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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에 대해 끝도 없는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낙오자에게 공통적인 특징이 하나 있다. 일단 관리직 위치에 있는 자가, 아주 빈약한 희망 한 줄기를 담은 '지나가는 립서비스' 한 마디라도 던져 주면, 감격에 겨워 어쩔 줄을 모르고, 마치 사회 상층부에 드디어 한 발이라도 편입을 한 듯 환호작약 미쳐 날뛰는 모습을 보인다는 점이다. 보통 가망 없는 시골 깡촌 출신에, 말 그대로 '삼대가 빌어먹을 가난', '한글이나 채 뗄까말까 할 무지'를 대대손손 물려 받은, 그래서 유일한 희망이라곤 가윗자락 하나 들고 무작정 상경하는 길밖에 없었던 못 배워먹은 년이 터벅터벅 돌부리를 차며 걷는 모습(제딴에 이걸 위풍당당이라고 착각)을 떠올리면, 대개 그 졍확한 심상에 대응할 수 있다. 이 영화가 무대로 삼고 있는 독일 베를린도 마찬가지. 대영주 호언촐러른이 누대에 걸친 다져 온 기반을 드디어 왕국의 위세로까지 발전시켜 웅비의 첫걸음을 뗄 때, 베를린은 더 이상 이름만 건 선제후의 낡고 작은 레지던스가 아니었다. 교황을 초빙하지는 않았어도(신교국이 그럴 필요가 없음) 세계 만천하에 제국의 위용을 선언하기에 충분했던 시절, 이 도시는 전에 없던 관심과 경외의 대상이 되었다. 전 유럽을 석권하려 분수에 넘는 만용을 부린 어느 독재자의 패착과 더불어, 이 도시는 외세에 의해 반분되는 초유의 운명을 맞이하게 되지만, 시민의 저력은 그 극복이 불가능해 보였던 분단장벽의 붕괴를 그로부터 반 세기가 채 안 되어 자긍과 희열로 가득한 자신들의 눈동자, 시선 앞에 끌어댈 수 있었다. 역사의 굴레는 시원히 벗어 던졌지만, 개개인의 과제와 간난이야 알아서 해결해야 할 터. 이런 걸 체제가 대신 풀고 다독여 줄 수는 없다. 그런 건 기대해서도 안 된다. '세상이 그때 그리 변하지만 않았어도 내 처지가 지금 어찌되었을까?' 안타깝게도 정답은 '변함 없음'이다. 히틀러의 의지가 유럽을 넘어 세계를 석권했다 가정해도, 3대에 걸쳐 무지렁이의 영혼을 세습해 온 하층민이 신분 상승의 다른 사다리를 탈 수는 없다. 그 남편이란 집에서 놀고 자빠진 건달이나 마찬가지며, 어디 가서 호모 취급이나 받으며 호구로 줘 터지고 다니기나 딱 좋은 비실비실한 아들놈이, 폰팔이, 편의점 알바 외에 마땅한 밥벌이감을 구할 길이 없는 이치도 변할 것 없다. 이도저도 안 되면 그냥 군대나 가야 하며(받아 주기나 한다면), 머리를 그리 타고 나고 태도가 삐질삐질 야무진 데라곤 조금도 찾아 볼 수 없는 불량분자인 DNA인 걸, 한나라당 김무성이나 히틀러 할애비가 와도 고쳐 둘 수 있겠는가. 닥터 멩겔레나 침 질질 흘리며 메스 들고 안 오면 다행이지. 저주 받은 피는 못 속인다 이 말이다. 백날천날 조선일보 본다고 국졸 학력이 올라가겠으며, 오지도 않는 손님 파리만 날리는 점빵의 처량한 처지를 잊을 수단이 책밖에 없는데, 책이라고 읽는 꼬락서니가 썩은 눈구멍이 아닌 국졸의 똥구녕으로 후비는 판이니 필자 작가의 의도를 정반대로 곡해 왜곡할 밖에, 첫째 삼대를 이어 내려 온 돌대가리의 저주이며, 둘째 단 한 순간도 인생이 평탄할 날 없었던 좌절과 실패의 상처 때문이다. 부모가 그 꼬락서니니 자식새끼도 저 모냥 저꼴인 것이다. 외모가 그꼴이라고 해서 자리에 주저앉아 징징거려봐야 뭐 하나 나아질 것도 없지만, 반대로 제 분수도 모르고 허위의식에 쩔어 임대료도 감당 안 되는 자리에 남보라고 허세를 떠는 짓 역시 신세 말아먹는 지름길이라 할 수 있다. 영화에서 카티와 줄리아가 보여 주는 모습은, 이 대한민국의 숱한 무지렁이 집구석의 대책 없는 낙오자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시전하는 촌극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긴 이런 걸 보여 줘도, 이게 지 이야긴지 모르는 실질적 문맹자, 하루 종일 인터넷만 하고 앉은 꼬락서니(능력이 없으니 그럴 수밖에)를 공감 능력, 사회성의 증거라고 열심히 우기고 있는 국졸에게 뭘 기대하겠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