 거행되고 난 후 별궁에 도착하면 별궁에서는 왕비 댁에서 해야 하는 수납채 의식, 수납징 의식, 수고기 의식이 이뤄지며 이때 필요한 모든 물품과 음식은
궁궐에서 준비하고 만들었다. 고기와 수고기 의식이 끝나면 비로소 친영 기일을 온 나라에 공포했다. 그 다음에 이루어지는 의식이 책비이다. 책비는 왕비의 책봉의식으로
양반사대부나 일반 백성의 혼례와 크게 다른 부분이기도 하다. 책비와 수책비 의례가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민유중의 딸은 국왕 숙종의 왕비가 되고 조선의 국모가 되었다. 친영은 국왕이 별궁으로 가서 왕비를 맞이하는
의식으로 백성들에게 공개되는 행사였다. 왕비와 함께 궁으로 돌아온 국왕은 술과 음식을 나누는 의식인
동리를 행함으로써 부부의 연을 맺는 절차, 납비의를 모두 마치게 된다.
이후 왕실어른을 뵙고 폐백을 올리는 조현, 신료들의 축하를 받는 하례를 거쳐 친영과 동리를
행한 다음날인 5월14일 숙종은 대혼례를 치렀다는 교서를
내려 온 나라에 국혼을 알렸고 대사면을 실시했다. 이어 숙종은 가례도감의 관원 및 잡일을 한 내관 등에게
상을 내리고 의궤편찬을 명하여 국혼의 전 과정을 정리하고 기록하게 하였다고 한다.
혼인은 일반인에게도 일생에 몇 안 되는 중요한 행사이다. 그러니 전통시대 국왕의 혼례야 어떠했을지 상상이 가기도 했지만, 금혼령에서 시작되어 대혼례를 치렀다는 교서가 나오기까지의 과정이 엄청나기만 하다. 또한 인현왕후의 국혼과정을 읽으면서 조선시대 왕비의 위치와 처지가 어떠했는지를 알 것도 같다. 환국의 정치를 행하며 왕권을 강화하려 했던 숙종, 어쩌면 그에게 있어 국혼은 정치의 한 수단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장희빈이 왕자를 낳자 인현왕후는 서인으로 강등되어 친정으로 쫓겨났고, 이후 노론이 다시 복귀하면서 왕비의 위호를 회복하고 궁궐로 돌아온 것을 보아도 그렇다. 어찌되었던 지금은 볼 수 없고 다시는 행해질 수 없는 조선시대의 국혼에서 우리는 무엇을 읽어야 할까 하는 질문이 계속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