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리뷰 (1)

한줄평
평점 분포
  • 리뷰 총점10 0%
  • 리뷰 총점8 100%
  • 리뷰 총점6 0%
  • 리뷰 총점4 0%
  • 리뷰 총점2 0%
연령대별 평균 점수
  • 10대 0.0
  • 20대 0.0
  • 30대 0.0
  • 40대 0.0
  • 50대 7.0
리뷰 총점 종이책
정확한, 하지만 실망스러운 번역
"정확한, 하지만 실망스러운 번역" 내용보기
알튀세르의 [마르크스를 위하여]는 마르크스주의만이 아니라 인문사회과학 일반의 영역에서도 고전으로 꼽을 수 있는 저서다. 비록 마르크스주의의 실추로 인해 이제는 널리 읽히지 않고 논의되는 빈도도 훨씬 줄어 들었지만, 알튀세르의 문제제기는 여전히 유효하다. [마르크스를 위하여]는 1960년에서 1965년까지 알튀세르가 썼던 글들을 모은, 일종의 논문모음집임에도, 놀라운 이론적
"정확한, 하지만 실망스러운 번역" 내용보기
알튀세르의 [마르크스를 위하여]는 마르크스주의만이 아니라 인문사회과학 일반의 영역에서도 고전으로 꼽을 수 있는 저서다. 비록 마르크스주의의 실추로 인해 이제는 널리 읽히지 않고 논의되는 빈도도 훨씬 줄어 들었지만, 알튀세르의 문제제기는 여전히 유효하다. [마르크스를 위하여]는 1960년에서 1965년까지 알튀세르가 썼던 글들을 모은, 일종의 논문모음집임에도, 놀라운 이론적 통일성을 보여 주고 있다. 이 책의 핵심 주장은 마르크스의 사상적 발전 과정에서 하나의 절단(coupure)이 발생했으며, 이 절단을 통해 비로소 마르크스는 마르크스가 될 수 있었고, 역사유물론이 성립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절단이 칼로 두부를 잘라내듯이(절단coupure이라는 개념의 원래 의미는 이처럼 잘라낸다는 것이다) 청년 마르크스의 저작들에서 나타나는 관념론적 사상의 영향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마르크스주의 과학을 위한 초석을 놓은 것을 의미한다는 점이다(바로 이 점에 '절단'이라는 은유적 개념이 갖는 한계가 있다). 이는 갈릴레이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변적 물리학(또는 자연학)과 절단하고 근대 물리학의 초석을 놓은 것이나 프로이트가 정신분석의 초석을 놓은 것에서도 확인될 수 있는 과학사의 특징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알튀세르가 보기에 마르크스 이후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과제는 절단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주의 과학 속에 여전히 남아있는 관념론적 요소들을, 역사유물론의 기본 개념들에 근거하여 개조하고 전환시켜 내는 데 있다. 그런데 스탈린 사후 발생한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분열과 사회주의적 인간주의는, 마르크스주의에서 이러한 개조의 작업이 제대로 수행되지 못하고, 오히려 관념론적 요소들에 의해 마르크스주의의 기본 원리들이 침식되고 공격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후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는 결국 당대의 마르크스주의의 과제는 마르크스주의를 특징짓는 핵심 원리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인식하고, 이 원리에 기초하여 개조의 작업을 수행함으로써 마르크스가 초석을 놓은 마르크스주의 과학을 좀더 발전시키는 데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마르크스를 위하여]에서 알튀세르는 먼저 마르크스를 마르크스로 만들어준 절단의 토대가 무엇인지 확인하는 데 주력한다. 그에 따르면 이는 바로 헤겔변증법과 구분되는 유물변증법의 본질에 있는데, 그는 <과잉결정>이라는 개념을 통해 이를 설명하고 있다. 즉 헤겔변증법은 특유의 목적론적 전제 때문에 동질적인 전체로 부분들을 흡수하고, 이에 따라 정세에 대한 인식에 기초한 정치적 실천의 가능성을 봉쇄하는 데 비해, 마르크스는 모순의 본질 안에 모순의 실존 조건들을 포함시킴으로써(이것이 바로 과잉결정의 의미다) 구조의 인식 및 변혁과 정세적인 운동 사이의 근원적인 연계를 확립하고 있다. 아울러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 개념의 개조를 핵심 과제로 제시하고 있는데, 이는 절단 이후에도 존속하는 전과학적 이데올로기의 가능성을 설명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와 공산주의 사회의 종별적인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도 이데올로기 개념을 가공하는 게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알튀세르를 읽어야 하는가? 알튀세르의 이론적 실천의 독특성은 알튀세르가 한 철학자로서가 아니라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철학을 했다는 데 있다. 알튀세르의 이론적 운명이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적 운명과 근원적으로 연동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알튀세르의 유효성, 알튀세르의 이론적 교훈은 분명 이전보다 훨씬 감소되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역으로 인문사회과학의 이론적 장래가 마르크스주의와의 이론적 대결 없이, 이론적인 부채 청산 없이 존재할 수 없다면, 그리고 다수의 현재의 이론가들이 마르크스주의와의 실질적인 이론적 대결을 역사적 정세에 대한 <사실적 확인="">(문제는 이러한 확인은 사실은 저널리즘적인, 즉 이데올로기적인 자기반영에 불과하다는 데 있다)으로 대체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역설적이게도 알튀세르의 이론적 유효성은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인문사회과학의 장래의 가능성을 결정한다는 의미에서만이 아니라, 이러한 장래의 가능성을 봉쇄하고 있는 현재의 인문사회과학에 특유한 이데올로기적 자기기만을 해체한다는 의미에서도 말이다. 따라서 데리다가 <마르크스의 유령들="">에 관해 말했던 것이 극히 정당한 것이라면, 또한 그 이전에 <알튀세르의 유령들="">에 관해 말하는 것 역시 극히 정당한 일이다. 이 책의 번역은 상당히 정확한 편이어서, 원문의 내용을 훼손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하지만 알튀세르의 핵심 개념들 및 일부 용어들에 대한 번역에 다소 문제가 있고(예컨대 <과잉결정>으로 번역해야 할 것을 <중층결정>이라고 번역한다든지, <지배소를 갖는="" 구조="">라고 번역해야 할 것을 <지배적 구조="">로 번역한다든지, 또는 <종별성>을 <고유성>으로, <실존>을 <존재>로, <통일성>을 <통일체>로, <이유>나 <근거>를 <이성>으로 등등), 몇 가지 구절들에서는 오역도 엿보인다. 아울러 이 번역본에는 단어는 우리말이되, 문장이나 어법은 우리말로 볼 수 없는 경우가 많아서 읽다가 얼굴을 찌푸리게 되는 경우가 자주 있다. 쉽지 않은 책을 정확히 번역하기 위해 애쓴 역자의 노고는 칭찬할 만하지만, 이 정도의 번역으로 역자 스스로가 자부심을 느낀다면, 그것은 역자 자신의 자기비하에 불과할 것이다. 이 번역이 나온지도 6-7년의 시간이 지났는데, 출판사나 역자가 개역의 의지를 보여 준다면 많은 독자들에게 큰 선물이 될 것이다.
j******a 2002.12.04. 신고 공감 3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