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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과 ‘정치’. 얼핏 둘은 어울리지 않는 별개의 영역 같기도 하다. 그러나, 겉표지의 ‘식민지, 전쟁, 분단 시대의 극장 예술’이라는 카피를 보면, 그 생각이 금세 바뀐다. 예술이야말로 시대적, 곧 정치적이라고. 이 책의 저자(이상우)는 극문학을 전공하고 현재 고려대학교 국문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극장, 정치를 꿈꾸다」는 식민지 시대로부터 분단 시대인 1970년대까지의 극장, 곧 연극과 영화에 대해 논하고 있는 책으로 <2018년 세종도서 학술부문 우수도서>로 선정된 책이다. 주(註)가 32쪽(347-378p), 참고문헌이 12쪽(379-390p)에 달할 만큼 많은 자료를 바탕으로 한 역작이다. 저자는 <책머리에>에서, 이 책을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은 “정치보다 극장이 주어가 되는, 극장의 문화정치에 관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계속해서, “식민지, 제국주의 전쟁, 분단시대를 겪으며 관객들과 희로애락을 함께 해온 우리 극장은 과연 어떠한 방식으로 정치적 욕망을 표현했을까? 극장은 자기 시대의 공기를 어떠한 표상을 통해 연극이나 영화에 담아내고자 했을까? 그리고 극장이라는 표상 공간에서 같은 시간에 같은 공기를 마시며 같은 표상기호를 소비, 향유하는 관객들은 저마다 무엇을 느끼고 생각했을까 극장은 정치를 말한다. 극장은 표상작용을 통해 정치를 말한다. 그러한 표상작용의 문화사적 의미를 분석하고자 한 것이 저자의 의도다. 이 책에서 극장의 문화정치는 크게 연극과 영화 두 가지 예술장르를 대상으로 다루었다. 그리고 문화정치의 양상을 역사, 젠더, 민족주의, 영화 정치의 관점에서 살펴보았다.”(5~6p)라고 개략적인 안내를 해준다.
대학을 졸업하고 아주 오랫동안 학술서적을 멀리해왔다. 그러다 보니 이 책을 읽기 전에 학술서적에 대한 편견, 곧 재미보다는 고리타분할 수도 있겠다는 선입견이 없었다고는 말 못 하겠다. 극장과 정치라는 제목은 분명 흥미를 유발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책을 다 읽고 난 지금은, 굳이 그런 편견을 가질 필요는 없었는데, 하는 생각이다. 왜냐하면, 전공자가 아니어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분명히 학술적인 관점에서 접근한 글인데도, 독자의 대중적 흥미를 유발하는 내용도 꽤 많다.
「극장, 정치를 꿈꾸다」는 모두 4부로 이루어져 있다. 1부 <극장, 역사를 말하다>에서는 <김옥균 이야기는 극장에서 어떻게 기억되는가>와, <군국주의 극장에 투영된 민족사 이야기> 두 편의 글을 통해 역사적 인물 혹은 역사가 어떻게 극장에 투영되는가에 대해 분석하고 있다. 먼저 <김옥균 이야기는 극장에서 어떻게 기억되는가>를 통해 저자는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에 대한 기억 욕망과 재현 방식을 기억의 정치학이라는 문제를 떠나서 해석하기 어렵다”(53p)라는 견해를 취한다. <군국주의 극장에 투영된 민족사 이야기>를 통해서는 1930년대 후반부터 1945년 8월까지 우리 역사극에 나타난 고대사 이야기와 ‘이조’ 이야기를 다루면서, 역사극 작가들이 “고대사 이야기는 마치 신라 미술품처럼 민족의 자랑으로 여긴 반면, ‘이조’ 이야기는 쇠퇴한 조선의 불교미술처럼 민족의 수치로 치부해버린 것”(95p)이라는 탁견을 보여주고 있다. 이 시기 역사극이 이처럼 이중적인 시각으로 접근했다는 것은 전혀 알지 못했던 사실이다.
1부가(3부도) 학술적인 냄새가 다소 강한 편이라면, 2부는(4부도) 분명 학술적인 글인데도 학술적인 글 같지 않게 재미있게 술술 읽을 수 있었다.
2부에는 <극장, 젠더를 말하다>라는 제목 아래 <식민지 여배우와 스캔들>과, <김명순, 연극으로 하위주체를 말하기> 두 편의 글이 실려 있다. ‘토월회의 여배우들과 스캔들의 젠더정치’라는 부제를 가진 <식민지 여배우와 스캔들>에서는 토월회의 여배우인 이월화, 복혜숙, 윤심덕 이야기를 위주로 하여, 당대 여성 음악가나 무용가 우호적인 평가를 받았던 것과는 달리 비난의 대상, 경멸의 대상이 되어야만 했던 당대의 젠더인식을 살펴보고 있다.
당시 여성, 혹은 신여성이 스캔들을 일으킨다는 것, 여배우가 된다는 것은 그 자체가 모두 ‘추문’이 되었던 것이고, 그 추문이 세상에 알려지면 여류 명사에서 타락한 여성으로 일거에 전락하게 되었던 것이다. (126-127p)
가정 밖의 존재로서 여배우는 대표적인 비난과 경멸의 대상이 되었다. 여배우가 비난의 대상, 경멸의 대상이 되는 것은 장래의 유망한 국민인 청년자제를 유혹하여 가정으로부터 극장으로 끌어내 음탕한 취미에 빠지게 만들고 학교교육과 가정교육에 나태하게 만든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즉, 여배우는 현모양처이데올로기의 공공의 적으로 인식되었던 셈이다. 여배우가 곧 추문, 스캔들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128-129p)
저자는, 근대 여성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근대국민국가의 젠더이데올로기인 현모양처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는데, 특히 여배우가 대표적인 경우라고 말하고 있다. 식민지 조선 여성의 억압적 현실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인물이 1세대 신여성이자 한국 최초의 여성 소설가인 김명순(1896~1951)이다. 김명순은 1917년에 문예지 <청춘> 현상공모에 단편소설 ‘의심의 소녀’를 응모하여 3등상을 받아 공식적으로 문단에 작가로 등단하였다. 이후 <창조> 동인으로 활동하기도 하고, 여러 잡지를 통해 시, 소설, 수필, 희곡 등 다양한 장르에 걸쳐 활동한 인물이다. <김명순, 연극으로 하위주체를 말하기>에서는 김명순의 희곡 분석을 통해 당대 남성 지식인들이 1세대 신여성들에게 얼마나 폭압적이고 몰염치했는지를 잘 파헤치고 있다. 저자는, 김명순이 기생 출신 후처의 딸이라는 점, 우에노 공원 강간 피해자라는 점 등으로 인해 남성 지식인 작가들의 집요한 공격과 비난을 받았으며, 김명순의 희곡이 자기변명적, 자기방어적 글쓰기의 성격을 지닌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다고 본다. <김명순, 연극으로 하위주체를 말하기>를 읽으며 나는 김기진, 김동인 등 당대의 남성 엘리트 작가들에 대한 심한 분노를 느꼈다. 개화했다는 작자들이 신분(기생 출신 후처의 딸)을 문제 삼아 공격하고, 그뿐인가, 동경 유학 시절 한국인 남성에게 강간을 당했는데(피해자인데), 이를 비관하여 자살을 기도하다가 강간 사건이 세상의 화제가 되자 강간범이 아닌 피해자인 김명순이 악의적인 비난에 시달린 것이다. 이게 과연 있을 수 있는 일인가, 하는 생각에 치미는 화를 참을 수 없었다. (강간범은 식민지 시대에 조선인 최초로 일본군 대좌로 승진하는 등 출세가도를 달리고, 해방 이후에는 육군 참모총장과 체신부 장관을 역임하는 등 승승장구했다고 한다. 이름을 밝히지 않았지만 이쯤되면 누군지 아는 사람도 있으리라. 친일파가 청산되었더라면 이런 파렴치범이 해방 후에도 승승장구하는 일이 없었을 텐데…, 이 또한 화가 난다.)
<신상옥은 영화 ‘꿈’을 왜 두 번 만들었을까>와 <남북한 분단체제와 신상옥의 영화> 이 두 편의 글을 통해 분단 시대의 극 예술에 대해 살펴보고 있는 4부 <영화인의 극장정치>도 영화감독 신상옥의 남과 북을 오간 드라마 같은 삶을 비롯하여 흥미를 유발하는 내용이 제법 많았다.
이 책은 대학교수인 저자가 학술 논문의 형식으로 쓴 9편의 글을 4개의 주제로 묶어서 극장, 혹은 영화(연극)인이 말하고자 했던(혹은 꿈꾸었던) 바가 무엇인가를 파헤치고 있다. 학술 논문으로 쓰인 글이다 보니, 대중적인 관심사보다는 깊이 천착해 들어가는 부분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큰 어려움 없이 읽을 수 있도록 쉽게 쓰여 있어 우리 영화나 연극, 현대사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듯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