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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한국 사회에는 '혐오'가 넘치고 있다. 인간애와 자유, 평등과 평화가 넘치는 세상이 아니라 혐오가 넘치는 세상은 무얼 말하는가. 혐오 표현을 보면 거의 모든 국민이 혐오의 대상에 속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싶다. 내가 페미니즘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계기도 '여성혐오'가 궁금해서였다. 왜 여성이 혐오의 대상이 되는지, 어쩌다 혐오의 대상이 됐는지 나로선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여성혐오를 비롯하여 우리 사회의 혐오 현상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궁금했는데 시기 적절하게 독서모임 회원이 추천해 읽고 토론한 책이다.
저자는 "지난 2012년 [표현의 자유를 위한 정책 제안 보고서]에서 혐오표현에 관한 장의 집필에 참여하면서 처음 혐오표현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2013년에는 일베가 큰 사회문제로 떠올랐고, 2016년에는 강남역 여성살해사건 이후 여성혐오가 새로운 이슈가 되"면서 절박한 현실에 떠밀려 혐오표현 전문가가 됐다고 한다. "2016년에는 국가인권위원회의 혐오표현 실태조사 보고서 작성에 참여했다." 이 과정에서 "'말'이 차별의 현실과 만날 때 어떤 폭발력을 갖는지" 이해하게 됐고, "왜 혐오표현이라는 말이 칼이 되고 폭력이 되고 영혼을 죽이는 일이 될 수 있는지" 알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책은 그간의 연구와 고민에서 출발해 우리 사회의 혐오 문제를 독자들과 나누기 위해 출간한 책이다.
저자는 혐오표현에서 혐오는 매우 싫어하고 미워한다는 일상적 의미와 조금 다르다고 한다. "여기서 혐오는 그냥 싦은 것을 넘어서 어떤 집단에 속하는 사람들의 고유한 정체성을 부정하거나 차별하고 배제하려는 태도를 뜻한다."고 한다. 여성혐오로 번역되는 '미소지니misogyny'는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성적 주체로 결코 인정하지 않는, 여성의 객체화, 타자화, 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여성 멸시"라는 뜻임을 우에노 치즈코의 정의를 빌어 설명한다.
국제사회에서 통용되는 혐오표현에 대한 개념 정의에서도 "혐오표현이 모두 '차별'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고, "혐오표현은 소수자를 사회에서 배제하고 차별하는 효과를 낳는" 공통점이 있다고 한다. "소수자는 역사적으로 불평등한 대우를 받아왔고 현재도 사회에서 불이익을 받고 있는 집단으로서 인종, 성별, 장애, 성적 지향 등 고유의 특성을 함께 가지고 있는 집단 또는 그 집단에 속하는 개인을 뜻한다." 소수자에 속하는 사람들은 "여성, 소수인종, 소수민족, 동성애자, 장애인 등"이다.
"이렇게 편견과 차별의 마음이 표출되어 폭력으로까지 이어지는 것은 모든 소수자 차별 · 혐오에서 거의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일베 게시판에는 여성에 대한 편견, 무시, 비하, 멸시, 조롱부터 여성에 대한 노골적인 배제와 차별, 폭력까지 다양한 수위의 표현물들이 올라온다. '된장녀'에 대한 신상털기, 여성 우대 정책에 대한 분노, 그리고 '약 먹여서 성폭행하는 방법'이 모두 같은 맥락에서 일어날 수 있다. 그런 글을 올리는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다양한 수위의 차별, 혐오, 배제, 폭력이 하나의 맥락으로 뒤섞여 있을 것이다."
저자는 여성들과 동성애자들 같은 소수자에 대한 차별이 과거에 있었고, 현존하며,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 자명한 상황에서 "혐오표현이라는 과격한 용어의 사용은 의도적으로 선택된 '반차별운동'의 전략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한다. '남혐'과 '개독'이라는 표현이 혐오표현으로 성립하지 않는 이유는 한국사회에서 남성과 기독교도가 다수자에 속하기 때문에 소수자에 대한 혐오표현이 갖는 영향력이 거의 없기 때문이라 한다. 이런 맥락에서 메갈리아의 '미러링'은 일베의 여성혐오 표현이 여성들에게 공포와 두려움으로 작동하는 방식과 다를 수밖에 없다. 일부에서 제기하듯 "악에 대해 악으로 되갚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은 제법 그럴 듯한 논리지만, 이것은 미러링의 취지를 오독한 것"으로 "미러링은 뒤집어 보여주기 위한 것이지, 그 자체로 혐오를 목적으로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저자는 메갈리아의 '미러링'이 다른 사회적 약자에 대한 혐오로 이어지는 것은 정당화되기 어렵지만 "혐오에 대한 사회적 문제의식을 환기하고 여성을 주체화했다는 점에서 대항표현 운동과 동일한 전략적 목표를 설정하여 실제 효과를 거두었다"고 평가한다.
혐오표현이 특정 집단에 대한 고정관념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편견에서 시작돼 조롱과 위협, 모욕적인 말과 행동에서 나아가 고용과 서비스, 교육 등에서의 차별과 괴롭힘으로 나타나고 협박, 강간, 방화, 테러로 확산되며 집단학살에 이르는 역사적 선례를 통해 그 위험성을 충분히 자각하고 방지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유럽처럼 강력한 법이 있지도 않고 미국처럼 사회의 면역력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혐오표현에 대한 내성을 갖지 못한 한국 시민사회는 혐오표현에 대한 인위적 개입이 늦었지만 이제라도 불가피한 현실이라 한다. "형사규제나 행정 규제는 물론, 여건과 배경을 바꾸는 규제나 교육이나 인식 개선 활동을 통해 혐오표현의 토대 자체를 바꿔나가는 국가 정책" 등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놓고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은 정치가나 책임있는 지위에 있는 인사들이 소수자에 대한 중립이 아니라 책임 있는 행동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저자의 일침이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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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칼이 될 때>는 작년에 오프라인 독서모임에서 한 회원의 추천으로 알게 된 책이다. 비교적 많은 회원이 모여 토론을 통해 우리 사회에서 이슈가 되는 혐오표현들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 의미 있는 자리였다. 이번에 다시 읽으며 각각의 장마다 제대로 읽고 보다 깊이 이해해 내 생활 속에서 반성할 필요를 느낀다.
말이 중요하다는 건 알지만 일상 속에서 무심코 내뱉은 말이 소수자 집단에 대한 혐오 표현이 될 수 있다는 걸 간과해왔다. 머리로 아는 것과 몸으로 옮기는 것과의 괴리가 일상 속 말에서도 나타난다. 하지만 소수자에 대한 차별이 현존하는 사회에서 혐오표현은 차별을 재생산하기 때문에 표현의 수위와 상관없이 차별을 조장할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별 생각없이 한 말이 내 의도와 달리 차별을 조장하는 셈이 된다.
저자가 예로 든 사례를 통해 혐오표현이 우리 일상 속에 어떻게 나타나는지 살펴보자.
첫째는 김치녀, 김여사, 개념녀 같은 차별적인 말이 식사나 술 자리에서 농담식으로 난무할 경우다. 여기에 문제제기를 하는 소수자는 흔히 "너무 예민하다"거나 "분위기를 깬다"는 말로 제지 받고 입을 다무는 경우가 많다. 그 후 침묵으로 자신을 보호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침묵이 일상 속에 굳어지면 이러한 차별적인 말이 정당화되고 고착화된다고 한다. 분위기를 깨더라도 소신껏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용기가 필요하다.
둘째, 소수자 집단에 대해 부정적인 이미지를 표현하는 말들이 있다. "동남아시아 출신들은 게으르다", "조선족들은 칼을 가지고 다니다가 시비가 붙으면 취두르는 게 일상화되어 있다." 또 여성에게 "조신해야 한다.", "집에서 애나 봐라" 같은 말들로 일정한 틀에 가둬놓고 한계를 지우는 유형이다. 저자는 "이러한 말들이 별다른 제지 없이 발화된다면 어느 순간 사실로 굳어지게 된다."는 점을 지적한다. "허위가 사실로 둔갑하여 또 다른 차별을 낳게 된다."고 하는데 바로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의 능력에 대한 차별이 대표적인 경우가 아닐까.
셋째, 구분을 위한 호칭 자체가 차별을 야기하는 경우다. "여학생", "안경 쓴 학생", "휠체어 탄 학생", "히잡 쓴 학생", "다문화"처럼 부르는 경우 특별한 주의가 필요하다고 한다. "맥락에 따라 구분 자체가 열등하고 비정상적이고 비민주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효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다문화"라고 부를 경우 다문화 배경을 가진 학생을 차별하고 배제하는 효과를 낳을 수 있다.
넷째, 불쾌감이나 모욕감을 유발하는 욕설이다. 이러한 말은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고 정신적 상처를 입힐 수 있다. 일본의 혐한 시위대가 "김치 냄새 난다!"거나 "조선인은 똥이나 먹어!"와 같이 말하는 경우다. 이는 '모욕형' 혐오표현으로 "소수자 집단의 부정적 이미지를 고착화시키거나 구분을 통한 차별을 야기하기도 한다."고 한다.
다섯째, 소수자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방식의 차별적 혐오표현이다. "동성애자를 전환 치료의 대상으로 간주하거나 이주자에게 "너희 나라로 가라"고 말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표현은 "그들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기본적 권리를 가진 주체로서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는 것으로 차별을 조장한다"고 한다.
여섯째, 눈에 보여서는 안 되는 존재로 간주하는 '비가시화의 방법'도 있다. 흔히 들어본 말로 "정신병자들은 집에 있어라"와 같은 말이다. 동성애자한테 "내 눈에 띄지 않으면 괜찮다"고 하거나 "퀴어축제 같은 거 안 하면 안 되나" 하는 식으로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고 사는 것이 평등한 인간으로서 존중받는 삶이라고 할 수" 없다.
이 장을 다시 읽으며 우리 일상 속에 이미 들어와 있는 혐오표현이 많다는 것과 나와도 무관하지 않다는 걸 알고 새삼 놀랐다. 어떤 표현은 그 정도쯤이야 하고 가볍게 지나가기도 했던 말들이라 더욱 경각심을 느끼게 된다. 나보다 불리한 위치에 있는 소수자에게 무심코 던진 한 마디가 얼마나 상처를 줄 수 있는지, 우리 아이들에게 부모로서 조언한답시고 갑질을 한 건 아닌지 되돌아보니 마음이 무척 아프다. 무심코 던진 말이 누군가의 가슴에 칼이 되지 않도록 모두 관심을 갖고 읽어보길 바라고 싶은 책이다. 역시 다시 읽어보길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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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인격이다』의 저자 조항범 교수에 따르면, 화자가 무슨 말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격 수준이 드러난다고 한다. 화자는 그럴 의도가 없다고 해도 청자는 화자가 발언한 말의 형식과 내용을 통해 화자의 품격 정도를 평가할 수 있다. 말이 많은 사회. 향기 나는 말로써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이도 많지만, 칼처럼 날카로운 말로 다른 이에게 상처를 주는 일도 만연하다.
오랫동안 ‘혐오표현’을 연구한 저자는 법학자다운 냉철한 분석력을 발휘하여 ‘혐오표현’의 칼날을 무디게 할 목적으로 이 책을 저술했다. ‘혐오표현’의 의도와 드러나는 방식을 살펴보면, 혐오표현 자체는 논란의 여지없이 ‘악(惡)’이다. 사회적으로 권장할만한 그 어떤 긍정성도 가지고 있지 않기에 ‘하지 않는다.’ 정도의 소극적 규범을 넘어, 발언하면 누군가에게 해악을 끼치므로 적극적으로 규제해야 할, ‘해서는 안 된다.’는 인식이 필요하다. 단, 혐오표현이 구체적으로 무엇이고, 어떻게 (또는 어디까지) 금지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학계의 전문성과 공동체의 합의가 요구된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혐오표현’에 대한 공적인 담론 자체가 부족했다. 혐오표현이 주로 여성, 성 소수자, 우리나라에 정착한 외국인(귀화자, 근로자, 난민을 막론하고) 등 소수의 사회적 약자를 대상으로 했기에, 소수에 포함되지 않는 다수의 시민들은 혐오표현의 심각성을 잘 느끼지 못하거나, 혐오표현 발화자의 개인적 일탈로만 규정하여 혐오표현이 편견과 증오범죄로 이어지는 매커니즘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제 (표현의) 자유의 이름으로 저질러지는 죄악을 보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인간으로서의 존중을 받아야 할 헌법적 가치와, 공존을 지향하는 세계시민으로서의 품격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혐오표현과 싸워야 한다. 독자로서의 나는 이 책이, 칼이 되는 말이 더 이상 생산되지 않도록 막아주는 방파제 역할을 감당할 것이라 믿으며, 교양인을 자처하는 모든 이들에게 적극 추천하는 바이다.
p.s 강력한 법으로 규제하는 손쉬운 방법 외에 (다소 시간은 걸리겠지만) 사회/문화적 공감대 확산을 통한 대처 방안까지 제시하는 저자의 견해에 적극 동의한다. 다만 ‘혐오표현’의 정의를 명료화하고자 ‘사회적 소수자’를 대상으로만 한 발언으로 한정한 점에서는 매우 유감이다. 저자에 따르면 ‘김치녀’는 혐오표현이지만, ‘한남충’은 혐오표현이 아니다. ‘이슬람 비하’는 혐오표현이지만 ‘개독’은 혐오표현이 아니다. 여성과 무슬림은 소수자이고 남성과 크리스천은 다수자이기 때문이란다. 이러한 구분은 - 저자가 그리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 “남성혐오와 기독교 모독은 정당하다.”는 오해를 낳을 수 있다. (실은 이런 구분 자체에 대해서도 나는 회의적이다. 인류의 절반인 여성을 왜 소수로 규정하는지 모르겠으며, 우리나라에서 기독교인은 다수이지만 비(非)기독교인들에 비해서는 소수이고, 무슬림은 우리나라에서는 소수이지만 전 세계적으로 볼 때 결코 소수자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에서 저자가 규정하는 ‘소수자’를 ‘사회적 약자’로 변형에서 이해했는데, 그리하면 이해는 통하지만 ‘여성과 무슬림 전체를 사회적 약자로 보는 것이 타당한가?’라는 추가 질문이 남는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소수자인가? 아님 사회적 약자인가? 여성인 박근혜 대통령을 모욕하는 것은 혐오표현이고, 남성인 문재인 대통령을 모욕하는 것은 혐오표현이 아닌가? 테러 방지를 위해 공공장소에서의 ‘부르카’ 착용을 금지한 프랑스의 안보정책은 무슬림에 대한 혐오표현인가? 한편 무슬림이 인구 대부분을 차지하는 아랍 국가 내에서의 이슬람을 비하하는 표현은 혐오표현이 아닌가? 받아들이기 힘든 논리다.)
윤리교사로서 나는, “여학생을 혐오한 남학생에게 똑같이 혐오하라.”고, 또는 “남학생들을 비하하는 발언은 혐오표현이 아니니까 거리낄 것 없이 해도 된다. 여학생은 남학생에 비해 소수자니까.”라고 여학생들에게 가르칠 수 없다. 아니, 가르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남녀갈등만 부추길 뿐이다. ‘성 소수자를 환영합니다.’라는 현수막을 거는 것이나, 일본에서 혐한시위대에 맞선 카운터 운동(‘사랑해요’ 풍선 시위)은 대항표현으로서 매우 바람직하고 품격 있다. 혐오표현 발화자들을 스스로 부끄럽게 여기게 만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질인 ‘일베’의 방식을 그대로 따라하는 ‘워마드’의 방식은 마찬가지로 저질이다. 저자가 진심으로 혐오표현을 혐오한다면, 발화자가 누구냐에 따라 ‘허용될 수 있는 혐오표현’을 인정해서는 안 된다. ‘미러링’을 대항표현으로 인정하는 저자의 시각은 다소 충격적이었다. 비유하자면, 학교 현장에서 체격이 큰 학생이 체격이 작은 학생을 때린 것을 교사가 보고, 체격이 작은 학생에게 “저 녀석이 자기한 한 행위가 얼마나 나쁜 행위인지 깨달을 수 있도록 너도 똑같이 때려.”라고 말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것과 유사한 기분이었다. 이 책 발간 전후에 발생한 사건들 중 ‘여성에 의한 가톨릭 성체 훼손 사건’이나 ‘순직 군인을 비하한 여성의 발언’에 대해 저자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궁금하다. 만약 저자가 여전히, (‘그깟 빵조각’, 또는 ‘집 지키는 개 따위’라는 식의 극단적인 페미니스트들의 발언을 듣고도) 여성은 소수자이고 기독교와 남자는 다수자이니까 저 사건은 ‘혐오표현이 아니다.’라고 간주한다면 매우 위험한 생각이 아닐 수 없다. 다수자에 의한 소수자에 대한 폭력에 주목하느라 소수자에 의한 다수자에 대한 폭력에 애써 눈감은 셈이기 때문이다. 법학자 또는 혐오표현 전문가로서의 저자의 권위는, 저자의 의도와 무관하게, 저자가 혐오표현으로 간주하지 않은 혐오표현을 사회적으로 허용할 수 있다는 오해를 충분히 불러일으킴으로써 혐오에 대한 사회 구성원들의 민감성을 오히려 감소시킬 수 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저자가 좀 더 신중했어야 했다. 미국에서 흑백 차별법에 반대한 인권운동가들이 백인의 탑승을 거부하는 흑인들만의 버스를 운영하지 않았다. 이는 인종 평등에 효과적이지도 않고, 한편으로는 유치하며, 궁극적으로 옳지 않은 방법이기 때문이다.
혐오표현이 비도덕적인 것은, 발화자와 대상이 소수자냐 다수자냐에 따라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인격 존중’이라는 보편 윤리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누가 하면 혐오표현이고 누가 하면 혐오표현이 아닌 그런 혐오표현은 없다. 혐오표현은 누가 하든지 혐오표현이고, (누가 하느냐에 따라 해악의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이지) 그 자체로 나쁜 것이다. 발화자와 대상자에 따라 해악 정도의 비대칭성을 충분히 이해하고, 백 번 양보해서 ‘미러링’이 ‘혐오표현’의 심각성을 보여주는 긍정적인 효과가 있음을 인정하더라도, 윤리교사로서 단언하건대 혐오표현에 대한 (풍자나 해학 이상의) 미러링은 어느 경우에도 도덕적으로 정당화 될 수 없다. 저자에게 묻는다. ‘조선인 죽어라!’라는 혐한시위대에 맞서 ‘일본인 죽어라!’라고 대응하는 것은 정당한가? 독자로서의 나는, 저자가 규정한 혐오표현 외에도, 혐오를 확대 재생산하는 온갖 종류의 혐오표현에 대해 반대하는 바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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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정의는 말(言)과 함께 시작되지만 모든 말이 정의로운 것은 아니다 -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2018년 제75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은 진지한 고민과 희망을 보여줬다. 축제의 분위기와는 다르게 참가자들은 검은 옷을 입거나 ‘타임스 업(Time's Up)'이 적힌 배지를 달았다. 타임스 업은 미국 사회의 성폭력과 성차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여성 영화인들이 만든 단체다. 타임스 업은 젠더 폭력을 새삼 깨닫게 해주고 성폭력 피해자들이 더 이상 가해자들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정의로움을 호소하고 있다. 즉, '나도 그 일을 겪었다(Me Too)' 그러니 '이제는 그런 시대를 끝내자(Time's up)'는 것이다. 말이 정의롭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이를 버릇없이 키운다고 해서 ‘맘충’, 남성우월주의 때문에 ‘한남충’, 노인이라는 ‘틀딱충’, 사회에 아무런 일도 하지 않으면서 복지혜택을 누리는 청소년이라는 ‘급식충’ 등은 어떤가? 사람에다가 벌레 ‘충(蟲)’자를 붙인 말이 정의롭지 않다는 것을 굳이 구구절절 늘어놓을 필요는 없어 보인다. 듣기가 거북할 정도로 상대방을 혐오하고 비하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러한 말들이 거의 인격 내지 영혼을 살인한다는 것이다.
인터넷이 일상화되면서 누구나 혐오표현(hate speech)을 아무렇지 않게 하고 있다 누구나 한번쯤 들어보았거나 사용해봤을 혐오는 매우 싫어하는 미워하는 감정이다. 혐오동물, 혐오식품이 있듯, 무언가를 싫어하는 감정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런 만큼 우리는 혐오를 어제오늘뿐만 아니라 내일에도 자유롭게 사용할 것이다. 그런데 왜 혐오표현이 문제가 되는 것일까? 혐오표현이 말 그대로 사람의 입에서 나와서 다른 사람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주기 때문일까?
이러한 폭발적인 시대를 고민하면서 홍성수는『말이 칼이 될 때』를 꺼내 들었다. 이 책에서 저자는 혐오표현이 왜 우리 모두의 공공선(公共善)을 파괴하는 문제인지를 설득력 있고, 교양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그래서 읽는 내내 저자가 말하는 “혐오할 자유는 없다”라는 말에 공감하게 되었다. 정말이지 말이 칼이 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혐오가 우리 사회의 커다란 문제라는 것을 예전과는 다른 시각으로 다시 한 번 치열하게 고민해보게 되었다.
혐오표현의 문제는 혐오의 피라미드를 보면 좀 더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혐오의 피라미드의 단계를 보면, 편견(특정 집단에 대한 부정적 고정관념) → 혐오표현(조롱, 모욕적, 폭력적 말이나 행동) → 차별행위(고용, 서비스 등의 영역에서 차별, 분리) → 증오범죄(편견에 기초한 폭행) → 집단학살(특정집단에 대한 의도적 말살)이다. 편견에서 비롯된 차별이 증오범죄내지 집단학살로 이어지는 과정을 보게 된다.
이쯤 되면 혐오표현은 사회악이며 도덕적인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혐오표현 때문에 악플에 시달리는 피해자를 생각하면 가해자들을 법적으로 처벌하는 것은 정당하다. 공공의 적에 가깝도록 나쁜 감정을 쏟아내는 가해자들에게 좋은 처벌은 약(藥)이 될 수 없다. 그보다는 망치로 다스려도 나쁘지 않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저자의 생각은 망치가 아닌 메스에 있다. 혐오라는 나쁜 감정만을 치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카를린 엠케가 『혐오사회』에서 말한 대로 혐오는 ‘원인’이 아니라 ‘결과’다. 다시 말하면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감정을 근본적으로 치료해야 한다.
그러면 '노키즈존(No Kids Zone)'에 대한 사회적인 감정으로 어떨까? 예전과는 달리 아이는 장소에 따라 얼마든지 혐오적인 존재가 되어버렸다. 동시에 그 아이를 키우는 엄마 또한 ‘맘충’ 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만큼 우리 사회는 이기적으로 각박해졌다. 각박해진 감정은 노키즈존이라는 출입금지라는 방법을 최우선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불평등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좀 더 세심한 관심과 배려보다는 눈앞에 당장 보이는 영업상 방해가 많기 때문이다.
『말이 칼이 될 때』는 혐오표현에 맞서는 사회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따지고 보면, 말이 칼이 된다는 것은 섬뜩해 얼마든지 혐오표현이라는 모순을 반복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하지만 저자의 주장을 따라가다 보면 ‘말이 칼이 될 때’는 ‘대항표현’이라는 통찰력을 깨닫게 된다. 대항표현은 혐오표현이라는 사회적인 문제점을 파악하면서 논리적으로 맞서 싸우는 것이다. 사회적 약자이기 때문에 차별받는 것이 아니라 차별받기 때문에 사회적 약자가 되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혐오를 넘어서 공존하기를 희망해본다. 누구나 차별받지 않고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 이러한 희망을 가지고 우리 모두가 이 책을 읽으며서 타임스 업(Time's Up) 배지를 달아보았으면 한다. 노키즈가 아니라 키즈인 세상, 맘충이 아니라 맘인 세상. 이제 혐오 시대를 끝내야 한다. 타임스 업은 까칠한 표현이 아니라 용기 있는 대항표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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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기 전까지 혐오표현이 왜 문제인지, 왜 차별금지법의 제정이 필요한지 몰랐다. 기독교인이라 차별금지법이 제정되면 동성애를 죄라 말하지 못할 것이고, 우리나라에 동성애자가 많아질 것이라는 막연한 문자폭탄이 날아왔고, 교회적으로 차별금지법의 제정을 반대하기 위한 노력을 많이 해욌다. 혐오표현이란 소수자에 대한 편견 또는 차별을 확산시키거나 조장하는 행위 또는 어떤 개인, 집단에 대해 그들이 소수자로서의 속성을 가졌다는 이유로 멸시, 모욕, 위협히거나 그들에 대한 차별, 적의, 폭력을 선동하는 표현을 말한다(31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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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휠라워니 프렌즈 예스24굿즈가 탐나서 필요한 책들 고르려고 보니
7월부터 정독도서관에서 수강중인 강좌가 19세기 이후 단편소설로 보는 미국 문학 작품세계 "미국문학 읽기" 거든요. 그래서 앞으로 읽고가야 할 책들이 있어서 이참에 미국 작가들의 책도 주문하고 평소에 읽고 싶었던 책도 골랐습니다. 이렇게 자주 책스타그램 남기는 일 넘 재밌고 좋네요.^^ 필요한 책은 어쩜 이리 끊기지도 않는지요..... ㅋㅋㅋ
예스24와 휠라워니 프렌즈의 콜라보로 휠라워니 캐릭터들이 들어간 여름아이템이나 실용적인 아이템들이 꽤 많이 나왔어요. 비치볼 / 슬링백 / 여권 담는 크로스백 / 틴케이스. 저는 이 중에서 틴케이스로!!! 그동안 하도 예스24에서 책을 많이 샀던 관계로 작년여름에 장만해둔 비치볼도 있구요, 슬링백과 크로스백 들도 이미 포화상태라.... 잡동사니 깔끔하게 정리해서 넣어두려고 이번에는 휠라워니 프렌즈 틴케이스로 골랐습니다.^^ 보자마자 컬러매치가 딱 내 스타일..... 파스텔톤의 컬러배합이 맘에 들었거든요.
휠라워니 프렌즈 틴케이스에 정리해서 담았더니 아주 깔끔.^^ 예스24굿즈도 함께 챙길 수 있는 책쇼핑은 언제나 행복해요.
얘기하고 싶은 책은 바로 <말이 칼이 될 때>. 어크로스 출판사에서 나온 홍성수 법학자가 쓴 사회학 도서입니다. 알고 싶은데 아직 그만한 통찰력이 못 되어 사회정치에 대해서는 알아두고 배울 것들이 너무 많다는 생각을 해요. 그래서 이런 사회 정치도서, 사회학 도서들은 꾸준히 읽으려고 노력합니다. 사회가 워낙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 살고 있고 다양한 목소리가 공존하는 사회에서 공동체와 개인 모두가 지켜야 할 중심이 무엇인지 고민할 일들이 너무 많이 생겨나고 있어요.
혐오표현은 무엇이고 왜 문제인지 저자가 이 책에서 여러 장에 걸쳐서 현실과 맞닿아 있는 이슈들을 꺼내어
개개인에게 잠재되어 있는 문제의식을 건드려주고 수면위로 끌어 올리는 역할을 해주는 책이었어요.
이런 책은 많은 사람들이 읽어 보고 독서 토론을 하면 더더욱 좋고, 개인 혼자라도 스스로 생각해 볼 기회를 만들어서 봤으면 싶을 정도입니다.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을 우리는 왜 배타적으로만 바라보게 되었는지.... 사회적 불평등과 구조적인 현실속 모순 속에서 타인을 공격하는 것이 자신에게 과연 이로운 일인건지도 묻고 싶어요. 혐오 표현을 주고 받는 것은 결국 모두에게 상처가 되는 일이고,
나아가서는 자신의 삶의 질을 생각해서도 좋은 영향이 올리 만무한 일.
자신과 다르다고 여겨지면 무조건 적으로 간주해야
자신의 논리가 정당함을 부여받는 것은 결코 아닌데도
그런 오류를 범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요즘이예요.
"통제" 보다는 "존중"에 더 큰 방점을 찍고 타인을 바라봤으면 좋겠습니다.
한국의 현재 혐오 논쟁에 있는 코너가 저는 굉장히 흥미롭고 집중되는 부분이었습니다.
아이 엄마의 이미지가 예의 없고 남들에게 피해를 주는 기피 대상으로 고착화되면서 '맘충 이라는 혐오표현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어요. 소수자를 혐오하는 차별적인 행태라기 보다 맘충이라는 말은 생각보다도 널~~리 회자되는 것에 대해 저자 역시 우려를 표하고 있어요. '맘충' 이라는 혐오 표현 그 자체로 아이와 아이 엄마를 인격체로서 존중은 커녕 사회적으로 해로운 존재라는 인식을 심어주고 있어요. 이건 그 특정 대상에 대한 차별이 확실하고 그것이 재생산 되고 있다는 것이 심각한 지점입니다. 혐오 표현을 통해서 그 대상자는 사회 속에서 위축됨을 느끼고 자신의 행동에 두려움을 느끼게 되며 그것이 반복된다면 사회에서 어느 순간 배제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혐오 표현은 정말 해로운 것입니다.
"맘충" 이라는 혐오 표현에 제가 좀 더 집중한 지점은 바로 '노키즈존' 입니다. 아이와 엄마에 대한 혐오가 직접적인 차별로 이어짐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책에서 말하고 있어요. '노키즈존' 은 엄연히 2017년 11월 국가인권위원회에서도
차별이라는 결정을 내렸던 사실이 있습니다.
어떤 집단의 출입을 금지했다고 모두 차별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죠.
영업장에 따라서 방해가 되는 요소들이 있을 거라고 충분히 여겨지는 바이지만 '노키즈존' 이라고 해서 어떤 특정 집단을 지정해 배제하는 것은 항상 최후의 수단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특정 집단을 대상으로 출입을 금지하는 것이
영업의 본질적인 목적을 위해 불가피한 것인지도 따져봐야 한다는 것!
금지만 시키는 것이 이 문제에 대한 해법인지 다양한 시선으로 고민해보고
토론해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요.
이런 배제와 차별이 문제가 되는 근본은 우리가 홀로 사는 사회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배제하는 방법을 자꾸 선택하다 보면 공존의 해법을 찾아보려는 노력도 없이
너무 손쉽게 문제를 해결하려는 경향이 짙어질 것 또한 우려되는 바이기도 합니다.
업주들의 고충이 있음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 해결 방안이 꼭 노키즈존이어야 하는지를 이 책에서 묻고 있는데요. 우리가 평소에도 '노키즈존' 과 같은 화두에 직면했을 때
손 쉽게 해결하려고만 한다거나 자기중심적인 방법에만 꽂히다 보면
차별받지 않고 존중받는 사회를 만드는 것과 역행하는 일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가 혐오 표현을 경계하고 이렇게 문제로 인식하게 되는 건
'맘충'이라는 말이 말에 머무르지 않고 실제로 진짜 벌레 취급하는 식으로 현실화 되고 있기 때문이예요.
특정 소수자 집단을 구분하고 배제하는 일은 당하는 사람에게는 굉장히 큰 상처가 됩니다.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말 함부로 하는 태도는 정말 지양했으면 좋겠어요.
공존을 위해 사회를 파괴하는 차별과 폭력의 말들을 반대하는 분들이라면 이 책 <말이 칼이 될 때> 는 꼭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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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충, 한남충, 혐한 등의 혐오표현을 들으며 발화자의 열등감 표출이라고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열등한 그들만의 생각을 아무도 공감해주지 않을 것이며, 그들의 열등감만을 피력하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 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보다 훨씬 심각했다. 혐오표현이 진실과 상관없이 편견을 만들고, 그 편견이 차별을 만들고, 차별이 증오심을 일으켜 폭력을 선동하고 제노사이드와 같은 사회적 문제로 연결된다는 것이었다. 저자의 말대로 더이상 침묵과 무시가 대안이 아니다. 유럽의 대부분의 국가에서 혐오표현을 제지하는 법을 규정하고 있고, 미국에서는 개인의 의사 표현을 중시하여 법으로 처벌하지 않되 혐오표현을 하는 사람을 고립시키는 사회의 연대가 있다. 혐오표현 중 정말 혐오스러운 말은 "맘충"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희생으로 아이를 키우는 어머니와 어린 아이를 벌레로 비하하는 이런 혐오표현을 "이기적인 어머니,무질서한 아이" 정도로만 한다면 사회가 극도로 혐오스러워 지는 것을 막을수 있을것 같다. 급격히 성장하여 개인의 기분과 상태보다는 효율과 성장이 우선시 되는 우리 나라는 혐오표현을 사회적 차원에서 아직 교육과 제재 등이 없다. 소수의 정체성 자체를 송두리째 부정하고, 폭력의 피해 대상이 될수 있다는 모두 인식하고 이에 대한 방안을 강구할 때임을 알리는 책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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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m.blog.naver.com/dkdlwlrl/221190703987 작년에 <82년생 김지영>을 읽으며 '맘충'이라는 말을 처음 알았다. 후배들에게 물어봤더니 꽤 오래 전부터 있던 말이란다. 한창 육아 중인 후배들이라 그 말에 많은 상처를 받았다고 한다. 식당이나 커피샵을 가더라도 혹시 나를 맘충으로 보지 않을까 늘 염려스러웠고, 행동이 소심해지고, 가능하면 아이를 데리고 사람 많은 곳을 가지 않으려 했단다. 이런 대화를 한 지 얼마되지 않았는데, 이 책을 만났다. 혐오표현(hate speech)의 혐오는 그냥 감정적으로 싫은 것을 넘어서 어떤 집단에 속하는 사람들의 고유한 정체성을 부정하거나 차별하고 배제하려는 태도를 말한다. 소수자에 대해 편견을 조장하고, 모욕하고, 증오를 선동하는 혐오표현. 그 혐오표현의 대상이 되었을 때 우리는 어떤 마음일지, 과연 혐오표현도 표현에의 자유를 인정받아야 할 지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이 책은 말하고 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소수자에 대한 '편견'이 '혐오표현'을 낳고, 그것이 '차별행위'로 드러나며 '증오범죄', 더 나아가 '집단학살'까지도 이어지는 '혐오피라미드' 형태를 띈다는 설명에서는 공포심이 유발되었다. 혐오표현에 노출된 소수자들이 편견, 공포, 모욕감, 긴장, 자신감과 자부심 상실, 자책 등으로 고통받고 자살로 이어지는 경우까지 있다고 한다.(p.76) 소수자들이 겪는 정신적 고통은 그 당사자가 되어보지 않은 사람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이라 생각된다. <아픔이 길이 되려면_김승섭>에서도 소수자들에게 갖는 편견이 얼마나 상처를 주는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사실 나는 혐오표현은 일부 일베들이나 하는 행위인 줄 알았다. 비상식적인 사람들의 전유물 정도로 생각했다고나 할까. 그런데 혐오표현이 몇 년 사이에 너무나 많이 확산되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여성 전반에 대한 혐오나 노인에 대한 혐오, 성소수자, 장애인들에 대한 혐오는 내가 상상한 것 이상인 것을 보고 놀랄 수 밖에 없다. 여성혐오는 실제 범죄로까지 이어진 경우가 있어서 더 심각한 수준이라는 걸 느낀다. 끔찍하다. '나는 단지 운이 좋아서 살아 남았다'라는 역설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외국인에 대한 혐오표현도 문제가 크다. 우리나라에서도 물론 이런 현상을 볼 수 있고, 가까운 일본에서 '혐한 시위'는 도가 지나칠 때가 종종 있는 것 같다. 그곳에서 늘상 머무르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심리적으로 얼마나 위축이 될까. 걱정된다. 홍성수 교수는 혐오표현 규제에 대해 '표현 자체는 규율하지 않되, 표현이라는 선을 넘어가는 순간 강력히 대처'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고 있다. 차별시정기구를 둔다거나 교육, 홍보, 정책, 지원, 연구 등의 국가, 법적 규제와 시민단체의 반차별운동 등의 자율적 규제에 무게를 실어야 한다고 이야기 한다. 물론, 사안에 따라 형사규제, 민사규제, 행정규제도 필요함을 주장하고 있다. 사회가 다양화되고 있는 이상 가치나 철학의 차이는 당연하다. 그 차이를 서로 인정해야 건강한 사회일텐데, 문제는 그 차이를 불인정함을 넘어 혐오대상으로 삼을 때 돌이킬 수 없는 문제를 일으키는 것 같다. 우리가 생각하지 않은 것들, 당연하게 인식했던 것에 브레이크를 걸어주는 홍성수 교수 같은 학자들의 연구와 사회 운동이 감사할 따름이다. 내가 속하지 않은 사회의 시각에서 바라볼 줄 아는 역지사지의 관점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함을 느낀다. 그런 역지사지의 시각이 우리 사회를 조금씩 진보하게 만들고, 말이 칼이 되는 사회를 만들지는 않겠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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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의 자유는 인간의 기본권이다. 표현의 자유로 주변과 소통하는 것은 물론 자신의 처지를 말하고 권리를 주장하기 위한 필수 도구이다. 특히 소수자에게는 더 많은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 표현의 자유는 마땅히 옹호되고 보장되야 하지만 혐오표현은 규제를 해야 한다. 왜냐하면 혐오표현은 표적대상들에게 심각한 해악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장애인은 집 밖으로 나다니지 말라'라는 말은 장애인이라는 소수자 집단에게 모욕을 주고 정신적 고통을 받게 만든다. "술 취한 아저씨가 동남아 이주민에게 '니네 나라로 가라'고 외친다." 이러한 차별과 배제는 이주민들과의 공존조건을 파괴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혐오표현인가. 혐오표현은 어떤 개인. 집단에 대하여 그들이 사회적 소수자로서 가진 속성때문에 편견조장. 모욕. 증오선동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인종. 종교. 성적 지향. 젠더 등 소수자를 표적대상으로 과거부터 차별, 배제, 편견을 받아왔거나 현재에도 피해를 보고 있다는 맥락에서 봐야 한다. 혐오표현의 사회적 해악을 막을 방법은 차별금지법을 제정함으로 다소 해결할 수 있다. 아울러 진정한 해결책은 사회 인식의 변화다. 이것이 이 책 '말이 칼이 될때'가 말하는 바다. 김치녀. 된장녀. 게이. 동성애자. 강남역 여성 살해사건 등 우리 일상 곳곳에서 들려오는 혐오표현과 피해등 보편적인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깊게 생가하지 못햇던 주제를 접하게 되었다. 즉 혐오표현의 범위를 정확히 규정해서 인지하고 혐오표현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좀더 이해하게 된 시간이다. 아울러 혐오표현의 규제에 심히 동감하는 바이다. 안다고 생각했던 현상을 좀더 깊이 파고든 기분이랄까. 미처 깨닫지 못한 주제에 대한 문제 인식은 상쾌함을 가져다 준다. 이것은 마치 거실 청소를 하는데 소파까지 다 들어내고 난 뒤 까맣게 있는 먼지까지 꺠끗이 청소할 때의 기분이다. #홍성수 #어크로스 #혐오표현 #말이칼이될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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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책이 있다. 똑같이 관심이 가서 구입하긴 했지만 읽기 전과 후가 별로 달라지지 않은 책과 읽기 전과 후가 많이 달라진 책. <말이 칼이 될 때>는 분명 후자였다. 물론 실제로 내 자신이 달라졌는지, 그리고 달라졌더라도 그 정도가 얼마나인지는 다른 사람들이 판단할 몫이겠으나 일단 생각이나 관점 만큼은 확실히 바뀌었다. 나 정도면 그래도 혐오 표현을 쓰는 건 아니지 하는 생각, 은연중에 많이 했었다. 그것이 나 정도면 그래도 꼰대는 아니지 하는 생각과 별로 다를 바 없는 생각이었다. 그런 식의 생각을 하는 사람일 수록 사실은 그런 사람이라는 말은 맞는 말 같았다. 사실 이 책을 읽기 전에도 이런 생각은 했었다. 재미동포라는 말은 일반적이고 일본에 사는 우리 동포도 재일동포 또는 교포라고 하는데 왜 중국에 사는 이들만 유독 조선족이라고 하는지. 재중동포라는 말은 거의 들어본 적 없어 그 사실이 궁금했었다. 우리 민족과 그들만 다른 사람들인가? 했다가도 그럼 조선이라는 말 자체를 안 썼을텐데 하며 궁금증만 더했었다. 역시나 혐오 표현이었다. 책에서는 '된장녀'와 '김여사' 같은 말도 혐오표현이라고 한다. 김여사 같은 말은 악의 없이 쓰더라도 그렇다. 예전에 드라마 <미생>에서 한석율이 안영이에게 김여사 운전이라고 했고 악의는 전혀 없었으며 안영이도 웃고 말았지만 그래도 그 순간 한석율은 여혐자였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그동안 무심결에 혐오 표현들을 얼마나 많이 쓰고 살았을지 반성하게 되었다. 올해는 적어도 작년보다는 그런 무의식적 혐오 표현들을 무심코 사용하는 일이 적게끔 언행에 보다 신경쓰도록 해야겠다. |