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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때 이진경 교수의 문체를 좋아했다. 『철학과 굴뚝 청소부』, 『모더니티의 지층들』, 『자본을 넘어선 자본』, 『미-래의 맑스주의』를 읽고서는 그처럼 되는 게 꿈이었다. 덕분에 그린비 출판사를 좋아하는 출판사 1위로 꼽기도 했고. 이제는 다 과거. 그것도 꽤나 지난 과거. 세월은 흘러 많은 게 변했다. 나는 학자가 되겠다는 꿈은 제대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버렸고, 이진경 선생님과 고병권 선생님 그리고 고미숙 선생님이 이끌던 수유 공간 너머는 흩어졌다. 자연스러운 과정인지 모르겠는데, 여하튼 그들의 책은 여러 출판사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이진경 선생님의 책도 휴머니스트를 비롯한 여러 출판사에서 나왔다. 오랜만에 문학동네에서 나온 『뻔뻔한 시대, 한 줌의 철학』을 2012년인가 2013년에 읽은 적이 있다. 선생님에게는 죄송하지만, 꽤나 실망했다. 이진경 선생님이 쓴 글이 맞나 싶을 정도로 깊이가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완독한 뒤에, 1초도 주저하지 않고 중고책으로 팔 정도로 말이다.덕분에 사놓고 안 읽은 『불온한 것들의 존재론』이나 『역사의 공간』도 펴보기가 싫었다. 내가 변한 건가, 선생님 글이 변한 건가. 그러다가 올해 『불온한 것들의 존재론』을 펼쳤다. 특별한 이유는 없고, 안 읽은 책은 빨리 읽고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책은 좋았다. (좋았지만 일 초도 망설이지 않고 처분하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책을 놔둘 공간이 없기에) 개인과 공동체 사이에 넘을 수 없는 간극을 메우려는 선생님의 철학적 사유가 돋보이는 에세이. 비록 체계적인 서술은 아니지만 '불온'이라는 키워드로 6가지 소재(장애자, 박테리아, 사이보그, 온코마우스, 페티시스트, 프레카리아트)를 탐색하며 무엇이 존재인지, 우리는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논의한다. 이에 앞서 1장과 2장은 '불온성'을 정의하는, 그러니까 서론 성격의 글이다. 물론, 답은 없다. 다만 하나는 확실하다면, 우리의 삶은 우리를 불편하게 하고, 불안하게 하는 불온한 것과 만남으로써 풍성해진다는 것. 이하는 메모. --- 단수로서의 존재, 미규정성으로서의 존재는 그 모든 만남과 갈라짐이 이루어지는 장이다. (중략) 존재론의 장소는 존재자가 보이지 않는 저기 어딘가에 따로 있는 '심연'이 아니라, 바로 존재자가 있는 곳이고, 그 존재자들이 만나는 곳이며, 또한 갈라지고 헤어지는 곳이다. 어떤 존재자로 하여금 그 존재자가 되게 하는 만남과 헤어짐, 그것이 그 존재자로서 존재를 지속할 수 있게 해주는 조건 그리고 그 조건이 가능하게 해주는 또 다른 조건의 연쇄다. (58쪽) 재벌이나 권력자처럼 남에게 크게 폐 끼치는 자도 없으 것이다. (중략) 그런데도 그들은 자신이 남에게 폐를 끼친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노동자가 노동을 조금이라도 줄이고자 하면 왜 그러느냐고 호통을 치고, 밥을 해주던 가족이 제때 해주지 않으면 욕을 하고 비난을 한다. (86쪽) 노동자는 자신이 '신세를 지고 사는 자', 다시 말해 폐를 끼치는 자임을 잘 알고 있다. 자본가라는 타인 없이는 생존할 수 없는 자임을. 이런 점에서 노동자는 장애자만큼이나 장애자다. 타인들의 존재에 대한 민감성, 자신을 떠받치는 타인들에 대한 예민한 감각을 갖고 있다. (88쪽) 우리는 모두 장애자다. 모든 존재자는 항상 - 이미 다른 수많은 존재자에 기대어 그것들이 '폐를 끼치며' 살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장애자다. 무언가에 기대어 존재하는 것이 모든 존재자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면, 모든 존재자는 운명적으로 장애자들이다. 이 경우 장애는 존재 그 자체와 결부된 것이란 점에서 존재론적 장애다. 이런 점에서 모든 존재자는 '동등하다'. (91쪽) 그 자체로 완벽하지 않은 생명체는 없다. 다만 그것이 살아가는 조건에 의해 좀 더 유리한 것과 불리한 것이 구별되고, 좀 더 완전한 것과 불완전한 것이 구별될 수 있을 뿐이다. 정상과 장애의 구별 또한 마찬가지다. 그 자체로 '정상'인 것은 없으며, 또한 그 자체로 '장애'인 것도 없다. 이런 의미에서 다시 한 번 말해야 한다. 생명의 평면에는 그 자체로 결함인 것도 없고, 그 자체로 강점인 것도 없다. 거꾸로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 자체로 '완전한' 것은 없으며 결함을 갖지 않은 것도 없다. 모든 것이 장애자다. (105쪽) 문명이란 흔히들 자처하듯이 자연의 문턱을 넘기 위한 시도의 집합인 동시에, 인간과 자연 사이에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에 끊임없이 설치되고 덧붙여진 문턱들의 체계다. 혁명이란 문턱을 제거하려는 집합적 운동이다 (111쪽) 박테리아나 원생생물은 먹이를 먹지만, 내ㆍ외부를 가르는 특이적 면역계는 없다. 그렇다면 특이적 면역계는 발생적으로 나중에 생겨난 것이며, 외부를 내부화하는 소화와 섭취의 매커니즘에 비해 발생적으로 이차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자아'란 동물들이 갖는 어떤 취약성으로 인해, 아마도 외부적인 것과 공생할 수 있는 능력의 취약성으로 인해 '발전'시켜야 했던 식별의 체계라고 해야 할 것이다 (148쪽) 스스로의 가변적인 변이능력을 포기하면서 얻은 이러한 면역체계는 '죽음의 의미를 아는 자'인 인간의 손을 거치면서, 거기에 경제학적 합리성이 더해지면서 감염을 피하기 위해 감염 위험이 있는 것을 대대적으로 미리 죽이는 인위적 방어체계가 되었다는 것이다. '방역'이라 불리는 이 방어체계로 인해, 방치했다면 350마리도 죽지 않았을 구제역 때문에 350만 마리의 가축을 죽이고, 조류독감의 위험에 대처하기 위해 650만 마리의 가금류를 순식간에 죽이는 거대한 학살이 지난겨울 조직되었음은 잘 아는 사실이다. (158쪽) 나는 유령이 존재함을 믿는다. 강력한 힘을 갖고 실존함을 확신한다. 예를 들어 1980년대 초 내가 들어간 대학에는 적지 않은 유령이 존재하고 있었다. 1970년 청계천에서 "근로기준법을 지켜라!"라고 외치며 분신했던 전태일의 유령, 1980년 광주에서 죽어간 2000여 시민들의 유령이. 그 유령들로 인해 나는, 또 나의 친구들은 뜻하지 않은 삶으로 말려들어갔다. (168쪽) 도구를 손에 들고 움직이는 인간, 그것은 기계와 유기체가 결합해 하나처럼 작동한 최초의 사이보그였다. (181쪽) 접속한다는 것은 오염을 향해 손을 내미는 것이다. (중략) 메시지를 수신하는 순간 수신자가 오염되어 변환된다면, 메시지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정보들을 모으고 수합하면서 발신자가 반복하여 변환된다면, 이를 '소통'이라는 말로 부르는 것처럼 순진한 일도 없을 것이다. (198쪽) 언제나 다른 것의 존재의 목적인 그런 존재자도 없고, 항상 다른 것의 수단일 뿐인 그런 존재자도 없다. (212쪽) 영혼은 신체로부터 자유롭다지만, 어디를 가든 피부 같은 개체성의 피막에 감싸여 있다. (249쪽) 우리가 누군가에게 매혹될 때 단지 성적인 매력에 끌려 들어가는 것만은 아니다. 매혹의 이유는 알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의 욕망인데도 알 수 없는 것은, 그것이 수많은 이유를 갖기 때문이고, 어느 하나로 확정할 수 없기 때문일 게다. (288쪽) 화폐 페티시즘만큼 페티시즘에 반하는 것은 없으며, 사물에 대한 욕망을 망쳐놓는 것은 없다. 그것은 페티시즘이라고 불리지만, 사실은 페티시스트의 욕망을 뭉개버리고 화폐에 대한 욕망으로 얼른 바꾸어버린다는 점에서 페티시즘에 반한다. (294쪽) 프레카리아트란 불안정한 노동자계끕이 아니라 불안정하게 만드는 계급이다. 노동자계급을 불안정하게 만드는 계급이고, 계급적 규정 자체를 동요시키고 지우는 계급이다. 비움의 포텐셜로 노동자계급을 계급에서 이탈하도록 만드는 계급이다. 계급이기를 중단한 계급이다. (338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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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저자가 줄 곧 수행하는 낯선 것의 드러냄과 그래서 익숙해 진 것들의 다시 낯선 것으로의 되돌리기 작업이다. 보지 못하던 것, 생각지 못하던 것, 알지 못하던 것의 실체를 선명하게 드러내어 그 존재성을 부각하고 그것에 잠재된 진실의 의미를 확인함으로써 우리들이 상실하거나 잃어버린 감각을 깨우는 기획이다. 하찮고, 비루하며, 보잘것없어 그 존재마저 지워버리려 하는 것들, 그럼에도 그 정체를 명확하게 이해할 수 없는 낯섦과 당혹감을 느끼게 하는 것들, 이들‘불온한’것들의‘있음’에 대한, 그 실재함에 대한 이야기다.
또한‘존재론’인 까닭은 “존재하는가와 무관하게 표상되는 명사적 실체”인 존재자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 산엔 곰이 한 마리도 없어” 라는 말이 곰이 존재하지 않음을 뜻하지만 이 경우에도 곰은 곰이라는 존재자임이 분명하다는 의미에서 그러한 것이다. 설혹 우리들이 보지 않고, 알려고 하지 않으려하며 그 존재자의 존재를 부인하더라도 존재하는 존재자들, 바로 이 알 수 없어 불온한 존재자들을 새롭게 보아야 하는 이유의 이야기다. 이들 표상으로 ‘장애자’, ‘박테리아’, ‘사이보그’, ‘온코마우스(oncomouse)’, ‘페티시스트’, ‘프레카리아트(precariat)’등 여섯의 불온한 것들을 통해 우리들의 감각적 타성을 벗어버리도록 요구하고 있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불온하다고 느끼는 것은 눈앞에 있지만 무엇 때문에 저런 짓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을 때. 정체를 알지만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보이지 않을 때 발생한다. 또한 불온성은 그 부정의 대상이 나를 덮쳐올 것 같은 불안, 즉 내가 선 자리와 내가 가진 것을 잠식하리라는 예감에서 오는 불안과 당혹의 감정이다. 이 불편한 감정, 불안을 떨쳐내기 위해 그것을 억압하고 급기야는 폭력을 휘둘러 공격한다. 자본가에게 비정규직 노동자가 불온하게 인식되어 공권력을 동원하여 무자비하게 탄압하는 것, 최근의 한진중공업 사태와 같은 것이 그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진정 불온한 것은 무엇일까? 이처럼 이 책은 우리의 통념적 감각을 바꾸는 작업, 인간의 혁명을 말하고 있다.
불온한 것의 처음을 장식하는 대상은‘장애자’이다. 정상인들은 왜 장애자를 불온하게 여길까? 비하와 동정의 양가감정을 수반하는 거부의 시선, 이 시선 속에서 장애자는 미천하고 보잘것없는 것이 되었고 그래서 눈앞에 있어도 보이지 않는 대상이 되었다. 여기엔 인간의 위대함과 탁월성을 기초로하는 존재의 사유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고 이는 곧 장애자는 인간의 위대함을 훼손하고 잠식하는‘결함’으로 간주된다는 것이다. 더구나 인간의 자랑스런 통념 속으로 밀고 들어와 인간을 그 비루하고 소소한 세계로 끌어들이기에 불온한 것이 된다. 인간이란 것이 과연 이처럼 위대하고 탁월한 것일까? 이 터무니없는 토대는 덜 위대한 것, 덜 탁월한 것인 2류, 3류를 만들어내고, 다시금 배제시키고 지워버리는 작업을 출현시킨다. 이 존재론적 서열화는 우리가 갈라서고 대결하여 끊어버려야 할 사슬일 것이다.
장애자만이 누군가에 의지하여 생존하는 존재일까? 누군가가 옆에 있어야 살아갈 수 있는 존재자로서의 장애자는 ‘폐를 끼치는 자’이다. 버스에 장애자가 타고 내리는 것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한다. 정상인들은 이런 불편함과 불화로 자신들을 끌어내리는 장애자를 비난한다. 그러나 타인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 수 있는가? “우리가 지금 살아 있다는 것은 우리의 생존에 필요한 일들을 기꺼이 해주는 누군가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재벌이나 권력자는 아마 남에게 가장 커다란 폐를 끼치는 자들일 것이다. 수많은 노동자가 과로하며 생산을 해주지 않는다면, 수많은 사람이 내주는 세금에 기대어 그 세금으로 관료들이나 졸개들을 거느릴 수 없다면 그들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누군가가 귀찮은 일을 기꺼이 감수해주었기 때문에 내가 지금 살아 있다는 것, 나의 생존에 필요한 일들을 기꺼이 해주는 누군가가가 있기 때문이라는 점을 잊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노동자가 조금이라도 노동을 줄이면 호통하는 자본가의 뻔뻔함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여기에는 폐를 끼치는 것을 지우는 것으로 돈에 대한 환상이 있다. 돈을 주는 순간 폐를 끼쳤다는 사실을 잊는다. 또한 돈을 주기 이전부터 줄 생각으로 자신이 끼치는 폐를 지워버린다. 자신이 지은 신세를 교환으로 바꿔놓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자신이 지불한 것보다 더 많은 돈을 벌기위해 일을 시키면서도(이득이 없다면 고용시킬 이유가 없지 않은가)미래의 지불 가능성으로 현재의 모든 폐를 지우는 것이다. 이것은 돈이 많은 자들은 항상 타인에 기대어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모두는 장애자다. 모든 인간은 장애자인 것이다. 모든 존재자는 수많은 다른 존재자에 기대어 폐를 끼치며 살 수 밖에 없는 것이며, 우린 운명적으로 장애자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린 동등하다. 기대어 있음을 보지 못하는데서 기인하는 오인이자 환상인 장애자에 대한 몰이해는 제거되어야 할 것이다.
‘장애자’가 이처럼 의타적 존재로서의 인간 보편의 운명을 통해 존재자에 대한 감각을 일깨우고 있다면, ‘박테리아’는 생성과 면역이라는 매개어를 통해 ‘공생과 공존의 가능성’에 대한 이해를 깨운다. ‘미토콘드리아’처럼 잡아먹힌 것에 잠식됨으로써 변성된, 잡아먹은 것의 새로운 신체가 출현하는 탄생지점을 포착하는 것이다. 생성이란 이렇듯 “어떤 만남이나 충돌에 의해 하나의 상태로부터 다른 상태로 이행하는 것”이다. 한편 나의 내부에 속하는 것과 외부에 속하는 것을 구별하는 면역이 항상 외부를 구별하고 배제하는 메커니즘만 작동한다면 우린 아마 먹이를 먹는다는 것이 불가능 할 것이다. 질병이 숙주와 기생체가 서로 적응하는 과정이라면 치유란 서로의 공생 내지 공존 가능성의 시작이라는 것과 같이 외부적인 것과 공생 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 될 것이다. 배제하고 추방하는 비위생적 치안이란 호소는 생물학적으로도 비이성적인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사이보그’에서는 유기체와 기계의 결합, 인간의 외연을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경계를 부수어 버리는 자기 소멸의 존재자를 얘기한다. 이것은 확장되어 오늘의 무선통신의 세계와 결합한 인간, 접속과 변환에 의해 자기가 소멸하는 능력에 의해 규정되는 네트의 바다, 실제적인 소통은 없으며 오직 오염과 감염, 변형과 변조만 있는 신체를 말하며, ‘온코마우스’에서는 목적론적 사유로 인해 수단이 되어버린 새로운 신체의 존재자가 된, 즉 상품으로서 만들어지는 신체, 생명복제시대의 윤리, 타자를 수단화하는 비정한 자본주의와 물질주의를 비판한다. 이것은 생물학적 성이 남녀라는 인간의 형상을 모델로 하는 함수의 이항성에 매몰된 이성의 눈가림으로 인해‘페티시스트’라는 사물에의 사랑을 왜곡하는 ‘화폐에 대한 페티시즘’으로 연결되어 사물성은 사라지고 화폐에 대한 미친 욕망에 휘둘리는 화폐가치라는 과시성 상품에 의존하는 천박한 남근주의적 욕망의 비판이 된다.
끝으로 불안정을 의미하는 precarious와 프롤레타리아의 합성어인 '프레카리아트(precariat)'라는 어떤 계급에도 속하지 않는 계약직 노동자, 파견직 노동자와 같은 비정규직 노동자의 신체와 영혼을 잠식하는 불안정 시대의 도래를 알리고 있다. 범람하는 노동자, 이들을 양산하여 값싼 노동력을 상시적으로 착취하려는 시장자본주의는 오히려 이 불명하고 애매모호한 계급의 불온성에 역습을 당 할 수도 있다. 이성이나 정신이 다가설 수 없는 무능력의 지대, 목적성으로 환원할 수 없는 근본적 저항의 지대인 오이코스의 반란은 지속될 것이다. 아니 지속되어야만 한다. “익숙한 것을 다시 낯선 것으로 만드는‘미친 감각’”, 그래서 끊임없이 갈등하고 충돌하여 새로운 개체, 공동체를 만들어내는 작업, 공생과 공존의 화합을 만들어가는 작업은 계속되어야 할 이유가 된다. 불온한 것들이라 밀어내는 것들, 그 거북함으로 보지 않고 외면하려는 것들을 통해서 우린 보다 완전한 종족이 되어 가지 않겠는가? 낯설고 불편한 것들과의 만남을 기꺼이 새로운 삶의 기회로 긍정하고 그것들의 존재 자체를 평온한 삶의 전제조건으로 긍정하는 곳으로 안내하는 이 책은 제거와 추방을 행하는 지배질서의 오인을 멋지게 규명하고 있다. 우리의 통념을 기막히게 전복시키며 잃어버린 보편적 진실에 대한 감각을 살려내는 이 존재론적 사유는 적대하는 우리들에게 새로운 삶을 만들어가는, 친구가 되는 방법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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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온한 것들이란 정체를 쉽게 알 수 없는 데, 현 체제나 개인적 삶을 슬며시 뒤흔드는 존재들이다. 언뜻 보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무시하고 뒤돌아서는 데, 괜히 뒤통수가 간지럽고 다시 한 번 더 보지 않고는 못배기게 하는 존재들이다. 장애자, 박테리아, 사이보그, 실험용 쥐, 변태성욕자들, 백수들.(용어를 그대로 쓰지는 않았다. 내 마음대로 의역했다. ) 우리 사회에서 꼭 필요하지 않을 것 같은 이런 하찮은 것들이 왜 존재할까에 대한 답이 이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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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과 요한계시록을 버무려 놓은 에세이를 읽은 느낌이다. 정통에서, 노말에서, 상식에서, 일상에서 벗어났다고 여겨지고 판단되고 간주되는 모든 것들에 대한 애정이 글의 시작이다. 그리고 그 애정을 철학적으로 사회학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아니 이야기하고 있다. 쓰려진 단어들이 쉬운 일상의 언어가 아니라서 다소 독해에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저자의 마음만은 따뜻하다. 모든 불온한 것들을 위한 복음서다.신학적으로 표현하자면, 다시 예수에게로 돌아가야 한다. 병든자, 어린아이, 세리, 그리고 자신에게 독배를 권하는 천부까지도 사랑하는, 사랑할 운명을 타고난 예수의 이야기다. 하늘을 나르는 새도 들에 핀 꽃도 다 하늘의 뜻이다. 인간과 생물 사이에 경계가 무슨 의미가 있으랴. 창조주의 섭리안에서는 모든 것이 하나이고 질서이고 흐름인 것을. 생태계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다. 인간을 포함한 모두의 것이고, 그 모두는 각자 나름의 흐름만이 존재할 뿐이다. 교차하면서 때로는 독자적으로 보이는....
귀있는 자가 듣는다. 그러나 불행히도, 아니 당연하게도 귀있는 자는 그리 많지 않다. 장애자, 박테리아, 사이보그, 온코마우스, 페티시스트, 프레카리아트는 결국 나의 다양한 모습이다. 우리는 여러 모습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며 살고 호흡한다. 그 모든 모습은 결국 하나고 결국 나, 우리 자신이다. 나를 나로부터 계속 분리시키는 것이 근대의 악습이다. 분리가 다시 돌아가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단절이 되면서 근대는 우리에게 치명적 고독을 선물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불온한 것인데, 불행히도 우리는 그 불온을 계속 타자화시킨다. 노말은 없다. 불온한 것이 본질이다, 모든 생명체에 적용되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