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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결산] 공신의 다른 이름, 정치적 승자 혹은 기득권세력..
"[2017 결산] 공신의 다른 이름, 정치적 승자 혹은 기득권세력.." 내용보기
간혹 사극 혹은 역사소설를 읽다 보면 이야기의 한 축이 공신인 경우가 많다. 주인공을 도와 주인공이 무사히 임금의 자리에 오르게 만들고 자신은 공신이 되어 부귀영화를 누린다. 그러나 끝에 가서는 그런 왕과 갈등을 빚고서 대부분 몰락한다. 어찌 보면 도식적인 이런 이야기들이 아무리 팩션이라 할지라도 역사적 사건을 차용한 것 일진데, 전혀 근거가 없이 작가가 상상력
"[2017 결산] 공신의 다른 이름, 정치적 승자 혹은 기득권세력.." 내용보기

   간혹 사극 혹은 역사소설를 읽다 보면 이야기의 한 축이 공신인 경우가 많다. 주인공을 도와 주인공이 무사히 임금의 자리에 오르게 만들고 자신은 공신이 되어 부귀영화를 누린다. 그러나 끝에 가서는 그런 왕과 갈등을 빚고서 대부분 몰락한다. 어찌 보면 도식적인 이런 이야기들이 아무리 팩션이라 할지라도 역사적 사건을 차용한 것 일진데, 전혀 근거가 없이 작가가 상상력으로만 그려냈다고 보긴 어렵다. 실제 역사에서도 공신과 임금의 갈등은 심했고, 또한 공신과 신진사류들의 갈등 역시 심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런 공신들은 그 시대 임금의 입맛에 따라 좌지우지되는 소모품이었을까?

 

  실록 등 역사사료에 공신에 관한 많은 문헌들이 존재하는 것을 보고, 공신이란 존재가 어떤 의미를 가졌기에 그렇게 많은 자료들이 발급되고 또 자손대대로 전승되었는지 궁금했다는 저자. 그래서 그는 조선시대 태조부터 숙종에 이르기까지 역대공신의 적장자와 생존해 있는 공신들이 임금과 함께 제단 앞에 모여 회맹제를 지내는 기록물을 살펴보게 되었다고 한다. 그 중에서 [이십공신회맹축]이라는 같은 제목의 다른 문헌을 조명하여, 이 회맹축이 어떤 역사적 배경에서 생성되고, 또 그 제작과정과 내용은 무엇을 담고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한다. 비단 재질의 두루마기 형태로 그 길이만해도 24미터에 이르는 [이십공신회맹축]은 인조와 숙종 때 두 번에 걸쳐 제작되었다.

 

  그렇다면 조선시대 공신이란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공신은 시대의 산물이라고 한다. 때로는 새로운 나라를 세운 이들에게 부여된 이름이었고, 때로는 정치적 승자들의 이름이었으며, 그리고 때로는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의 이름이기도 했다. 나라에서는 공신이 탄생할 때마다 회맹제를 거행했고, 그 때마다 공신 또는 공신자손의 이름으로 회맹제에 모였다고 한다. 조선은 군주제의 나라였다. 나라에 공을 세운다는 것은 곧 왕에게 공을 세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특정한 정치적 사건으로 공을 세우고 녹훈되어 공신이 되면 그것은 당사자에게 크나큰 명예이자 많은 특권이 수반되었다. 그러기에 공신이라는 이름은 실질적이고 제도적인 호칭이었으며, 왕에게는 자신을 지지해줄 정치적 동반자 혹은 후원집단이기도 했다.

 

  조선시대 공신 녹훈은 태조 때의 개국공신으로부터 마지막으로 영조 때의 분무공신에 이르기까지 총 28차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공신의 호칭은 모두 달랐다. 이러한 공신 녹훈의 절반이 선조와 광해군 그리고 인조의 3대에 걸쳐 이루어졌다. 선조 때 5, 광해군 때 4번 그리고 인조 때 5번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그 시대가 그만큼 정치적 격랑기에 있었음을 뜻한다. 28차례의 공신 녹훈 중 후에 삭훈 된 경우도 일곱 차례나 되었는데, 광해군 때 녹훈된 4차례는 모두 삭훈되었다. 이는 인조가 반정의 정당성을 세우기 위해 광해군을 부정하였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특이한 것은 숙종 때 남인과 서인의 정치적 대립속에서 탄생한 보사공신은 환국을 거칠 때마다 삭훈, 복훈과정을 반복했다. 이는 공신이 정치적 투쟁의 산물로 승자에게 내려지는 것이었음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공신 중에서도 특정한 사건에 직접적으로 공을 세운 공신을 정훈공신이라 했고, 이들에게는 왕명을 수록한 공신교서가 내려지고, 공신화상을 그리고, 등급에 따라 토지와 노비를 지급했다. 이와는 달리 직접적인 공은 작지만 크게 보아 공을 인정받은 넓은 의미의 공신을 원종공신이라 했고 이들에게는 공신녹권이 발급되었다. 이러한 공신 녹훈이 지속되면서 서로 다른 공신호를 가진 공신세력은 누적되어 갔다. 이에 따라 왕을 중심으로 서로 다른 공신세력을 한자리에 모아 회맹하는 전통이 세워지게 되었다. 회맹제에서 왕은 공신들의 공을 잊지 않고 보상하겠다고 공식적으로 천명을 했고, 공신들은 왕의 은혜를 충으로 지키겠다고 맹세 했다.

 

  조선시대 공신 앞에 숫자를 붙여 복수의 공신들의 연대를 강조한 것은 태종 때 3공신으로부터 유래되었다. 태종은 즉위 후 왕권강화를 위하여 태조 때 녹훈된 개국공신, 정사공신, 그리고 자신이 녹훈한 좌명공신 세력을 규합하여 회맹제를 지내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이후, 회맹제를 지낸 시점을 기준으로 역대공신의 녹훈 수효를 합산하여 그 앞에 숫자를 붙였다. 이런 관례에 따라 조선후기로 오면서 이십공신으로 지칭되는 공신그룹이 성립되었다. 스무 번째로 공신이 녹훈된 것은 광해군 때였지만, 인조반정 후 광해군 때 녹훈된 4차례의 공신이 모두 삭훈되어, 인조 때 녹훈된 영국공신이 바로 스무 번째 공신이 되었고, 이때 처음으로 이십공신회맹제가 거행되었다고 한다.

 

  영국공신은 인조 22년인 1644년 좌의정 심기원 일당의 역모를 미연에 막아낸 공으로 녹훈되었으며, 인조는 1646년 신구공신과 그 자손들을 거느리고 회맹제를 거행했다. 이 회맹제에 올려진 회맹제문과 참석한 사람의 명단을 수록한 것이 이십공신회맹축이다. 이후 숙종 때 보사공신이 녹훈되면서 이십일공신이 되었으나, 중종조의 정난공신이 삭훈되어 여전히 이십공신이 되었다. 그래서 이십공신회맹축이 별도로 존재하게 되었다. 보사공신은 숙종 6년인 1680년 허적의 아들 허견이 주도한 역모를 사전에 적발한 공, 다시 말해 서인이 남인세력을 축출한 경신환국 이후 서인주축세력을 녹훈한 것이다. 숙종은 이들을 녹훈하고 회맹제를 거행했다. 이로서 인조의 이십공신회맹축과는 다른 또 하나의 이십공신회맹축이 제작되었다. 그러나 이는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세력이 정계로 복귀하면서 보사공신을 삭훈하고 공신교서와 녹권을 회수 불태워 없애버렸다. 이후 1694년 폐비 민씨의 복위문제로 서인이 다시 복귀하면서 보사공신에 대한 복훈이 이루어지고 이십공신회맹축도 다시 제작되어 오늘에 이른다고 한다.

 

  한가지 아쉬운 것은 1728년 영조 때 이인좌의 난을 진압한 공로로 조선 마지막 공신 녹훈인 분무공신이 녹훈되고, 이십일공신회맹축이 제작되었으나 그 행방을 알 수 없다는 점이다. 정조 당시에도 확인된 이 회맹축이 언제, 어떻게 자취를 감추었는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다고 하니 온갖 생각이 다 들기만 한다. 이러한 회맹축 제작에 관한 전모는 의궤를 통해 확인할 수 있고, 그 내용은 의궤나 각각의 회맹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조선초기부터 공신회맹을 계기로 한 회맹축이나 회맹록은 지속적으로 존재해왔고, 개인에게 배부된 것은 복본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십공신회맹축과 같이 어람용은 왕에게 진상된 유일본이었고 따라서 그에 걸 맞는 격식을 갖추어 제작되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공신에 관한 회맹축을 읽으면서 씁쓸한 마음이 가시지를 않는다. 조상들의 문화기록유산으로 생각하고 그 의미를 살펴보면 그만일지 모르겠으나, 그들만의 그룹을 만들어 부와 권력을 독점한 것 같아 보여서이다. 이러한 전통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기득권이라는 이름이 바로 그들의 이름과 겹쳐 보이는 것은 비단 나 하나 뿐만은 아닐 것 같다.

k*****1 2018.01.17. 신고 공감 5 댓글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